Life/세상사

소설 - 메디컬센터

smores 2012. 6. 26. 23:38

메디컬센터


이화현 지음


# 프롤로그


조용한 흐느낌들이었다. 누구하나 입 밖으로 울음소리를 내놓지 않는 침묵의 장례식. 그곳에는 소리나는 눈물이 없었다. 하지만 초여름의 찬란한 오전을 집어삼킬 만큼의 지독한 슬픔은 분명히 존재했다.


한껏 물오른 푸르름이 산 전체를 뒤덮은 가운데 중턱의 가족 묘지에는 또 하나의 봉분이 쌓아지고 있었다. 초록의 잔디가 부드럽게 깔려진 다른 봉분들 아래로, 새로운 붉은 흙더미는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무덤이 둥글게 제 모습을 갖추어 갈수록 유월의 햇살은 그것을 다지고 북돋우는 일꾼들의 이마에 끈적이는 땀방울을 쉴 새 없이 배어나게 했다.


어느덧 무덤은 솟아야 할만큼 솟아올랐다.


“이제 마지막 인사를 드려야 한단다.”


어린아이의 티를 갓 벗어나 보이는 소녀의 등을 검은 양복의 사내가 몸을 숙여 감싸 안았다. 슬픔을 억누르느라 눈 주위가 벌겋게 충혈된 남자는 소녀를 무덤 곁으로 다가서게 했다.


그러나 사내의 타이름에도 소녀의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녀는 입고 있는 소복만큼이나 하얀 낯빛으로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넌 누구지?’


소녀는 울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말간 눈으로 줄곧 자신과 나란히 서 있는 낯선 소년을 응시했다.


소년은 소녀보다 한 뼘 정도 키가 컸고 가슴에는 황색의 리본이 단단하게 매여져 있었다. 소년의 리본은 소녀의 머리칼에 묶여져 있는 흰색 매듭과 그 의미가 같은 것이었다.


소녀는 궁금했다. 그리고 결국 소리내어 물었다.


“여긴 우리 엄마 무덤인데, 넌 누구지?”


찌르는 듯한 소녀의 눈빛에 소년은 표정없는 얼굴로 무덤을 바라보며 대답해 주었다. 소년의 입술은 망설이지 않았다.


“이분의 아들.”


“아들…. 우리 엄마의 아들?”


소녀는 검은 양복의 사내에게 또렷이 물었다.


“정말인가요?”


사내의 붉은 눈자위가 일그러지자 소녀는 휘청거렸다.


아버지, 당신의 아들이군요.


# 1장


세진병원.


최선의 진료, 최첨단 의학 연구, 우수인력 양성을 통해 국민보건 향상에 기여하는 것을 설립 이념으로 개원한 세진병원은 지상 20층 지하 5층 연건평 6만여 평의 최첨단 지능형 빌딩에, 1,300여 개의 병상과 40개 진료과, 8개의 특성화 센터, 그리고 100여 개의 특수 클리닉으로 구성되어 900여 명의 의사와 1,000여 명의 간호사를 포함한 4,700여 명의 인력이 근무하고 있는 국내 최고의 3차 의료기관이다.


***


밤 1시 10F 수술실.


명현은 열린 복막 사이로 보이는 장들을 타월을 이용해 아래쪽으로 밀어 놓고 위로 올라온 디버(국자 모양의 수술기구)를 재빨리 한 손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다른 한 손으로 수술 시야를 가리고 있는 피를 스펀지 스틱으로 닦아 내었다.


집도의의 손놀림이 긴급하게 움직였다. 세 시간 전 교통사고로 응급실로 이송되어 온 40대 남자는 장 파열이 꽤나 심각했다. 몇 군데 출혈 포커스를 잡았는데도 환자의 복막은 여전히 새어나오는 피고 가득 찼다. 환자의 머리 쪽 마취과에서는 또 하나의 수혈 팩이 교체되었다.


“거즈.”


땀에 젖은 얼굴로 검붉은 수술 부위를 노려보던 집도의의 손에 거즈가 놓여졌다. 다른 출혈부위를 찾은 집도의는 그 부분을 거즈로 누르곤 다시 간호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이크로 니들 홀더.”


“석션.”


수술방에서 레지던트 1년차의 위치는 집도의 바로 옆이다. 집도의가 수술을 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가로 방향으로 서서 환부가 잘 드러나도록 어시스트하는 게 1년차의 역할이다. 따라서 환자의 복부를 벌리고 있어야 하는 1년차에게는 수술 시간이 길어질수록 팔의 무거움은 더해질 수밖에 없었다.


‘후, 제발….’


명현은 수술 마스크 안으로 숨을 삼키며 수술대 팔걸이에 등을 기대었다. 이미 4시간을 넘어서고 있는 수술은 거의 사흘 째 밤을 새고 있는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


다행히 얼마 있지 않아 출혈이 잡히기는 했으나 환자의 예후는 그다지 긍정적으로 비춰지지 않았다.


환자는 복부 봉합이 끝난 뒤 외과계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명현은 중환자실 컴퓨터에 오더를 내린 다음에야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반팔의 푸른 수술복에 마스크를 목에 걸은 채 그녀는 중환자실 복도를 힘겹게 걸어 나왔다. 며칠 전부터 이어진 두통, 하루 평균 세 시간 정도의 수면시간, 거기에 여덟 시간 이상을 수술방에서 지내다 보니 명현의 몸 상태는 지금 최악이었다.


초여름에 접어든 유월. 이맘때면 그녀는 어김없이 미망(未忘)의 시간들에 빠져들었다.


‘지긋지긋한 사랑의 찌꺼기들.’


명현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수술지 작성과 담당 환자들의 새벽 드레싱을 미뤄두고서라도 울렁거리는 몸 속을 지금 당장 눌러야 할 것 같았다.


9층에 있는 중환자실에서 수술방이 있는 10층으로 다시 올라가기 위해 명현은 비상구 계단을 타닥거리며 뛰어 올라갔다. 그런 후 탈의실에 걸어둔 자신의 의사 가운을 걸치고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1층에 있는 병원의 로비로 향했다.


이제 막 새벽을 넘어선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천 개가 넘는 병상을 보유하고 있는 세진 병원의 로비는 적잖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저마다의 손에는 환자들을 위한 먹거리를 담은 작은 가방이나 투명 비닐봉투들이 빠짐없이 들려져 있었다.


밤사이 비워뒀던 병상으로 마음 급하게 달려가는 그들의 곁을 명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찰나적으로 스쳐 지났다. 그리고는 로비의 뒷문 쪽으로 빠른 걸음을 내딛었다.


우수한 실력의 의료진과 더불어 병원 뒤쪽에 조성되어 있는 공원은 세진 병원을 다른 어떤 병원보다도 우월한 위치에 있게끔 한 부분이었다.


공원은 작은 수목원을 연상시킬 만큼의 울창한 나무숲으로 덮여져 있었다. 그 숲길을 따라 연결된 산책로를 걷다보면 연못과 분수대가 차례대로 나타나고, 길의 마지막에는 해마다 두 번의 정기 음악회를 여는 야외 공연장이 제법 규모 있는 크기로 자리잡고 있었다.


명현은 하늘을 향해 쭉 뻗은 나무들 사이를 걷고 나서야 비로소 가둬두었던 숨을 몰아서 내쉴 수 있었다.


이슬이 내려앉아 물 냄새가 섞인 촉촉한 흙들은 명현의 발자국을 소리 없이 움켜쥐었다. 본격적으로 빛이 퍼지지 않은 희뿌연 아침 하늘이 그녀가 걷고 있는 나뭇길 위로 언뜻언뜻 내비쳤다. 명현은 이미 정해진 곳을 찾아가는 사람처럼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는 갈림길에서도 주저 없는 선택을 했다.


조금만 더 가면 그녀가 가끔씩 들러서 쉬곤 했던 작은 나무가 보일 것이었다.


산책로에서 왼쪽으로 좁다랗게 난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 보면 작고 아담한 나무들의 군락이 나타나는데, 그녀는 시원스레 뻗은 큰길보다 안쪽에 숨겨져 있는 아늑한 그곳을 훨씬 좋아했다.


크고 멋지게 생기진 않았지만 부드럽게 뻗은 가지에 풍성하게 매달린 초록의 솔잎들은 그녀가 육체적으로 힘들 때나 찌들어버린 감정의 무게로 힘들어 할 때 늘 다정한 가지를 내려 명현을 포근하게 안아주곤 했다.


명현은 하루종일 두꺼운 안경을 견디느라 고생한 자신의 콧잔등을 위해 무테안경을 벗으며 나무 앞 벤치 위에 반듯하게 누웠다. 그리고 팔을 올려 눈을 가려 버렸다.


‘잠시만, 잠시만 이러고 있을게.’


후우우. 명현은 깊은숨을 옅은 신음소리와 함께 여러 번에 걸쳐 끊어 뱉었다. 그리고 혼잣말로 나직이 말했다.


“사라져, 제발, 제발….”


매이고 싶지 않은 상념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빠져나가기를 명현은 소원을 빌 듯 입술을 반복적으로 움직였다. 웅얼거리듯 입술 위를 맴돌던 말이 목안으로 감춰질 때쯤 그녀는 다시 입술을 열었다.


“유월아, 빨리 지나가 버려.”


잔잔하던 명현의 입가가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억지로 안으로 누르기만 했던 감정의 무게들이 결국 그 한계를 넘고 말았다. 감정에 의해 또 흔들려버린 자신의 심장을 명현은 끄집어내어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도록 얼려버렸으면 하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영원히 딱딱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을까?


“하아….”


스스로를 못마땅하게 여긴 그녀의 입술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답이 나오지 않는, 아니 이미 답을 알고있는 자신의 감정에 왜 그리 쉽게 초연해지지 못하는지. 아픔을 지울 수 있는 약이 있다면.


‘훗, 만일 그런 약이 있다면 세상은 너무 시시할지도 몰라.’


그녀는 자신의 엉뚱한 바람에 조소했다. 그러면서 조용히 흥얼거렸다.


***


2년만의 첫 출근이었다.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인우는 서둘러 빌라를 나섰다. 이른 시간이라 도로 위는 한산했고 차분한 회색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아침 풍경은 서둘러 운전하는 그에게 여유를 주었다.


빌라를 떠난 지 20여 분이 자나자 왼쪽으로 보이는 숲 사이로 하얗게 솟은 병원 건물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인우는 좌회전 깜빡이를 넣은 다음 병원 정문을 단숨에 통과했다. 익숙했던 여느 날의 일상처럼 그는 망설임 없이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미끄러뜨렸다.


am.6:00. 시동을 끄기 전 그는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하고는 차문을 열었다. 깔끔한 정장에 휩싸인 그의 몸이 주차장에 우뚝 솟아올랐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미리 받아두었던 담당 환자들에 대한 보고서도 다시 한 번 더 숙지를 해야했고, 당장 오늘부터 있을 수술에 대한 파트 회의도 이른 아침 시간에 이루어져야 했다. 바쁜 일정을 생각하며 인우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방이 있는 6층을 누르려던 그는 잠깐 망설이더니 다른 숫자를 선택했다. 엘리베이터는 지하 3층에서 1층 로비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약속된 장소로의 이동처럼 그는 뛰는 듯한 걸음으로 병원 로비를 가로질렀다. 로비의 뒷물을 열어 젖히자 여름의 촉촉하고도 싱싱한 새벽 공기가 그의 얼굴을 가볍게 스치고 지났다.


살찐 나뭇가지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며 그 사이로 뻗어있는 산책로를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한낮의 햇빛도 거뜬히 막아낼 수 있을 만큼 나뭇잎들은 무성해 보였다.


그도 함께 심었던 나무들이었다. 나무심기는 부친의 취미이자 특기였으며 신념이었다.


생일 때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기념해야 될 일이 있을 때마다 그의 부친은 병원의 숲에다 나무를 심으셨다.


그의 기억에는 남아 있지도 않은 부모님의 약혼과 결혼, 그와 동생 정우가 태어나던 날, 그리고 6년을 함께 했던 애견 루키를 묻었던 날, 늘 싸움에서 지던 동생이 처음 이겼던 날….


가족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특별한 일들은 그의 부친에게 나무를 심는 충분한 이유가 되어 주었다. 그 의미들을 되새길 수 있도록 나무마다 이름도 붙여주어 가족들 각자의 이름을 가진 나무들도 생겨났다.


나무들을 바라보던 인우는 문득 과거의 일부가 떠올랐다.


일곱 살 때쯤, 그는 부친이 아끼던 집 마당의 나무를 고사시킨 적이 있었다. 어린아이다운 호기심으로 그는 부친의 서재 약품 상자에서 약을 꺼내어 매일 일정 양을 나무뿌리에 부었다. 그 결과 나무는 잎이 바스라지기 시작하면서 차츰 말라갔고 결국 고사해 버렸다.


그의 부친은 이유를 모르고 안타까워하다 나무를 파내었다. 그러다 흙에 배여있는 약품 특유의 색깔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부친은 그에게 나무에 대해 물었다. 일곱 살의 그는 거짓말을 했다. 자신이 그러지 않았노라고.


그날, 병원 숲에는 나무 한 그루가 심어졌다. 그의 부친은 새로운 나무 옆에서 그를 안아주며 말했다.


-아마도 네게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거다. 오랫동안 끊임없이 네 얘기를 들어줄 것이며 무조건 네 편이 되어 줄 거야. 나무란 그런 존재란다. 모든 걸 받아들이지. 오늘부터 이 나무는 너의 나무다. 서인우 나무. 친구니까 서로 잘 지켜 봐주며 함께 잘 자라렴.


그는 좀 더 크고 난 다음에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그가 고사시킨 나무가 조부가 심어 준 부친의 나무였다는 것을.


새벽이슬에 바지를 적시며 인우는 풀숲 사이로 나 있는 샛길을 지체없이 걸어 들어갔다. 자신의 마음을 고해하기 위해 숱하게 다녔던 길을 오랜만에 걷게되어 그는 가슴이 설레었다. 이제 곧 자신만이 아는 자신의 나무가 나타날 것이다.


그가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거리를 줄여 나가자 잔뜩 휘어진 모습으로 손을 내밀고 있는 나무가 보였다. 변함없이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인 채 나무는 그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 오랜 친구와의 재회 때문인지 인우의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지어졌다.


‘안녕, 서인우. 오랜만이지?’


인우는 먼저 인사를 건네려는 듯 뻗어진 나뭇가지를 잡기 위해 나무 근처로 다가섰다. 그러나 그는 친구에게 악수를 청하지 못했다. 방해꾼이 있었다. 나무 앞 그의 벤치에는 이미 누군가가 있었다.


그 자신이 오히려 이방인이 된 것 같이 방해꾼은 지나치게 평화로운 모습으로 그의 쉼터를 차지하고 있었다.


‘훗, 나 없는 사이 새로운 친구라도 사귄 건가?’


당당하게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침입자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여자였다. 여자는 한쪽 팔로 눈을 가리고 벤치에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인우는 돌아가야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는 타인에게서 귀중한 휴식을 뺏을 마음이 없었다.


‘내일 다시 올게. 2년간의 얘기는 그때 나누면 되겠지.’


더 다가서려던 걸음을 멈추고 그는 돌아섰다. 촉촉하게 젖은 여름풀은 그의 발걸음을 소리 없이 머금었다. 숲은 조용했다. 그때 고요한 공기 속에 노래 소리가 울렸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바람이 불어 꽃이 떨어져도… 그대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내가 눈감고 바람이 되어 그대의 꽃잎도 띄울게…”


낮고 깊숙한 목소리. 숲을 휘도는 잔잔한 바람의 소리처럼 여자의 노래 소리는 그를 붙잡았다. 엿듣듯 호흡을 감추고 인우는 가만히 여자의 노래를 들었다. 듣기 좋은 노래 소리에 그는 잠시 많은 생각들을 잊었다.


‘멋진 재능이군. 가수를 해도 되겠어.’


그는 끝까지 여자의 노래를 듣기로 했다. 그러나 편안하게 흘러나오던 여자의 노래 소리는 어느 순간 끊어지면서 잦아들고 있었다.


‘우는 건가?’


인우는 자신도 모르게 여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소리없는 걸음으로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여전히 눈을 가리고 있었고 살짝 벌어진 입술로 나지막한 한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외과 윤명현.


인우는 하얀 가운에 새겨진 이름을 읽으며 여자의 병원 내 위치를 대략 파악했다. 여자는 외과 레지던트였다.


“윤명현.”


뜻하지 않게 여자의 이름이 그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인우는 목안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을 그만 소리내고 말았다. 그 바람에 인기척을 느낀 여자는 팔을 내리고 눈꺼풀을 번쩍 밀어 올렸다. 여자의 눈동자와 부딪친 순간 인우는 할 말을 잃고 탄식했다.


“아….”


투명한 얼음 막이 뒤덮인 것처럼, 여자의 눈동자에는 흐르지도 못한 눈물이 두껍게 덮여 있었다. 고여 있는 게 신기할 만큼 눈물은 넘칠 듯 찰랑거렸다.


낯선 사람의 갑작스런 등장에도 여자는 놀라지 않았다. 벤치 뒤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을 여자는 가만히 올려다 볼 뿐이었다.


‘그냥 흘려버려. 그렇게 답답하게 가둬두지 말고.’


인우는 손을 뻗어 여자의 눈가를 무겁게 누르고 있는 액체를 떨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바지 주머니에 꽂힌 그의 손은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주술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그의 몸은 꽁꽁 묶여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경험하지 못한 생경한 혼란스러움에 인우는 당황했다.


‘뭐지? 왜 심장이 미친 듯이 팽창해져 터질 것 같은 거지?’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한 그의 시선은 집요할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그런 그의 눈빛을 받아내던 여자의 눈동자에 작은 떨림이 생겼다. 또르륵, 굵은 눈물 줄기가 여자의 얼굴 옆으로 떨어졌다. 여자의 눈동자를 제대로 보게 된 인우는 그만 눈썹을 찡그리고 말았다. 자신의 그림자가 고스란히 투영된 검푸른 눈동자.


여자의 눈은 시리도록 맑았다. 그것은 깊은 색을 띠는 겨울 바다 같았다. 차갑고 무심하며 잔잔하지만 그래서 더욱 더 눈길을 빠트리게 만드는 심연의 바다 속 같은.


‘울지마, 눈물에 네 눈동자가 얼룩질지도 몰라.’


마음으로 속삭이며 인우는 여자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기 위해 굳어있던 걸음을 떼었다. 그러자 여자는 짧은 순간 눈동자를 일렁거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벤치를 벗어나 나무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인우는 언짢아졌다. 피하듯 달아나는 여자의 뒷모습에 심장에 모여들었던 피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팽창할 때와 마찬가지로 심장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굴었다. 인우는 조용하던 자신의 내면에 균열이 생긴 걸 납득할 수 없었다.


‘왜, 왜 내가 네게 붙잡혔던 거지?’


순간 묘한 오기가 그를 자극했다. 자신의 심장이 왜 그렇게 제멋대로였는지 그는 확실히 알아보리라 마음먹었다.


여자가 사라진 쪽을 쳐다보던 시선을 접고 인우는 그곳을 등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다 그는 벤치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무언가를 보게 되었다.


“휴, 어지간히 두껍군.”


여자가 두고 간 안경을 살펴보며 인우는 슬쩍 입가를 늘렸다. 여지를 남겨놓고 갔으니 기꺼이 찾아 줄 생각이었다.


***


6F 일반외과 병동, am.7:00.


병동의 아침은 환자들의 약과 주사 처방을 위해 병실을 드나들고 있는 간호사들의 분주한 움직임 속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바쁘게 시작되고 있었다.


이미 병동의 복도는 환자의 병상을 지키는 보호자들과 산책이라도 다녀왔는지 휠체어를 탄 채 자신의 병실로 돌아가는 환자들로 밤의 한가로움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명현은 아침 드레싱을 끝낸 후 간호사실 컴퓨터에 담당 황자들의 오더와 각종 검사 결과를 입력하고 있었다.


피로감이 묻어나는 안색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일에 몰두해 있는 그녀에게서는 다른 느낌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거운 자신의 감정에 흔들렸던 못마땅함도, 그로 인해 은연중에 배어 나온 슬픔도, 그리고 조금 전 낯선 이와의 만남에 대한 놀람도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30명이 훨씬 넘는 담당 환자들의 오더와 기록들은 제때에 관리를 해두지 않으면 지시된 오더를 그대로 수행할 수 없어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또한 환자를 위해서라도 진료한 자료들을 완전히 남겨두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정리를 해 두어야 했다.


명현은 고개를 잠시 들어 간호사실 벽에 걸려있는 둥근 시계의 바늘을 확인했다. 서둘러야 될 것 같았다.


스태프 회진 전 먼저 치프에게 밤사이 환자들의 변화나 신환이 있는 경우는 신환에 관한 히스토리를 설명해야하는 치프 가이드를 돌아야 할 시간이었다. 그 치프 가이드가 끝나면 스태프를 모시고 섹션 전체가 움직이는 스태프 회진을 돌아야 했다.


명현은 아직 처리하지 못한 환자들의 기록을 조금 남은 시간동안 열심히 컴퓨터에 입력하고 있었다.


참기 힘들었던 두통도 잊어버릴 만큼 그녀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일 때였다. 누군가가 호들갑스럽게 간호사실로 성큼 다가왔다.


겨우 서른일 뿐인데 노처녀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며 억울해하는 간호사 강민지였다. 그녀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가뜩이나 커다란 눈을 화장으로 더 강조시켜 혹여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민지는 그 큰 눈을 놀라울 만큼 크게 뜨고서는 벅찬 감정을 숨길 수 없어 터트리듯 큰 목소리를 토해냈다.


“오늘 서인우 선생님 오셨다는 데 알고 계셨어요?”


“응, 오늘 출근하신다고 김병훈 선생님이 그랬잖아.”


스테이션 너머에서 수간호사 진숙이 명현이 내려준 오더를 체크하며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대꾸해 주었다.


“아, 빨리 봤으면 좋겠다. 여전히 근사하겠죠?”


민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들떠 있었고, 별다른 반응 없이 기록 정리에만 열중하고 있는 명현에게 진숙은 동참을 부추기려는 듯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윤 선생님, 혹시 서인우 선생님 알고 계세요? 아! 2년 전에 미국 가셨으니까 모르시나?”


진숙은 자신보다 열 살이나 적은 명현에게 반말을 적당히 섞어가며 물었다.


“한 번도 뵌 적 없어요.”


하던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 하면서 명현은 고개를 좌우로 살짝 저어 주었다.


다들 노래를 부르는 구나.


과 윗년차 선배들도 며칠 전부터 서인우, 서인우 하면서 경외시 하더니 이젠 간호사들까지도 내뱉는 말마다 서인우 노래를 하고 있었다. 어떤 대단함을 가진 사람이기에 여러 사람의 입에 저렇게 부지런히 오르내리는 건지.


명현은 그 이유가 의사로서의 실력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특이한 캐릭터 때문인지는 나중에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뉴욕 메모리얼 슬론 캐터링 암 센터에서 연수를 끝내고는 일주일 전에 귀국 하셨다는데, 원장님이 외과의사라 선택의 폭이 좁았는데도 서인우 선생님 전공을 선택할 때, 외과 과장님들은 모두 다 탐을 냈었지.”


진숙은 자신이 그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듯이 으쓱해 하면서 이력까지 설명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하지만 앞으로 몇 달은 모시게 될 스태프인데도 명현의 태도는 처음과 다를 바 없었다. 무관심했고 무덤덤 해 보였다.


진숙은 예상했던 호응을 조금도 보여주지 않는 명현을 슬그머니 훑어보았다.


그녀에게서는 언제나 도도함과는 다른 기품이 흘렀다.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당당함의 고운 자태가 단아한 외모에 배어 나와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좀체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에 관한 살가운 얘기도 꺼내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근접할 수 없는 견고한 성 같았다.


힘든 1년차 생활을 하면서도 흐트러져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다. 듣기로는 사흘째 밤을 지 샌 걸로 아는데 그 흔한 하품 한 번이 없었다.


관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보니 여자 전공의들은 대체로 부스스함이 표시 나지 않는 하나로 질끈 묶어버리는 머리를 선호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칫 관리하기 힘든 커트머리를 항상 단정하고 세련되게 유지하고 있었다.


본인은 그다지 의식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녀의 외모는 처음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거기에 넘치지 않는 건조한 눈빛은 그녀를 관심 있어 하는 병원 내 남자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마들었다. 웃을 때조차도 입가를 무너뜨리지 않을 수 있는 차가운 절제로 그녀는 자신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오늘 오시는 스태프 선생님이시라고만 치프 선생님께 들었어요.”


명현은 제법 오뚝하게 솟은 콧날 위의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한숨쉬듯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흐트러진 수첩과 널려진 자료들을 반듯하게 정리한 후 치프 가이드를 위해 간호사실을 벗어났다.


민지는 정리된 몸 동작으로 복도를 조용하게 걸어가고 있는 명현의 반듯한 뒷모습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역시, 관심 없는 표정이네요.”


참으로 신기하다는 듯이 민지의 눈이 가늘어지자 수간호사인 진숙도 동감하며 민지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함께 쳐다보았다.


“그러네, 도대체 저렇게 무관심할 수 있는 능력이 뭘까? 호된 사랑에 아팠나?”


명현의 모습이 복도에서 사라졌는데도 두 사람의 시선은 계속 복도 쪽에 머물러 있었다.


“그건 아니라잖아요. 박소영 선생님 말로는 학교 때 사귄 사람 하나 없었다는데.”


명현과 학교 동기인 레지던트의 말을 증거로 대며 민지는 아니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그렇게 들었지? 그럼, 단순히 독신주의잔가?”


진숙이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추측의 결론을 얘기하자 민지도 상상력을 동원해 내어 명현의 증세를 진단 내렸다.


“아니, 제가 볼 때는 거부증 내지는 기피증이 분명해요.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드러나지 않는 명현의 모든 것이 궁금했다. 그 중에서도 그녀의 사랑은 특히 더 그랬다.


***


6F. 일반 외과 과장실.


최신 시설로 지어진 병원의 사무실답게 과장의 방은 실용적인 기능을 부각시켜 깔끔하게 인테리어 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환자를 진료하기 위한 병상침대와 책상 그리고 벽면에 붙박이 된 책장, 책자의 칸칸을 매우고 있는 손때 묻은 의학 서적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 출근해서 원장님은 뵙고?”


GS(일반외과) 과장인 원규가 미소와 함께 출근 인사차 들른 인우에게 넌지시 물었다.


잔잔한 눈매에 오십대의 중반을 넘긴 원규는 작고 왜소한 체구였지만 그 인품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넉넉했다. 그는 늘 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후배 의사들을 따뜻하게 다독여 주었고 끊임없이 연구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서 말보다는 행동으로 훌륭한 의사의 본보기를 제시해 주었다.


인우의 경우에도 원규는 그가 자라는 과정 내내 부모님 다음으로 자신을 깊은 애정으로 지켜 봐주었고, 큰 결정을 앞둔 시기에도 자신의 선택을 믿고 지지해준 훌륭한 조력자 역할을 자처했다.


“아뇨. 어제 전화만 드렸습니다.”


인우는 한없는 자상함을 보이는 원규를 향해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큰 키와 속마음을 알 길 없는 가라앉은 눈빛, 그리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까지 부자지간이라도 어찌 저리도 똑같을까 싶어 원규는 어쩔 수 없이 핏줄의 대단함을 느껴야 했다.


“널 자랑스러워하신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느냐. 표현이 무뚝뚝하셔서 그렇지 마음은 네가 느끼는 그대로 이시다.”


원규가 후배로서 존경하고 있는 선배인 서 원장을 쫓아 함께 지낸 세월은 앞에 앉은 인우의 나이보다도 더 오래되었다.


서 원장은 의사로서의 확고한 신념을 병원 운영의 힘들었던 시기에도 고집스럽게 지켜내어 지금의 세진 병원을 이끌어 오신 분이었다. 그런 서 원장의 아들인 인우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한곳으로 맹렬히 빠져드는 차가운 열정까지도 아버지인 서 원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말이 많으신 분은 아니었지만 부친인 서 원장이 그를 뿌듯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인우도 느낄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넌 의사가 됐어야 하는 게 맞아. 결국은 네 의지로 택한 일이니 지나온 길을 너무 아쉬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원규는 인우의 선택이 나쁘지 않았음을 얘기해주고 싶었다. 혹시나 하는 염려가 섞인 원규의 말에 인우는 그저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단지 아쉬움이 계속 남아 있을 뿐이죠. "


“알지, 알아. 그러나 원장님의 입장에서는 널 포기하는 게 정말 힘드셨을 거다. 그러기엔 네가 너무 뛰어났어.”


원규는 대견스러운 눈빛으로 인우를 바라보며 서 원장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더 이해시켜주었다.


생각에 잠긴 듯 인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여다보며 시선을 내리고 있더니 부드럽게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원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회진 가셔야 될 시간입니다.”


“그래, 너도 오늘부터 바빠지겠구나. 어서 가자. 녀석 어깨라도 한 번 두들겨주고 싶어도 네놈의 키 때문에 쉽지가 않구나. 어째 아직도 크는 것 같으냐?”


소파에서 일어 선 원규가 인우의 키를 아래위로 훑었다.


“훗, 아버지께서 늘 나무를 닮은 사람이 되라고 주문을 외시더니 키만 닮았나 보죠.”


인우는 희미하게 웃음 지으며 원규의 뒤에 서 있는 채로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원 녀석, 별일이다. 농담도 다하고.”


원규의 웃음소리가 인우의 등뒤를 타고 경쾌하게 들려왔다.


***


외과병실 7F.


외과 병실인 7층과 8층은 각 섹션의 아침 회진 특유의 분주함으로 가득 차있었다.


회진을 시작해야 되는 병실 앞에는 인턴, 레지던트 각 년차와 실습 나온 서브 인턴(sub-intern)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스태프를 기다리느라 잠시 대기상태로 서 있었다.


일반 외과내의 위암 파트(섹션)에는 섹션 치프인 4년차 병훈, 3년차 재환, 2년차 승수, 그리고 1년차 명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위로는 전문의인 스태프가 있다.


‘첫 회진 시간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을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 난리들인지.’


명현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복도 벽에 어깨와 뒷머리를 가볍게 갖다 대었다.


피곤했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무릎이 꺾일 것 같았다. 눈이라도 감는다면 그대로 잠을 이룰 수 있는 만큼 그녀는 지쳐있었다.


윙윙거리는 몽롱한 파장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기는 했지만 명현의 시야에는 아무 것도 잡혀있지 않았고, 의식은 점점 흐릿하고 모호한 세계로 깊게 빠져들고 있었다.


바로 그때 웅성거림이 들렸다. 아마 기다리던 스태프가 온 모양이었다.


명현은 막혀있던 숨을 틔우기 위해 헛기침을 소리 죽여 내뱉으며 벽에 기대었던 허리를 반듯하게 세웠다.


명현은 한발 먼저 병실로 들어가 환자의 병상 앞으로 다가갔다. 치프인 병훈은 스태프에게 그녀가 치프 가이드 한 대로 환자의 현재까지 상태와 간밤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아침 회진을 시작했다.


명현은 스태프가 지시하는 사항을 꼼꼼하게 메모하면서 다음 환자 앞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이렇게 메모를 해두지 않으면 회진이 끝난 후 대강만 기억에 남아 지시된 사항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게 되고 만다. 담담 환자들의 오더를 작성해야 하는 1년차로서는 스태프의 지시사항을 기록해두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병실 안의 공기를 부드럽게 두드려주는 듯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에, 언뜻 키는 아주 큰 것 같고, 말수는 그다지 많지 않다.


여기까지가 명현이 직접 느낀 그 대단하다던 서인우의 전부였다. 바로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이유로 정직한 시선으로는 쳐다볼 수는 없었지만 목을 타고 올라오는 음성만으로도 웬만큼은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당한 자신감에서 우러나오는 절제된 여유로움. 그런 것들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회진이 끝나고 병실 복도에 쭉 늘어서서 나머지 지시 사항을 마저 듣고 각자의 맡은 일들을 향해 흩어질 때쯤, 고개를 숙인 채 메모에 바쁜 손놀림을 하던 명현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를 들었다.


“윤. 명. 현?”


한 음절씩 끊어서 불러지는 자신의 이름은 낯설었다. 늘 듣던 친숙한 이름이 아니었다.


명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그건 새로 왔다는 스태프의 음성이었다. 명현은 대답이라도 하듯 그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피하고 싶은 뜨거움 같은 것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명현은 그가 왜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꿰뚫듯이 쳐다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확실치는 않지만 그의 입매가 웃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묘한 분위기였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 같기도 했고 문제를 던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눈썹을 슬쩍 밀어 올리며 빨리 답을 찾으라고 재촉해 대었다.


‘뭘까…? 그를 언제, 어디서 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떠올려야 할 정도로 낯선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나?’


명현의 눈동자는 생각을 하느라 계속 복잡하게 일렁거렸다. 자신의 생각이 멈추지 않고 무언가를 떠올리려 하는 걸 보면 분명 한 번쯤은 보았던 사람이 틀림없었다. 누구지?


그러다 마침내 그녀의 기억은 그의 존재를 생각해 내었다.


‘아,…숲에서.’


잠깐의 휴식을 깨트려 버린 이방인.


순간 그때의 짧은 영상이 빠르게 명현의 머릿속으로 지나갔다.


‘훗, 이제야 알았나 보군.’


인우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시시할 정도로 쉽게 찾아 버렸다. 같은 외과라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우스운 상황이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회진을 돌기 위해 병실로 올라왔을 때 그의 눈은 곧바로 그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새벽에 느꼈던 것보다 키가 컸다. 이마를 살짝 덮으며 귀 뒤로 넘겨진 앞머리는 창백한 그녀의 얼굴 색을 조금은 짙어 보이게 했고, 짧게 커트된 머리칼로 인해 드러난 목덜미는 한순간 당황할 만큼 선이 고왔다.


낯선 감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에 대한 집착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이 기분에 대해서 인우는 명쾌한 해석을 내리지 못했다.


인턴과 함께 회진을 해야 될 다음 환자의 병상으로 한 발 먼저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은 회진 내내 그의 신경을 분산시켰다.


40여 분 가까운 시간을 함께 하면서 계속 눈길을 보내었는데도 그녀는 전혀 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뭘 그리 열심히 적는 지 도저히 그녀의 눈은 마주할 수가 없었다.


인우는 할 수 없이 돌아서는 그녀의 이름을 힘주어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네, 선생님.”


무슨 이유로 저렇게 자신의 이름을 분명하게 끊어 부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명현은 아무 거리낌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 방으로 내려와.”


인우는 간단히 자기가 할 말만을 하고는 아래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가기 위해 먼저 비상구 계단 쪽으로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호출에 명현의 눈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아무런 이유도 모르는 채 호출을 받은 그녀는 혹시 회진할 때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했었는지에 대해 골몰해 보았다.


“왜 그러시지? 너 무슨 실수라도 한 거 있냐?”


치프인 병훈도 걱정스러운 어투로 호출의 이유를 궁금해했다.


“아뇨.”


되새겨 보아도 실수 따위는 없었다. 명현은 여전히 생각에 잠긴 채로 또렷하게 부인했다.


“한 번 걸리면 아작 날 텐데. 서인우 선생님 미국 가기 전 별명이 메스였는데. 치프 선생님이 산 증인이잖아. 얼른 가 봐. 너무 걱정은 말고, 합리적인 성격이시니까 괜한 일로 힘들게는 하지 않으실 거다.”


3년차 재환이 걱정을 보태는 듯한 위로를 해주었다. 하지만 그게 위로든 걱정이든 명현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의 방에 가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진이 끝난 8층 병실에서 6층에 위치한 그의 방까지 명현은 계단을 통해 천천히 내려갔다. 그러면서도 내내 그녀의 생각은 호출의 이유에 머물러 있었다.


‘왜, 무슨 일일까?’


마침내 도착한 그의 방 앞에서 명현은 마음을 가다듬으려는 듯 훅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똑똑.


“네.”


간단한 대답이었다. 명현은 주춤한 마음을 다잡으면서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방에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피아노 협주곡이 격정적인 절정 부분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는 피아노 선율에 휩싸인 채 컴퓨터 모니터에 집중해 있었다. 그러다 명현이 들어서는 기척이 느껴지자 모니터에 시선을 둔 채 앞쪽의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거기에 앉으라는 것이다.


명현은 그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살며시 끌어당겼다. 그와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상태라 그녀는 시선 둘 곳이 마땅찮았다.


자연히 명현의 시선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포개어져 있는 그녀의 손으로 내려졌다. 그는 그녀를 앞에 불러 두고도 자신의 일에만 몰두해 있는 듯 보였다.


불편했다. 명현은 지금의 어색하고 어려운 침묵의 시간들이 빨리 흘러가기를 간절히 바랬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마찬가지였다. 그는 용건을 꺼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왜 불렀는지 어서 말해주면 좋으련만.’


명현은 다시 고개를 내려 자신의 손을 조용히 만지작거렸다.


그의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가 잠시 멈춰졌다. 아주 잠깐. 그리고 다시 규칙적인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명현은 그의 키보드 소리를 의식하며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틈이 없군.’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와서부터 의자에 앉을 때까지 작은 기척 하나 내지 않았다. 물 흐르듯 조용한 동작으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앉더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인우는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잠시 멈추고 그녀를 응시했다. 일부러 한참의 시간을 끌었는데도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저렇게 반듯한 자세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미동이 있기 마련인데, 그녀는 자연스럽게 잘도 앉아 있었다. 아마 더 이상의 시간도 가능할 거 같았다.


지금 그녀의 태도로 보아서는 아무래도 그녀 스스로는 친절하게 그의 심장을 망가뜨린 이유를 보여줄 의사가 없는 것 같았다.


인우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하던 일을 멈추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시력이 많이 안 좋더군.”


명현이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인우는 무방비 상태로 자신에게로 향해진 명현의 눈을 마치 환자의 진료하듯 뚫어지게 직시했다.


신기할 정도로 맑고 깨끗한 눈동자였다. 어른의 눈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만치 검은 눈동자를 둘러싼 흰 부분들이 파르스름하게 투명했다. 게다가 눈에 담는 모든 것을 스며들게 하는 촉촉함도 어려 있었다. 첫 느낌처럼 검푸른 겨울 바다가 맞는 것 같았다.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으면서도 자꾸만 들여다봐야 할만큼 깊은.


그 눈을 다시 마주하게 되자 인우는 자신의 심장이 또 다시 폭주하고 있음을 느꼈다.


가지고 싶었다. 신기한 것을 발견한 어린 사내아이가 그것을 조바심치며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는 그녀의 눈동자가 탐이 났다.


“실력 좋으신 선생님 많으신데 수술 받지 그래?”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어려 있었다.


“아뇨, 지금도 충분히 좋습니다.”


인우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느긋해진 자세로 굿은 표정으로 딱딱하게 대답하는 명현을 쳐다보았다.


그런 인우를 바라보는 명현은 개인적인 관심은 사절이라는 항의와 함께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는 정리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경계를 그어 버리는 눈빛이 상대를 더 자극하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차가움을 녹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인우는 그녀의 내부를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동안 말없이 명현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명현은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눈빛과 알 수 없는 의미가 섞인 지금의 분위기에서 얼른 헤어나고 싶었다.


“부른 용건? 솔직히 말해야겠지? …없어.”


그는 느긋한 표정으로 빙긋거렸다.


아마 잠시동안 침묵이라는 것이 흘렀을 것이다. 명현은 그의 지나친 솔직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유가 없다니….


명현은 지금까지 긴장하느라 소비했던 에너지가 아까웠다. 허탈한 마음에 참아두었던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인우는 불쾌감을 억지로 희석시키고 있는 명현을 지켜보며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내 대답이 불쾌하고 마음에 안 든 모양이군. 그렇다면 이유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어.”


손깍지를 낀 그의 시선이 한 곳을 가리켰다. 명현은 컴퓨터 옆에 얌전히 엎드려 있는 자신의 안경을 발견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입가를 긋고 있는 그의 미소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자신을 부른 이유가 마치 안경 말고 또 다른 이유가 더 존재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명현은 다른 이유 같은 건 알고 싶지 않았다. 안경을 돌려주기 위해서 부른 걸로 족했다. 어쩐지 자세하게 알아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에 그녀는 의식적으로 자신을 향한 그의 관심과 호의를 피했다.


명현은 그와 얽혀 있던 시선을 그의 가슴께로 옮겼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그만 나가봐도 될까요?”


“그냥은 안 되겠고, 사례라는 걸 한 다음 찾아가도록 해.”


인우는 생각지도 않은 말을 불쑥 내뱉으며 명현의 반응을 기다렸다.


확연하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인우는 그녀가 잠깐 동안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씀해 주시겠어요? 어떤 사례를 원하시는지.”


차분하던 명현의 음성이 지지 않으려는 듯 고집스럽게 변하면서 인우의 짙은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 내었다.


그의 장난 같은 대답에 명현은 싸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인우는 지나치게 핏기가 가신 그녀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창백한 낯빛이 마치 새벽에 흘린 눈물방울이 다시 얼굴에 흘러내릴 것 같은 슬픈 색깔을 띠고 있었다.


고집이 세어 보이는 콧날과 타인의 마음속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 같은 투명한 눈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당당함이나 도도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슬픔이 먼저 보였다. 흘러내리지도 못하고 고여 있기만 했던 눈물. 왠지 그녀는 위태롭게 벼랑 끝에 간신히 서 있는 사람 같았다.


“내가 원하는 건 뭐든 주겠다는 투로 들리는군. 그런 건가?”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인우는 피식 웃었다.


“훗, 겁도 없이…. 별 거 아냐. 밥 먹는 거 어때? 난 그게 좋을 거 같은데.”


“네, 그러겠습니다.”


어떤 의도가 숨겨져 있는 요구든 그게 아닌 정말 단순한 식사이든 그녀는 아무 상관없었다. 그로 인해 그녀가 달라질 건 없었다.


“1년차라 시간 내기 힘들테니 가능한 때가 되면 알려줘. 이젠 나가 봐도 돼. 윤. 명. 현.”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조용히 움직였다. 스스륵 미끄러지듯이, 마치 모든 동작이 틀에 맞추어진 것처럼 매끄러워 보였다.


명현이 막 문손잡이를 돌리려 할 때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방안을 울렸다.


“아, 물어볼 것이 있어. 아침에 말이야, 왜 울었지?”


그녀는 멈칫거렸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소리만을 남겨둔 채 그의 방을 나가 버렸다.


인우는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짓에 웃음이 났다.


어쩌자는 거냐, 서인우.


***


6층 비상구에서 안쪽으로 이어진 제일 끝 방에 여자 수련의(인턴)와 전공의(레지던트)들이 머무는 의국 방이었다.


10여 평 정도의 방에는 늘 정돈되어 있지 않은 책상 3개가 놓여 있었고 출입구 오른편 구석에는 2층 침대 두 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침대 위에는 잠옷 대용으로 사용하고 벗어 던진 듯한 녹색 수술 복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고, 책상 위에는 음식을 자주 시켜 먹기 때문인지 중국집, 도시락 집 등에서 보낸 스티커가 따로 모아져 있었다.


인우의 방에서 나온 명현이 막 의국으로 들어섰을 때 1년차 동기인 소영이 밀린 자료 정리를 하는지 책상에 앉아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소영은 들어오는 명현을 곁눈질로 확인하고 특유의 걸걸한 음색으로 말을 걸었다.


“수술 없어? 난 이것 끝내놓고 두 판이나 뛰어야 한다. 어휴.”


그렇게 말하는 소영은 하나로 묶어버린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빠져 나와 있어 ‘나 지금 무지 바쁘거든요.’라고 온몸으로 말을 해주고 있는 듯했다.


“있어.”


명현은 가까운 침대로 가서 풀썩 엎드리면서 웅얼거렸다.


안경 때문에 비스듬히 돌려진 그녀의 얼굴에는 단정하게 넘겨져 있던 까만 머리카락들이 부드럽게 쏟아져 내렸다. 안경과 머리카락이 얼굴에 가하는 불편함과 성가심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지쳐 있었다.


며칠 동안 당직을 제외하고도 두세 시간 정도 토막 잠을 자야 했기 때문에 세상의 무게만큼이나 그녀의 눈꺼풀은 무거워져 있었다.


“야! 서인우 선생님 봤냐? 정말 그렇게 끝내주게 생겼어? 다른 과 간호사들 아침부터 자리 비우면서 보러 간다고 난리도 아니라는데. 어때? 넌 바로 옆에서 가이드 했을 테니 잘 알거 아냐. 빨랑 불어봐.”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소영은 큰 목소리로 자신이 앉아있는 의자를 뒤에 있는 침대 곁으로 쭉 밀었다.


의자를 끄는 거친 소리가 들리자 눈을 감고있던 명현의 표정에 잠시 불만이 스쳤다.


‘아, 제발. 소영아. 지금은 참아줘.’


눈이 저절로 감겨지기는 했지만 명현은 쉽게 수면에 빠져들지 못했다. 그렇다고 대답을 할 수 있는 여력이 남은 건 아니었다. 단지 가늘어 질대로 가늘어진 몇 가닥의 신경들이 간식이 그녀의 의식을 잡고 있을 뿐이었다.


“야, 자냐? 너 자도 돼? 명현아?”


소영은 의자에 앉은 채로 몸만 옆으로 비틀어 돌리며 명현이 잠들었는지를 확인했다.


그새 잠들었나?


소영은 입을 뾰죽이 내밀며 명현의 얼굴을 살피다 비틀었던 몸을 반듯하게 돌리려 했다. 성격상 궁금한 점은 빨리빨리 해결해야 되었지만 잠든 명현을 깨우면서까지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런 소영에게 명현은 아직은 잠들어 있지 않음을 나타내고 말았다.


“나 20분만 잘게. 잠들면 일어날 자신 없으니까. 네가 꼭 깨워줘. 꼭 깨워줘야 돼? 부탁할게.”


혹시나 수술시간을 놓칠 새라 명현은 걱정이 되어 소영에게 부탁했다. 순간 소영의 눈이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반가움에 반짝거렸다.


“그럼 대답은 하고 자. 언니한테 정보를 좀 줘야 이놈의 망할 병원 생활에 즐거움을 보탤 거 아니냐. 듣기로는 완벽하다는데 네가 보기에는 어때?”


통통한 볼 살을 그녀 최대의 핸디캡으로 여기는 소영이 급기야는 침대로 다가와 앉으며 엎드린 명현을 바로 눕혔다.


소영의 집요한 관심에 명현은 귀찮은 듯 안경을 벗고는 손등으로 눈을 가려버렸다. 그리고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그냥…그래.”


소영은 원하는 만큼 만족스러운 얘기를 해 주지 않는 명현을 향해 시큰둥하게 불만스러워 했다. 그러면서 명현의 안경을 그녀의 손에서 빼내어 책상 위에 안전하게 올려놓아 주었다.


“미친년, 남자 보기를 비포장도로에 깔린 자갈보다 하찮게 보는 너한테 내가 뭘 묻겠냐. 자라, 자. 내 친히 몸소 알아보도록 하마.”


# 2장


10F 수술실.


명현은 섣부른 잠을 청한 자신을 원망했다. 10분이라는 짧은 시간은 자신에게 휴식의 위안을 준 것이 아니라 깊은 잠을 요구하게 만드는 갈증만을 더해 주었을 뿐이었다.


정확하게 시간을 맞춰 잠을 깨워주던 소영을 야속하게 생각하며 정신을 차렸을 땐 따가움이 느껴질 정도의 자잘한 핏발들이 눈동자에 퍼져 있었다.


조금이라도 진정이 될까 싶어 간호사실에서 얼음을 얻어 얼음물로 눈을 두들겼다.


그렇게 얼음의 도움으로 붉은 기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수술 준비를 하고 있는 그녀의 눈 속에는 아직도 가시가 남아 있었다.


명현은 환자의 복부를 소독약으로 소독한 다음 소독포로 덮어놓으면서 수술 준비를 끝내었다. 그러고 잠시 후 수술방으로 마취과 스태프가 들어왔고 그로부터 조금 뒤 집도의인 인우도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수술 장갑을 낀 손을 가슴 높이로 올리고 수술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의 거의 전부를 가린 인우가 수술대 앞으로 다가왔다.


집도의 바로 옆이 1년차인 그녀의 자리라 명현은 수술대로 성큼 다가온 그와 무심결에 시선이 부딪쳤다.


얼굴의 다른 부분이 가려지면서 강조되듯 드러난 그의 눈은 수술등처럼 선명해 보였다. 그리고 뜨거워 보였다.


그가 수술대 앞에 나란히 서게 됨으로서 명현은 그의 시선은 피할 수 있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기운은 여과 없이 느껴야 했다.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자그마한 체격에 동글동글한 얼굴이 귀여운 수술방 써큐레이팅 간호사인 지혜는 특유의 잔잔한 눈웃음으로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인우를 반갑게 맞았다.


아이들이 즐겨보는 만화 프로그램의 들뜬 여자를 표현해야 되는 성우처럼 그녀의 목소리 톤은 실상에서 듣기로는 지나치게 높았다.


그 때문인지 인우의 등장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던 치프인 병훈과 3년차 재환은 높은 톤의 목소리가 주는 소름을 털어 내느라 얼굴 표정을 이상하게 지어 보였다.


“잘 있었어요? 결혼했다면서요. 축하해요. 나중에 축하주 한 번 사죠.”


양손을 가슴 높이로 든 채로 소독포가 덮인 수술 부위를 내려보던 인우의 시선이 부드럽게 지혜를 향했다.


“어머, 정말요? 약속 잘 지키시는 분이라는 걸 아니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예전에 들으시던 시디(CD)있는데 틀어 드릴까요?”


인우의 약속에 지혜의 목소리가 반가움으로 한 층 더 높아지면서 조용하던 수술방 분위기가 급격히 소란스러움으로 변해버렸다. 대단한 목소리였다.


“있다면 부탁해요.”


지혜와는 확연하게 대조되는 낮은 음성이었다. 인우는 별 다른 표정 변화 없이 마취과 스태프의 얘기를 들으면서 간단히 대꾸했다.


“선생님 영향 때문인지 다른 선생님들도 간혹 찾으시거든요. 이번에도 공연 때 하실 거죠?”


인우가 겪어 본 바로 지혜의 수다는 중간쯤에서 끊어주지 않으면 끝없이 길어졌다.


“아마도 그렇겠죠. 자, 이제 시작합니다.”


상기된 표정의 지혜는 음악을 틀기 위해 오디오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가 돌아 왔고 인우는 수술대에 누워있는 환자를 바라보며 간호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손위에는 수술용 칼이 얌전히 올려졌다.


환자는 심한 위궤양으로 위 일부를 절제하고 미주 신경도 절단하기로 한 중년의 아주 뚱뚱한 여자였다. 절개를 시작하자 두꺼운 노란 지방층이 나왔고 지방층이 깊어서 한참을 들어가니 근육층이 나왔다.


‘어휴!’


저 두꺼운 지방층을 당겨야 할 생각을 하니 명현은 벌써부터 팔이 저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 그래도 수면 부족으로 모든 기운이 사라진 것처럼 힘이 없는 상태였는데 절로 한숨이 그녀의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복막이 열리면서 밖으로 나온 장들을 병훈이 타월을 이용해 익숙한 솜씨로 아래로 고정시켜 놓았다.


명현은 수술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 병훈이 넘겨준 디버로 개복 부위를 힘껏 당겼다. 그러나 환자의 두꺼운 지방층은 힘을 주며 당기고 있는 명현의 팔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힘껏 당긴다고 당겼는데도 시야가 조금 밖에 보이지 않았는지 치프인 병훈이 재촉하는 목소리를 냈다.


“더 당겨.”


수술이 끝날 때까지 이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데 명현의 손이 매끈한 기구 손잡이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려고 했다.


명현은 남아있는 힘을 끌어 모으느라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디버를 당기는 데에만 주력하느라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힘껏 입술을 베어 물고 있는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별 말이 없는 걸 보면 수술 시야가 충분히 확보된 것 같았다.


명현은 안도감에 긴장을 조금 늦추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마스크 속에 가려진 자신의 입술이 비릿한 피 맛이 강하게 느껴질 정도로 깊게 터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수술방의 무거운 분위기를 편안하게 감싸면서 수술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별 다른 말이 없어도 집도의가 내미는 손에는 다음에 사용될 수술 기구가 써큐레이팅 간호사에 의해 익숙하게 올려졌다.


예상된 수술 시간이 반 이상 지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순조롭고 조용하던 수술방에 화가 난 듯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수술 진행이 잘 안 되는지 인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대로 안 해!”


인우는 육중한 니들홀더(바늘 잡는 기구)로 병훈의 손등을 내려쳤다. 혈관을 매어 놓은 타이를 잘 못한 것이었다.


굵은 혈관에서 검붉은 피가 솟아났다. 수술 시야가 벌겋게 변하자 2년차와 3년차는 타월과 석션(suction)으로 고이는 피를 서둘러 닦아 내었다. 그러는 동안 인우는 병훈이 놓친 혈관을 다시 타이하기 위해 재빨리 손을 움직였다.


피하지도 못한 치프의 장갑 속 손등이 선명하게 붉어져 있는 걸 명현은 볼 수 있었다.


‘인정사정 봐 주지 않는구나. 하긴, 수술 중에 타이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까.’


무섭게 변한 인우의 얼굴을 흘깃거리고는 저 사람이 조금 전 자신에게 사례로 밥을 사라고 장난처럼 말한 사람이 맞을까 하는 의문이 명현의 뇌리에 짧게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명현의 시선이 타이를 능숙하게 매는 인우의 손으로 향했다.


출혈이 되고 있는 혈관의 끝을 인우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잡아 어렵지 않게 단번에 타이를 성공시켰다.


수술을 진행하기 위해 혈관을 자르게 되고 실을 이용해서 잘린 혈관을 피가 나지 않도록 묶는 타이는 외과의로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치프라는 놈이 아직 타이도 제대로 못해?”


인우의 질책이 떨어지자 병훈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어느 정도 굵기의 동맥만 되도 타이가 풀리면 천장까지 튀어 오른다. 수술하는 사람의 얼굴은 물론이고 타이도 삽시간에 시야가 가려져 버린다.


타이가 더욱 중요한 이유는 다시 빨리 잡지 못하면 그만큼 혈액 손실이 있게되고 환자는 위험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과를 도는 학생이나 인턴, 레지던트는 항상 가운 앞자락 단추에 실을 끼워 놓고 잠시라도 시간이 나면 실을 안 풀리도록 매듭짓는 연습을 한다. 그러나 맨 손이 아닌 수술 장갑을 끼고 타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 수술 부위가 깊어지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부분을 손가락의 감각만으로 타이 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 이렇게 매듭이 풀리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는 것이다.


뜨거운 수술등과 수술실의 열기로 명현의 잠신은 저 멀리 달아난 모양이었다. 명현은 조금 전보다는 훨씬 또렷한 의식으로 능숙하게 수술 집도를 하고 있는 인우를 살짝 엿보았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수술이 4시간이 지난 오후 2시쯤 끝이 나자 집도의인 인우는 3년차 재환과 2년차 승수에게 마무리 봉합을 지시하고는 수술대를 벗어났다.


장갑을 벗고 마스크를 내리면서 명현에게 들으라는 듯 낮으면서도 마른 목소리를 냈다.


“밥은 오히려 내가 사줘야 될 것 같군. 힘쓰는 걸 보니.”


민망함을 감출 수 있는 마스크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명현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수술방을 나가고 있는 그의 등을 힘주어 쳐다보았다.


“휴, 휴!”


모두 막혔던 숨을 내쉬느라 바빴고, 병훈은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유독 기운 빠진 모습이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잊어버리세요. 워낙 깔끔한 성격이시라 뒷일은 걱정 없잖아요.”


재환이 병훈의 표정을 살피면서 넌지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내가 실수했는데 뭘. 얼른 마무리하자. 명현이는 수술지 작성하고.”


“네, 선생님.”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지만, 또 해서는 안 되는 실수이기도 했다.


명현은 앞으로 그녀 자신도 겪을 수 있는 실수이고 질책이라 생각하니 입가가 씁쓸해졌다.


수술방을 나온 명현은 복도 쪽으로 놓인 의자에 기대어 앉아서 아무 생각도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렇게 괴롭히던 잠도 공복의 속 쓰림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수술방의 긴장은 그녀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는지 명현은 이렇게 피로감이 무뎌진 상태로는 저녁까지 무사히 견딜 수 있을 것 같다는 우스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다움을 포기해야 하는 1년차 생활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이 숨막히도록 빡빡한 시간들이 좋았다.


병원에 있는 동안은 그녀를 짓누르고 있는 미움과 증오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것이 어떤 존재였는지도 간혹 잊어버리게 될 정도로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인우는 수술복 위에 하얀 가운을 걸쳐 입으며 책상 위에 있는 스케줄 표를 확인했다.


다음 수술은 2시간 후에 하나 더 잡혀 있었다. 그 정도면 미리 약속되어진 NS(신경외과) 소아 척추 파트 스태프인 진성과 늦은 점심을 함께 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였다.


인우는 벽에 걸린 시계를 슬쩍 쳐다보았다. 약속 시간이 10분이나 지나 있었다. 인우는 수술 모자로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쓱쓱 쓸어 넘기면서 문을 열고 나갔다.


15층에 위치한 구내식당은 점심시간의 북적거림이 한풀 꺾였는지 한적하게 몇몇만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당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선 인우는 그를 향해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이는 진성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인우는 편안한 얼굴로 진성이 앉아있는 식탁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손을 내밀어 2년만의 재회를 반가워했다.


“미안하다. 수술이 조금 늦게 끝났다.”


늦음을 간단히 해명하며 내미는 인우의 손을 진성이 힘차게 맞잡았다.


“수술은 항상 늦제 끝나는 법이지. 점심 늦은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자식, 더 멋있어졌네. 가뜩이나 세진병원 내 여자들 너 때문에 몸살 앓는데 더 보태면 쓰나.”


마르긴 했지만 큰 키의 진성은 아주 날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위로 올라간 눈 꼬리와 차가워 보이는 은테 안경의 탓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성의 성격은 전혀 날카롭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30분의 시간만 있다면 그와 서로 호형호제하도록 만들 수 있는 털털한 성격이었다.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야?”


능글거리는 친구의 인사에 인우는 피식 웃으며 먼저 의자에 앉아 버렸다.


“자식이 말이야, 두루두루 나눠 쓰지도 않을 거면서 갈수록 멋있어지기나 하고. 주지도 않으면서 지나치게 멋있는 것도 죄악이야. 여인네들 마음 아프게 하는 게 얼마나 큰 죈 줄 알아?”


진성은 타박 아닌 타박을 장난스럽게 더 갖다 붙이며 오랜 친구인 인우를 친근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마 아래로 곧게 뻗어내린 콧날을 중심으로 뚜렷하게 자리잡은 눈매가 섬세한 선으로 깨끗하게 마무리되어 강한 남자다움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인우의 단정하게 다물어진 입술선과 자신의 생각에 골몰해 있는 진지한 눈빛은 쉽게 근접할 수 없는 냉정함이 서려있었다.


진성의 우스갯소리에 절묘하게 섞여있는 친구의 걱정을 인우는 웃음으로 넘겨 버렸다.


“실없는 소리만 늘어 가지고는. 아들놈 얻었다더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지? 날 상대로 농담도 던지고.”


인우에게 진성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허물없는 친구였다. 의대를 진학하기 이전의 고민도 함께 나누었었고 의사가 되기 위한 긴 시간동안에도 둘은 서로를 크게 의지하며 보내었다.


“장가도 못 간 놈이 어디서 큰 소리야? 하긴, 여자가 있었어야 뭐라도 하지. 너같이 허우대 멀쩡하지, 정신 상태도 결격 사유가 없는 놈이 지나쳐 버린 길에 매여 여자 하나 없었다면 그 누가 믿겠냐 말이다. 서인우, 돌리지 않고 한 방으로 물어보마. 너 설마 남자 쪽으로 감정이 끌리고 그렇진 않지?”


장난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인우를 바라보는 진성의 표정에는 나이에 맞지 않은 개구쟁이 같은 장난기가 엿보였다.


“미친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진성이었지만 인우는 화가 나기보다는 그가 언제나 자신을 편안하고 재미있게 웃겨 주는 친구임을 알기에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아니면, 정말 왜 인거냐? 내가 널 친구로 둔 죄로 원장님 뵐 때마다 왠지 모를 죄송함으로 움찔거려야겠냐? 인우야, 그냥 눈 질끈 감고 한번 저질러 볼래? 응?”


제법 진지한 듯한 얼굴을 꾸며내 들이밀며 사정조로 말하는 진성의 모습은 인우로 하여금 수술방에서 들었던 긴장을 풀고,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좋은 수였다.


“배고프다. 밥 먹자. 네놈의 되지도 않은 잔소리로는 도무지 배가 부르지 않거든.”


인우가 피식거리며 배식구 쪽으로 걸어가자 진성도 냉큼 그 뒤로 따라 붙었다.


마침 주방 안의 여인들도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 중인지 무리 중에 한 사람만 급히 일어서서 배식구 앞으로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주머니는 반찬통으로 손을 뻗으려다가 인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라, 누군가 했더니 서 선생님이시네? 난 또 누가 이렇게 잘생겼나하고 한 번 더 쳐다봤네.”


나이 오십은 훌쩍 넘어 보이는 여인은 친근한 말투로 인우를 기억해냈다.


“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인우는 자신을 알아보고 친근함을 전해준 여자가 고마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한 몇 년 된 것 같은데…. 고 사이에 당연히 결혼은 했을 테고, 애기는?”


여인의 궁금증을 다 해결해주려면 점심을 먹지 못할 거 같아 인우는 재빨리 화제를 돌려버렸다.


“아주머니, 수술 시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보게. 맞어, 맞어. 가뜩이나 늦은 점심인데 못 먹으면 안되지.”


여자는 부리나케 둘의 밥이며 반찬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서 두 사람의 손으로 넘겨진 식판에는 왕성한 성인 남자의 식욕이라 해도 해결하지 못할 만큼의 많은 양의 음식들이 담겨져 있었다.


둘의 식판과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여인의 넘치는 정에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의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인우가 진성을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하진성, 처음 본 사람이 계속 신경이 쓰이고 궁금하다는 건 그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는 건가?”


인우는 말하면서도 정말 모르겠다는 듯 팔짱을 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내지 못한 정답을 진성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 그건 관심의 시작이지. 뭐? 너, 설마….”


수저를 내려놓으며 입을 헹구기 위하여 물을 마시던 진성은 꿀꺽하며 목젖을 크게 삼켜 버렸다.


“추측하지 마. 그러면 사라질 수도 있겠군.”


한쪽 팔을 풀어 관자놀이를 슬며시 문지르며 인우는 낮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사라질 수 있는 감정에 이렇게 혼란스러워 한다는 건가?’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고 나면 자신의 심장이 필요 이상으로 빨리 뛰게 된 이유를 뚜렷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정확하게 알지도 못한 채 가지고 싶다는 집착 같은 소유욕만을 느끼고 말았다.


이렇게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느낌이 단순히 관심이라는 감정의 시작이라는 것인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는 인우를 보며 진성은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끝내 사라지지 않는 관심도 많아. 이 답답한 친구야.”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넘겨짚지 말라고 인우는 못을 박았지만 진성은 친구의 망설이는 표정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진성이 알고 있는 친구 서인우는 주저하거나 망설이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항상 판단은 명쾌했고, 그게 따른 행동은 자신감 있게 이루어졌다. 그런 친구가 망설인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는 증거이다.


진성은 장담할 수 있었다. 서인우가 여자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


“윤 선생님!”


저녁 회진의 마지막 병실을 나오는 명현에게 오늘 밤 당직 간호사인 성희가 복도를 바쁜 듯이 가로지르며 다가왔다. 명현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7호실 정세현 씨 통증이 너무 심하다고 약 처방 더 해 달래요.”


성희는 화장이 취미인 사람처럼 평소에도 화려하게 메이크업을 하고 다녔다. 야간 당직인 지금도 마스카라까지 완벽하게 칠하고 빨간 입술을 다급하게 움직였다.


명현은 뜬금없이 저렇게 화장으로 짙게 얼굴을 가리고 있으면 답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거 같은데 정작 당사자인 성희는 무척이나 가벼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희의 빨간 입술에 휩싸이듯이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명현은 그제야 자신이 들은 내용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조금 전 회진 돌 때는 아무 말씀 없으시더니 그새 또 호출하셨어요? 알았어요. 지금 내려가 볼게요.”


의사들의 하얀 가운 자락을 몸의 불편함에 상관없이 자주 보고 싶어하는 환자들이 있다. 지금도 성희가 다급하게 뛰어와야 할 정도의 환자는 아니었다. 그래도 환자의 호출은 담당 의사로서는 꼭 지켜줘야 할 의무였다.


명현은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아래층의 병실을 향해 주저 없이 걸음을 떼었다.


오늘은 더 이상 아무 일이 생기지 않기를 명현은 간절히 기도했다.


당직이 아니니 병실의 1차 콜은 받지 않아도 되니까 오더를 내리고 밀린 차트 정리만 하면 잠을 잘 수가 있을 것이다.


시계 바늘의 짧은 침이 9를 가리키고 있었다. 암으로 두 시간 후 정도면 잠을 잘 수가 있다는 기대로 그녀의 동작들이 점점 빨라졌다.


마지막으로 간호사실에 들러 환자들의 오더를 내리고 명현은 의국으로 돌아와 윗년차 선배들에게 보고해야 될 자료정리를 시작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오고 그녀의 의지와 손에 쥔 볼펜이 서로 방향을 달리했다.


딩동.


휴대폰에서 울리는 소리에 명현의 눈이 번쩍 떠지면서 급히 메시지를 확인했다. 명현은 깊은 한숨을 쉬며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 이럴 순 없어. 어차피 해야 될 일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해 버리자.’


평소 일에 대한 원칙을 생각하면서 책상에서 일어선 명현은 가운을 벗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목 부분이 하얀색으로 동그랗게 마무리된 옅은 보랏빛이 도는 반팔 블라우스에 짙은 색 바지를 입은 명현은 굽이 낮은 구두를 발에 꿰며 의국 문을 나섰다.


[지금 밥 먹지. 지하 3층 A30. 서인우.]


명현은 휴대폰을 열어 인우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고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굳이 오늘이어야 하는지.’


복도 끝 의국방을 나온 명현은 병동의 가운데에 위치한 간호사실에 먼저 들러 자신의 외출을 알렸다. 밥 한 끼 먹는 정도라 그냥 나갈까도 생각했지만 응급실 콜이 올 수도 있으니 자신의 부재를 알려야 할 것 같았다.


“나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얼마 안 걸릴 거예요.”


명현은 간호사들이 머무는 스테이션에 조용히 얼굴을 내밀며 낮게 소곤거렸다.


“오늘 오프 아니시잖아요.”


당직 간호사 성희가 의외라는 듯이 놀란 눈으로 명현을 쳐다보았다. 별일이었다. 외출이라고는 없던 사람이 오프도 아닌 밤에 저렇게 갖춰 입고 나가다니.


“아니에요. 갑자기 그럴 일이 생겼어요.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 줘요. 부탁할게요.”


정해진 오프 날이 아닌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명현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루고 싶다고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알았다. 선생님 좋은 데 가시나 보다. 이렇게 예쁘게 하고 가시는 걸 보면.”


성희의 눈빛이 호기심에 반짝거렸지만, 명현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거라면 얼마나 좋겠어요. 빚 갚으러 가는 거니까 너무 부러워 마세요.”


간호사의 괜히 넘겨 짚어보는 말투에 명현은 가볍게 부정을 하면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의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불빛이 6으로 향하자 명현은 성희를 향해 미소를 보이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좋은곳이라….’


어디가 좋은 곳이라는 건지.


소위 말하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그게 어디든 좋은 곳이라는 말인가? 아니 그건 틀린 말이다. 사랑을 하기 때문에 같은 공간에 머무는 게 지옥일 경우도 있으니까.


매일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가지지 못한 사랑을 아파해야 하는 지독히 나쁜 사랑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 그건 틀린 말이다.


‘우스워, 그렇게 많은 오류가 있음에도 다들 그 사랑이란 걸 감싸고만 있으니.’


명현은 어디를 가는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던 성희의 얼굴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자조했다.


***


‘A30, A30…. 저기 있다!’


주차장 기둥 중간 부분에 하얀 색으로 쓰인 번호가 보이자 명현은 숫자가 적혀있는 기둥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직원 전용 주차장이라 주차 공간의 절반 이상은 퇴근으로 비어 있었다.


A29 블록을 지나고 나머지 하나 기둥을 남겨두자 명현의 발걸음은 하기 싫은 일은 하는 사람의 그것처럼 좀 더 느려졌다. 망설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달갑지 않은 일에 명현은 최대한 발걸음을 끌고 있었다.


그때 차 시동 걸리는 소리와 함께 헤드라이트가 켜지면서 기둥으로 가려진 부분에서 은회색의 차가 명현의 앞으로 바싹 다가와 멈췄다.


“타.”


창문이 내려지면서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명현은 조수석 문을 열면서 간단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차에 올랐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는 화가 나 있는 듯 보였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옆모습이 위험스럽게 굳어 있었다. 가뜩이나 불편한 상대인데 화까지 나있다고 생각하니 명현은 껄끄러운 시간들이 무사히 그것도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게 되었다.


명현은 벨트를 내려 고정시키기 위해 의자 옆쪽의 고리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벨트는 맬 수 없었다. 인우의 손이 그녀의 턱을 잡고 거칠게 그의 얼굴 쪽으로 돌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명현은 갑자기 입술이 터질 것 같은 뜨거움과 아픔을 느꼈다.


그에게 잡혀진 턱이 힘껏 아래로 당겨지면서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자 인우는 거친 숨을 내뿜으며 그녀의 입술 속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무방비 상태인 그녀의 입술 속을 그의 혀가 세차게 휘젓기 시작했다.


숨이 막혔다.


명현은 차 오르는 숨 때문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밀쳐내야 할 것 같았다. 명현은 그를 밀치기 위해 팔을 뻗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인우는 자신을 밀어내느라 안간힘을 쓰는 명현의 손목을 힘주어 잡아채면서 그녀의 머리도 함께 잡아 고정시켜 버렸다. 강요된 키스에 더 이상 참기 힘들어진 명현이 머리를 흔들며 괴로워하자 그는 그녀를 밀쳐내 버렸다.


“왜… 하아… 하.”


명현은 숨을 다 내쉬지도 못한 채 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이유를 물어왔고, 인우는 상처가 나 있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면서 화가 난 표정으로 다그쳤다.


“밥 먹고 잠잘 시간도 없어 수술방에서는 비실대더니 이렇게 흔적을 남길 정도의 사랑을 할 시간은 있었나 보군.”


인우는 저녁 회진을 돌면서 그녀의 입술에 난 상처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열렬한 키스를 나눈 연인들 사이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붉은 자국이었다. 오랫동안 쓸려서 아릴 것 같은 그녀의 입술을 보는 순간 인우는 피가 얼어붙는 배신감이 휩싸였다.


왜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는지. 아니 당연히 혼자일 거라 당정 지은 자신이 어리석었는데도 그가 느낀 건 정확히 배신감이었다.


인우는 그녀의 사랑을 인정할 수 없었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그녀를 자신에게로 데려오고 싶었다. 그 역시도 말이 안 되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건 그녀를 옆에 두고 난 후에 고민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분노의 열기를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성난 키스를 해 버렸다. 그녀는 하루도 안 된 짧은 시간에 자신을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전혀 서인우 답지 않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제 사랑인데도 선생님께 허락을 구해야 하나요? 몰랐어요. 다음부터는 스태프 선생님께 먼저 말씀을 드린 후 사랑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식사는 어려울 것 같아요. 약속은 나중에 지키겠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지금의 상황에서 명현은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뭐가 잘못되었다는 건지. 설령 그의 오해가 사실이라 해도 그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명현은 자신이 할 말만 차갑게 던져놓고 문을 열고 내리려 했다. 그러나 차를 급히 출발시킨 인우의 행동이 더 빨랐다.


“내려 주세요…. 세워요. 세워요. 세우라니까!”


꾹꾹 누르고 있었던 명현의 감정이 터져 버렸다. 꿈속에서도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이 왜 이런 모욕적인 취급을 받아야 되는지 명현은 알 수가 없었다.


명현이 소리를 내지르자 인우는 끽 소리를 내며 브레이크를 깊게 밟았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을 내뱉었다.


“정리해, 이건 스태프로서 주제넘게 참견하는 게 아니라 서인우가 윤명현에게 당부하는 말이니까.”


명현은 말도 되지 않는 요구를 하고있는 인우를 싸늘하게 응시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릎 위에 올려진 그녀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억지로 참고있는 분노의 표출이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순서를 대며 정확하게 이유를 대라고 하면 지금은 해 줄 수가 없어. 우습게도 나도 헝클어져서 엉망인 상태거든. 하지만 하루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네 생각 때문에 신경이 쓰여 미치는 줄 알았어. 다른 일들을 도저히 집중해서 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다 저녁 회진 때 네 입술에 난 상처를 보게 되었지. 그 다음은 나도 모르겠다. 남 있는 이성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복잡함이 뒤엉켜 있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선생님의 억지를 이해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차가웠다.


“알아.”


인우는 가라앉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명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그녀의 눈은 강한 거부감을 감추지 못해 일렁거렸고 치솟은 분노로 상처 난 입술을 힘주어 깨물고 있었다.


인우는 손을 올려 깨물려 있는 그녀의 입술을 빼주면서 열망 가득한 눈빛으로 명현을 향해 말했다.


“아무 것도 묻지 말고 그냥 지금 그대로 내게로 와. 그래서 내가 왜 이러는지 네가 가르쳐줘.“


그는 명현의 말간 눈을 붙잡으면서 진지하게 요구했다.


“싫어요.”


명현의 대답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좋아, 그러면 내가 가지.”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인우는 결정을 내린 듯 했다.


둘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 났다. 명현은 모든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했다. 냉각된 침묵이 어색하지도 않을 만큼 그녀는 지쳐있었다.


명현은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가 어디로 차를 몰던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더 흔들지만 않는다면 이쯤에서 참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명현은 등받이에 몸을 묻고 차창 밖의 밤 풍경을 눈으로만 담고 있었다.


인우의 차는 한참을 달리더니 ‘향수(鄕愁)’라는 간판이 매달린 아담한 한옥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차에서 먼저 내린 후 조수석 문을 열고 명현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툭 하고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저런 꼿꼿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인우는 그녀의 대단한 의지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내려, 배고파 쓰러질 생각이 아니면.”


인우는 시선을 외면한 채로 묵묵히 앉아 있는 명현의 손목을 잡아채어 차에서 내리게 했다. 그런 다음 억지로 그녀를 이끌어 대문을 넘어 들어갔다.


주인인 듯 남자가 마루 위에서 대문을 들어오고 있는 사람을 쳐다보더니 반가움에 한껏 웃는 얼굴로 뛰다시피 다가와 인우의 손을 덜컥 잡았다.


“야, 인마! 너 언제 왔어. 전화라도 하고 오지 그랬어.”


“너무 늦은 시간이지? 배고픈데….”


남자는 인우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명현의 얼굴과 그에게 잡힌 손을 번갈아 살펴보고는 지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환한 웃음으로 그녀에게 인사말을 했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오늘 해가 서쪽으로 진 게 맞나?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저놈이 손을 잡고 들어올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하하. 저놈 친구 조경숩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경수의 말을 듣고 명현은 잡힌 손을 빼내려고 힘을 줬다.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으로 그녀의 노력이 전해지지 않았는지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명현은 신발을 벗기 위해 계단으로 올라서는 인우의 팔을 붙잡으며 소리 죽여 말을 건네었다.


“놔주세요.”


당당했다. 정중했지만 명령의 말처럼 들릴 정도로 그녀의 목소리는 매끄러웠다. 그리고 물러설 눈빛도 아니었다. 인우는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풀었고, 인우와 명현은 경수의 뒤를 따라 마루를 걷기 시작했다. 시원한 마루의 감촉이 명현의 발 아래로 느껴졌다.


경수는 좁은 마루로 이어진 여러 개의 방들 중 맨 끝 쪽 방문을 열어 그 안으로 둘을 안내하고는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총총히 사라졌다.


둘만 남겨진 방안은 어두운 침묵이 한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명현은 인우의 숨막히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주변을 느끼려고 애를 썼다.


천장이 낮은 방은 답답함이 아닌 아늑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활짝 열려진 창문은 유리가 아닌 한지가 발라져서 대나무 발로 반쯤 가려 놓아 은근히 멋스러웠다.


창밖 정원에는 돌로 막아 둔 자연스러운 작은 연못도 보였고 음식을 만드는 집답게 유난히 많은 항아리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야생화들이 장독대를 에워싸듯이 피어 있었다.


그리고 그 꽃들을 보호하기라도 하려는지 키 작은 석등 안에는 석류 빛 불이 발갛게 밝혀져 그들을 새초롬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마치 방안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녀는 처음 그 자세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인우는 회색의 정장 재킷을 벗어 바닥에 두고 등을 벽에 기대었다. 그러면서 잔잔한 눈동자의 움직임만이 있는 명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의식적으로 그이 눈을 피하며 창밖만 내다보는 명현의 침묵을 그는 인정해 주었다.


오늘은 인우도 자신의 억지스러운 행동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고 더 이상 몰아 부치는 건 그를 위해서도 결코 현명한 방법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구수한 찌개 냄새와 갖가지 반찬들로 금세 밥상이 가득 채워졌다.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게 꾸며져 있다거나 보지도 못한 어려운 음식들이 아니라 일상처럼 소박하고 정갈한 반찬들이었다.


“자, 기쁜 날인데 술이 빠져선 안 되죠. 저 녀석 집에선 아마 오늘 같은 날 나무를 심을 겁니다. 의미를 양으로 표현한다면 숲을 만들 정도로 많이 심을 걸요. 하하. 저희 집에서만 맛보실 수 있는 술이죠. 어머니가 솔잎주 장인 이시거든요.”


어머니에 대한 자랑과 함께 경수는 인우를 제쳐두고 명현에게 술잔을 내밀어 노란 듯 붉은빛을 띠는 술을 가득 채워주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술을 받더니 그 자리에서 고개만 살짝 돌리고는 잔을 비우더니 웃음 띤 얼굴로 정말 맛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말 맛있어요. 향기도 좋구요.”


명현의 칭찬에 눈 꼬리가 접어지면서 웃고 있는 경수의 인상은 영락없이 인심 좋은 음식점 주인의 것이었다.


“넌 운전해야 되니까 마시지 말고. 혹시 성함을 여쭤도 될는지?”


망설이는 표정이 역력하게 경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윤명현입니다.”


“아, 명현씨. …그럼 나이는?”


“27살입니다.”


명현이 군더더기 없이 또렷한 말투로 대답하지 경수는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느낌에 감탄했다.


그녀에게는 흔히 볼 수 없는 단아함과 우아함이 있었다. 잘 정제된 행동들이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어 의식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경수는 눈은 명현에게 둔 채로 팔꿈치를 이용해서 인우의 가슴팍을 쿡 찔렀다. 그러자 묵묵히 식사 중이던 인우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경수를 바라보았다.


경수는 목소리를 낮춘다고 한 것이 명현의 귀에도 또렷이 들렸다.


“이 도둑놈아. 여덟 살이야. 여덟 살.”


친구가 건넨 장난 투의 말에 인우는 피식 웃고는 물 컵으로 손을 뻗었다.


“명현 씨, 식사 맛있게 하시고 요것조것 많이 드시고 천천히 쉬시다 일어나세요. 아셨죠?”


정다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살갑게 대한 경수는 인우를 또 다시 푹 찌르더니 “너도 많이 먹어라. 자식아.”하고는 방을 나갔다.


보여준 정성과 똑같이 음식은 하나같이 그녀의 입맛에 맞았다.


명현은 제대로 된 밥상을 받아본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에도 없었다. 열심히 젓가락을 쓰면서 그녀는 먹는데 집중하려 노력했다.


조용하고 단정한 동작을 반복하면서 명현은 밥공기를 조금씩 비워내고 있었다.


그녀는 특별한 훈련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식사 예절이 무척 뛰어났다.


숟가락에 밥을 어느 정도 올려야 밉지 않은지, 반찬은 어떻게 갈무리해서 자신에게로 가져가야 하는지, 또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고 내리는 차분한 손놀림까지. 그녀의 식사하는 모습은 예쁜 춤사위같이 느껴질 정도로 신기하게 아름다웠다.


인우는 그런 명현을 더욱 더 깊어진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잘 먹는군.”


“비실대지 않으려면요.”


명현은 뾰족한 말을 내비치면서 경수가 두고 간 술병을 들어 말간 액체를 자신의 잔에 붓고는 좀 전처럼 잔을 비워서 내려놓았다.


다시금 조용하게 그녀의 손이 반복을 계속하더니 두 잔, 세 잔, 네 잔…. 인우는 세기를 그만하고 그녀에게서 술병을 빼앗았다.


“그만 마셔. 나중에 힘들어.”


“주세요.”


명현이 다시 팔을 내밀어 술병을 가지려 하자 그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만해, 윤명현.”


“왜 마음대로세요.”


음성은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지극히 조용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단단히 화가 나 있음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명현은 화가 난 눈빛 그대로 인우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의 짙은 눈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건 이미 깊어져 있었다.


이제야 명현은 그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무얼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피하고 싶어하는 게 분명할 것이다. 그는 위험스러웠다. 그리고 강해 보였다. 잘 막을 수 있을지 두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대로는 되지 않을 테니까.


“그만 일어나지.”


마주하고 있던 명현의 표정이 복잡한 생각에 빠진 듯 점점 어둡게 변해가자 인우는 단호하게 그녀의 생각을 잘라버렸다.


앉아있던 그가 긴 다리를 펴고 일어서자 다시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한 당당함이 그에게서 풍겼다. 명현도 지체없이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서 마루 아래로 내려섰다.


두 사람이 방에서 나오는걸 보고는 경수도 그들의 뒤를 따라 마당으로 내려 왔다.


“늦은 시간인데도 밥 줘서 고맙다. 영미 씨에게도 안부 전해주고.”


오래된 친구라 그런지 두 남자는 별다른 인사말을 주고받지는 않았다.


“그래, 자주 좀 와라. 아무리 바쁜 의사 선생님이라도 밥은 먹어야 살 수 있지 않냐? 명현씨, 자주 오세요. 혼자 오시면 제가 맛있는 거 더 드릴게요.”


무덤덤하게 인우와 말을 나누던 경수가 갑자기 뒤쪽에 서 있던 명현을 향해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명현도 경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경수의 배웅을 뒤로하고 인우의 차는 주차장을 천천히 벗어났다.


시내에서 벗어난 곳이어서 그런지 도로가를 밝히는 불빛들은 점점 흩어져 있었고 옆 차선을 지나는 차들의 속도도 빠른 듯이 보였다.


인우는 변함없이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는 명현을 향해 건조한 말투로 물었다. 하루 동안 그 자신도 받아들이기 힘든 비정상적인 행동에 가하는 일종의 제재 같은 것이었다. 더 이상의 감정 개입은 스스로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어디로 갈 거지?”


명현은 그를 외면한 채 지친 목소리로 희미하게 대답했다.


“병원으로 가야 되요.”


인우는 병원을 향해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맛있는 음식과 예민해져 있는 신경 줄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알코올. 차 안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로 인해 차곡차곡 흔들림 없이 쌓여있던 피곤함으로 지쳐 있던 명헌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정말 죽은 듯이 잔다는 게 맞는 말일 거라고 인우는 흘끔흘끔 명현의 자는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병원의 정문을 지나서 경사면을 오른 뒤 지상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멈춘 후에도 인우는 선뜻 잠든 명현을 깨우지 못했다.


한참 동안 그녀를 관찰하듯 바라보던 인우는 명현의 어깨에 자신의 양복을 벗어 덮어주고 문을 열고 나와 주차장을 거닐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올려다 본 병원은 수없이 많은 불을 밝히고 있는 등대처럼 인우의 눈에 비춰졌다.


고통과 절망으로 많은 아픔이 있는 곳이지만 그 속에는 희망도 함께 섞여 있었다. 그 희망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도 의사임을 온전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인우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반복해서 걸었던 곳을 걷고 또 걸었다. 오늘 하루 그를 힘들게 했던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떠올랐다.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인 생각과 행동들이었다. 웃음밖에 나지 않는 어처구니 업는 상황들. 그럼에도 결론은 그 모든 것을 다 감수하고서라도 윤명현을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걸음을 천천히 떼면서 차가 세워져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한 곳을 주시하던 그의 눈썹이 잠시 찌푸려졌다.


어느새 잠에서 깨어났는지 명현이 차 옆에 반듯하게 서서 그가 걷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인우는 거리를 두고 어둠에 묻힐 듯한 그녀를 잠시 동안 지켜보다가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제가 사드렸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명현은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러자 인우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돌려 그를 보게끔 만들었다.


“피한다고 해결될 건 없어. 마주보고 싸워야지. 그리고 나도 공짜로 얻어먹은 밥이야. 그러니 다음에 사도록 해.”


인우는 엄지손가락으로 명현의 눈 밑을 지그시 눌러 쓰다듬어 주고는 차를 타고 떠나 버렸다.


그들 모두에게 혼란스럽고 혼돈스러웠던 긴 하루였다.


***


한 달을 통틀어도 운 좋은 하루 이틀 정도만 빼고는 1년차에겐 아침밥이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은 아침 수술이 없는 날이 있다. 거기에 오늘처럼 전날 당직을 서고 난 다음날이 마침 아침 수술이 없는 날과 맞아떨어지면 시간에 조금은 더 여유가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경우 대부분은 그동안 먹지 못했던 아침밥이란 걸 먹게 된다.


명현도 오늘은 아침 회진이 끝나고 지시 받은 오더를 처리하고 나니 1시간 정도를 그녀만의 시간으로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그녀도 굶주린 속을 달래기 위해 주저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제대로 된 식사로는 얼마만인지.


명현은 기억을 더듬어 일주일 전 <향수>에서 먹었던 저녁 이후로는 처음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따뜻한 국 냄새가 쓰라린 그녀의 위장을 자극했다. 명현은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입안으로 살짝 밀어 넣었다.


구수한 아욱 된장국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명현의 입에서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버렸다.


어이없게도 행복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국물 한 숟가락에 행복이라니. 명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바로 그때 식당에 들른 다른 섹션(파트) 윗년차의 눈에 명현의 모습이 띠고 말았다.


“야아, 요즈음은 1년차가 아침도 먹는구나. 뭐해! 빨랑 따라오지 않고.”


아침부터 자신의 모습을 살필 겨를도 없이 바빴든지 아니면 미처 한 번 쯤은 거울을 봐야 한다는 것을 잊었는지 그의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후줄근한 가운은 말할 것도 없었고 지금 당장 세수라고 시켜주고 싶을 만큼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그는 간 질환 파트의 2년차였다.


아마도 수술이 많은 모양이었다. 수술이 많을 때는 일단 수술방을 두 개 구해 놓고 수술이 거의 끝나갈 때쯤 한쪽을 치프에게 마무리하게 한다. 그리고 스태프는 곧장 준비가 된 다른 방으로 옮겨가 용병으로 불러온 다른 파트 1년차를 데리고 수술을 시작하는 것이다.


명현은 어제 낮에 먹었던 샌드위치 이후 처음 먹는 음식물에 대한 미련을 빨리 끊어야 했다.


잠시 행복했었는데. 명현이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그녀에게 들려 왔다.


“앉아 있어.”


다른 파트 2년차와 이미 일어나서 움직임을 취하려던 명현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을 쳐다보았다.


‘헉! 메스다.’


자신의 뒤를 벽처럼 막고 서 있는 인우를 보고 2년차는 허겁지겁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OP(수술) 테크닉을 가졌다고 NS(신경외과), CS(흉부외과), PS(성형외과) 과장님들 모두가 칭찬했다던 그 장본인이었다.


인우는 2년차의 인사에는 별 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한 동안 그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2년차는 인우의 이유 모를 싸늘한 눈빛에 괜히 움찔거려졌다.


“우리는 아침을 먹으려고 하는데, 넌?”


인우는 들고 있던 식판을 명현이 앉아있던 식탁에 내려놓으며 2년차를 여유있게 노려보았다.


“네? 아, 저는 조금 후에 수술이 있어서요.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2년차는 볼일이 없었던 사람처럼 냉큼 돌아서 식당 문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2년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명현이 쟁반을 정리하면서 움직이려하자 인우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앉아.”


그는 자리에 앉으면서 그 곳을 벗어나려고 하는 명현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문득 명현의 눈에 앉아 있는 인우의 정수리가 들어왔다. 깨끗하게 다듬어진 까만 머릿결이 가지런하게 넘겨져 있었다. 보기 좋은 머리 모양이었다.


“너 아니라도 수술 들어갈 1년차 많아. 그만 기다리게 하고 좀 앉지 그래.”


여전히 명현이 앉을 생각이 없는 거 같아 그는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명현도 다시 조용히 그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둘은 한동안 말없이 아침을 먹었다.


조금은 냉정해지길 바라며 인우는 일주일 동안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었다.


회진을 돌 때마다 스치는 그녀의 향기와 목소리의 여운을 담담하게 느끼려고 노력했었다. 게다가 수술 마스크 위로 고스란히 드러난 그녀의 말간 눈동자 또한 무심하게 여기려고 애를 써보았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런 모든 노력은 끝내 그녀를 향한 갈증만 더해줬을 뿐이었다.


“왜 그렇게 먹어?”


인우는 밥과 반찬들은 전혀 손도 대지 않은 채 국그릇의 국물만을 떠먹고 있는 명현을 나무라듯 응시했다.


그런 인우의 시선을 느꼈는지 명현은 그나마 먹고 있던 국물에서조차 숟가락을 거둬버렸다. 그리고는 또렷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오늘 아침은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더 먹도록 해.”


자상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강한 말투였다. 인우는 마치 자신이 있어 명현이 밥을 먹지 않는 것처럼 생각했는지 간단한 요구만을 남긴 채 거침없이 일어나 식당을 빠져나갔다.


명현은 그가 사라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워진 앞자리가 썰렁했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마냥 불편하고 긴장되기만 했었는데 막상 빈자리를 보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불편하다고 생각하던 것이 더 편안해지지도 않았고 마음이 그다지 가벼워진 것 같지도 않았다.


순간 명현은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아냐, 윤명현. 그는 위험해. 그것도 아주 많이.’


그날 이후 명현은 매일매일 살얼음을 딛고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걱정하고 염려했던 구체적인 일들은 생기지 않았지만 그의 다가옴이 멈춘 것 같지는 않았다. 언뜻 마주치게 되는 그의 눈빛도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피하지마.’


# 3장


그날 저녁. 오후 오프를 맞은 명현이 막 의국을 나서려는데 중환자실에서 콜이 왔다. 위급한 콜이라 잠시의 틈도 없이 명현은 다시 옷을 갈아입자마자 중환자실로 뛰어갔다.


수술 후 장기에서 갑작스런 출혈이 일어난 것이었다.


명현은 수액을 투여할 혈관 루트를 재빨리 하나 더 확보해 놓은 다음 수혈 준비를 부탁했다. 수혈을 시작하고 바이탈 사인(혈압, 맥박, 호흡수)을 10분 간격으로 체크하고 소변양도 30분 간격으로 살펴봐야 했다.


초저녁에 시작되었던 출혈이 자정 무렵에서야 조금씩 양이 줄면서 멈출 기미를 보였다. 완전히 출혈이 멈추고 나서야 명현은 치프인 병훈에게 환자의 상태를 보고 한 다음 중환자실을 나설 수 있었다.


비틀거리지는 않았지만 명현은 기운이 다 빠진 사람처럼 걸음을 끌고 있었다. 좁은 복도를 빠져 나오자 중환자실 환자들의 보호자들로 붐비던 대기실이 휑하니 낯설게 그녀를 맞았다. 명현은 높은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새벽 12시 40분.


당연히 고요해야 될 시간이었다. 그들도 쉬어야 하니까.


명현은 의국과 그녀의 아파트를 두고 갈등했다. 그리고 아파트까지 가는 시간이 아깝긴 했지만 명현은 자신의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6층에 있는 의국에 들러보니 소영이 신발을 벗지도 못한 채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명현은 소영의 신발을 잠이 깰까 조심스럽게 벗겨주고는 자신의 가운도 벗었다.


잔잔한 무늬가 프린트 된 반팔 블라우스 사이로 초여름의 밤공기가 미풍처럼 들어왔다.


명현은 병원 내 택시 승강장을 그냥 지나쳐서 병원의 입구까지 이어지는 완만한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다른 세상임을 알려주는 불빛들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생동감으로 살아 꿈틀거리는 세계와 삶에 대한 겸허한 시간들이 존재하는 세계.”


명현은 그 불빛을 바라보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막 명현이 병원의 시작과 끝을 표시하는 커다란 문을 통과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 옆으로 차 한 대가 스르르 미끄러지듯이 다가왔다.


“윤명현.”


무시할 수 없는 굵은 음성이 명현의 걸음을 우뚝 멈추게 했다. 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명현의 시선은 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인우는 새로운 방법으로 시행되고 있는 위암 수술에 관한 학회 준비를 시작하면서 며칠 째 병원을 나서는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병훈이 위급 환자의 상태를 보고하는 바람에 자정을 훌쩍 넘겨버린 것이었다.


수요일과 금요일 오전 오후의 외래 진료를 제외하고는 매일 여섯 시간 이상을 수술실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에 저녁 회진을 끝낸 후부터는 피로감이 급속도로 몰려들었다. 빨리 가서 쉬어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병원의 로고가 새겨진 정문을 막 통과하면서 인우는 서서히 차의 속도를 높였다. 그때 그의 눈에 명현이 들어 왔다. 순간 인우는 반짝거리며 빛을 내고있는 차안의 시계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시계는 새벽 1시를 나타내고 있었다.


핸들 위에 올려진 인우의 손에 살며시 힘이 주어졌다. 열려진 창문으로 명현의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만이 보였다.


“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꼼짝도 않고 있던 그녀가 뚜벅뚜벅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지마. 윤명현.’


인우는 빠른 동작으로 기어를 움직여 차의 움직임을 멈추고는 차에서 내려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명현을 성큼 따라 잡았다. 그리고는 그의 손아귀에 들어 온 그녀의 손목을 힘껏 죄면서 차를 향해 뒤돌아 걸었다.


“아파요.”


명현의 조용한 항의였다. 거칠게 끌어당기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녀의 손목을 아프도록 움켜쥐었다.


“타.”


그는 손목을 놓지 않은 채 차 문을 열고는 명현이 타기를 기다렸다.


“늦은 시간이야. 데려야 주려는 것뿐이니까 걱정 말고 타.”


“그러실 필요 없으세요. 혼자 갈 수….”


인우는 그녀의 손목을 차 쪽으로 확 끌어당겨 차와 그의 뻗은 팔 사이에 명현을 가둬버렸다.


그의 완력에 명현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시원하게 와 닿던 밤 공기가 가까이 다가 선 그의 체온으로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내가 너 혼자 못 갈까봐 그러는 줄 알아? 늦은 시간이라는 말 무슨 뜻인 줄 몰라?”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또 다그치고 말았다. 인우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안타까운 눈길을 떨어뜨렸다.


“미안하다.”


그에게 잡혀있던 명현의 손목이 풀어져 내렸다. 명현은 그의 눈가에 묻은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미안하다면 그만둬요. 난 당신과 함께 할 생각이 없어요.’


명현은 그와 얽혀 있던 시선을 차안으로 몸을 밀어 넣으면서 외면해 버렸다.


많은 차들로 붐비는 도로는 새벽이라는 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다. 넉넉하게 그려진 차선들 위로 달려나가는 차들 사이로 인우는 여유롭게 차를 몰아갔다.


“다음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셔야 돼요.”


긴 침묵을 깨트리며 명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깎아 놓은 듯이 준수한 그의 모습이 그녀가 앉아있는 쪽 차 유리창에 그대로 미쳤다. 그는 차에 오른 후 단단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아무 말도 없었다.


“그 다음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생각에 빠져 있던 명현은 무뚝뚝한 그의 음성에 천천히 얼굴을 돌려싿.


“오른쪽 2단지 관리실 앞에서 세워주세요.”


자신의 아파트가 보이자 명현은 단지 진입로에 있는 관리실에서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그 다음은.”


하지만 그녀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어느새 그는 관리실을 통과해 버렸다.


“그냥 여기에서 내릴게요.”


잠시 머뭇거리던 명현이 잘라서 말하자 인우가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답지 않아. 네가 어디에 사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 정도는 알고 있을텐데.”


그의 말에 명현은 체념한 듯 조용히 대답했다.


“207동 이예요.”


그는 정면에 보이는 205동을 지나서 207동 앞에서 차를 멈추었다.


“내려.”


명현은 곧장 내리지 못하고 그를 망설이는 듯 바라보았다.


인우는 정면을 주시한 채 경직되어 있었다. 명현은 갑자기 그를 혼자 두고 내려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한계를 넘어 보이는 그의 차가운 모습이 안타까웠다.


‘나 때문인가요? 만일 그렇다면 그러지 말아요.’


명현이 내리지 않고 말도 없자 인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계속 그러고 앉아 있을 건가? 다음은 내 마음대로 하라는 뜻 같은데.”


옆모습만을 보여주는 그는 점점 더 어두워진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냥 그 감정 버려버리면 안 되나요?’


명현은 차마 그 말은 덧붙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재빨리 차에서 내려 아파트 안으로 들어 가버렸다.


인우는 고집스레 앞만 보고 있다 그제야 고개를 돌려 가운데 통로로 사라지는 명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널 내 곁에 둘 수 있지?’


***


6F 병동 간호사실(스테이션).


“선생님 그날 데이트 잘 하셨어요?”


명현은 손으로는 간호사실 컴퓨터에 오더를 입력하면서 시선은 이상한 질문을 해대는 성희에게 향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무슨 뜻이냐는 듯 어깨만 가볍게 으쓱 해보였다.


명현은 성희의 물음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 같아 하던 일을 계속하며 대충 넘겨버렸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어서인지 명현의 얼굴 앞으로 짙은 화장으로 갑갑해 보이는 성희의 얼굴이 갑자기 가깝게 다가왔다.


“얼마 전 밤에 예쁘게 하고선 빚 갚으러 가신다고 그러셨잖아요.”


궁금함으로 그 날 이후 꼭 묻고 싶었었는데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러다 2주 정도가 지난 지금 불현듯 그 궁금함을 묻고 싶어졌다.


성희는 기억을 일깨워 주려는 듯 명현이 했던 말을 단어 선택까지 정확하게 짚어 주었다.


‘아, 그날. 그 엄청난 날을 생각나게 하는 또 한 명의 증인이 있었구나.’


명현은 마음으로는 언급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차분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관심을 둔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는 간호사에게 명현은 가만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때였다. 몇 날 밤을 새도 통통한 볼살이 줄지를 않는다고 투덜대는 소영이 간호사실 모서리를 돌아 나오다 둘의 대화를 들었는지 눈을 반짝이며 끼어 들었다.


“언제? 누가?”


“지난주에 윤 선생님이 오프도 아니신데 밤에 살짝 나갔다 오셨거든요.”


무슨 대단한 얘깃거리라도 되는 양 소영과 간호사는 눈을 부딪친 채 진지하게 수군거렸다.


“얘가? 오프도 아닌데 월담을? 허어, 이거 신문에 날 일이네. 내 일찍이 근 8년의 시간 동안 윤명현이 남자로 불리는 인간들을 만나는 꼴은 보지를 못했었는데. 그런 불후의 사건이 있었단 말이지.”


호기심에서 시작된 소영의 놀람은 점차 친구에게 비밀을 먼저 알리지 않은 명현에 대한 괘씸함으로 변해갔다.


작은 키의 소영이 170cm나 되는 명현의 얼굴에 코를 바싹 붙이기 위해서 까치발을 디디면서 눈을 가늘게 째렸다.


“윤명현, 사실대로 말해 봐. 정말 데이트했어? 남자랑?”


“아니.”


진짜라면 감정의 변화가 표정에서 보일 법도 한데 너무도 차분해서 별일이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는 목소리였다. 명현은 소영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고는 멈췄던 자신의 일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럼 월담은?”


뭔가가 더 있다고 생각했는지 소영의 물음은 끈질겼다.


소영이 아는 명현은 바깥보다 병원에 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 친구였다. 기껏 오프 날이 되어도 그녀의 아파트에서 잠을 자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오프도 아닌 밤에 외출을 했었다니. 소영은 그게 더 놀라웠다.


“급한 일이 있었어.”


담당 환자들의 검사 결과 정리에 집중해 있는 명현의 반응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무슨 급한 일?”


“…….”


명현이 평소 거짓말이나 둘러대는 말을 손톱 끝만큼도 못한다는 걸 알고 있는 소영으로서는 친구의 순간적인 침묵의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했다.


“신문에 날 일이 생겼구만. <세진병원 윤 비(妃), 사랑 찾아 야밤에 월담!>”


비장함이 묻은 소영의 너스레에 간호사실에 앉아있던 간호사들 모두는 맞다며 몇몇은 박수까지 치며 동조를 했다. 그러나 그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에 오히려 명현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졌다.


“윤 비(妃)? 그게 무슨 말이야?”


목소리를 끄집어내기조차 힘겨웠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자신이 들어야 된다는 게 명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네 말투며 걸음걸이 거기에 눈빛까지 고상함과 도도함의 최상급 결정판이지. 우리는 그렇게 흉내도 못내. 정말 몰랐어? 소문은 당사자가 제일 어둡다더니 인턴 때부터 온 병원이 아는 걸 본인만 몰랐다?”


명현의 표정이 급속도로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소영은 혀를 차며 딱하다는 듯 설명을 해주었다.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니?”


“멋지지? 다들 갖고 싶어하는 별칭이기도 하지만 엄두가 안 나는 말이기도 하지…. 명현아?”


“…….”


명현의 침묵에 소영의 웃음이 멈춰버렸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은 명현의 미간이 표시가 날 정도로 그어지자 소영은 당황해 했다.


“병실 올라가야 할 일이 있어. 나중에 보자.”


명현은 저도 모르게 싸늘하게 말했다.


“응? 어, 그래.”


소영은 왜 그러느냐고 붙잡으며 물어 볼 수 없었다. 명현은 그렇게 할 틈도 주지 않고 무섭게 등을 돌려 버렸다.


어색해하는 그들을 배려할 수 없을 만큼 명현은 화가 났다. 그것은 타인을 향한 성냄이 아니었다.


-어깨가 더 펴져야 허리가 반듯해지지!


왜 그리 팔을 크게 휘젓고 다니누.


신발을 끌면 안 된다는 거 모르니?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걸어라.


본때 없이 말을 그렇게 빨리 하면 쓰나!


앉고 서고 걸을 때도 손 모양을 항상 정돈하도록 해라….


그런 식으로 한 순간의 틈도 놓치지 않고 어린 자신을 다그치던 할머니의 교육 효과가 이렇게 탁월하리라고는 명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할머니의 요구대로 그것들은 어느새 그녀의 몸 속으로 스며들어 버렸는지 자신은 그로 인한 어색함도 아니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조차 몰랐었다.


그렇게 벗어버리려 했던 굴레였는데 그게 자신도 느끼지 못 할 정도로 편안함으로 감싸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좋으시겠어요, 할머니. 손녀가 그렇게 멋진 이름을 갖게 되었으니….’


이렇게 저주스러운 기분이 들 땐 친구들과 남자 동기들은 욕이라는 걸 잘도 하는 것 같았는데 명현으로서는 그것도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위층은 병실로 가기 위해 비상구로 통하는 무거운 문을 열면서 명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최악의 말이 무엇인지 머리를 짜내었다.


“나쁜 놈! 음….”


명현은 답답했다. 어떤 욕이라도 좋으니 시원하게 내뿜을 수 있으면 막힌 곳이 조금이나마 뚫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정확하게 ‘나쁜 놈’에서 그녀의 욕은 멈춰 버렸다. 다들 그렇게 나쁜 말들을 어떻게들 알고 잘들 하는지 지금의 그녀로서는 솔직히 그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누가 나쁜 놈이야?”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명현의 눈이 저절로 감겨 버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오로지 최고의 나쁜 말을 찾는 데에만 집중해 있던 명현은 비상구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들려 온 사람의 목소리에 놀라서 덜컥 하고 떨어진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그였다.


폭풍같이 거대한 힘이 느껴지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고요한 정적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깊은 상념에 잠긴 눈빛으로 한낮의 햇살을 등으로 막아내었다. 바닥으로 이어진 짙은


 회색의 그림자는 그가 빠져 있는 생각의 꼬리만큼 길어 보였다.


인우는 팔짱을 끼고 창가 난간에 기대 선 채로 명현을 잔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명현은 창을 통해 쏟아지는 여름의 강한 날빛에 눈이 부셨다.


아마도 빛으로 인해 얼굴에 진 그림자 대문일 것이다. 순간 그의 모습이 쓸쓸함으로 비춰졌던 것은.


“아니에요.”


들었나 보다.


명현은 마땅한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아 무안했다. 그녀는 손끝으로 이마를 슬쩍 문지르며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나 인우는 당황해하는 그녀의 표정이 흥미로웠다.


“오늘은 누가 나쁜 놈이지?”


그가 이제껏 지켜본 명현은 기계적이고 차가워 보일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러니 있는 힘껏 문을 밀치고 들어오면서 내뱉은 말도 새로웠지만 무엇보다 그녀에게 나타난 감정의 표현이 인우는 더 마음에 들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언제나 망설임 없던 그녀가 주저하고 있었다. 인우는 난간에 비스듬하게 서 있던 몸을 바로 세우면서 더욱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내가 나쁜 놈이 되어봐서 그런지 신경이 쓰여. 뭐가 문제지?”


그의 자조 섞인 물음에 명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인우는 기어이 그녀가 이유를 설명해야 되게끔 만들었다. 명현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숨을 한 번 들이키고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욕을 하고 싶었는데 아는 게 없어요. 나쁜놈 밖에는.”


명현의 신기한 고백에 인우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그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반면 그녀는 진지하고 심각해 보였다.


“그럼 네가 알고 있는 욕의 전부가 나쁜 놈이라는 건가?”


“더 이상 떠오르는 게 없는 걸 보면 그런 거 같아요.”


안타까워하고 있는 명현의 표정에 인우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아는 욕이 없어 속상해 하다니. 게다가 기껏 알고 있다는 게 고작….


인우는 갑자기 그녀의 문제를 같이 해결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좀 더 명현을 부추겨 보기로 했다.


“그 정도로는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없지 않나? 많이 부족할 텐데.”


“아는 게 없으니 어쩔 수 없어요.”


명현은 생각을 더 한다 해도 나아질 건 없다는 듯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설마. 포기하려는 건 아니겠지? 배워. 좋은 선생님 소개시켜줄 테니까.”


마침내 명현은 그의 눈이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망신스러움에 그녀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에게 그런 얘기를 해 버렸는지 명현은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망신살 뻗쳤구나, 윤명현. 왜 갑자기 욕 타령이니. 그냥 너답게 살지. 윤명현답게.’


인우가 말릴 새도 없이 명현은 재빠르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인우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린 채 심각하게 고민하던 명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떤 대단한 일이 그녀의 표정을 변화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우는 뜻밖에 보게 된 그녀 모습이 오랜 기다림 끝에 주어진 선물처럼 소중했다.


***


10F 오후 3시. 일반외과 수술실.


인우의 집도하에 치프인 병훈과 2년차 승수, 그리고 1년차 명현이 81세 된 남자 환자를 수술하고 있었다.


복부를 절개한 환자의 내장 사이로 암세포가 생긴 위를 3분의 2 가량 잘라내어야 하는 큰 수술이었다.


환자가 워낙 고령이고 암 세포가 림프절까지 전이가 된 상태라 수술방 분위기는 자못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피아노 협주곡이 몇 시간째 수술방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쯤, 힘든 분위기를 바꿔 놓는 인우의 지시가 떨어졌다.


“김병훈. 너 윤명현 과외 좀 해 줘라.”


수술의 고비인 림프절까지 절개를 마친 후라 인우는 고개를 들어 병훈을 잠시 쳐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네? 과외라뇨?”


인우의 맞은편에서 수술 과정 모두를 꼼꼼하게 보느라 집중해 있던 병훈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인우의 물음을 한 번 더 되물었다.


“윤명현에게 욕 좀 가르쳐줘. 레슨비는 내가 주마.”


전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는 듯 인우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농담인 듯한 내용을 진담같이 하고 있는 인우를 향해 병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욕하고 싶은 상대가 나타났나 보다. 잘 가르쳐 줘라. 테스트 볼 테니까. 점수 낮으면 레슨비는 없다.”


봉합 전 흉부 세척이 시작되었다. 인우는 숙였던 허리를 반듯하게 하면서 병훈에게 나머지 마무리를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선생님. 저 이제 욕 안 하는데요? 그거 끊은 지 꽤 됐습니다. 애들한테 물어보세요. 저 의사 그만두고 아나운서 시험 볼 수 있을 정도로 언어순화 시켰습니다.”


병훈은 정해진 순서대로 가슴을 한 땀 한 땀 봉합하면서 언어 순화를 이루어 낸 자신을 대견해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명현이 뒤늦게야 난감한 표정으로 하소연했다.


“치프 선생님, 안 그러셔도 돼요. 선생님이 장난치시는 거 같아요.”


“그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세상에 욕을 배우려고 선생님이 필요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냐? 또 그건 배워서 내 것이 되는 분야가 아니거든? 몸소 체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심오한 분야란 말이지.”


병훈은 욕에 대한 개인적인 철학으로 그녀를 달래면서 인우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마스크를 내리면서 수술대를 벗어나던 인우는 자신의 바로 옆에서 곤란해하고 있는 명현을 가만히 쳐다보고는 조용히 다음 말을 내뱉었다.


“김병훈, 자기가 알고 있는 최악의 말이 ‘나쁜 놈’ 정도라면 선생님의 도움이 있어야겠지?”


사실을 확인하듯 병훈은 눈을 큰 동작으로 꿈뻑거렸다. 그리고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네? 그럴리가요. 명현아, 정말이냐? 너 생각보다 더 심각하구나. 나쁜 놈은 우리가 쓰고 있는 바른 말 고운 말이지 욕이 아니야. 너 이때까지 세상을 어떻게 산 거야? 속 터져서. 하지만 이젠 걱정마라. 내가 너의 그 답답함을 확 날려보낼 수 있도록 나의 현란한 언어들을 모두 전수해 주마.”


비장한 대사에 큭큭대는 웃음소리가 간호사들과 2년차 승수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명현에게 다양한 욕을 가르쳐야 하는 과외 선생으로서 임용된 병훈은 대단한 각오로 여러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그넫, 왜 선생님이 레슨비를 주세요? 배우는 저 녀석이 내야지.”


문득 떠오른 병훈의 궁금함이 문을 나서려는 인우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했다.


“널 추천한 게 나니까.”


인우는 그들에게 등을 돌린 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대꾸하며 수술방 입구 쪽으로 걸음을 향했다.


그러는 사이 그 힘겨웠던 수술도 무사히 끝나고 있었다. 승수는 가슴에서 복부까지 이어진 환자의 개복 부위를 봉합하기 시작했고 치프 병훈은 그런 승수를 지켜봐 주고 있었다.


세진병원 일반외과 위암, 위장 질환 파트는 국내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인우의 위암 수술 집도 능력은 위암 수술의 권위자로 알려진 과장 원규의 조언도 필요 없을 만큼 섬세해 한 달 동안 20건 이상의 수술 스케줄이 잡혀 있는 상태였다.


명현은 유연하게 수술방을 빠져나가는 인우의 당당한 뒷모습을 보며 과연 그도 두려워하며 망설이는 존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


밤 9시. 세진병원 로비.


“얘, 이것도 마셔. 어휴, 이 얼굴 좀 봐. 엉망이네.”


중년의 여자가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에게 몇 종류의 파우치 팩을 입으로 가져다주었다.


“은정아, 세 번씩 거르지 말고 꼭 챙겨먹어. 6월이라 옷들도 여름옷으로 바꿔왔다.”


“엄마, 병원 안은 그렇게 덥지 않아. 긴 팔 몇 개 넣지 그랬어.”


은정은 가방 안을 뒤적이며 옷들을 확인했다.


하루걸러 당직을 서야 하는 퐁당퐁당이 생활인 인턴들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스케줄 때문에 여의치가 않을 때에는 이렇게 빨래를 수거하고 새 옷들을 배달하기 위해서 가족 중 누군가가 다녀가게 된다.


“넣어 뒀어. 어떻게 딸 만나러 병원으로 면회 다니게 생겼네. 의사선생님 되는 게 그렇게 쉽니? 우리 딸 장해.”


로비 의자에 나란히 앉은 딸의 머리를 은정 모는 연신 쓸어 넘겨주며 기특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 딸이 의대 시절부터 봐온 시험을 세어 본다면 아마 수백번은 족히 넘을 것이다. 낙천적인 성격 탓에 힘든 얼굴 한 번 없더니 그 어렵다는 세진병원 인턴시험도 거뜬히 통과해 부모로서 얼마나 대견한지 몰랐다.


“엄만, 인턴이 무슨 의사 선생님이야? 그냥 의사지. 아니다. 여기에서는 의사가 뭐야? 인간 취급도 못 받는 게 인턴이야. 내가 엄마 마음 상할까 봐 더 깊은 건 얘기 못하겠는데 어쨌든 그래. 어서 가, 나 들어가야 돼.”


은정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목소리를 낮추며 삐죽거렸다.


“전화라도 자주 좀 해.”


가방을 들고 손을 흔들면서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옮기는 딸을 보며 은정 모(母)는 뿌듯하면서도 가슴이 짠해져왔다.


모친을 보낸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은정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기가 막혀 했다.


그 사람의 원래 머리 스타일을 전혀 알 수 없게 만드는 하나로 질끈 묶어버린 머리하며, 병원 내 사람들은 다 똑같지만 24시간 갇혀 지내는 그녀의 얼굴색은 거의 복사 용지 수준으로 탈색되어 있었다.


눈 밑은 그림자가 져 피곤함과 푸석거림을 강조하는 듯했고, 촉촉했던 입술은 수분 부족으로 메말라 있었다. 은정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면서 탄식을 내뱉었다.


“에구, 이건 25살의 피 끓는 청춘의 얼굴이 아냐. 요즘은 환갑 넘은 할머니들 얼굴도 나보다 2578배는 낫겠다. 불쌍한 은정이….”


그러다 한순간 쳐다보고 있던 거울 속으로 사람의 모습이 얼핏 스치는 것을 발견한 바람에 그제야 은정은 엘리베이터 안에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휴, 쪽팔려. 언제부터 저기 있었던거야. 탈 때부터 있었나? 그럼 다 봤나? 다 봤겠지? 아, 짜증나라. 못살아, 내가.’


은정은 인상을 쓰며 그가 있는 족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고개를 살짝 돌려 버렸다.


엘리베이터 정면의 거울과 남자가 서 있는 쪽의 시선을 가렸다 해도 반짝거리는 엘리베이터 벽은 그의 모습을 충분히 비춰주고 있었다.


은정은 언뜻 본 남자의 인상착의가 눈길을 끌 만할 정도인 것 같아 그의 모습을 엘리베이터 벽을 통하여 만족스럽게 흘끔흘끔 거렸다.


요즘은 다들 키가 커졌다 해도 남자는 보통보다 훨씬 큰 키였다. 짙은 감색 반팔 티셔츠에 연회색 면바지를 입은 편안한 차림이었지만 그는 타인의 시선을 모을 정도로 깔끔하고 귀티가 흘러보였다.


‘자식, 인물 한 번 훤하네.’


도착 벨이 땡하고 울리자 뒤통수가 뜨거웠던 은정은 잽싸게 엘리베이터에서 벗어났다. 가능한 한 엘리베이터에서 빨리 멀어지기 위하여 그녀는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그러나 그런 은정의 뒤를 따라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노력을 허무하게 만들었다.


“일반외과 병동이 어느 쪽입니까?”


‘뭐야, 여기에서 내린 거야? 얼씨구 목소리까지 좋다 이거지.’


남자의 목소리까지 감정을 끝낸 은정은 뒤돌아서서 자신을 따라 오라는 말과 함께 병동 간호사실로 그를 안내해주었다.


‘누가 입원했나 보지? 근데 이 사람아, 병문안은 좀 더 이른 시간에 다니시게.’


“여기예요. 몇 호실 찾아 오셨어요?”


은정은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 비어있는 간호사실을 살피면서 무뚝뚝하게 물었다.


“병문안이 아니고 일반외과 윤명현 씨를 만나러 왔는데요.”


남자는 은정을 내려다보면서 정중하게 말을 꺼내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은정의 놀란 눈이 남자를 향했다.


“윤명현 선생님을요? 잠깐만요.”


은정은 간호사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누군가를 찾는 듯하더니, 복도 끝에서 혈압기를 든 통에 들고 다가오는 간호사 성희를 발견하고는 달려가 팔을 잡아당겼다.


“김 간호사님, 윤 선생님 어디계세요?”


성희가 살포시 웃더니 은정더러 잘 알아들으라는 듯 속삭였다.


“인턴 선생님이 모르시는데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아, 엄마가 오셔서 30분쯤 자리 비웠거든요.”


은정이 혀를 쏙 내밀며 재빨리 이유를 둘러댔다.


“의국방에서 회의 중이라 들었는데요. 왜 그러세요?”


은정이 눈짓으로 스테이션 옆에 길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키자 성희는 자리를 옮겨서 상냥하게 회의 중임을 알렸다. 그리고 모서리 쪽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곧 끝날 것 같다는 말도 함께 전했다.


남자가 의자가 있는 쪽으로 사라지자 성희는 다급하게 은정을 붙잡고 궁금한 듯 물었다.


“누구예요? 윤 선생님 애인?”


“글쎄요. 인턴인 제가 아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은정은 조금 전 성희의 대꾸를 그대로 흉내 내며 새침하게 대답을 했다. 그러자 성희는 무안함에 그저 피식 웃어 버렸고 은정도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금방 기분을 풀어 버렸다.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의기투합을 해버리는 또래 친구들처럼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공통의 관심사를 얘기했다.


“근데 스타일 죽이죠? 딱 내 타입인데. 이런 네모 건물 속에서 24시간 막노동을 하고 있는 처지니 기회가 없네.”


모서리 쪽을 흘깃 쳐다보며 은정이 낮게 한숨짓자 성희도 목을 쭉 빼내어 남자를 훔쳐보았다.


“어머, 윤 선생님 저번에 데이트 나갔다고 소문 쫙 났더니 저 사람인가 봐요. 웬일이래? 정말 윤 비가 연애를 하긴 하나 보네.”


성희의 말에 은정도 맞장구를 쳤다.


“설마 했는데 정말인가 보다. 명현 언니 학교 때부터 남자들한테 요만큼의 여지도 없었는데 남자가 병원엘 다 찾아오고.”


같은 학교 한 해 선배인 명현은 눈에 띄는 외모보다도 남자들을 일정 경계 안으로는 절대 들여놓지 않는 단호함으로 더 유명했다. 은정이 알기로도 명현은 그 흔한 소개팅 한 번 허락한 적이 없었다. 그런 명현에게 남자라니.


은정은 믿기지 않는지 계속 남자 쪽을 쳐다보게 되었고 성희는 그런 은정에게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인턴 선생님, 진짜 잘생겼다 그죠? 솔직히 윤 선생님도 외모라면 빠지지는 않죠. 성격이 좀 차가워서 그렇지.”


아니라는 듯 은정은 고개를 두어 번 옆으로 살짝 저으며 성희의 말을 반박했다.


“명현 언니 그렇게 안 차가운데? 자세히 알고 보면 마음도 약하고 얼마나 부드러운데요. 첫 인상이 조금 차갑긴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속을 잘 모를 때 이야기고.”


간호사실의 여자 둘은 명현의 차가워 보이는 인상에 관해 서로 다른 느낌을 열심히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잠시 후 저쪽 복도 끝에서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울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둘은 수다를 떨었다. 아마도 누가 급히 간호사실 쪽으로 달려오면서 은정의 이름을 크게 부르지 않았다면 금방 끝이 날 얘깃거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야, 김은정. 너 일루 안 와? 장성택씨 채혈하고 시간 맞춰 드레싱 잊어 먹지 말랬지. 너 제때 했어. 안 했어. 응? 너 때문에 치프 선생님한테 내가 얼마나 깨진 줄 알아? 들은 욕이 일 년치는 될 거다. 너 오늘 딱 걸렸어!”


갑자기 나타난 2년차 승수는 한 대라도 때리기라도 할 듯이 달려들었다. 은정은 어쩔 수 없이 한 대 맞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승수의 손을 누군가가 잡아챘다.


“말로 하십시오.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건 좋지 않은 버릇입니다.”


명현을 찾아온 그 남자였다. 허공에서 낚아 채인 승수의 손목이 번쩍 위로 들려져 있었다. 들려진 손을 내리기 위해서 승수는 힘든 모습으로 끙끙거렸고 남자는 승수의 손을 쉽게 놓아주니 않았다.


“누구세요? 잘 모르시나 본데요, 얘는 여자가 아니라 인턴이거든요, 인턴!”


화가 난 승수는 이를 물면서 으르릉거리는 소리를 내고는 남자에게 잡힌 손을 어렵게 쳐내었다. 그러더니 은정을 무섭게 쳐다보았다.


“너! 김은정. 따라와.”


승수는 커다란 덩치를 소리가 나도록 홱 돌려 저만치 먼저 걸어 가버렸다. 승수가 그렇게 가버리자 은정은 남자와 눈을 맞추며 갑작스러운 사태에 불만스러워 했다.


“웬 참견이세요? 머리통 한 대 맞으면 끝날 일을 왜 한 시간짜리 잔소리로 만들어 놨냐구요.”


남자는 볼멘소리를 해대고 승수의 뒤를 따라가 버린 은정이 기가 막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명현의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웬일이니?”


명현의 뒤쪽으로는 세 명의 남자가 더 있었고 모두들 차트와 필름들을 잔뜩 들고들 있었다.


“어, 메시지 남겼는데 못 들었어?”


명현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이 미묘하게 떨렸다.


“미안, 회의 중이라 체크를 못했어.”


“시간 있어?”


“치프 선생님, 중환자실에는 30분쯤 후에 제가 갈게요.”


명현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들으라는 듯 크게 말하고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먼저 움직였다. 그러자 남자도 그녀의 뒤를 성큼성큼 따라가더니 둘은 곧 6층 일반외과 병동 쪽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남겨진 치프와 3년차 재환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성희를 채근했다.


“누구야? 명현이 애인?”


병훈이 스테이션에 팔꿈치를 대고 안쪽으로 몸을 쑥 집어넣은 다음 비밀 이야기인 듯 속삭였다.


“그런가 본데요. 아까부터 기다렸어요. 근데 윤 선생님은 별로 반가운 얼굴 같지가 않네요.”


성희는 그들이 사라진 엘리베이터를 슬쩍 쳐다보고는 의아하게 대답했다.


“어허, 저놈이 욕을 먹을 그놈인가 보네. 멀쩡한 허우대가 아깝다. 나랑 바꿨으면 딱 좋겠구만. 욕을 먼덕 어쩌든 그 잘 빠진 몸은 솔직히 좀 부럽다.”


이제 서른인 병훈이 벌써부터 나온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씁쓸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운동 하셔야겠다.”


성희가 눈으로 병훈의 배를 쏘아보며 한 마디로 놀려대자 병훈은 바쁜 병원 생활을 들먹였다.


“그러고 싶어도 논문이다 뭐다해서 도대체 시간이라는 게 나질 않으니. 어떻게 해.”


“그러면 서인우 선생님은 시간이 남아도시나 봐요. 몸매 예술인 게 남는 시간 탓이라면 요즈음 학회 준비 때문에 야근도 하시던데. 진짜 시간이 넘쳐나시나 봐요.”


대꾸할 말이 없자 병훈이 손을 들며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오케이, 거기까지. 이 몸은 논문 때문에 바빠서 이만.”


***


병원의 1층의 로비는 낮 동안의 그 소란스러움을 어디론가 감춰버리고 지금은 침묵같은 정적과 넓은 공간적인 의미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수많은 의자들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에게 명현은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내밀면서 물었다.


“언제 왔니?”


“커피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별로 좋아하지도 않잖아.”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뒷모습은 서로 대칭형처럼 닮아 있었다. 굽어짐 없는 어깨선이며 꼿꼿한 자세가 같은 틀로 찍어 놓은 듯 똑같았다.


“기일 때문에 왔니?”


정해져 있지 않은 곳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던 명현이 먼저 무심한 목소리로 또렷하게 물었다.


“내일이야, 알고 있지? 알고 있지? 이번엔 꼭 왔으면 좋겠다. 오래 걸리지도 않잖아. 잠시면 끝날텐데.”


남자가 명현에게 전한 것은 그렇게 해주기를 원하는 부탁과 바람이 아니었다. 그건 안타까움이었다.


“할아버지가 대견해 하시겠구나. 낳아주지도, 키워주지도 않은 그저 호적상의 어머니 기일을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빠짐없이 참석하는 널 보시고는 얼마나 흐뭇해하시겠니.”


명현은 가볍게 속마음을 토로하는 듯 보였으나 남자는 명현의 음성이 감정으로 뜨거워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나.”


남자는 진지한 얼굴로 명현을 바라보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여전히 명현은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킨 채였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하루 때문에 그 멀리서 와야 되니.”


“난 괜찮아. 다행이도 항상 학기가 끝날 때쯤이잖아. 여긴 2주 정도 있을 거야.”


남자는 잠시 망설이듯 뜸을 들이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일 올 수 있지?”


“그건 내일이 되어 봐야 알지.”


불확실한 사실이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를 담은 대답이었다. 명현은 아무 것도 드러내지 않은 얼굴로 남자의 기대감을 무너뜨렸다.


“핑계라는 거 알아. 올 마음이 있다면 문제될 건 없어. 그렇지?”


“들어가 봐야 돼.”


그녀가 종이컵을 구기면서 일어났다. 마지못해 남자도 천천히 따라 일어나면서 명현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런 남자에게 명현은 일부러 보여주려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의 손을 끌어 당겼다.


“윤석현, 나 너 미워하지 않아.”


“알아.”


그는 마주한 그녀의 시선을 부드럽게 받아들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넌 하나뿐인 내 동생이니까.”


명현의 조용한 음성에 둘 사이에는 잠시 정적이란 것이 흘렀다.


그 말을 들은 후에야 석현은 정문을 향해 걸어갔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명현도 이내 등을 돌려 자신이 가야 될 것으로 향했다.


‘그깟 죽은 후의 기일이 무슨 소용인가. 살아서 지옥 같은 삶을 살았는데….’


그런 생각에 일순간 헛웃음이 날 정도로 명현은 엄마의 기일이 자신에게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반짝거리는 대리석 바닥의 경계를 한 칸 씩 세기라도 하듯이 발걸음으로 꾹꾹 누르면서 불편한 감정도 함께 눌렀다.


***


명현은 생각에 빠진 채 로비의 바닥만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걷고 있었다.


기일에 참석하지 않은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이번에도 빠지게 되면 여덟 번을 빠지게 되는 건가? 벌써 그렇게 되어버렸다니.


명현은 석현의 방문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기일에 다녀오면 그리움의 흔적들에 온 마음을 잠식당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올해도 가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아직 정리가 안 됐나 보군.”


명현은 갑작스레 다가온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10시가 지난 시간인데도 인우는 가운을 입고 있었다.


주말을 제외하고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수술이 있어 그의 흰 가운 안은 항상 푸르렀다.


“정리할 시간을 주고 있었다는 걸 모르는 건가?”


인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차가운 눈동자가 파고들 듯이 명현의 얼굴에 쏟아졌다.


“저는 그러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날 가만히 내버려둬요. 제발.’


냉랭한 그녀의 항의였다. 명현의 모습은 곧 깨어질 듯한 살얼음판 같았다.


“이미 네 선택을 필요 없게 돼 버렸어.”


인우는 어둡게 가라앉은 명현의 눈동자를 그의 눈에 담으면서 먼저 로비를 벗어났다.


학회 준비로 며칠 째 늦은 시간까지 병원에 남아있던 인우였다. 그러다 잠깐의 휴식을 위해 공원을 산책하고 들어오던 중이었다.


넓은 병원의 로비는 밤 시간이라 그다지 많은 사람들이 있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스치는 사람들 중에서 그의 눈은 단번에 명현을 발견해 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명현을 본 것만으로도 풀어졌던 인우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명현이 웃고 있었다. 희미하게였지만 분명 웃어주고 있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향해.


삽시간에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줄 하나가 그 탄성을 견뎌내지 못하고 끊어져 버린 느낌이었다. 인우는 그것이 자신의 분노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4장


첫 수술. 외과의로서 명현의 첫 수술이 잡혔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수술방에는 들어가지만 그건 어시스트로서의 역할일 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드디어 첫 집도를 할 기회가 온 것이다. 그 대상은 응급으로 들어 온 충수염 환자였다.


수술방 어시스트는 치프인 병훈이었고, 2년차 승수가 리트렉터(Retractor, 수술 부위를 벌려주는 기구)를 잡아 주었다.


명현은 제일 먼저 오른쪽 하복부에 약 5cm정도의 피부 절개를 넣었다. 그러나 메스 날은 피부에 얕은 상처만 만들었을 뿐 환자의 복부는 절개되지 않았다. 수 없이 반복해서 봐 오던 건데도 막상 하려니 쉽지 않았다.


“휴.”


낮게 숨을 내쉬며 명현이 다시 시도하기 위해서 메스를 고쳐 잡으려 하자 병훈의 따뜻한 충고가 그녀의 재 시도를 북돋워 주었다.


“메스 날을 연필 쥐듯이 쥐어. 그리고 힘을 주고 반듯하게 그어 봐. 뭐가 걱정이야.”


명현은 병훈의 말대로 힘껏 메스를 그었다. 그러나 그 힘도 부족했는지 겨우 지방층만이 보여지자 2년차 승수가 인숙하게 지방층을 벌리고 근육층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명현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이런 말은 환자한테는 미안하지만 뚱뚱한 사람은 수술할 때 무지 힘들다. 그치 않냐?”


수술 마스크 안으로 웅얼거리며 우스개 소리를 하던 승수가 다시 모스퀴토(mosquitto)를 이용해 근육층을 벌리고 기역자 모양의 아미네이비(army-navy)로 수술 부위를 당겨 주었다.


드디어 복막이 보이자 병훈이 타월을 이용해 밖으로 나온 장을 고정시켰다.


이제 명현은 빨갛게 성이 나 있는 돌기만 찾으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보아도 있을 것 같은 자리에서는 충수돌기가 보이지 않았다.


“왜 안 보이는 거죠?”


명현의 이마에 땀이 흘렀다.


병훈은 아직까지는 도와줄 생각이 없는지 지켜보고만 있었다.


사람마다 충수돌기의 위치는 다양하다. 그래서 복막을 열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충수돌기가 나타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오죽하면 외과 의사들이 그런 충수돌기를 보고 ‘good morning appendix'하며 반가운 인사까지 했겠는가?


명현이 한참을 뒤지면서도 돌기를 찾아내지 못하자 지켜보고 있던 병훈이 나섰다.


병훈은 익숙한 솜씨로 잠시 뒤적이더니 회장 뒤에서 벌겋게 부풀어 오른 돌기를 찾아내었다. 제법 성이 많이 나있는 모양이 환자를 꽤나 괴롭혔을 것 같았다.


병훈은 돌기 주위의 조직을 박리하고 앙상하게 돌기만 남겨 놓았다. 그런 다음 타이 준비를 마치더니 다시 메스를 명현에게 넘겨주었다.


마침내 명현이 그 돌기를 자르게 되자 수술방에 그녀의 첫 집도를 축하하는 박수 소리와 격려의 말들이 분주하게 오고갔다.


***


일반외과 팀들의 회식이 저녁 8시로 잡혀 있었다. 마침 명현의 첫 수술 축하도 겸해서 병원 옆 골목에 있는 고기집으로 장소가 정해졌다.


명현은 치프의 마지막 지시 때문에 30분 정도 늦게 도착하게 되었다.


과 회식이다 동기 회식이다 해서 몇번 와 본 적이 있어서 익숙하게 다른 손님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나무계단으로 이어진 별채 쪽으로 들어갔다.


기다란 테이블이 일자형으로 연결되어 양옆으로 나란히 서로 마주 보게끔 앉아 병원 식구들이 벌써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지글지글 고기 익는 소리와 연기로 인해 방안은 뿌옇게 변해 있었고, 병원의 분주함과 다른 왁자지껄한 소음이 잡아당겨 놓았던 일상의 스트레스를 조금은 덜어 주는 것 같았다.


명현이 늦은 티를 내지 않으려 아래쪽의 자리로 앉는 순간 외과 과장인 원규의 부름이 들렸다.


“명현이 왔니? 내가 축하 술 한 잔 줘야지?”


과장이 술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 것을 본 명현이 먼저 일어나 원규의 근처로 다가간다.


“수고했지? 첫 집도 축하한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알고 있지? 내가 아들놈 하나 있었으면 며느리 삼았으면 딱 좋겠는데 아쉽다.”


원규가 두 손을 공손히 내민 명현의 잔에 말간 액체를 부어주며 진심으로 아쉬워하자 대장항문 파트 스태프인 정식이 과장 옆에서 한 몫 거들고 나섰다.


“여기 서인우 있잖습니까? 과장님이 중매 한번 서십시오.”


날카로운 인우의 눈매가 살짝 틀어지더니 그의 맞은편인 원규의 뒤쪽에 앉은 명현을 향했다. 그러나 명현은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든 술잔만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래, 그래 인우가 있었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명현아, 서인우 어떠냐? 내가 장담하지. 한 마디로 저 녀석 명품이거든? 아, 참 그런데 나이 차가 너무 많이 지나?”


원규는 온화한 표정으로 인우를 쳐다보면서 큰 소리로 확인하듯 물었다.


“가만있어 보자. 네가 서른넷이냐? 다섯인가? 인우 너 몇 살이냐?”


“…….”


고개를 갸웃하며 진지하게 떠올리고 있는 원규를 보며 인우는 그저 싱긋 웃기만 했다. 그러자 정식이 뭘 그런 걸 따지냐는 듯 답답하다는 말투로 다시 끼어들었다.


“과장님도 참,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확실히 예스냐 노냐만 들으면 되지.”


그때까지 원규와 정식의 자리 중간쯤에 앉아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명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럴까? 명현아, 너 저 녀석 구제해 줄 마음 없냐? 자라는 것도 내가 다 봐서 아는데, 썩 괜찮아.”


자상한 원규의 음성이 명현의 귓가에서 부드럽게 울렸다. 하지만 명현에게 묻고 있는 것은 원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바로 그녀의 앞에 앉아있는 인우의 눈빛이었다. 명현은 그의 차가운 눈동자 깊숙이 존재해 있는 뜨거움을 보았다.


‘여러 사람 앞에서 미안해요.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어요.’


명현은 인우의 눈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또렷이 밝혔다.


“싫습니다.”


그 한 마디에 여기저기서 간호사들의 아우성소리와 윗년차 선배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웃음소리들이 뒤섞인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응? 싫어? 그래…. 당사자가 싫다면, 그건 안 되는 일이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며 원규는 허허거리며 웃음 지었다.


“아이쿠! 어쩌냐, 서인우. 너 차였구나. 하하하, 천하의 서인우가 차이는 꼴도 보고 오늘 정말 기분 좋은날인데?”


정식이 농담반 진담반인 듯한 말을 던지면서 인우를 향해 잔을 내밀었다.


“너무 좋아하시는 거 같습니다, 선생님. 제가 차인게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인가 봅니다. 저는 가슴이 꽤 아픈데.”


인우는 여유로운 입가로 술잔을 가져가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좋지, 누가 너 같은 인간이 차일거라 생각인들 해 봤겠냐? 다들 넌 뭐든 완벽할 거라 생각하지. 어쨌든 축하한다. 새로운 경험을 해 본 거에 대해. 하하하.”


인우는 정식에게 받은 잔을 다시 되돌려주며 명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맙다, 윤명현. 모두들 나의 새로운 경험을 축하해 주는 것 같아서 기쁘긴 한데, 나까지 좋아라 하지는 못하겠다. 차인 놈이 미쳤구나 하는 소릴 들을 것 같아서.”


분명 웃고 있는 표정이었지만 인우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명현은 마주친 그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고는 고개를 살짝 틀어 술을 비웠다.


그리고 비워진 잔을 원규에게 되돌려 주면서 잔을 가득 채웠다.


“과장님, 제 자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명현은 꿇고 있던 무릎을 세우기 위해 손끝으로 바닥을 살며시 짚었다. 빨리 일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소곳하게 모아져 있던 다리가 펴질 때였다.


다섯 명의 간호사들 중 한 사람의 입에서 명현의 이야기가 또 툭하니 흘러나왔다. 그녀는 성희였다.


“과장님, 너무하셨어요. 윤 선생님 멋진 애인 분 있으시던데 과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얼마나 곤란하시겠어요.”


명현은 암담한 표정으로 숨을 들이쉬었다.


다들 뭐가 그리 궁금한 건지. 명현은 그들의 관심이 달갑지 않았다.


그날 석현을 봤던 성희가 명현의 마음을 대신해 주기라도 하듯이 바라지도 않던 말을 불쑥 꺼낸 것이었다.


젓가락을 든 채로 이야기를 듣던 과장이 고개를 돌려 명현을 보면서 사실여부 확인을 요구했다.


“어, 아닌데? 저번에 명현이 너 남자친구 없다 했잖니. 녀석 거짓말이었구나.”


원규가 연륜에서 나오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짐짓 서운하다는 듯 명현을 다독거렸다.


“아뇨, 거짓말 아닙니다.”


명현은 말간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단정한 음성은 흔들림이 없었다.


“야, 봐라. 아니라잖니. 난 또 명현이가 나한테 거짓말했나 싶어 우울할뻔 했다.”


원규는 말을 꺼낸 성희를 보며 아래 입술을 엄하게 내민 채 명현의 진실성을 편들어 주었다.


“그럼 선생님. 저번 밤에 찾아오신 안경 쓴 남자분은 누구세요?”


알고는 넘어가자는 식으로 성희는 자신이 본 구체적인 모습을 언급하며 들먹였다.


명현은 잠시 침묵했다.


여자에게는 남자, 남자에게는 여자 그것을 제외하고는 할 얘기들이 없는 세상 같았다. 왜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모든 관심이 쏟아지는지. 명현은 씁쓸했다.


“동생이에요.”


“친동생이요?”


“네.”


연극의 장면이 바뀔 때처럼 갑작스런 정적이 흘렀다.


인우의 얼어붙은 눈이 명현에게로 향해졌다. 찌를 듯한 그의 시선을 그녀는 피하지 않고 받아야 했다.


“감동적이군.”


인우는 서늘한 목소리를 조용하게 내뱉고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궁금한 점이 해결되어버리자 방안은 다시 술 권하는 소리와 말소리들로 다시 왁자지껄해졌다.


남의 얘기는 원래 그런가 보다. 심각할 땐 모든 에너지를 동원해 참견해 대더니 관심이 끊어지는 순간 정말 별일 아닌 남 얘기가 되고 만다. 궁금증이 해소되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앞옆, 비켜서 옆 사람들과 열심히 술잔들을 주고받는다.


명현에게도 그녀의 자리에 앉자마자 축하와 격려의 술잔들이 계속 이어졌고 그녀는 마다하지 않고 마셔 버렸다. 명현이 잔을 내려놓기 바쁘게 2년차 승수가 기특한 얼굴로 술잔을 건넸다.


“윤명현, 축하한다. 넌 잘 할 거야. 다른 파트의 어리버리한 놈들보다는 네가 훨씬 낫다.”


승수는 이미 취기가 올라있는지 많이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곰 같이 커다란 덩치를 옆에 앉은 3년차 재환에게 기대며 어리광을 부리듯 병원 일을 투덜대기도 했다.


승수의 어리광을 받으며 재환도 앞에 앉은 명현에게 첫 집도를 축하해 주었다.


“축하한다. 솔직히 내가 1년차 어려워해 보기는 처음이지만 그건 순전히 느낌상의 문제니 뭐라고 할 수 없고 앞으로 더 잘 해 보자.”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두 배는 될 법한 승수의 몸을 지탱해주고 있는 재환이 명현에게 술잔을 건넸다.


“제가 어려우셨어요? 죄송합니다.”


명현이 차분하게 미안함을 전하자 재환이 피식거리며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죄송할 건 뭐야. 나쁘다는 뜻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라. 치프 선생님은 명현이 한 잔 안 주세요?”


맞은편에 앉은 대장 파트 치프와 잡담을 나누며 낄낄대는 병훈을 재환이 찔렀다.


“응? 나도 줘야 하나? 쟤 많이 마셨어. 이럴 땐 안 주는 게 사랑의 표시야. 너희들이 치프의 깊은 사랑을 이해할 수 있어? 명현아, 축하한다. 끝. 됐지?”


항상 저런 식이었다. 말로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명현은 병훈의 그런 편안함이 좋았다.


“근데 명현아, 너 아까 왜 싫다고 했냐? 서인우 선생님 말이야. 애인도 없으면서 왜 그랬냐? 남자인 내가 아까워 죽을 뻔했다. 네가 뭘 모르나 본데 우리 선생님 남자들이 봐도 멋있는 사람이야.”


병훈이 얼마나 목소리를 낮추면서 소곤거리는지 명현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충 내용을 이해한 명현은 말없이 담담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서 싫은 게 아니에요. 누구와 함께 해야 되는 그 감정이 싫은 거지.’


***


그 날 밤의 당직을 제외하고는 다들 2차를 가는 분위기들이었다.


명현은 밀린 일을 이유로 2차를 사양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무리지어 각 자의 목적지를 향해서 비틀거리는 걸음을 걸었다.


인턴과 당직인 다른 파트 1년차가 서로 담배를 나눠 피면서 모퉁이에 서 있자 명현은 병원으로 가야 되는 두 사람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병원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굽 낮은 구두 소리가 가로등에서 번져 나온 오렌지 색 불빛을 밟고는 조용한 골목을 울렸다. 매끈한 목선이 그대로 드러난 셔츠 아래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명현의 도드라진 무릎 뼈가 치마의 트임 새로 엿보였다.


‘그날일 텐데.’


일부러 잊으려고 애썼는데도 소용이 없었나 보다.


문득 명현은 고개를 들어 깜깜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땅위의 불빛들 때문에 완전히 검어지지 못한 하늘이었다.


‘잘 계시나요? 걱정하지 마세요. 난 아프지 않을 거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날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아. 자꾸 사랑을 하라고, 그리고 함께 하자고 재촉해. 난 그러지 않을 건데.’


명현은 어지러워 잠시 동안 눈을 감았다.


‘잊어버리려고 너무 많이 마셨나 봐요.’


명현은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버티고 서 있는 가로등에 쿵하며 이마를 갖다 대었다. 시원했다. 뻑뻑했던 눈 주위도 한결 부드러워 졌다.


명현은 안경을 끌어내리며 눈가를 세차게 문질렀다.


‘정신 차려. 윤명현.’


그때 인우도 얼마 후로 다가 온 학회준비를 이유로 2차를 거절하고 병원쪽으로 급히 움직이고 있었다.


솔직히 학회는 핑계에 불과했다. 조금 전 걸려 온 전화를 받는 사이 명현이 혼자서 병원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본 것이었다.


‘동생이에요.’


그 우스운 사실을 인우는 명현에게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회식장소에서 병원으로 향하는 길은 주택들과 가게들이 띄엄띄엄 보일 정도로 한산한 길이었다. 그래서 어렵지 않았다. 인우는 저만치 앞에서 또박또박 걷고 있는 명현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제법 술을 받아 마시는 것 같았는데 그녀의 자세는 여느 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한참동안 하늘을 쳐다보고 나더니 휘청거렸다. 그리고는 가로등에 이마를 부딪치고 있었다.


뒤따라 걷고 있던 인우는 심상찮은 행동을 보이고 있는 명현에게 성큼 다가갔다.


“차인 건 난데 네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거지?”


순간 아래로 흐를 것 같던 그녀의 어깨가 움찔거리며 굳어졌다.


요 근래 명현의 귀를 계속 자극하는 그 목소리였다.


명현은 안경을 쥐고 있는 손으로 가로등을 밀면서 얼굴을 들었다. 어지러웠던 것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아 명현은 감았던 눈을 뜨고는 뒤돌아섰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우뚝 서 있는 그의 모습이 흐릿했다.


‘넥타이를 풀었나? 재색 양복은 그대로인 거 같은데.’


명현은 눈을 살짝 찌푸리며 인우의 상태를 가늠해 보았다.


“취했군.”


어느새 다가왔는지 그가 바로 코앞 가까이에 있었다.


셔츠의 첫 번째 단추가 열려져 드러난 그의 남자다운 목이 명현의 눈높이에 닿았다. 그의 일부분이 또 자신의 눈을 뺏어가 버렸다. 그의 것이 자꾸만 하나씩 저절로 눈에 띄고 있었다.


명현은 피하듯이 안경을 다시 쓰면서 그와 마주하고 있던 자신의 몸을 돌렸다.


“아뇨. 이젠 괜찮아졌어요.”


그리고는 다시 단단해졌다.


그녀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휩싸여 있던 감정에서 벗어나려고 애쓴 흔적 같았다.


인우는 금방이라도 그녀의 눈가를 쓸어주고 싶어하는 자신의 손을 바지 주머니 속에서 꽉 움켜쥐었다.


‘나타내고 싶지도 않을 만큼 지독한가? 네 슬픔은?’


인우는 앞서 걷고 있는 명현의 뒷모습을 애잔하게 바라보고는 두어 걸음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녀와 함께 걸었다.


주택들로 이어져 있는 좁은 도로는 밤 10시가 지난 시간이라 한적했다. 유월의 초 여름밤은 집들의 창문을 열게 만들어 두런거리는 가족들끼리의 다정한 얘기 소리도 간혹 들려주었다.


명현은 어쩌면 그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귀를 바짝 기울여 보았지만 그녀의 귀에 들려 온 소리는 다른 것이었다.


“다들 2차 가는 분위기던데 왜 가지 않았지?”


인우가 조용히 물었다.


“그냥요. 그러는 선생님은요.”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느라 힘들었는지 명현의 어깨가 숨을 들이쉬기 위해 잠시 들썩였다.


“핑계를 대면서까지 빠져나온 이유가 있기는 하지. 궁금하다면 말해 줄 용의가 있어.”


그녀의 보폭을 맞추느라 인우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느긋했다.


“…….”


명현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묵묵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걷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인우는 그런 명현의 손목을 지그시 잡아 멈춰서게 했다.


“뭐라고 말 좀 해봐.”


“궁금하지 않아요.”


명현은 병원 본관의 자동문이 보이자 그때서야 어두운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기다란 두 인영(人影)이 서로 마주보며 그림처럼 정지해 있었다.


“네게서 들어야 할 말이 있어.”


“전 없어요.”


“난 있어.”


순간 인우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거부할 거라 생각했는데 명현은 의외로 순순히 그의 걸음을 따라 걸었다.


잠시 후 그들은 병원의 야외 주차장을 가로질러 공원의 산책길로 접어들었다.


가로등이 켜져 있긴 했지만 밤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모든 걸 덮어주고 있었으며 눈앞에만 보이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감출 건 감춰버리고 있었다.


황색의 가로등 불빛이 어둠을 포근하게 만들어 준 한밤의 나무 숲길을 두 사람은 한참을 그저 걷기만 했다.


그들 사이에 감정의 일치가 없다 해도 지금 순간만큼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쳤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둑한 길을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만을 느끼며 그들은 천천히 걸었다.


“왜 내가 계속 오해하고 있었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인우는 그녀에게 직접 묻고 싶었던 말을 나직이 꺼냈다.


“상관없었으니까요.”


그녀의 대답이 체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그의 걸음이 멈춰버렸다.


‘상관없다? 뭐가 상관없다는 거지? 내가? 아니면 네가?’


인우는 명현의 무성의한 대답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인우는 느리게 몸을 돌리고는 그녀의 손목을 던지듯 내쳤다. 그리고는 지나치게 얇은 명현의 어깨를 있는 힘껏 거머쥐었다.


“다시 말해 봐.”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태연하게 무심한 말을 흘린 후 명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아니. 넌 내가 질투에 미쳐 미친놈처럼 굴 때 오해 정도는 풀어줬어야 했어.”


명현의 눈을 들여다보는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랬다면 뭐가 달라지나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건조한 눈빛에도 무심한 음성에도 그녀의 감정은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적어도! 네가 상관없어 하는 내가 몇주 동안 불안하고 초조하지는 않았어.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은 네 사랑을 두고 비정상적인 상상 따위도 하지 않았겠지.”


인우의 눈이 빛을 내며 잡고 있던 명현의 어깨에 힘을 가했다. 그녀의 몸이 휘청거릴 만큼의 완력이었지만 명현은 인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럼 사과를 드려야 되나요? 오해를 풀어드리지 못해 죄송했다구요? 원하신다면요.”


그녀는 다가섬을 냉정하게 잘랐다.


명현은 이쯤에서 그가 그만두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그러나 명현의 마음을 그는 이미 읽어버린 듯했다.


“윤명현, 이번엔 방법이 틀렸어. 사과 따위로는 안돼. 네 생각대로라면 그건 날 떼어버리려는 몇 마디 거짓말에 불과하니까. 내가 원하는 건 오해도 상관없어하는 네가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하는 이유야.”


‘그러면서까지 날 피하려는 이유 말이야.’


인우는 그녀를 들여다보려는 듯 얼굴을 가까이 내렸다.


“감정들이 얽혀드는 게 싫어요.”


시선이 마주치자 명현의 초연한 음성이 떨렸다.


인우는 왜 진즉에 이 눈빛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싶었다. 얼음물이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눈빛으로 사랑을 하는 여자는 없을텐데. 인우는 그것이 단지 그녀가 자신의 사랑을 침범한 무뢰한에 대한 그녀의 입장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감정들이 나와 얽히는 게 싫다는 건가?”


인우는 늦추지 않고 물었다.


“누구라도 아니에요.”


물론 당신도요.


명현이 뚜렷한 거부의 표정을 지어 보여도 인우에게는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했다.


“왜 그런지 더 이상의 이유를 물으면 말해 줄 건가? 물론 아니겠지?”


“더 이상의 이유 같은 건 없어요.”


거짓말. 그는 명현의 차분한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의 감정을 가둬 버린 게 무엇이든 그에겐 문제될게 없었다.


“윤명현, 난 네가 필요해. 네가 들끓게 만든 심장 때문에 하루하루가 불편하고 힘들어.”


그녀의 얼굴을 꿰뚫을 듯 바라보면서 인우는 부서뜨릴 것 같이 쥐고 있던 그녀의 어깨에서 살며시 힘을 뺐다. 그리고 손을 올려 명현의 얼굴을 가만히 쓸면서 고개를 숙였다.


“…혼자서 해결하세요.”


서서히 다가온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맞닿으려 할 때 명현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틀어 버린 뺨 위로 그의 숨결이 부딪히고 있었다. 겉잡을 수없이 빠르게 뛰고있는 자신의 가슴과는 달리 그의 숨결은 평온하고 부드러웠다.


“혼자서 할 수 있었다면 벌써 그렇게 했겠지. 너 아니면 안 돼.”


그는 고집스럽게 돌려진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눈 아래로 다시 가져왔다.


“내겐 없는 걸 바라시네요…. 그만하세요.”


명현은 지친 목소리로 말하고 인우를 올려다보면서 자신의 뺨을 감싸고 있는 그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서늘한 감촉의 손가락이 인우의 손등을 스쳤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아픔만큼이나 그의 마음을 싸하게 만드는 감촉이었다.


하지만 인우는 그녀의 벗어나려는 노력을 단번에 무시해 버렸다. 그는 명현을 와락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했다.


“네게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와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할 수 있어.”


언제나 반듯하게 세워져 있던 그녀의 허리가 중심을 잃고 그의 가슴에 휘어지듯 묻혔다.


그는 따뜻했다. 강하고 위협적인 사람의 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의 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등을 지그시 눌러 둘 사이의 틈을 메워 버리자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 소리가 명현을 흔들었다.


“함께하는 그런 일은 없어요, 절대로. 그러니 놔주세요.”


하지만 마음과 달리 명현은 기운 빠진 부탁을 해야했다.


순간 그의 약속을 붙잡고 싶어하는 자신을 다시 제자리고 가져다 놓으려니 힘이 들었다. 명현은 그를 밀쳐내야 된다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네 힘으로 빠져나갈 수 있으면 그렇게 해.”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인우는 단호했다.


“…….”


명현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포기한 건가?”


낮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이 조용한 그녀를 불렀다.


“아뇨.”


“오늘만이야. 이렇게 놓아주는 것도.”


그녀의 대답이 쓸쓸하게 들렸다. 벗어나기 위해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것보다 더 큰 효과였다.


인우는 무엇보다 그녀의 슬픔이 가장 싫었다. 그는 그녀의 몸을 두르고 있던 팔을 풀어주었다. 천천히 그녀의 몸이 떨어져 나갔다.


명현은 그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한참 동안을 그렇게 서 있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먼저 가야 할 거 같아요. 쉬고 싶어요.”


“기억해. 오늘만이야.”


잊지 말라는 단단한 그의 말을 뒤로하고 명현은 그에게서 차츰 멀어졌다.


‘미안해, 엄마. 오늘도 엄마 보러 못 갔어. 그곳에서 엄마를 만나는 건 아직 아프니까.’


***


세진병원 20층 원장실.


병원 뒤편의 숲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원장실은 의사의 방이라기보다 작은 온실을 연상케 했다. 많은 종류의 분재와 옹기에 심어진 야생화들이 방안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인우는 소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세진병원의 4대째 원장인 민준과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부자지간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닮아있었다. 큰 키가 주는 당당함과 짙은 눈매의 매서움이 그들이 핏줄 관계에 있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아들놈 얼굴을 근 한달 만에, 그것도 애비가 먼저 전화를 걸어서 부탁해야 볼 수 있다니.”


짐짓 나무라는 투였지만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서 원장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이번 일요일에는 찾아뵈려고 했었습니다.”


인우는 허리를 앞으로 숙인 채 팔꿈치를 그의 긴 다리 위에 올리면서 손깍지를 껴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회의 때마다 한 과장이 네놈 자랑을 해대는걸 보고 병원 생활은 잘 하고 있나보다 했다.”


아들의 자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서 원장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되는 자식 칭찬은 그 의미가 두 배로 증폭되었다.


“어릴 때부터 유독 저에게는 관대하신 분이셨으니까요.”


인우는 조금 전 두 번째 수술을 끝내고 나올 때쯤 부친의 호출을 받았다.


아마도 자신이 수술방에 있다는 걸 알고는 퇴근을 늦춰가면서 기다린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유 없이 헤픈 사람은 아니지. 흠, 아직도 의사가 된 걸 후회하니?”


서 원장은 아들의 얼굴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후회한다고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


하얀 가운 안으로 푸른색의 수술복을 그대로 입고 있는 인우는 피곤한 듯 얼굴을 쓰윽 문지르며 서 원장의 말을 수정했다.


“그래 그런 적은 없지. 그럼 다시 물으마. 여전히 이 애비를 원망하느냐.”


아들이지만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서 원장은 인우의 침착한 눈빛을 응시한 채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뇨. 둘 중 누군가가 꼭 해야 될 일이었다면 당연히 정우보다 제가 했었어야 하니까요. 정우 놈에게 계속 의대를 고집하셨더라면 아마 아들 하나 잃으셨을 거예요. 저는 의사 되는 걸 싫어하지는 않았으니까요. 다만 더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게 있었을 뿐이었지만 정우는 의사 되는 걸 싫어했어요. 아시잖아요, 그 녀석은 자기 손가락의 작은 상처에서 나는 피조차도 무서워하는 놈이라는 것을.”


그러실 필요가 없다는 듯 인우는 아버지인 민준에게 배려 섞인 대답을 했다. 처음 시작이 어찌되었든 현재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은 다름이 아니라 의사였다.


이제껏 한 번도 스스로의 선택에는 후회를 하지 않을 만큼 인우는 최선을 다하는 생활을 해왔었다. 그러니 후회와 원망이라는 말은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미 지나버린 일이지만 아들의 진로에 관한 얘기는 아직도 부자간의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일순 어색해진 분위기에 민준은 말을 돌렸다.


“흠, 네 녀석 때문에 정우 약혼기간이 2년을 넘겨버렸다. 약혼은 먼저 하게끔 두었다마는 결혼만큼은 형이 먼저라고 못을 박은 상태이니 정우 놈 원망 더 듣기 싫으면 네 어머니가 몇몇 부탁을 해둔 모양이니 한 번 보도록 해라. …왜 그리 결혼에 뜻이 없는 거냐? 하나에 빠지면 지나치게 열정을 쏟아 붓더니 그게 네 열정을 다 가져갔나 보다.”


남자로서 자신의 일에 입지를 굳히다 보면 결혼이라는 것이 이를 수는 없지만 아들의 결혼이 늦은 이유는 그 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아들은 자신이 좋아하며 빠져 있었던 일 외에는 관심이라는 것을 두지 않았다. 서 원장은 그게 아들의 강한 예술혼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꺾어 버린 사람이 바로 아버지인 자신이었다.


“이제부터라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인우는 생각에 잠긴 목소리를 내며 기다란 손가락으로 눈가를 은근한 동작으로 비볐다.


***


병원에서의 시간은 다른 어떤 곳의 시간보다 빨리 지나간다.


명현은 그런 병원에서 스스로와의 싸움뿐만 아니라 많은 시간 부딪히게 되는 인우로 인해서 머릿속이 혼란스러움으로 순서없이 엉켜가고 있었다


명현은 가운을 벗고 하얀 색줄이 좁게 그어진 하늘색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갈색의 가느다란 벨트로 마무리 한 다음 거울을 빤히 들여다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거울 속의 여자는 참 우습게도 그녀가 기억하는 엄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예뻤던 엄마의 얼굴이 자신의 모습 위로 겹쳐지자 명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윤명현이 아니라 정영주네.”


명현은 이마 위를 살짝 덮고있는 머리를 손으로 정리해서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안경을 벗고 눈가를 몇 번 문지르면서 손가락으로 눈 밑을 지그시 누르고는 눈을 떴다.


파랗도록 흰 눈동자엔 군데군데 핏발이 보였다.


며칠 전 부친에게서 온 전화 내용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일 년에 한 두 번 있는 규칙적인 호출은 아닌 것 같았다. 병원을 다녀간 석현이 자신의 소식을 전했을테니 다른 용건일 확률이 높았다.


무얼까?


명현은 얼마전 도착한 아버지의 메시지를 떠올렸다.


-집에 좀 들를 수 있겠니? 할아버지께서 찾으시는구나.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명현은 머리를 좀 기르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난히 긴 목덜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명현은 풀어 두었던 원피스 첫 단추를 채워버렸다.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처연함이라니….’


명현은 습관적으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자 말라있던 입술이 금세 터져서 붉은 핏물이 배였다.


그때였다.


“오프야?”


갑자기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온 소영이 어지럽혀진 책상 위를 뒤지면서 물었다.


“응.”


“어디 가는데? 아파트? 좋겠다. 잠이나 실컷 자라.”


나란히 붙은 두 개의 책상 위를 무얼 찾는지 정신없이 뒤적이던 소영이 거울 앞에선 명현을 흘깃 쳐다보았다.


“명현아, 네가 봐도 너무 예쁘니.”


“무슨 소리야?”


명현은 거울 속으로 소영과 시선을 부딪치며 의아해했다.


“아니, 화장을 하는 것도 아니고 뭘 그리 뚫어져라 보고 있어? 거울이랑 싸우는 것도 아니면서.”


소영은 물러날 생각이 없는지 책상에 기댄 채로 명현의 뒤에서 거울 안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보았다.


“싸우지는 않아도 시비는 걸어 보려고 했었지. 왜 이렇게 마음에 안 드는 모습으로 비춰주느냐고.”


명현은 못마땅해하는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말했다.


“얘가 사람 거품 머금고 쓰러지는 꼴 보려고 작정했네. 구체적으로 말해. 어디가 마음에 안들어?”


흥분한 듯 소리를 높여 떠들긴 했지만 소영은 명현의 표정으로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차갑게 내려앉은 눈빛이 그랬고 지그시 깨물고 있는 입술 또한 명현이 굳어있음을 나타내 주었다.


“모두 다.”


‘전부 버리고 싶을 정도로 싫어.’


명현은 깊게 심호흡을 하며 거울을 등지고 돌아섰다.


“아파트 가는 거 아냐?”


소영은 대답대신 싱긋 웃어주기만 하는 명현을 팔짱을 끼고는 노려보았다.


“다녀올게.”


건드리면 흘러내릴 거 같았던 명현의 어깨가 다시 반듯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1년차는 주중 오전 오후 한 번씩 오프를 받게 된다. 그래서 오늘처럼 오후가 오프이 날은 익숙하지 않은 밝은 빛이 존재하는 병원 밖을 구경하게 되었다.


철저하게 길어진 여름의 낮은 해넘이 시간도 무척이나 늦었다. 다른 계절이라면 어김없이 찾아왔을 어둠은 어디서 지체를 하고 있는지 그 자락을 보여주지도 않고 있었다.


명현은 병원 본관 맞은편 택시 승강장에서 택시를 타기 위해 언덕 아래에서 올라오는 차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다행이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없어서 얼마 있지 않아 택시를 탈 수 있을 거 같았다.


잠시 후 저쯤에서 택시가 나타나자 명현은 손을 살짝 흔들어 승차 표시를 해주었다. 택시는 본관 앞에서 승객을 내려주고는 명현이 있는 곳으로 오기 위해 도로 중앙에 설치된 화단을 빙 돌고 있었다. 바로 그때 택시의 움직임을 쫓고있던 명현은 건너편 본관의 자동문 사이로 누군가와 함께 나오고 있는 인우를 보게 되었다. 가운 차림인 걸 보면 아마도 찾아온 손님의 배웅 정도 되는 모양이었다.


외래 진료가 있는 날이라 그런지 그의 하얀 셔츠에는 사선 줄무늬가 그려진 은색의 넥타이가 단정하게 매여져 있었다.


‘잘 어울려요.’


명현은 의식적으로 보지 않으려 했던 그의 모습을 눈에 담고 말았다.


그의 손님이 명현이 서 있는 택시 승강장으로 가기 위해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자연 배웅을 하던 인우의 시선도 손님을 따라 옮겨졌다. 그러다 길 건너편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명현을 발견했다.


인우는 한동안 명현을 바라보고만 있더니 갑자기 큰 보폭으로 그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현은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때마침 다가온 택시에 재빨리 오르면서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인우는 멀어지는 택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아련한 눈빛은 뭐지?’


인우는 언뜻 시선이 부딪쳤을 때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명현의 눈길을 떠올렸다. 엷긴 했지만 그건 분명히 그녀가 피하려고만 했던 상대에 대한 감정이 실린 눈빛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다가와.”


그는 조용히 되뇌면서 병원 안으로 몸을 돌렸다.


“아저씨, 제기동으로 가주세요.”


명현은 다급하게 행선지를 말하고 눈을 감았다.


심장이 제 속도보다 훨씬 빨리 뛰고 있었다. 자신에게로 다가오기 위해 성큼성큼 도로를 가로지르는 인우의 모습이 아직도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금지된 것을 훔쳐보다가 들킨 사람처럼 명현은 그를 급히 피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계속 쳐다보았을까? 명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는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 그건….’


병원을 벗어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명현은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낯익은 길들이 보이고 얼마 있지않아 이웃들과는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긴 담으로 둘러 싸여진 규모가 큰 한옥이 한 채 나타났다.


명현은 집 앞 공터에 택시를 세우고는 주위를 살피면서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눈앞에 버티고 선 오래된 한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양연당(養淵當).


초서체의 유려한 흘림이 현판에 먹물빛으로 새겨져 대문간 채에 높이 걸려 있었다.


명현이 태어나서 의대에 입학하기 전까지 아침을 맞았고, 또 사랑의 의미를 버린 곳이기도 했다.


높이 솟아있는 대문의 기둥은 나무 본연의 색이 아닌, 사람과 시간의 마찰로 인한 흙빛을 띠면서 그 오래됨을 말해주고 있었다.


명현은 무채색의 대문 앞에서 반듯하게 선 자세로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뜨거움이 남아있는 여름 오후의 빛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 5장


명현의 부친인 성균은 지금도 역사책에서 그들의 이름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정승들을 수차례 배출해 낸 윤씨 종가의 5대 독자였다.


그로인해 성균의 결혼은 그의 집안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중대사가 되었고 그가 대학 재학 중일 때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가문의 명예와 그 자부심 계승을 삶의 최대목적으로 여기는 성균의 부친인 한학자 형수는 당시 한영대 총장으로 재직 중이던 정성(鄭聖) 명예교수의 장녀(長女) 영주를 며느리 감으로 정해 결혼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균은 집안에서 정해준 상대와 결혼을 하라는 부친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땐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균이 사랑한 이숙정은 비록 지방의 넉넉지 못한 살림을 이끄는 편모슬하에서 자라긴 했지만 천성적으로 밝고 명랑한 성격으로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예쁜 아가씨였다.


그녀는 공부도 아주 잘한 탓에 명문 한영대로 진학하면서 서울에서 유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한 학년 선배인 성균을 만나게 되었고 그와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사랑에 빠졌다.


항상 많은 억제가 뒤따랐던 성균에게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성격의 숙정은 신비한 세계와의 접촉 같았다.


무뚝뚝하지만 반듯한 몸가짐과 준수한 용모를 가진 성균과 생기 넘치는 활발한 아가씨인 숙정의 사랑은 그렇게 단단하게 영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성균의 부친인 형수에 의해 결혼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끝내 좌절을 겪게 되고 말았다.


둘의 사귐을 허락지 못했던 형수는 극단적인 단식과 집안에 대한 깊은 의무감을 무기로 아들의 사랑을 접게 만들었다.


결국 숙정과 헤어진 성균은 얼마 있지 않아 집안에서 정해준 영주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성균에게는 사랑을 잃어 가면서 감행된 결혼이라 처음 시작부터 아내인 영주에게 살가운 정을 표현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영주는 가족들의 사랑과 배려라는 따뜻한 온실 속에서 활짝 피어난 청초한 꽃이었다. 타고난 기품과 단아한 아름다움을 가진 그녀는 여리고 순종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무뚝뚝했지만 깊어 보이는 눈매의 남편을 영주는 시간이 갈수록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의 대가로 명현을 가지게 되었다.


평소 자신을 바라보는 남편의 모습에서 다정함과 따뜻함은 느낄 수 없었지만 의례히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남자의 표현 부족이라 생각하니 별다른 섭섭함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잉태한 아이가 존재하는 이상 남편의 관심과 사랑은 차츰 나아질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영주에게 그런 행복은 찾아오지 않았다.


출산일이 두 달이나 더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주에게 산통이 찾아왔다. 하루 이상의 진통 끝에 딸을 출산하게 되었지만, 출산 후 이유 모를 과다출혈로 영주의 생명은 위급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다행히도 급박하게 이루어진 수술로 영주는 목숨을 건지게 되었지만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다는 절망스러운 선고를 받게 되었다.


그 이후 냉담해진 시부모님의 태도와 그녀 스스로 느끼기에 동정과 연민의 눈빛만이 가득한 남편, 그리고 그녀 자신에 대한 원망스러움 들이 출산 후의 영주를 괴롭혔다.


성균은 파리한 안색의 아내가 안쓰러웠고 아들로 태어나지 못해 집안 어른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자신의 딸도 안타까웠다.


그러던 차에 그녀의 방에서 아기인 명현과의 생활만을 해 오던 영주에게 충격적인 사실이 전해졌다. 시어른들의 강력한 주재로 남편과 결혼 전 사귀었던 숙정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성균의 부친인 형수는 숙정에게 호적상의 위치는 바라볼 수 없다고 미리 못박았었다. 대신 숙정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윤 씨 집안의 자손으로 받아들여 그 존재를 부여하겠다고 했다.


숙정은 형수의 제안에 같은 여자로서 영주에 대한 죄책감과 양심의 꺼려짐이 있었으나 성균에 대한 접지 못한 사랑으로 큰 욕심을 부리고 말았다.


숙정은 성균의 곁에 머물 수 있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모든 걸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영주는 갇혀진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그녀 자신을 감정적으로 구속한 채 아기를 돌보는 것 외에는 다른 일상생활을 모두 포기한 듯했다.


하루종일 방문 밖 출입도 않았고 남편인 성균과의 만남 자체도 거부했으며 같은 지붕 아래에 존재하는 모든 이름들을 단단한 벽 너머로 내몰아 버렸다.


명현이 태어난 바로 다음 해에 성균과 숙정 사이에는 대단한 윤씨 집안의 6대독자인 석현이 태어나게 되었다. 호적상으로 윤성균과 정영주의 아들, 그리고 윤명현의 동생 윤석현으로 완벽한 가족으로 연결 고리가 엮어졌다.


석현은 친모인 숙정과 함께 명현의 본가에서 가까운 곳에서 생활했고, 명현은 영주와 함께 본가에서 조부모의 엄격함과 살갑지는 않았지만 안타까운 눈으로 늘 자신을 안아주던 부친 성균과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서너분의 아줌마 아저씨와 함께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될수록 명현의 눈에 비친 부모의 일상들은 정상적인 여느 집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부친인 성균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아내를 향한 사랑의 배려가 아니라 조심스러움과 용서의 배려였고 엄마인 영주는 남편에 대한 무관심과 냉담함, 그리고 분노의 기운만을 내뿜고 있었다.


명현이 무엇에 대해 많은 호기심들이 생길 무렵 그녀의 부모는 누가 뭐래도 남남인 관계였다. 한 아이를 사이에 둔 서류상의 부부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그들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명현의 작은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 생겼다. 그녀가 13살이 되는 유월에 닥쳐온 영주의 죽음이었다.


방과 후 집으로 돌아온 명현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엄마 영주의 죽음을 들었다.


그리고 장례를 치르는 선산의 장지에서 처음보는 낯선 여자와 자신보다 키가 큰 남자아이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명현의 세상은 뒤틀어져 버렸다.


며칠 사이에 드러난 엄마가 아닌 아버지의 여자, 그리고 그녀의 아들. 거기에 영주가 남긴 일기장은 어린 명현을 심각한 혼란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 버렸다.


일기장에는 영주의 죽음이 단순한 심장마비가 아니라 스스로 세상을 버리기 위해 약물을 과다 복용했다는 것과, 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속병들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었다.


뒤늦게 모든 걸 알게 된 명현의 외가쪽에서는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명현의 양육권 포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현실은 친부인 성균의 양육권 포기가 없는 한 명현은 같은 지붕 아래서 계모인 숙정과 동생 석현을 매일 볼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었다.


점점 차가워지는 딸의 눈빛과 그늘진 모습에 성균은 가슴이 끊어질 듯 안타까웠으나 그로서는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죽은 전처 영주를 빼닮은 아름다운 딸에게는 감히 부정(父情)을 전할 수가 없었다. 죄책감만을 느낄 뿐이었다.


그때부터 명현은 엄마 영주의 일기장 마지막 글귀에 구속되어졌다.


<사랑은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잔인하지만 절박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명현은 눈물의 흔적이 묻은 엄마의 글씨에 자신의 심장이 쪼개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삐익.


명현의 가느다랗게 뻗은 손가락이 대문의 벨을 무게감없이 눌렀다. 곧이어 낯익은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면서 커다란 대문이 주저없이 열렸다.


명현이 대문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안채와 연결된 중문을 밀치면서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집안일을 봐주던 박씨가 반갑고 놀란 얼굴로 뛰어 나왔다.


“아이구, 우리 면현이 왔네.”


큰살림을 도맡아 이끄는 사람답게 깔끔하고 야무져 보이는 인상이지만 명현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던 자상한 사람이었다.


박 씨는 명현의 손을 붙잡고 토닥토닥 거리면서 젖은 눈가를 재빨리 훔쳐냈다.


“아줌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자신보다 한참 작은 박 씨를 살포시 껴안으며 명현은 속엣 말을 내놓았다.


“보고 싶었으면 왔었어야지. 얼굴은 왜 이리 상했어? 어서 들어가자. 어서.”


박 씨는 명현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며 걱정스러워 했다.


안채로 들어가는 길 양쪽으로는 낮은 꽃들이 앙증맞게 피어 있었고 여름풀들도 제철을 만난 듯 초록을 과시하고 있었다.


안채로 향하는 문을 밀고 들어가자 마당건너 넓은 마루 위에는 명현의 부친인 성균이 그녀를 애잔한 눈으로 바라보고 서 있었다.


명현은 눈을 내리는 정도의 인사와 함께 마당 중간쯤에서 조심스럽게 그녀를 맞는 계모 숙정을 지나쳤다.


안채와는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윤 옹의 거처는 규모는 작지만 한사람만을 위한 공간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아담한 정원에는 세죽(細竹)과 오죽(烏竹)이 가지런히 심어져 있었고 뒤로는 소나무가 즐비한 야산과 이어져 있어 솔향이 은은하게 실려오고 있었다.


해마다 겨울을 나고 이른봄이 되면 명현의 본가는 새하얀 창호지로 문들에게 새 옷을 갈아입혔다.


그 많은 문들을 새롭게 단장하기 위해서는 일주일이 넘는 시간과 집안일을 돕는 분들의 수고스러움이 함께하게 된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 힘든 일을 한 탓인지 뽀얗게 발린 창호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위로 시원한 대나무 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명현은 마당에 선 채로 인기척을 내며 조용한 음성으로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명현입니다.”


“흠흠.”


윤 옹의 헛기침 소리를 듣고 명현은 대나무 발을 걷어올리면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넓지 않은 방안에는 오래된 고가구 옷장과 윤 옹이 앉아 있는 작은 서안이 전부였다.


명현은 오른손을 위로 가게끔 두 손을 살짝 겹쳐서 어깨 높이와 수평이 되게 한 다음 천천히 고새를 숙여 이마를 손등에 붙였다. 그리고는 문 앞에서 조금 옆으로 비켜 앉아 윤 옹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찾으셨어요.”


잠시의 여유도 없이 용건을 꺼내는 명현은 차갑고 냉랭해 보였다.


푸르스름한 옥색 빛이 묻어나는 한복을 입고 하얀 수염을 가지런히 정리한 윤 옹은 덕망높은 한학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여든이 지난 현재도 후학을 위한 집필 활동과 장학재단 설립 등의 사회 활동이 왕성했다.


“흠! 어째서 어른들이 계시는 곳에 발걸음이 그리 뜸한 것이냐? 게다가 다 큰 여자가 집밖 생활이 그리 길어서 어쩌겠다는 생각인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구나.”


윤 옹은 노안(老眼)을 번뜩이며 명현을 꾸짖었다.


“하루의 전부를 병원에서 보내야 하는 저로서는 집에서 생활을 한다고 해도 더 나아질 건 없습니다.”


잔잔하고 공손한 어투였으나 절대 그러지 않겠다는 명현의 의지가 당당하게 나타나자 윤 옹은 화가 난 목소리로 크게 호통을 쳤다.


“누가 너더러 집 나가서 하루종일 밥 먹을 시간도 없는 의사 나부랭이 같은걸 하라 했더냐? 절 위하는 부모 마음은 본 척 들은 척도 않고. 고얀 것 같으니라고.”


옹이가 진 윤 옹의 말투에 화가 날 법도 했지만 명현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의사 나부랭이가 아니라 그냥 의사예요. 할아버지 손녀한테는 의사 나부랭이라 그러셔도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겪은 힘든 시간들을 모르는 분이 아니시잖아요. 저 하나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할아버지답지 않으세요.”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로 그녀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윤 옹의 노여움을 받아내고 있었다.


“시끄럽다. 네가 의사든 그게 아니든 상관하지 않겠다. 그건 네가 집을 나갈 때 나 또한 약속한 바이니. 허나! 더 늦기 전에 결혼은 하도록 해라. 지금 같이 혼자인 몸으로 밖으로 도는 꼴을 내 더 이상은 보지 않겠다. 정 교수 장남이 지난 달 귀국했다고 들었다. 날짜 알려 달라 해서 만나 보도록 해라.”


일방적인 통고였다. 이때까지 집안의 그 누구도 어겨 본 적이 없는 절대적인 의미의 전달이었다. 그러나 명현에게는 윤 옹의 알림이 그렇게 효과적이지 못했다.


“전 결혼하지 않습니다. 왜 안 되는 건지는 할아버지가 잘 알고 계실테니, 없었던 일로 해 주세요.”


명현은 내리고 있던 시선을 윤 옹을 향해 똑바로 들면서 싸늘하게 말했다.


“네, 이놈! 어디서 망발이냐. 결혼은 왜 하지 않으며, 왜 네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냐. 당치도 않은 소리 집어치우고, 얼른 성혼해서 여자 된 본분을 다하고 살도록 해.”


순간 차분하던 명현의 표정이 얼음물을 끼얹은 듯 굳어졌다.


여자 된 본분? 그 본분이 대체 뭐죠? 당치도 않은 말씀을 하시는 군요. 감히 제게.


“잊으셨어요? 전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믿음과 사랑의 약속이 오고간 남편에게 배신당한 정영주의 딸이에요. 그리고 그걸 견뎌내지 못하고 어린 딸을 내팽개쳐 둔 채 혼자 세상을 버린 약해빠진 여자의 딸이기도 하죠. 이유가 더 있어야 하나요?”


가라앉은 절규였다.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그녀는 낮은 숨을 힘들게 몰아쉬었고 일렁거리는 맑은 눈동자는 눈물없는 울음을 울고 있었다.


“네 이놈! 어디서,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배운 머리없이 그렇게 막돼먹은 말을 내뱉는 건 누가 가르쳤더냐! 네 어미는 윤씨 가문의 종부로서 정갈하고 단정한 애였거늘, 어찌 넌 이렇게 독하단 말이냐!”


감정이 격해졌는지 창백해진 얼굴로 서안을 붙잡고 있는 윤 옹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세상과 벽을 쌓고 갊의 낙이라고는 정원의 꽃과 딸의 머리 쓰다듬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없었던 분이 돌아가신 후에는 아주 그럴듯한 평을 듣는군요. 단정하고 정갈하셨다고요? 지나치게 말이죠. 정히 제가 결혼하는걸 보시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해진 자리에 나가서 결혼이 성사되기 위해 애써 보겠습니다. 단, 저의 결혼 후의 생활에 대해서는 일절 다른 말씀 없으시리라 믿겠습니다. 출가외인이니까요. 건강하세요.”


명현은 화가 난 채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윤 옹에게 예를 보인 후 조용히 방을 나왔다.


모든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했다.


구두를 신고 마당으로 내려 선 뒤에도 움켜쥐고 있던 그녀의 주먹은 펴지지가 않았다. 마당에 내려설 때부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성균과 숙정이 신경이 쓰였지만 명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선을 보라시네요. 날짜가 정해지면 연락주세요.”


혼잣말을 내뱉는 사람처럼 명현의 목소리는 끊어질 듯 약하게 들렸다.


힘들고 아파 보이는 딸의 음성에 성균의 뺨은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아무리 내치고 거부했더라도 혼자 아파하기에는 너무도 어렸는데. 못난 아비일지라도 감싸 안아 줬어야 했었는데.


성균은 딸의 가녀린 어깨를 바라보며 애틋함으로 잠시 비틀거렸다.


그런 성균을 숙정은 입술을 말아 물며 안타깝게 부축하면서 문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명현의 뒷모습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힘들고 아픈 곳이었다. 명현은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했다. 그녀가 대문을 넘어 서자마자 막아두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명현은 자신의 눈물을 감춰주는 어둠에 감사했다.


***


60평 정도로 보이는 외과계 중환자실에는 각종 호흡 장비, 영양주사, 심장박동 체크기 등을 주렁주렁 매단 환자들이 고통스러워하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명현은 수술 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환자로 인해 중환자실 출입이 잦아졌고 치프인 병훈도 환자를 독려하기 위해 시간 간격을 좁혀가며 수시로 드나들었다.


항상 그랬듯이 명현은 본가를 다녀오고 난 다음 며칠은 정상적인 병원 생활이 힘들었다. 그만큼 조부와의 깊은 강등의 골은 모든 에너지를 동원해야만이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오프였던 어젯밤도 평소보다 더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었고 잠깐 동안의 수면조차도 성공하지 못했었다.


저녁 7시30분. 저녁회진이 시작되었다.


1년차인 명현과 인턴인 은정이 한발 먼저 병실로 들어가서 우리파트 환자앞에 서 있으면 치프가 스태프와 함께 다가와서 환자의 변화를 설명하게 된다.


환자에 대한 치프의 설명이 끝날 때쯤이면 1년차와 인턴은 다시 그 방의 다른 환자의 병상 앞에 서 있는 것으로 회진은 진행된다.


그리고 치프와 스태프의 뒤로는 액팅(acting, 오더에 따른 처치 사항을 이행 하는 것, 주로 1년차)이 아닌 다른 년차와 실습 나온 학생들이 치프의 설명과 스태프의 지시를 귀 기울여 듣기 위해 회진 시간 내내 무리를 이루며 따라 다니게 된다.


아직 몇 개의 병실 회진이 더 남아 있을 때였다.


환자의 보호자가 인우를 붙잡고 환자의 상태를 처음부터 장황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미 치프인 병훈이 설명을 했는데도 미심쩍었는지 돌아서는 인우의 가운을 살며시 붙잡으며 모든 걱정스러움과 궁금함을 털어놓았다.


인우가 편안한 표정으로 보호자의 얘기를 끝까지 들은 후 웃으며 안심하라는 말을 해주자 환자의 보호자는 그때서야 밝게 안도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옆 환자의 보호자도 이때다 싶었는지 인우를 붙잡고 환자에 대한 이것저것을 묻기 시작했다.


‘그만들 하세요. 치프 선생님이 전부 설명해 드렸잖아요.’


명현이 병훈과 스태프 회진 전 돌게되는 치프 회진 때 차근차근 설명을 했던 내용들이었다.


그렇게 한 병실에서 오랜 시간을 있다보니 명현은 머리가 멍해지면서 지난밤 노력해도 오지 않던 잠이 밀려옴을 느꼈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인우의 낮은 음성이 자장가처럼 귓가에 은은히 울리자 명현의 몸이 살며시 침대 모서리로 기대어졌다. 대화의 내용이 점점 가물가물해지면서 기분이 달콤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모든 게 하얗게 지워져 버렸다.


갑자기 기분이 이상했다. 무언가에 놀란 듯 명현이 번쩍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병실 환자의 눈동자가 모두 자신에게로 향해 있었고 바로 앞의 환자도 눈이 동그래져서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명현은 알코올을 뒤집어 쓴 것처럼 등줄기가 싸늘하다 못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럴수가. 졸았나보다. 어떻게 회진 중에 졸을 수가 있을까?’


얼마나 지났을까. 다른 사람들은 벌써 옆방으로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암담했다.


명현은 이마를 손으로 짚고는 재빨리 다음 병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슬쩍 은정의 옆으로 다가가서는 소리죽여 입모양을 보여주었다.


“깨우지 그랬어.”


“저도 몰랐어요.”


은정도 황당해 하는 눈치였다.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회진 시간이 끝이 났는지 명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명현이 마지막으로 병실 문을 닫고 나왔을 때 병훈이 복도에 선 채로 인우에게 간단한 보고를 하고 있었다. 아침시간 못지 않게 바쁜 저녁시간이라 병실을 드나드는 다른 파트의 전공의들 발걸음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명현은 병훈의 얘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쑥스러움으로 시선을 어디에다 둘 줄 모르고 있었다. 간신히 병실 복도를 지나가는 아이에게 눈길을 주며 싱긋 웃어줄 때였다.


“요즘 1년차들 잠 안 재우나?”


인우의 조용한 목소리가 또 한 번 명현을 얼어붙게 했다.


명현은 아이에게서 얼른 시선을 돌려 느긋한 표정으로 병훈에게 묻고 있는 인우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나쁜 사람, 한번쯤은 그냥 넘겨주지.’


명현은 야속한 마음으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네? 아닙니다.”


병훈은 부인할 수가 없어서 그저 짧게 대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로 명현은 조금 전보다 더 긴장했었고 함께 서 있는 다른 전공의들도 불안한 분위기를 감지하는 듯했다.


“윤명현, 따라와.”


그의 방 쪽으로 몸을 틀면서 인우는 싸한 음성을 남겼다.


명현은 큰 키가 움직이면서 생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자 그와 또 부딪혀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명현은 눈을 질끈 감으며 난감해 했다.


“별일이다. 윤명현. 회진중에 졸기도 하고. 어서 가 봐. 그렇게 화나신 거 같지는 않으니까.”


명현의 키보다 조금 더 큰 병훈이 편안한 눈길로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어제 오프였던 애가 졸긴 왜 졸아. 그것도 어떻게 서인우 선생님 옆에서 졸 수가 있냐? 난 옆에만 가도 간장이 졸아붙는 것 같은데. 여자들이 보기에는 안 무섭나 보지? 이해가 안 되네, 이해가. 치프 선생님! 선생님은 아직도 서인우 선생님 앞에서는 무지 긴장하시잖아요.”


2년차 승수가 건들거리며 동의를 구하자 병훈이 딱 하고 승수의 뒤통수를 쳐 올렸다.


“지랄, 너나 잘 하세요.”


그들은 전혀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들처럼 가볍게 장난을 주고받았다. 명현은 그들이 부러웠다.


지금은 피할 수만 있다면 인우를 피하고 싶은 게 명현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지금은 그의 감정에 대항할 여력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인우의 방 앞까지 걸어가는 동안 명현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섞여 지나갔다.


‘과연 무덤덤하게 그와 마주할 수 있을까. 또 이유모를 두근거림이 생겨나지 않을까.’


명현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찌꺼기처럼 흩어져 있는 힘을 끌어 모았다.


똑똑.


크지도 않은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명현은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쁜 모양인지 소리나는 쪽으로는 쳐다보지도 않고 인우는 책상 위에 가득 놓인 자료와 모니터를 번갈아 보면서 자신의 일에 빠져 있었다.


이미 퇴근 준비를 마쳤는지 조금 전까지 입고 있던 푸른색의 수술복이 옅은 회색의 긴팔 셔츠로 바뀌어 있었다. 누가 일부러 챙겨서 입혀주는 것처럼 그의 옷차림은 말끔하고 세련되어 있었다.


하루종일 수술실에 매여있는 외과의는 출퇴근 시를 제외하고는 수술복과 하얀 가운이 병원내의 옷차림이었다. 그러니 매일같이 그의 출퇴근을 지켜보지 않는 이상은 한번씩 보게 되는 평상복 차림의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당신도 가운 밖에서는 부드러워 보이네요.’


한참을 문 근처에 서 있던 명현이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먼저 그를 불렀다.


“선생님.”


그래도 모니터에 고정된 그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앉아.”


그는 뭐가 잘 풀리지 않는지 손끝으로 턱 주위와 뺨을 쓰다듬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명현이 책상에 붙여져 있는 의자를 살며시 뒤로 당겨내어 앉으려 하자 조금전과 같이 가라앉은 그의 음성이 들렸다.


“거기 말고.”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 저기에 앉으라는 건지.


명현은 그의 등뒤에 놓인 소파와 소파를 가리키고 있는 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안 앉을 건가?”


아무래도 그의 의도를 맞추려면 수수께끼를 잘 풀어야 할 것 같았다. 망설이는 얼굴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한 명현을 인우가 왜 그러냐는 얼굴로 슬쩍 올려다보았다.


“이유를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우습게도 명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에게 묻고 말았다.


“널 왜 불렀다고 생각하지?”


그는 느긋한 표정으로 명현의 기억을 상기시켜 주었다.


“…….”


속상하게도 명현은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차가운 물로 빨리 식혀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끈거렸다. 그도 명현의 변화를 눈치 챘는지 빙긋 웃었다.


“회진 때 졸은 벌서는 거야. 벌 세우는 사람 당황스럽게 이유 같은 거 묻지 말고 무조건 앉아 있어.”


그는 태연하게 웃음 꼬리를 감추며 여전히 발갛게 달아오른 명현의 얼굴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명현은 책상 모서리를 천천히 돌아서 그의 뒤에 있는 소파로 다가가 그의 말대로 무조건 앉았다. 벌이라니 받아야 하겠지만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일에 집중해 있었고 자신의 존재조차 잊은 듯 보였다. 그가 두들기고 이는 컴퓨터의 키보드 소리가 메트로놈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와 불규칙하게 뛰던 명현의 심장박동을 규칙적으로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느긋해질 수가 없었다.


‘그 무조건이 언제까지인지. 그가 지금하고 있는 일이 끝날 때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지.’


명현은 그의 넓고 당당한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게되는 그의 등은 언제나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힘든 무게도 거뜬히 이겨낼 것 같은 힘이 느껴졌다. 거침없이 밀고 나가는 단단한 무기 같았다.


명현은 이 방의 유일한 소리인 키보드 소리가 차츰 멀어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주위도 조금씩 어두워졌다가 또 다시 밝아지고 있었다. 순간 명현은 자신이 잠시 잠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며칠 동안 그토록 애를 써도 오지 않던 잠이 왜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 들이닥치는지.


명현은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경을 벗고 눈가를 꾹꾹 누르며 졸음을 쫓았다. 소파 등받이에 등이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허리를 더 반듯하게 고쳐서 앉았다.


‘아, 제발. 지금은 안돼.’


잠에게 간절히 애원하고 싶었다.


명현은 최대한 눈에 힘을 주면서 보이는 대로 머리에 입력시켰다.


우선 적당한 길이로 단정하게 잘려진 그의 머리가 보였고 적당한 크기의 귀도 그리고 얼핏얼핏 그의 기다란 손가락도 보였다. 거기에….


한참을 일에 몰두해 있던 인우는 등뒤의 정적을 감지했다. 그는 의자를 조심스럽게 뒤로 물리면서 뱅글 돌려 앉았다. 인우는 좀 전에 못다 지은 미소를 한껏 부드럽게 지었다.


소파 팔걸이까지 머리가 미끄러진 상태로 명현은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풍성한 속눈썹이 작은 떨림도 없는 걸 보면 깊게 잠들어 있음이 분명했다.


‘이렇게라도 널 마음껏 볼 수 있으니….’


인우는 몸을 일으켜 소파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바닥에 닿도록 굽혔다. 그리고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문득 그녀의 말간 눈동자를 항상 유리벽처럼 가리고 있는 안경이 그이 눈에 거슬렸다.


인우는 그녀가 기척을 느끼지 못하도록 살며시 그녀의 안경을 벗겨내었다. 오뚝하게 도드라진 콧날에 눌러진 안경 자국을 그는 손끝으로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윤명현, 조금만 더 다가와.’


인우는 파랗게 짙어진 그녀의 눈 밑 그림자를 가만히 어루만지면서 명현의 모습을 마음껏 눈에 담았다.


그러다 눈가를 쓰다듬던 손길을 그녀의 붉은 입술 위로 가져갔다. 그러나 행여 잠이 깰까봐 닿을 듯 말 듯 스치듯 쓸어보기만 했다.


하지만 손길이 망설이던 명현의 입술을 그의 입술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내리더니 그의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살짝 덮었다.


# 6장


눈두덩을 내리 누르던 무거움이 사라진 것 같았다. 명현은 한결 가벼워진 눈꺼풀을 쉽게 밀어 올렸다. 그리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선 공간이었다. 자신의 아파트도 아니고 의국의 침대 위도 아니었다.


‘누구의 방이지? 아….’


그녀의 머릿속이 금세 어디인지 생각을 해내었다.


명현이 옆으로 기울어진 몸을 다급하게 일으키자 뭔가가 스르륵 흘러 내렸다. 그녀는 바닥으로 떨어진 회색 재킷을 집어들었다. 인우의 것이었다.


명현은 환하게 불이 켜진 방을 두리번거려 시간을 확인했다.


11시30분. 무려 3시간 가까이 잤었던 모양이었다.


명현은 재빨리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콜이 왔었는지부터 체크했다. 없었다. 다행의 한숨과 함께 그녀는 얼굴을 쓸었다.


그런데 뭔가가 허전했다. 제자리에 있어야 할 안경이 만져지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책상 위로 향했다. 거기에는 두 개의 안경이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이게 벌이라니.’


명현은 쓰게 웃었다.


그의 재킷을 옷걸이에 걸어두고 안경이 놓인 책상으로 걸어갔다. 안경을 집어들기 위해 내뻗어진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칫거렸다.


그녀의 안경 옆에는 밋밋한 열쇠가 매달려 있는 은색의 스틸 바가 펼쳐진 종이를 누르고 있었다.


[졸아서 벌 세워뒀더니…. 문은 내일 콜 하는 직시 열도록 해. -서인우.]


명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에게는 내가 나쁘듯 내겐 당신이 나빠요. 날 그냥 둬요. 자꾸 흔들지 말아요.’


그녀의 숨을 크게 내쉬고는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은 다음 문을 잠갔다. 그녀의 마음까지 단단하게….


***


명현은 새벽 시간 동안 응급실 콜을 두 번이나 받으면서 시간 맞춰 중환자실에 들러서 처방전도 써야 했다.


그의 방에서 달게 잔 이후로는 거의 밤을 꼬박 지새운 상태였다. 당직일 때는 늘 해 오던 일상이었는데도 오늘 새벽은 여느 때보다 훨씬 힘이 들었다.


드러나 살갗이 바늘이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고 목 안도 부었는지 물조차도 쉽게 삼켜지지 않았다.


그녀는 약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강단이 있어 좀처럼 잘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본가에만 다녀오고 나면 의례히 꼭 아팠다. 아마도 이번에도 겪어야 할 것 같았다.


아침 6시30분.


명현이 병실을 돌며 환자들의 드레싱을 해주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보지 않아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진행 중이던 환자의 복부 드레싱을 끝내놓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윤명현.>


다른 내용 없이 그저 그녀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명현은 주머니 속의 열쇠를 한 번 만져보고는 계단을 통해 6층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빠른 걸음으로 뛰었던 탓인지 두통이 들고일어났다. 명현은 간호사실 모서리를 지나면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는 길게 이어진 복도를 막 접어들었다.


한쪽 손에 가방과 재킷을 든 채로 복도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명현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두근, 아무래도 자신의 심장이 고장이 난 것 같았다. 보기만 했을 뿐인데. 열이 오르는 듯 했다.


명현은 천천히 그를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그는 밤을 샌 자신과는 다르게 생기 있고 여유 있어 보였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인우에게 내밀었다.


“네가 열어.”


그는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옅게 웃음 지으며 명현을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웃지 말아요.’


그녀는 몸을 돌려 열쇠를 꽂은 다음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그리고 옆으로 비켜서면서 다시 열쇠를 내밀었다.


“들어와.”


인우는 열쇠를 받아들면서 명현의 옆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드레싱 도중에 내려왔습니다.”


‘싫어요.’


명현의 거부였다.


“네 거니까 들어와서 가져가.”


명현은 목안이 따끔거렸다. 가둬뒀던 말들이 목안을 뻑뻑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몇 발자국 안으로 들어가 보니 책상 위. 그의 가방 옆에 작은 종이백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종이백을 들여다보았다. 고소한 버터냄새가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리고 그녀도 건드렸다.


“화나지 않으세요?”


뜬금없이 가시 돋친 명현의 말에 책상을 정리하던 인우가 고개를 들어 그녀와 마주했다.


“화나.”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차라리 화를 내세요. 이렇게 괴롭히지 말구요.”


드디어 그녀의 목안에 갇혀있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난 감정을 나누는 어리석은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거예요. 그로 인해서 절대 아프지 않을 거니까.


“괴로워? 왜? 마음을 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아니면 다시 닫아 버렸는데 자꾸 흔들려서? 어떤 거야?”


그는 명현의 눈동자를 붙잡고 낮은 음성으로 채근했다.


“날 그냥 내버려두세요…. 제발.”


명현이 평소처럼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애원하듯 부탁하자 인우는 뒤돌아 서서 성난 듯 창문을 활짝 열어 버렸다.


“껍질이 깨어졌는데도 못 빠져나오는구나, 바보처럼.”


깨어졌다고? 순간 안타까운 빛을 띠고있던 명현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하려 애를 썼다.


“껍질이 깨어져도 못 나올 수 있어요.”


‘바보라도 좋아요. 죽을 만큼 아픈 거 보다는 나을 테니.’


명현은 바깥은 바라보며 서있는 그의 등을 향해 같은 말을 해 주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그가 알아 버렸다.’


놀람과 당황스러움으로 찌푸려진 그녀의 미간은 반듯해지지 않았다.


명현은 복도 벽에 뒷머리를 부딪쳐 쿵쿵거리며 불안함을 달래었다.


***


서울에서 분당으로 빠지는 길은 항상 정체구간이었다.


휴일 오전이라 출퇴근 시간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일정 구간의 정체로 속도가 늦어지고 있었다.


인우가 간신히 빠져 나온 길로 십 여분 차를 몰자 아담한 집들이 나란히 붙어있는 주택가가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하얀 나무 펜스로 담을 대신한 그의 부모님이 사는 집은 붉은 벽돌담이 대부분인 집들 속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대문 없이 울타리를 지나면 작은 마당 한 켠에는 종류별로 조금씩 가꾸어진 채소밭이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설익은 과일들이 매달려 있는 키 작은 나무들도 있었다.


“저 왔습니다.”


인우는 현관을 열고 신발을 벗으며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얼굴 보여주러 왔구나?”


부엌에서 그의 어머니인 김 여사가 종종 걸음으로 현관까지 아들을 맞으러 나오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미인형의 얼굴을 한 김 여사는 연신 아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 형 왔어?”


단번에 형제임을 알 수 있는 그의 동생 정우가 훌쩍 큰 키로 복도 쪽 방문을 열고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저 왔어요.”


인우는 집 안쪽에서 바깥 정원으로 이어지는 곳에 만들어 놓은 툇마루를 향해서 지법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정원의 정취를 느낄 수 있게끔 그의 부친이 생각해 낸 것이었다.


툇마루에 앉아있는 서 원장은 마주한 여자와 바둑에 열중하느라 그의 인사를 단순히 고개만 끄덕거리면서 받고 있었다.


“아버님, 잠깐만요.”


서 원장의 반대편에 앉아있던 여자가 양해를 구하더니 잽싸게 일어나 인우에게 달려들어 팔을 껴안았다.


“오빠, 왜 이제서야 얼굴을 보여주는 거야.”


자그마한 키에 청바지 차림의 여자는 동그란 눈으로 반색하며 정다운 행동을 보였다.


“박지원, 떨어져. 누가 시아주버니한테 이렇게 매달리냐. 그것도 시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큰오빠에게 매달리는 막내 동생을 바라보듯 인우는 온화한 표정으로 꾸짖는 척했다. 그러자 어느새 뒤따라 나온 정우가 못 말린다는 얼굴로 지원을 두둔했다.


“냅둬, 형. 쟤 저러는 거 하루 이틀이야? 봐, 아버지도 가만히 계시잖아.”


정우의 약혼녀인 지원은 양가 어른들끼리 서로 친한 사이여서 어릴 때부터 친동생처럼 지내온 사이였다. 동생 정우와 인연이 되려고 했었는지 둘이 그렇게 싸워대더니 2년 전에는 결국 약혼을 한 상태였다.


건축가인 지원의 아버지와 인우의 부친 서 원장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들은 같은 서울 안에서 지내는 걸로는 부족했는지 결국 지원의 아버지는 나란히 집을 지어 서 원장을 옆집에 살게 만들었다.


낙천적인 성격인 정우와 끊고 맺음이 확실한 지원은 어릴 때부터 서로 자주 부딪쳤다. 되는 것도 없고 또 그렇다고 안 되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정우는 세워둔 계획을 정확하게 지키려고 애쓰는 지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성격차이로 티격태격 대던 둘은 정우가 제대후 복학을 하면서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미대를 다니던 정우와 사범대를 다니던 지원은 싸우면서도 3년동안의 캠퍼스 생활을 함께 하면서 미운 정을 키웠다.


그러다 정우가 프랑스로 유학을 가면서 떨어져 있게 되자 그렇게 쌓인 정은 이내 애틋함을 포함한 사랑으로 발전을 하게 되었다.


정우가 3년의 유학을 마치고 올 해 초 귀국을 했을 때 두 사람은 결혼을 하려 했으나 서 원장의 고집으로 형 다음이라는 전제 조건을 달고 약혼부터 하게 되었다.


식사가 다 되었음을 알리는 김 여사의 부름에 모두들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많이 바쁜가 보구나. 귀국했을 때보다 어째 좀 마른 거 같다.”


김 여사가 인우 앞으로 반찬을 밀면서 걱정했다.


“아뇨, 며칠 잠을 설쳐서 그런가 봐요. 학회 준비도 있고 해서.”


인우는 까칠해진 턱을 슬쩍 문지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싱긋 웃었다.


"오늘 선 보는 거 때문에 부르셨잖아요. 뜸들이지 말고 그냥 본론부터 말씀하세요.“


밥을 먹던 정우가 머뭇거리던 부모를 대신해 말을 꺼냈다.


“정우 약혼이 너무 길어져서 더 이상 늦출 수가 없구나. 또 마땅한 자리도 있고 해서, 어떠니?”


김 여사는 큰아들의 얼굴 표정을 살피듯 보고 난 후 빨리 다음을 말하라는 뜻으로 남편인 서 원장의 허벅지를 찔렀다.


“흠, 조 원장 조카인데 대학 강의 나간다더라…. 한 번 보는 게 어떻겠냐?”


부정적일 인우의 대답을 예상하면서도 서 원장은 조심스럽게 의사를 물었다.


“정우부터 보내세요. 지원이 나이도 있는데. 그리고 선은 보지 않겠습니다.”


인우는 부친의 고집으로 동생의 결혼이 연기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결혼에 대한 의사가 없음을 누누이 밝혔는데도 부친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정우가 재빨리 끼여들면서 솔직한 말을 꺼냈다.


“형, 잘 생각해 봐. 지원이 28살이야. 올해 지나면 쟤29살이야. 마누라가 29살이면 다들 이해하는데 약혼녀가 29살이라고 하면 다들 날 어떻게 보는 줄 알아? 사랑하는 동생 생각해서라도 선 좀 봐라 응? 난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솔직히 동생인 내가 봐도 뻑 가게 멋있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야? 아직도 피아노보다 더 좋은 여자가 없어서라고 하면 오늘부터 내가 형 할거야.”


식탁에 앉은 모두가 정우에게로 눈을 돌렸고 그런 동생에게 인우는 조용히 경고했다.


“까불지마, 서정우. 마음에 두고있는 여자가 있습니다.”


맑은 날 한낮은 마른번개처럼 예상치 못한 인우의 말에 김 여사와 서 원장은 궁금함을 당장이라도 풀어주기를 원하는 급한 표정들이었고, 동생 정우는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형! 여자 생겼어? 뭐하는 사람이야? 나이는? 예뻐?”


놀람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정우는 한 번의 질문으로 모든 걸 알고 싶어했다.


“얘, 말 좀 해봐. 응? 그럼, 한 가지만 얘기해 봐. 딱 한가지만.”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화사한 얼굴로 김 여사는 식탁을 툭툭치며 인우를 졸랐다.


“의사예요.”


순수하게 전해지는 단어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 심심한 대답이었다. 인우는 자신에게로 향해진 가족들의 너무하다는 노골적인 시선에도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우리 병원 의사냐?”


서 원장이 거들어 관심을 보이며 확인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고 말씀드리면 아마 내일 점심을 함께 하고 계실 테니까요.”


인우는 부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말씀드리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어 적당한 이유를 대며 내일 오전 중으로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 기다려 보도록 하마. 자식 놈 원망 들어가며 간신히 의사 만들어 놨더니 잘하면 덤으로 의사 며느리도 보겠구나.”


서 원장은 무심한 듯 말했지만 얼굴에는 이미 호기심이 가득하다 못해 넘쳐흐르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걸 떠나서 이성에 대해서는 그토록 관심 없어 하던 아들이 여자가 있다고 당당히 밝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을 지경인데 게다가 상대도 의사라니 서 원장은 궁금함으로 조급해지는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고 있어야 했다.


식구들대로 한 마디씩 물어봤으니 지원이 빠질 리 없었다. 그녀의 궁금증은 어른들과는 달리 아주 순수했다.


“오빠. 나도 하나만 물어봐도 돼? 나보다 나이가 많아? 아니… 적어? 나 그거 궁금해 할 자격 있는데….”


인 우는 지원의 물음이 귀여웠는지 싱긋 웃어주면 눈짓으로 힌트를 주었다.


“헉, 적다고? 나보다? 오빠랑 나랑 일곱 살 차인데?”


지원이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커진지도 모르는 채 흥분하자 그녀의 바로 옆에 앉아있던 전우가 목소리를 낮추라는 듯 손바닥을 아래로 두어 번 내렸다.


그리고 형인 인우를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설마 띠동갑 뭐 이런 건 아니겠지? 아, 알았어. 그만 할게.”


정우는 거기에서 멈추라는 인우의 눈빛을 읽고는 재빨리 말을 그쳤다.


“지원이 보다 많이 어리니?”


듣다보니 조금은 걱정스러웠는지 김여사가 넌지시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거의 비슷할 겁니다. 한 살 정도 적든지.”


그러자 정우가 또 한 번 잽싸게 끼여들었다.


“뭐야, 정확한 나이 몰라? 형답지 않게 뭐가 그리 미지근해?”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인우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말하자 김 여사는 더 애가 닳았다.


“너 혼자만 마음에 두고있니?”


“아직은요.”


아직이라…. 그럼 언젠가는 이루어진다는 뜻인가?


인우는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터뜨렸다.


***


그녀가 보고 싶었다.


식구들이 그녀에 관해 물어 올 때부터 인우는 명현의 맑은 눈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저년까지 먹고 가기를 바라던 가족들에게 약속을 핑계로 그럴 수 없음을 전하고 인우는 부모님의 집을 나섰다.


서울로 향하는 도로가 앞차들의 미등이 빨간색으로 자주 변하면서 지체되자 인우는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툭툭 쳤다.


한참을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가 오랫동안 한자리에 서 있게 되자 인우는 휴대폰을 꺼내었다.


뚜우-.


신호음이 길게 보내지기만 할 뿐 통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우는 정면을 응시한 채로 휴대폰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뚜우. 또 다시 신호음이 길어졌다.


[네.]


분명하고 또렷하던 목소리가 어쩐지 약한 듯이 들렸다. 인우는 이상한 느낌을 받으면서 말을 건넸다.


“어디니.”


명현은 대답이 없었다. 답답함이 그의 가슴속을 뜨겁게 휘젓고 다니는 것 같았다.


“윤명현, 어디야?”


낮게 울리는 그의 음성이 다급하게 터져나왔다.


[집…이에요.]


간신히 쥐어짜고 있는 목소리는 아픈 사람의 것이었다.


“어디 아프니?”


인우는 순간 어서 와달라는 그녀의 대답을 기대했다.


[…아뇨.]


그러나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도 그녀는 아니라고 말했다. 무참히 빗나간 대답이었지만 인우는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끊어.”


인우는 도로의 갓길로 핸들을 틀어서 중간에 빠지는 다른 길로 차를 돌려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쾅! 쾅! 쾅!


명현은 조금 전부터 울려대는 소리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도저히 일어날 수 있을 거 같지 않아 무시하려 했지만 상대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끈질기게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두통으로 흔들거리는 머리는 들 수고 없을 만큼 무거웠고 높아진 열 때문이지 위장은 메스꺼움으로 울렁거렸다.


그녀는 가까스로 침대에서 발을 내린 다음 벽을 짚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도어락을 풀어 쿵쾅거리는 시끄러움을 잠잠하게 만들었다.


거칠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인우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질렀다.


“뭐야 너!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왜 함부로 문 열어!”


그의 머리칼은 뛰어왔는지 앞쪽으로 흐트러져 있었고 급한 숨을 내쉬면서도 명현을 전체적으로 훑듯이 살펴보았다.


그때였다. 현관의 신발장에 눈을 감은 채로 힘겹게 서 있던 명현은 스르르 바닥으로 흘러내리듯이 주저앉았다. 인우는 곧장 그녀의 머리를 받쳐들고 뺨을 토닥거려 보았다.


“윤명현, 윤명현?”


명현의 몸은 발열 덩어리처럼 후끈거렸다. 인우는 그녀를 안아들어 침대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런 다음 여러 장의 수건에 물을 적셔 명현의 이마와 목 그리고 겨드랑이 사이까지 대어 주고는 급한 동작으로 현관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인우가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링거병과 주사기가 들어있는 조그마한 가방이 딸려있었다.


그녀에게서 내뱉어지는 열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조그맣게 벌려진 입술이 쌕쌕거리면서 끙끙대는 소리를 내자 인우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그려진 것처럼 가지런한 그녀의 눈썹을 손끝으로 천천히 정리하듯 쓸어주었다.


‘넌 왜 그렇게 혼자이려고 하지?’


그렇게 한시간 정도 지나자 높았던 열이 떨어지면서 그녀의 숨소리는 한결 편안해졌다.


침대 모서리에 앉아서 명현을 지켜보던 인우는 몸을 일으켜서도 한참을 더 내려다본 후 침실을 나왔다.


거실로 나온 인우는 소파에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아 목을 소파 등받이 뒤로 젖히고는 눈을 감았다. 피로가 엿보이는 그에게도 곧 잠이 찾아들었다.


***


명현은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목 안이 잠긴 것처럼 말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물이 필요했다. 물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명현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순간 어지러움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그녀는 다시 발을 천천히 바닥에 내딛으려고 힘을 실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아니, 불편했다.


명현은 이물질이 느껴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투명한 줄이 침대 옆 액자를 걸어뒀던 곳에서부터 손등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누가? 혹시….


명현은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는 링거액에서 시선을 돌리더니 손등에 꽂혀있던 바늘을 빼내었다. 그리고는 조금전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을 위해 침실을 벗어났다.


부엌으로 가서 원했던 물을 양껏 마셨고 욕실로 가서 찬물로 세수도 마쳤다. 그리고 아픈 자신의 얼굴이 보기 싫어 거울을 피해서 재빨리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렇게 욕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소파 등받이 위로 짧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조심스레 걸음을 떼어서 소파로 다가간 명현은 혹시나 하고 생각했던 것처럼 자신을 돌본 이가 인우임을 확인했다.


가끔씩 봐 오던 그의 사복차림은 휴일이라서 그랬는지 평소보다 가벼워 보였다. 검정색 반팔 티셔츠와 짙은 재색의 바지가 그의 큰 키를 깔끔하게 마무리시켜 주고 있었다.


그는 긴 다리를 쭉 뻗고 편안한 표정으로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근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보아왔지만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잠이 든 그의 모습은 처음이라 낯설었다. 하지만 잠이 든 모습 또한 그다웠다.


반듯한 이마에서 높게 솟은 콧날이 시원스레 뻗어 있었고 적당히 진한 눈썹과 단정한 입술선이 그의 얼굴에 담겨있었다.


명현은 소파 옆에 선 채로 그의 잠든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미안해요.’


***


불편한 자세 때문인지 인우의 단잠은 길지 않았다.


냄새 좋은 커피향과 잔잔히 들려오는 노래소리가 그를 빠른 속도로 잠에서 벗어나게끔 도와주었다.


그러다 문득 아픈 명현이 떠올랐다. 인우는 벌떡 몸을 일으켜서 침실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뭐 하는 거지?”


그는 눈을 가늘게 찌푸리면서 한 발 안으로 들어섰다.


옷장을 열어둔 채로 가방에 옷가지들을 챙기고 있던 명현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우를 잠시 쳐다보고는 옷들을 다시 챙겨넣었다.


“병원에서 갈아입을 옷들 챙겨요.”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건조하게 말했다.


“링거는 왜 그래.”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그는 화가 나 있었다.


“반 이상 들어갔어요. 그리고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성큼 명현의 곁으로 다가간 인우는 그녀의 팔을 잡아 침대 위로 앉히고는 화장대 앞에 놓인 의자를 끌어당겨 그녀와 마주 앉았다.


심하게 앓고 난 다음이라 그런지 명현의 눈은 정화라도 된 것처럼 더 맑아져 있었다. 움푹 파인 쇄골이 언뜻 드러나 보이는 티셔츠 위로 그녀의 선 고운 가냘픈 목덜미가 시리도록 하얬다.


“내 눈엔 아직 괜찮지 않은 걸로 보여.”


인우는 미열이 남아있는 얼굴로 고집을 부리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그의 시선이 온전하게 자신에게 쏟아지자 명현은 얼른 말문을 돌려 버렸다.


“네가 전화를 했더군. 아프니 지금 와달라고.”


명현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자신은 절대 그랬을 리 없었다.


“…설마요.”


명현은 외면했던 시선을 그에게로 돌리면 예쁜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그런데 그 설마가 사실인데 어쩌지?”


그의 기다란 눈매가 명현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의 눈빛에서 거짓이 느껴지지 않아 명현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게 사실이라고? 말도 안돼.


“윤명현, 세상에는 그럴 리 없는 일은 없어.”


인우의 단호한 말에 명현은 자신이 그랬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겠는지 답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시후면 알게 될 일이겠지만 인우는 지금만은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그냥 내버려두고 싶었다.


절대 그럴 수 없는 일로 못박아버리는 그녀를 더 고민하도록 놔두고 싶었다. 그래서 인우는 아랫입술을 꼭꼭 씹어대며 심각한 생각에 빠져있는 명현을 구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같은 노래만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 거지?”


인우는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며 지금껏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을 물었다.


“…진정제 같은 거예요.”


자신이 정말 인우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도움을 부탁했을까 하는 생각에만 빠져있던 그녀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스치는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자 그가 명현의 팔을 확 다잡으며 둘 사이를 좁게 만들었다.


“지금 네가 진정시켜야 할 게 뭐지?”


“…….”


그에게로 거의 맞닿을 만큼 당겨진 명현은 자신을 뜨겁게 담고있는 그의 눈을 보았다.


쿵쾅, 쿵쾅. 그녀의 심장이 달음박질을 치고 있었다.


당신을 보면 이렇게 제멋대로가 돼버리는 심장을 난 진정시켜야 돼요.


“말해봐. 아니면 내가 말해줄까? 윤명현?”


“아뇨!”


명현은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그의 팔을 힘주어 누르며 뒷말을 잘라 버렸다. 행여 그가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말하게 될까봐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바보인 줄만 알았더니 겁도 많군. 그건 나 때문이야. 그렇지? 그렇다고 대답해!”


인우가 잡고있던 그녀의 팔을 거세게 흔들자 명현의 몸이 크게 출렁거렸다. 그녀의 눈이 차츰 흐려지고 있었다. 조금씩 차 올라오는 물기가 그녀의 눈동자에 그득해질 때가 되어서야 명현은 깨물어서 붉어진 입술을 달싹거렸다.


“틀렸어요. 아니….”


순간 그의 입술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덮어버렸다. 그는 마음을 감추려고 하는 그녀의 입술을 삼킬 듯이 들이마셨다.


그렇게 애틋한 눈빛을 하고 있으면서도 돌아서려는 그녀를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강한 힘으로 내리 누르는 그의 입술은 그녀의 호흡까지 단숨에 빼앗아 버렸다.


명현은 갑작스런 그의 키스에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입술을 빨아들이는 그의 뜨거운 숨결에 명현은 팔을 침대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명현의 팔이 힘없이 떨어지자 그는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그녀의 입술을 열고 거침없이 그의 혀를 밀어 넣었다. 인우는 그녀의 입속을 샅샅이 헤집으며 연한 살갗이 주는 감촉을 마음껏 소유했다.


명현에게도 그의 열정이 느껴졌다. 숨길 수 없어 휘몰아치듯 내뱉는 그의 마음이 맞닿아 뛰고있는 심장에서 간절하게 전해져 왔다. 명현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뺨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미안해요….’


인우는 명현의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그녀의 입속을 더는 갈 수 없을 때까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녀의 숨이 가쁘게 차 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날 느껴. 너에게 향한 내 마음을 가져가.‘


인 우는 그녀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핥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윤명현, 네 심장소리를 잘 들어봐.”


그가 명현의 입술 위에서 감미롭게 속삭였다. 그녀는 기다란 속눈썹에 눈물을 매달은 채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내쉬고 있었다.


‘슬프게도 당신을 향해 미친 듯이 뛰고 있네요.’


명현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로 인해 맺혀있는 눈물이 떨어지려 하자 인우는 그녀의 속눈썹에 입술을 묻어 버렸다.


“난 널 울게 하지 않아.”


눈물을 흡수하는 그의 따뜻한 입술을 믿고 싶었다. 부드럽게 뺨을 쓸어주는 그의 손끝도 가지고 싶었다. 끝없이 감싸주며 품어 줄 것 같은 그의 단단한 어깨도.


그러나 명현은 고개를 저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미 알고있는, 그걸 잃고 난 뒤의 지독한 아픔이 그녀의 감은 눈을 뜨게 만들었다.


명현은 그의 입술에서 힘겹게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가슴을 힘껏 밀어냈다.


“미안해요…. 안 되겠어요.”


작은 소리였지만 명현의 말은 또렷했다. 그를 밀어내느라 뻗었던 팔을 간신히 거두며 그녀는 그의 온기를 멀리하려 했다.


“그래도 희망적이군. 네게서 미안하다는 말도 듣고.”


인우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명현을 꿰뚫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을 놓았다. 적어도 이제는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마음을 미안함으로 표현하는 그녀의 태도가 다행스러웠다.


그리고 그의 입술 아래에서 뜨거운 숨결을 고스란히 받아내던 그녀의 입술도 다음을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여기서 멈춰요. 지금 당장.”


명현은 스스로에게 당부하는 말을 차분하게 입 밖으로 꺼내었다.


어느새 그가 들어와 버렸다해도 다시 비워내면 될 일이다. 그리고는 그 어느 누구도 담지 않을 것이다.


“이미 늦었어, 윤명현. 그러길 바랬다면 네 심장소리를 내게 들려주는 일은 없었어야지. 네겐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아. 그냥 내 곁에 있기만 해.”


그의 손이 옆으로 향해진 명현의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의 손길은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뺨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갸름한 턱을 그에게로 돌려놓았다.


조금 전까지 촉촉하게 젖어있던 입술을 벌써 빈틈없이 앙다물어져 있었다.


인우는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선을 덧그리며 자신의 진심을 내어 보였다.


“그것도 어렵니?”


그가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명현이 고개를 저으면서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어려워요.”


“누굴 사랑하게 되는 게 그렇게 두려워?”


인우는 피해가지 않았다. 그녀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렇게 자신 있으세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대체 어떤 건가요, 사랑은?”


그녀는 애절하게 되물었다.


철저하게 피했어야 하는 건데. 그랬다면 이렇게 마음 아프지는 않을텐데.


명현은 그의 얼굴을 눈동자에 가득 담으며 자신의 사랑을 단단히 접어버렸다.


“아니, 나도 자신 없어. 그리고 잘 몰라. 네가 말하는 그런 사랑은 나도 처음이니까. 하지만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 무턱대고 피해야 되는 끔찍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는 점점 차갑게 굳어지고 있는 명현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인우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쥐려 하자 명현이 그의 손을 잡았다. 고운 마디가 쭉 뻗어내린 아름다운 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서 인우의 손을 천천히 내리면서 입술을 열었다.


“내가 아는 사랑은 끔찍했어요. 무턱대고 피하고 싶을 만큼. 이기적이고 또 절망적이었어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그런 게 아니었어요. 이젠 내가 겁쟁이가 된 이유를 알았으니 그만해요.”


명현은 잔잔한 음성으로 싸늘하게 말했다.


자신의 상처를 담담하게 내뱉기 위해 그녀는 그의 손에 닿아있는 손끝을 살짝 움켜쥐었다. 떨림을 감추려는 그녀의 행동에 인우의 눈빛은 짙게 변해갔다.


그리고 분명하고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들어, 윤명현. 그건 네 사랑이 아니야. 널 힘들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널 가두어 둘 수는 없어. 네가 본 사랑이 전부는 아니니까.”


인우는 그녀의 상처를 건드렸다. 아프지만 그녀 스스로 깨뜨리고 나오기를 바라서였다.


그가 억지로 손을 끌며 당길 수도 있지만 그건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녀의 의지대로 당당하게 헤치고 나오는 것이 그녀다운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명현은 인우의 생각대로 따라와 주지 않았다.


“맞아요. 내 사랑은 아니지만 내겐 세상 전부였던 사람의 사랑이었죠. 그러니 그 사랑은 내겐 전부였어요. 그래서 안하려구요.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팠으니까.”


결국 그녀는 또 자신의 껍질에 둘러싸여 버렸다. 잠시 빠져 나오는 듯 보이더니 어느새 어두운 핑계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인우는 가슴을 짓누르는 안타까움으로 명현을 거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낮게 소리쳤다.


“그만 해! 네게 세상 그 이상으로 중요한 사람이었다 해도 그건 널 내팽개쳐 두는 변명에 불과해. 그러면 날 향해 뛰던 네 심장은 어떻게 할거지? 버릴 건가? 미련 없이?”


인우는 자신의 가슴에 더 힘껏 그녀를 가두었다. 명현의 귓가에 닿은 그의 입술이 그녀의 사랑을 물었다. 네 사랑은 지나치는 바람처럼 무심히 떠나보낼 거냐고.


“버릴 거예요.”


그의 어깨 너머로 명현의 서늘한 대답이 떨어졌다. 망설이지도, 아쉬움이 묻어 있지도 않은 메마른 목소리였다. 명현은 손을 올려 인우의 등을 감싸고 싶었다.


허락도 없이 다가온 두금거림이었지만 그녀는 그가 아파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더 예쁜 사랑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자신을 담아버려 마음이 상하게 돼버렸다.


‘미안해요.’


명현은 그를 마주 안지 않기 위해서 가만히 손을 말아 쥐면서 애를 써야 했다.


“그렇게 쉽게 얘기하다니. 정말 바보군.”


인우가 그녀의 몸을 조금씩 앞으로 떼어내며 태연하게 말하자 명현이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걱정 마세요. 내게 사랑을 하라는 것보다는 덜 잔인할 테니.”


명현은 정확히 자신의 어디가 아픈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따끔거리는 가슴인지 아니면 감정을 감추어 거짓을 내뱉는 목 안이 그런 건지.


그는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서 있는 명현의 눈가를 가만히 쓸어주며 몸을 일으켰다.


“열이 남았어, 그만 쉬도록 해. 더 이상 서투른 변명으로 네 마음을 숨길 필요 없어. 변명은 진실이 아니니까.”


마주한 눈길에서 인우는 지체없이 등을 돌렸다. 어둑해진 어둠 속으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쿵.


잠시후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명현의 귓가에 공허하게 울렸다. 그녀는 억지로 세워두었던 몸을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미안해요. 하지만 그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난 너무 두려워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리고 아직도 부지런히 반복되고 있는 노랫말이 명현을 위로하듯 귓가에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당신을 울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나아요. …결국은 이 말밖에는 할 말이 없어요. 안녕.


***


명현의 아파트를 나온 인우는 급히 차를 몰았다.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11층에까지 다시 올라가 그녀를 다그치게 될 것 같았다.


왜 그렇게 고집스러우냐고. 자신의 사랑이 미덥지 못하냐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를 흔들어 버릴 것 같았다.


인우는 차 안 오디오의 버튼을 눌렀다. 맑은 피아노 선율이 그의 감정을 조절하려는 양 느린 템포로 음을 이어가고 있었다. 생각에라도 잠겼는지 그의 손끝이 입가를 둥글게 맴돌았다.


그녀에게서 세상의 전부였다면 부모님을 말하는 것인가? 어느 정도의 아픔이기에 끔찍한 사랑이라고 표현하는지.


인우는 그녀가 했던 말들을 곱씹어 보았다.


늘 듣던 피아노 음이 차안을 풍부하게 가득 메우자 인우는 팽팽했던 긴장이 한결 부드러워짐을 느꼈다.


문득 명현이 듣던 노래가 떠올라 그는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훗, 진정제라니….’


# 7장


도심의 휴일 밤은 낮보다도 밝아 있었다. 색색의 형광 불빛들이 거리를 생동감 있게 밝혀주며 밤의 시간을 열어주었다. 그 속을 통과한 인우는 높게 세워진 주차 빌딩으로 차를 서서히 진입시켰다.


의사라는 직업은 그다지 개인적인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특히 종합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들의 경우는 일상의 대부분을 병원에 매여 지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인우도 마찬가지였다.


인턴 시절 1년과 레지던트 4년 동안은 병원 외의 시간들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주차 빌딩의 뒤편에 있는 이곳도 2년 전 미국으로 연수 가기 전 의대 동기들과 두어 번 모임을 가졌던 곳일 뿐이었다.


깨끗하게 닦인 자동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낮은 조명과 허스키한 음색의 여가수가 부르는 재즈곡이 바(bar) 분위기를 달작지근하게 데워주고 있었다.


인우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직원에게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무대와는 거리가 떨어진 자리로 요구했다.


잠시 후 주문했던 술이 오자 인우는 천천히 잔을 비웠다. 좁다란 잔에 채워진 갈색의 알코올을 내려다보며 그는 명현이 술을 마시던 모습을 생각했다.


경수의 집에서도 또 첫 집도가 있었던 과 회식 때에도 명현은 제법 술잔을 비워냈었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 후 단정한 입술에 가만히 술잔을 가져가는 그녀의 모습은 꽤나 매혹적이었다.


‘큰일이구나, 서인우. 뭘 해도 그녀가 떠오르니.’


경직되어 있는 그이 입매가 명현의 생각으로 살며시 위로 올라갔다.


그때 그녀의 생각으로 상념에 젖어 있던 인우를 낯익은 목소리가 현실로 끌어냈다.


“어이, 서인우 웬일이냐? 네가 술 마시자고 전화를 다 하고?”


막 도착한 듯 가벼운 옷차림을 한 진성이 상기된 표정으로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으며 비워진 술잔과 인우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훗, 그런 적이 없었나? 미안한데? 친구 놈 술 한 잔도 사주지 않고 뭘 했을까?”


인우는 진성이 앉음과 동시에 대뜸 술잔부터 내밀었다. 둘은 서로의 잔을 채워주며 편안한 웃음을 웃었다.


“그야, 워낙 네놈이 술을 안 먹으니 그렇지. 못 먹는 거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입에 머금은 술을 단숨에 넘기느라 진성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예쁘게 장식된 아주 접시에서 대충 한 가지를 찔러서 입으로 가져갔다.


“아니, 사실은 잘 못 먹어.”


인우는 진성의 잔에 다시 술을 채우며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것도 유전인 것 같았다. 부친인 서 원장도 한두 잔의 술로도 알코올의 효과를 만족스럽게 느끼곤 했었는데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최대 세 잔이 넘게 되면 그 이후 시간은 두통으로 힘들어했다.


“그래? 몰랐었는데? 근데 왜 여기로 불러내. 다른 곳으로 하지.”


안주를 먹느라 우물거리던 입을 잠시 멈추며 그랬냐는 듯 진성은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른 곳 어디? 우리 둘이 차라도 마시자는 건가?”


인우는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며 의자 등받이로 몸을 깊숙이 기대었다. 애주가인 진성에게 잘 쉬고 있는 휴일 오후에 차나 마시자고 불러냈다가는 두고두고 싫은 소리를 들을 터였다.


“하긴, 그건 좀 우습다. 자고로 술잔을 앞에 두어야 말하기가 쉽지. 자, 말해봐.”


진성은 무턱대고 물었다. 습관적으로 콧잔등에 걸쳐진 은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싱긋 웃는 얼굴로 인우를 응시했다. 함께 보낸 시간이 많은 친구답게 진성은 복잡해 보이는 인우의 표정을 단박에 눈치챘다.


“무슨 뜻이야?”


이미 세 잔 이상의 술을 마신 탓인지 인우의 손은 연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너 고민 있잖아? 얼굴에 ‘나 고민 있어요. 그러니까 좀 들어주세요.’ 이렇게 써 있는데 뭘.”


진성은 고등학교 때부터 현재까지 인우의 제일 가까이에 있는 친구였다. 그 사이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할 때와 둘이 미국과 일본으로 연수를 떠난 시간들을 제하고도 그들이 공유했던 시간들은 엄청났다.


“둔한 녀석이 결혼이라는 걸 하더니 눈치도 생겼군.”


딸그락, 희미하게 웃음을 지은 인우는 얼음이 섞여있는 물 컵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유리컵의 표면에 맺혀있는 물방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속눈썹에 매달려있던 눈물도 이처럼 맑았었다. 인우는 자신의 입술에 닿았던 그녀의 슬픔이 아직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뒤이어 그녀의 보드라웠던 입술의 감촉도 선명하게 떠오르자 명현에 대한 인우의 생각은 자꾸만 깊어졌다.


그러자 그의 짧은 침묵을 의아해하는 진성이 인우를 재촉했다.


“빨리 말해. 뭐야?”


“그런 거 없어.”


인우는 기분이 나빠질 정도로 두통이 심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가라앉은 음성이 진성의 물음을 일축해 버렸으나 통하지 않았다.


“서인우, 너 여자 생겼지.”


“왜 그렇게 생각해?”


미간이 아주 잠깐 꿈틀대긴 했지만 인우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속내가 드러나지 않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너답지 않으니까. 넌 불투명한 표정을 지을 줄 모르는 놈이거든.”


자기관리와 감정의 표현에 대해서 인우는 철저하게 절제를 하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생각에 빠져있었다. 저 정도면 굉장히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도 지금과 같았다는 것을 진성은 기억했다.


그때도 인우의 눈동자는 지금처럼 동요하고 있었다. 피아노에 대한 열정을 끝까지 가지고 갈 수 없게 되었을 때도 그는 뜨거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었다.


“지금은 내가 불투명하게 보이나 보지?”


정확하게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고집스러운 감정 표현 때문에 명현이 더 아파하는 것 같아 인우는 신경이 쓰였다. 이쯤에서 그만두라는 그녀의 말이 어쩌면 마음을 숨기기 위한 변명이 아니라 진심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정말 놓아주어야 하나.’


“응,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너 혹시 지난번에 관심 어쩌구 하더니. 여자 맞지?”


진성은 테이블에 팔을 괸 채로 술잔을 빠르게 홀짝거렸다.


여자에 관해서는 도대체 무심하던 친구가 아스라한 표정을 짓던 그 날 알아봤어야 했는데. 진성은 어서 털어놓으라는 눈초리로 인우를 압박했다.


“사랑하는 관계에 있어서 최악의 결과가 넌 뭐라고 생각해?”


인우는 명현이 보았을 끔찍한 사랑이 궁금했다. 그녀를 얼어붙게 만든 지독한 상처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뭐가 잘 안돼?”


친구의 고민이 관심 있는 여자와의 밀고 당기는 단순한 연애사일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진성은 얼굴을 잔뜩 구기며 못마땅해했다.


“그럼 달리 물어보마. 부부 사이에서 생겨나는 일들 중 가장 나쁜 게 뭐지? 하진성, 궁금해 하지 말고 대답이나 해.”


물음에 대해 많은 추측을 하고있는 듯한 진성을 향해 인우는 나지막하게 잘라 말했다. 인우의 기다랗게 모양 좋은 손가락이 사각진 술병을 가볍게 감싸쥐며 비워있는 둘의 잔에 술을 따르자 진성은 준비한 대답처럼 금방 말을 뱉었다.


“그야 당연히 배우자의 배신이지. 둘 사이의 모든게 무너지는 아주 빠른 지름길이지.”


“배신? 이를테면 외도를 말하는 건가?”


부부간의 신의를 져버리는 행동. 그것 때문인가?


인우는 그녀에 의해 확인되지 않은 이유로 섣불리 판단하지 않기 위해서 진성과 나누었던 대화를 머릿속에서 재빨리 밀어내 버렸다.


“뭐 쉽게 말하자면 그렇지. 서인우, 뭔지는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접을 수 있으면 접는 게 어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가진 사람은 자신을 쉽게 열지 않아. 그래서 지켜보는 사람이 힘들어. 내 느낌이 맞는다면 그게 아마도 널 힘들게 하는 모양인데 난 말리고 싶다.”


아무리 친구라 해도 일정 선을 넘은 참견은 서로를 언짢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진성은 솔직하게 표현했다.


“접을 수 있었다면 그랬겠지.”


이제는 작은 알갱이로만 남아버린 얼음이 인우의 고요한 눈동자에 들어왔다.


접었어야 했다면 그녀의 사랑을 질투한 나머지 미친놈처럼 날뛰던 때 그만 두어야했겠지. 그러나 지금은 너무 늦어 버렸다. 그건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그 정도냐? 인생을 걸었던 피아노도 하루 고민만으로 깨끗하게 포기를 하던 놈이 이때까지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여자를 포기할 수 없다? 대단한가 보네…. 누구야? 서인우를 단단히 걸려들게 한 상대가?”


남자인 자신의 눈에도 인우는 부럽도록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180cm인 자신도 시선을 올려다봐야 하는 큰 키에 마르지 않은 당당한 체격에서는 강한 남자다움이 엿보였지만 깎아 내린 듯 곧은 콧날을 중심으로 짙게 자리한 눈매는 남자치고는 오히려 매끈하고 단정했다.


준수한 외모 때문인지 그 동안 인우에게는 열렬한 애정공세를 하던 여자들이 숱하게 많았었다.


가까이로는 의대 동기에서부터 그의 수업이 끝나기를 무작정 기다리는 다른 학교 여학생들까지, 서인우에 관한 여자들의 관심은 하늘을 찌를 만큼 대단했다.


그러나 그중 누구도 인우에게서 다정한 말을 들었던 경우는 없었다. 진성이 물어본 바로는 그의 이유는 하나였다.


“관심이라는 거 말이다, 그것도 일부러 노력해야 생기는 건가?”


하지만 그보다도 더 큰 이유는 피아노였다. 그때만 해도 서인우의 사고 중심은 피아노였다.


인우의 집안에는 의사들이 많았다. 우리 나라에서 서양의학이 시작될 때쯤, 이미 그의 증조부는 미국에서의 의학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 지금의 세진병원을 설립했다.


그 이후로는 그의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 또 그들의 자손들. 그리고 서 원장과 그의 형제들. 지금 현재로는 인우에 이르기까지. 그 수를 모두 합한다면 종합병원은 무리라 하더라도 준 종합병원 정도는 이끌어갈 수 있을 만큼은 되었다.


당연히 그런 집안의 장남인 인우에게는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어른들의 기대가 쏟아졌고, 부친인 서 원장의 경우에는 인우가 받아들여야 하는 의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인우는 피아니스트였던 모친의 재주를 더 물려받았는지 피아니스트가 될 자질이 대단히 뛰어났었다. 또 인우 스스로도 의사보다는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될 수 있을 만큼의 열정도 있었다.


서 원장은 난감해 했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인우는 뛰어난 외과의사가 될 자질이 충분했다. 차분하고 냉정한 성격 이면에는 함께 갖추기 힘든 대담함과 세심함까지 있어, 포기하기 아까울 정도로 욕심이 났었다.


의대 진학과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한 유학을 사이에 두고 서 원장과 인우의 사이는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살얼음을 딛는 것처럼 위태했다.


결국 합일점을 찾은 것이 의대를 진학해서 의사 학위를 취득한다면 그 후는 원하는 대로라는 조건부 허락이었다.


물론 6년의 시간이 어쩌면 의미 없이 지나가겠지만, 인우는 길게 남은 나머지 시간을 갖기 위해서 부친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무엇을 시작할 때의 마음과 진행중인 현실의 상황은 큰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중간 과정이라고 여긴 의학공부는 인우에게 또 다른 흥미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의사로서의 자질도 타고 난 것 같다는 주위의 칭찬을 들을 정도로 월등한 실력을 나타내었고 그 자신도 의학의 묘한 매력에 빠져들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의대를 졸업할 때 인우는 자신 내부에서 이는 또 한 번의 갈등을 더 겪어야 했다.


미뤄왔던 피아노를 다시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그는 그다지 기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다른 하나를 다시 포기해야 되는 결정에 이르게 되자 인우는 부친인 서 원장을 원망했다. 몰두하게 된 일에 관해서는 그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서 원장은 미리 예상하고서 그의 의대 진학을 우선 조건으로 삼았던 것이다.


병원에서의 임상 실습이 거의 없는 의대 공부만으로는 의사라고 말하기엔 부족함이 많았다.


자연히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인우는 세진병원에서의 수련의 생활을 결정하게 되었고,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은 쓴웃음 한 번 짓는 걸로 접어야 했다.


***


월요일 오전 7시50분.


9층에 위치한 외과계 중환자실 회의실에서는 일반외과 위암, 위장질환 파트 레지던트 4명이 환자 상황을 체크하고 하루 일정을 논의하는 간이 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치프인 병훈의 주재로 3년차 재환과 2년차 승수, 그리고 1년차 명현이 함께 했다.


30여 분간 환자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 그들은 프리젠테이션을 위해 7층에 위치한 판독실로 움직였다.


“아, 휴가 신청들 안 하냐? 스케줄 조정해야 되니까 빨리들 날짜 제출해.”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병훈이 7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서 여름휴가 예기를 불쑥 끄집어내었다.


“드디어! 꿈의 시간들이 제 곁으로 다가오네요. 기다려라, 해변아! 내가 너희들을 사뿐히 즈려밟아 주마. 치프 선생님도 계획 있으세요?”


승수의 흥분에 들뜬 목소리가 비상구 안을 쩌렁 울리면서 해변을 걷고있는 듯한 과장된 걸음걸이를 보여주었다.


“나 선 봐야 된다. 우리 어머니 며느리 타령에 내가 호응 한 번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군의관 가기 전에 하긴 해야 되는데.”


귀찮은 일을 맡게 된 사람처럼 병훈은 심드렁해 보였다.


“상대가 누구래요? 혹시 사진 보셨어요?”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라던데. 사진은 내가 무서워서 싫다고 했다.”


병훈의 큰 덩치의 승수가 자신의 곁으로 바싹 붙어오며 궁금해하자 쩝 하는 소리와 함께 덤덤하게 입술을 열었다.


“사진이 왜 무서워요?”


어이없어 하는 승수의 목소리가 한 번 더 크게 울렸다.


“얌마. 요즈음 프로필 사진이랑 실물이랑 얼마나 차이나는 줄 알아? 사진만 믿고 잔뜩 기대하고 나갔다가 까무러치면 어떻게 하냐. 그냥 마음을 비우고 나가는 게 정신 건강상 좋아.”


병훈의 엉뚱하고 기발한 대답에 모두들 그저 웃고 말았고 그들의 뒤를 조용히 따르던 명현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8시 30분.


노트북 앞에 앉은 승수가 판독실 화면에 브리핑을 위한 환자들의 차트와 필름들을 띄워 놓을 때쯤 판독실 문이 활짝 열렸다. 과장인 원규 뒤로 인우와 다른 스태프 한 명이 차례대로 들어와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일어선 채로 과장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리던 명현은 순간 대각선 방향으로 마주 앉아있는 인우와 시선이 부딪쳤다.


그는 너무나도 고요하고 흔들림 없는 눈빛을 하고있었다. 지나치게 잔잔해서 차가워 보일 정도였다. 자신을 지켜보던 짙은 눈동자는 그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명현은 가슴이 허전했다. 폭우가 쏟아진 후 골짜기의 흙이 남김없이 모두 떠내려간 것처럼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가 텅 비어 버렸다.


‘이쯤에서 그만두길 잘한 거 같아요. 지금도 이렇게 아픈데 더 길었다면 견뎌내지 못할 거예요.’


명현은 인우에게서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40여 분에 걸쳐 병훈의 브리핑과 스태프의 질문, 그리고 지시사항 등의 회의가 끝나자마자 모두들 바쁜 아침 시간답게 머뭇거림 없이 서둘러 판독실을 벗어나고 있었다.


나머지 정리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판독실을 나온 명현은 복도 중앙에 서 있는 인우의 모습에 잠시 숨을 멈췄다. 그는 팔짱을 낀 편안한 자세로 병훈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명현은 주춤하고 있던 걸음을 복도 벽쪽으로 최대한 가까이해서 재빨리 그들을 지나쳤다.


“명현아, 잠깐만.”


예상치 못한 병훈의 목소리였다. 명현은 돌아보고 싶어하지 않는 자신의 몸을 억지로 돌려세웠다.


“네, 선생님.”


명현의 몸이 돌려짐과 동시에 인우의 가운 자락이 그녀의 옆을 무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강하지는 않지만 깨끗한 느낌을 주던 그의 향기가 익숙한 약품 냄새에 섞여 그녀에게로 와 닿았다가 이내 조금씩 옅어지면서 사라져버렸다.


“너, 10시 수술 빠져.”


난데없는 병훈의 지시에 명현은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네? 이유는요?”


치프의 지시라면 당연히 따라야 하겠지만 명현은 그 이유를 묻고 싶었다.


“서인우 선생님이 학회 자료 정리 맡기셨다. 네가 하도록 해. 20분 뒤에 선생님 방으로 가서 지시 받으면 돼.”


급한 일이 있는지 병훈은 바빠 보이는 목소리였다.


“그거, 꼭 제가 해야되나요?”


인우의 이름을 들은 명현은 망설였다.


“그럼, 1년차 두고 치프인 내가 하fi? 바쁘니 그만 잡아줄래? 얼른 가서 수술 들어가기 전에 책 더 봐야 돼.”


병훈은 자신이 바쁜 이유를 설명하고는 여유 없어 보이는 걸음으로 복도 모서리 사이로 몸을 감추었다.


‘정말 단순히 학회 자료 정리 때문일까?’


명현은 그 외의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외과의에게 수술 불참은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 물론 수술이 끝난 후 그 과정을 자세히 기록해 둔 수술지가 있긴 하지만 직접 참여해서 눈으로 보는 경험과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수술을 들어가기 전 책으로 완벽하게 습득을 했다고 해도 실제 수술방에서는 많은 변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현명하게 대처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유능한 외과의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임상 실습과 수술참여가 동반되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참여가 중요한 만큼, 그와 반대로 수술 도중 쫓겨나는 것은 외과의에게는 최대의 모욕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명현에게 내려진 수술 불참 지시는 분명 좋은 기분을 들게 하는 일은 아니었다.


간호사실에서 오더를 쓰는 20분 동안에도 명현의 생각은 온통 한 가지 뿐이었다. 아무리 골몰해도 마땅한 다른 이유는 찾아지지 않았다.


외래 진료를 보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대기실 의자에 긴장하며 앉아 있었다.


명현은 호기심 어린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그 앞을 지나 인우의 방 쪽으로 걸어갔다.


명현은 편하지 않은 마음으로 노크를 했다.


“네.”


그의 대답과 함께 명현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가 방안에 가득했다.


곧 수술할 환자에 관한 자료들을 확인하고 있는지 손끝으로 입술을 지그시 쓰다듬으며 모니터에 집중해있는 그이 모습이 날카롭게 빛났다.


밀어낼수록 더 깊이 스며드는 그의 모습에 명현은 고개를 돌렸다.


“학회 자료 정리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명현은 침착하려 애를 썼다. 그저 스태프일 뿐이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건조하게 말했다.


“그런 거 없어.”


그는 명현을 쳐다보지도 않고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딱딱하게 내뱉는 그의 차가운 말투에 명현은 부르르 떨리는 손끝을 주먹 안으로 감추어야 했다.


나쁜 사람….


그녀가 먼저 그만둬 주기를 애원했었지만 너무도 갑작스럽게 다가온 인우의 냉랭한 태도에 명현은 서운함을 느꼈다.


“그러면 수술에 빠져야 할 이유는 없는 건가요?”


조용했지만 결코 부드럽지 않은 목소리였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를 주시하고 있는 명현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제야 인우도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는 그녀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너 수술방 못 들어가.”


그의 말은 거스를 수 없는 엄한 명령처럼 명현에게 파고들어 잔잔하게 일렁거리던 그녀의 눈동자를 어두워지게 만들었다.


“왜 그래야 하나요.”


집도의의 명령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겠지만 명현은 그 이유를 듣고 싶었다.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왜 안 되는지.”


인우는 어제보다 더 야윈 듯한 그녀의 얼굴을 언짢게 바라보았다.


밤사이 더 심하게 앓았는지 도도한 콧날은 더 고집스럽게 솟아 보였고 붉은기가 돌던 단아한 입술은 열 때문인지 하얗게 말라 있었다. 지금의 그녀는 도저히 4시간이 넘는 수술을 어시스트 할 수 있는 상태가 못 되었다.


인우는 그녀 자신이 알아서 수술에 빠지기를 원했지만 명현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거 같았다.


“아뇨! 모르겠어요.”


그리고 당신이 왜 그러는지도 모르겠어요.


참고있던 명현의 목청이 높아졌다. 그러나 곧 이어 들려온 인우의 냉엄한 목소리에 그녀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사진의 몸부터 챙겨. 열이 들끓는 어시스트는 수술방에서 그리 반갑지 않아.”


명현은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줄들이 그 탄력을 잃고 구부러져 버린 기분이었다.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자상한 스태프이시네요. 겨우 1년차 어시스트가 열이 있는지 없는지도 체크하시고. 다른 선생님이셨으면 몰랐을 일을 선생님을 알고 계시네요. 서인우로서 알고있는 사전인 사실을 병원일에 연결시키는 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꼬인 말을 내뱉는 명현을 그가 무섭게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서늘한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사적으로 알았다해도 알고있는 이상은 넌 내 지시에 따라야 해. 이의 있나?”


지극히 차분한 그의 태도에 명현은 반감이 생겼다. 그의 말이 맞다하더라고 따르고 싶지 않았다.


“인정할 수 없어요. 그러니 수술 들어가겠습니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인우에게 대들었다.


“안돼, 이건 서인우가 아니라 집도하는 스태프로서 하는 충고야.”


그의 눈이 위험스럽게 빛났지만 명현은 단박에 무시해 버렸다.


“들어가겠습니다.”


한 치도 지지 않으려 하는 두 사람의 눈빛이 예리하게 부딪쳤다.


“의사가 뭐라고 생각하지? 사람의 생명을 놓고 그런 고집은 전혀 도움이 안돼.”


그의 이성이 한 번 더 명현을 설득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고집이라 생각하셔도 좋아요. 단 수술은 들어가겠습니다.”


명현을 향해 경고의 빛을 내던 인우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다시 시선을 모니터로 가져갔다.


“좋아. 수술방에서 보도록 하지. 그만 나가봐도 돼. 윤명현.”


차갑게 쏘아보던 그의 눈동자가 자신에게서 사라지자 명현은 저릿한 가슴이 쩍 하고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걸 느꼈다.


이렇게 될까 봐 힘껏 묶고 또 묶었었는데.


그가 원망스러웠다. 메마르기는 했어도 아프지는 않았었는데. 그리고 흔들렸던 자신이 미웠다. 명현은 잠시동안 그의 온기를 느꼈던 입술을 깨물며 서둘러 그곳을 나와 버렸다.


***


잠시 후, 10F 수술실.


광범위하게 위를 절제해낸 다음 식도와 회장(소장의 일부)을 문합해주는 수술이었다.


이 수술은 소화 기관을 가리고 있는 간을 충분히 위쪽으로 당겨주어야만 겨우 식도와 회장을 연결해 줄 수 있기 때문에 위에서 당겨주는 1년차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한 수술이었다.


복막이 열리면서 장 내용물이 노출되자 치프인 병훈이 익숙한 솜씨로 각 어시스트들에게 그에 맞는 기구를 넘겨주었다. 곧 복막을 벌려주는 뭉툭한 국자 보양의 디버가 위쪽의 명현에게로 올라왔다.


병훈에 의해 소장은 이미 타월을 이용해 아래로 밀쳐져있었다. 명현은 디버를 이용해 간을 힘껏 위로 당겨 수술 시야를 확보했다.


조용했다. 인우의 수술 시간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던 우아한 피아노 선율도 오늘은 없었다. 환자에게 매달린 심폐장치와 수술방의 각종 장비들이 작동되는 기계음만이 규칙적으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별다른 명령 없이 차분하게 내미는 인우의 손위에 써큐레이팅 간호사는 사용될 수술기구를 미리 알아서 올려놔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명현의 손이 미끈한 디버의 손잡이에서 자꾸만 미끄러졌다.


“명현아!”


치프인 병훈이 집도의인 인우의 눈치를 보며 명현이 쥐고있는 디버의 위치를 다시 잡아 주었다.


명현은 병훈이 다시 잡아 준 위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남아있는 힘을 다 쏟아 부어야 했다.


그녀의 등줄기에서 쉴 새 없이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숨을 죽이며 할 수 있는 한의 힘을 끌어 모아 디버를 꽉 잡아 위로 당겼다.


“더 당겨.”


드디어 나지막한 인우의 음성이 터져나왔다. 병훈은 극도로 긴장한 모습을 보였고 수술방은 존재해야 되는 소리 외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았다.


바로 그때, 명현이 디버를 당기는 팔에 힘이 빠져 다시 고쳐 잡는 순간이었다. 아래에서 수술에 열중이던 인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윤명현, 간장이 미어지는 아픔 알아?”


마스크 위로 보이는 그의 짙은 눈빛이 명현과 마주쳤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간장이 미어지다니? 명현은 불안함으로 병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병훈도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짓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뭔가 실수를 했다면 그 즉시 지적이 있었을 텐데. 이건 더 위험한 경고 같았다.


명현은 재빨리 수술시야를 살펴보았다.


‘아, 어떻게 하지. 디버의 끝으로 간을 찌르다니.’


뭉툭한 디버의 끝이 간장의 일부를 미어지게 하고 있었다. 명현의 위치에서는 수술 시야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디버의 끝이 간을 찌르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명현이 놀람으로 눈이 커지는 순간, 미어진 부위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명훈이 피가 멈추도록 타월을 이용해 누르고 있었으나 피는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팽팽한 긴장 속에서 인우가 미어진 부위를 봉합하기 시작했다. 명현은 차라리 그가 소리를 치며 화를 내주기를 바랐다. 인우가 집도한 수술 중 최악의 긴장 상태였다.


“김병훈, 수술 전에 책보는 거 잊었나?”


인우의 지적에 병훈이 움찔거렸다.


“타이 하는데 오른손이 먼저야? 왼손이 먼저야? 타이가 너무 느슨해!”


그 후로도 동작이 느리다, 불이 잘 안 맞는다는 등, 병훈에 대한 그의 지적은 계속 되었다.


수술에는 적당함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특히 인우가 집도하는 수술은 외과를 전공하는 의사들이라면 누구나가 함께 참여해서 보고 배우고 싶어 할 정도로 완벽하고 섬세했다.


그렇다 보니 유독 수술방에서 만큼은 조금의 실수도 그는 용납하지 않았다.


명현은 아찔함을 느꼈다. 그가 말한 대로 이곳은 오기와 고집만으로는 들어와서는 안 될 곳이었다.


그의 충고가 옳았다. 평소보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던 자신에겐 오늘 수술은 무리였다.


서인우는 정확하고 이성적이었고, 윤명현은 어리석고 감정적이었다.


수술이 끝났다.


명현은 병훈에게 마지막 봉합을 지시하고 수술실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절대적인 당당함이 배어있어 어느 한 곳 기울지 않고 반듯했다.


명현은 깊게 눈을 깜박였다. 밀어내기로 했으니 지금 담아두었던 그의 뒷모습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노력이 뒤따라야 하는 그녀의 의지에 불과했다.


인우가 그대로 수술실 밖으로 미련 없이 빠져나가 버리자 명현에게는 이제껏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그리움이 밀려왔다.


그가 이상한 곳에 자신만 남겨두고 떠나 버린 것 같아 명현은 서글프게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


구부정하게 휘어진 그의 나무는 한여름의 강한 햇살도 적절히 막아 줄만큼 너르게 가지를 내려주고 있었다. 수술방에서 나온 인우는 다른 생각의 겨를도 없이 단숨에 이곳으로 향했다.


인우는 손을 뻗어 솔잎들 사이로 빗줄기처럼 갈라져서 내리고 있는 햇살을 손끝으로 만져 비벼 보았다.


몇 번에 걸쳐 소독약으로 소독을 하고 18도 내외의 서늘한 수술실에서 4시간 이상 있었던 그의 손은 빛의 따뜻함을 기쁘게 흡수하고 있었다.


인우는 자신이 뿜어냈던 차가움을 없애기라도 하듯 햇살 아래서 오랫동안 그렇게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빛 속에도 그녀는 있었다.


***


명현은 6층 의국에서 수술지 작성을 끝내놓고 담당 환자들을 둘러보기 위해서 7, 8층에 있는 외과 병실로 향했다. 그녀는 계단을 오르면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릿속을 정리해 보았다.


다가오려는 그의 가슴에 팔을 뻗어 거부했었는데도 결국 그는 마음 한 자락을 베어가 버렸다. 그래서 더 이상은 사랑의 두려움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를 밀어내고 다시 가슴을 묶어두려 했었다.


그런데, 그런데….


명현은 올라서고 있던 계단에 망연히 주저앉아 버렸다. 그녀의 마음은 엉킨 실타래가 돼버린 듯 했다. 풀려고 해도 시작과 끝을 찾을 수가 없을 만큼 엉망이 되어 있었다.


명현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편하고 불안한 자신의 마음을 버리고 싶었다. 그가 없는 곳으로 가서 마음을 버려야 할 것 같았다.


‘지금 당장.’


명현은 계단에서 일어나 8층을 향한 나머지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그녀가 이미 한 쪽이 열어 젖혀진 비상구 문을 통과하자 마침 병실에서 나오는 병훈이 그 쪽으로 오고 있었다.


“치프 선생님. 죄송합니다.”


가운을 걸치지 않은 수술복 차림으로 그녀의 곁을 지나는 병훈에게 명현은 또렷한 목소리로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아니, 미안함을 전했다.


“뭐가?”


그는 웬 뜬금없는 말이냐는 듯 눈을 둥글게 만들었다.


“수술방에서요. 제 실수로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잖아요. 그 때문에 스태프 선생님도 화가 나신 상태라 치프 선생님이 많이 곤란하셨을 거예요.”


문득 인우의 차가운 눈빛이 떠오른 명현은 다시 암담해졌다. 너무나 깨끗하게 이성적이 되어버린 서늘한 눈동자였다.


미안함으로 착잡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명현에게 병훈은 오히려 다정하게 위로를 건넸다.


“명현아, 우리 선생님 그런 일로 그러실 분 아니야. 그저 내 잘못을 지적하셨을 뿐이야. 수술방에서는 유독 철저하신 분이니까. 그건 내가 잘 알아. 다행히도 서인우  선생님은 발로 차지는 않으시잖냐. 수술방에서는 허다한 일이다. 마음 쓰지마. 근데 컨디션 별로야? 어째 좀 안 좋아 보이네?”


참 성격 좋은 사람이다. 외과의인 그에게는 과히 듣기 좋은 말은 아니겠지만 병훈은 성격이 좋았다.


수술에 매이는 외과의에게 참 성격 좋으시네요, 무난하시네요 는 절대 칭찬으로 들을 수 없는 소리다. 다른 의미로는 외과의로서의 자질이 부족하시네요 라고 해석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감기가 왔나 봐요.”


명현은 일부러 슬쩍 옅은 미소를 지었다.


“1년차부터 휴가 스케줄 잡을 테니까 휴가 내서 좀 쉬어.”


명현은 그렇게 하겠다며 병훈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병원을 떠나 있을 수 있다는 말에 명현은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


이후로도 명현은 30분 간격으로 연이어진 두 건의 수술로 9시간 가까이를 수술방에 있어야 했다. 온몸이 으스러질 것처럼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나마 내일부터 며칠은 쉴 수 있다는 희망이 그녀를 힘든 수술시간에서 간신히 지켜 주었다.


7시 10분.


명현은 수술방에서 나오자마자 저녁회진 준비를 해야했다.


복도와 계단을 뛰어다니면서 확인해야 될 검사결과를 기록하고 아침과 달라진 환자의 상태파악과 드레싱까지. 뛰면서도 바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그녀가 병실을 돌아보고 내려와 6층에 있는 병동 간호사실 모서리를 돌 때였다. 명현은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벽에 자신의 몸이 부딪쳐 뒤로 튕겨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곧 딱딱하고 차가운 복도 바닥에 몸이 둔탁하게 떨어졌다.


“아악!”


순간 등을 강타하는 통증에 명현은 새된 비명을 질렀다. 눈앞에 뭔가가 보이는 걸 보면 정신을 잃지는 않았나 보다.


시야에 뿌옇게 들어오는 하얀빛은 아마도 천장의 형광등인 거 같았고 그 사이로 검게 아른거린 건 사람의 얼굴 같았다. 그걸 본 명현은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대신 저음의 굵은 음성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윤명현!”


그였다. 명현의 얼굴에 하얗게 비춰지는 빛을 가려버린 사람은 그녀가 눈과 귀를 닫으면서까지 밀어내려고 했던 바로 인우였다.


“…….”


안경도 어딘가에 떨어졌나 보다. 명현은 그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는 게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아무 말 없이 그를 올려다보기만 하자 그의 손이 명현의 얼굴에 와 닿았다. 시원한 감촉이 그녀의 뺨을 톡톡거렸다.


“윤명현, 괜찮아?”


인우는 그녀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때까지도 명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간 얼굴을 온전히 드러낸 채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인상을 굳히고 있던 인우가 그녀를 들어 안으려 했다. 그러나 명현은 그가 그렇게 하도록 두지 않았다. 그녀를 안기 위해서 숙여진 그의 어깨를 명현은 손을 올려 가만히 밀었다.


“…괜찮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긴 했지만 명현은 쉽게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으스러질 것 같았던 몸이 그의 가슴에 부딪쳐 떨어지면서 조각조각 부서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명현은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키기 위해서 목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그러자 목과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으로 아 하고 작은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그녀의 목덜미를 탄탄한 그의 팔이 가볍게 받쳐주었다.


명현은 자신의 목덜미에 닿아있는 그의 팔에서 재빨리 몸을 일으키기 위해서 상체를 세우려했다.


“아….”


명현은 깨질 거 같은 두통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대로 있어.”


그의 나머지 팔이 그녀를 안기 위해 무릎 뒤로 들어가자 명현은 한 번 더 그를 밀었다.


“혼자 일어날 수 있어요.”


흔들거리는 머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명현은 눈을 감은 채 이마를 손으로 눌렀다. 그 동안 스며든 그의 모습도 아직 다 떨쳐내지 못했는데 더 보탤 수는 없었다.


“그럼, 다른 사람에게 안으라고 할까?”


명현의 깨끗한 이마가 순식간에 더 찌푸려졌다. 귓가에 나지막하게 울린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지 않도록 묶고 있는 그녀의 심장을 또 다시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노력했었는데.


그를 느끼지 않으려고 귀도 닫았고 눈도 감았다. 그러나 노력이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는 허무함이라니.


“아뇨, 그냥 내버려두세요.”


그녀는 다급히 손을 들어 인우를 막으며 끊어내듯 조용히 말했다. 이 정도로도 충분히 힘드니 내게서 떨어져요. 그리고 속엣말을 삼켰다.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보고 있는데 그냥 두라고? 날 나쁜 놈으로 만들고 싶은가 보군.”


놀람으로 명현의 감은 눈이 번쩍 떠졌다.


병동 스테이션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간호사들과 복도를 지나가는 환자들의 보호자들, 또 크게 다쳤나 싶어 기웃대는 방문객들까지.


명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눈동자에 당황했다. 넘어진 충격보다 더 아찔했다.


“아, 그럼 손만 조금 당겨 주세요.”


명현은 저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빨리 일어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수술복을 입은 두 사람의 실랑이는 명현이 그에게 손을 내밀면서 구경꾼들을 흩어지게 했다.


색깔의 대비 때문인지 내밀어진 그녀의 팔은 푸른색의 수술복으로 인해 섬뜩할 정도의 흰색을 띠었다.


인우는 시린 느낌을 주는 그녀의 가느다란 팔이 못마땅했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천천히 당겨 주었다. 그가 당기는 대로 몸을 일으켜 세운 명현은 이내 현기증으로 휘청거리고 말았다.


“어지러운가?”


인우는 기울어지는 명현의 어깨를 재빨리 감싸쥐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요. 하지만 곧 괜찮아질 거예요.”


언제나 차분하게 정리되어 있던 그녀의 표정이 계속 찡그러져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명현은 인우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그의 손에서 어깨를 살며시 빼내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어깨는 인우의 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스르르 빠져나가려는 그녀의 어깨를 인우는 지그시 더 강한 힘으로 감싸 쥐었다. 꼼짝도 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진 명현은 아래로 향해 있던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위험스러울 만치 가까운 거리였다.


“좀 누워있지 그래. 아무래도 잠시 동안은 안정을 취해야 할 거 같은데.”


그녀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인우는 고개를 숙여 명현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마주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자칫 오해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가깝고 친근해 보였다. 거기에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내려진 인우의 시선은 누가 보아도 다른 상황을 떠올리게 할만큼 다정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뭐하시는 거예요!”


더 이상은 그러고 있을 수 없어 명현이 자신의 얼굴을 뒤로 물리려 하자 그의 커다란 손이 더 빠르게 그녀의 뒷머리 전체를 쓰다듬었다.


그는 뭘 찾기라도 하듯 꼼꼼하게 그녀의 머리 밑을 만졌다. 짧은 시간 명현은 얼어붙어 있었다. 인우의 손끝이 닿은 건 명현의 머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가슴이 묶어 버린 곳이 아프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가 자꾸 건드린다고 항의를 하고 있었다.


“네 몸에 관해서는 넌 그다지 잘 알아서 하는 거 같지가 않아. 다행히 바닥에 뒷머리가 부딪치지는 않았나 보군.”


자신에게서 떨어지려고만 애를 쓰던 명현이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얌전히 서 있자 인우도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한참동안 서로를 향해 있었다.


“회진 시간 지났습니다, 선생님.”


자신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 숨이 막힐 것 같아 명현은 가까스로 말문을 돌렸다. 들리지 않게 얕은 숨을 내쉬며 명현은 그의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회진 빠지라고 하면 또 대들 텐가?”


인우는 냉큼 시선을 피해버리는 명현을 바라보고는 잠시 빙긋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차갑고 건조한 음성 속으로 미소를 감추어 버렸다.


“…아뇨.”


“잘 생각했어. 가서 좀 쉬도록 해.”


그때서야 명현의 어깨는 그에게서 자유로워졌다. 앞으로 쭉 걸어가기만 하면 그녀가 쉴 수 있는 의국이 있었다. 명현은 어지러움으로 걸음이 흔들리지 않으려고 내딛는 발끝에 힘을 실었다.


그렇게 몇 발자국을 걸었을까.


“윤명현.”


긴장하며 걷고있던 그녀는 다시금 들려온 자신의 이름에 애써 모은 기운을 잃고 말았다. 멈칫하고 있던 그녀 앞으로 어느새 그가 다가와 있었다.


“궁금하군. 흐린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지.”


인우는 투명한 안경을 명현의 앞에 내놓았다.


‘무슨 뜻이지?’


명현은 그의 말을 되짚느라 미처 안경을 받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인우는 멍하니 서 있는 그녀의 손을 가져가 그 위에 안경을 올려 주었다.


“계속 어지러우면 내게 먼저 연락해.”


무게감있는 그의 음성만이 들렸을 뿐이었다.


명현은 그가 남긴 여운 때문에 잠시 더 그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도대체 당신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요?’


# 8장


짙은 재색의 정장은 인우의 모습을 더욱더 완벽하게 보이도록 했다. 넓고 탄탄한 상체를 지나 힘있게 뻗어 내린 다리까지 잘 손질된 양복은 그의 몸을 날렵하게 감싸고 있었다.


양복의 색보다 엷은 빛을 띠는 넥타이 끝을 재킷의 단추로 깔끔하게 마무리 할 때쯤 인우는 자신의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천천히 뒤돌아 섰다.


“네.”


사무적인 그의 대답이 떨어지자 문이 조금씩 틈을 보이며 느릿하게 열렸다. 방문객은 선뜻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랫동안 문만 열어두고 있었다. 의아하게 생각한 인우가 문 쪽으로 다가가기 위해서 걸음을 떼려 했다.


그러자 방문객이 먼저 그의 방안으로 얼굴을 내비췄다.


“오랜만이야.”


기다란 머리카락이 굽실거리며 등까지 흘러 그녀가 걸을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렸다. 자줏빛의 선명한 입술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우에게로 다가왔다.


“그래, 오래간만이다.”


의외의 방문객이라는 듯 인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하늘거리는 블라우스에 바지 정장을 차려 입고 인우와 마주 선 여자는 키가 꽤 큰 편이었다. 거기에 높은 구두를 신어서인지 그녀의 시선은 187cm나 되는 인우의 눈높이에 근접해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지? 최선영. 약속 장소는 여기가 아닌 줄 아는데?”


오늘은 의대 동기들과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미국에 있는 동안은 참석하지 못했으니 인우에게는 2년만의 모임 참석이었다.


최선영.


그녀는 의과대학 6년과 전문의 되기전 5년을 함께 한 동기이다. 세진병원에서 PS(성형외과) 전공의 수련을 마친 다음 전문의가 되었고 지금은 자신의 병원을 개원해서 운영하고 있었다.


“훗, 과장님 뵐 일이 있었어. 그러다 네 생각이 나서 함께 갈까 하고.”


선영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인우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11년 동안 그녀 혼자서 가슴앓이를 해 온 남자.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이나 그의 곁에 머물렀는데도 바늘 끝만큼의 틈도 주지 않았던 차가운 남자.


선영은 밀려드는 기억에 가슴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개원했다는 소식은 진성에게 들었다. 늦었지만 축하한다.”


그가 출국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있을 때 선영은 결혼을 했다. 당시 세진병원은 재벌가의 며느리가 되는 그녀의 얘기로 한동안 떠들썩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후 진성으로부터 그녀가 개원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었다.


“누구나 다 하는 일이 축하들을 일인가? 하지만 네 축하는 받을게. 고마워.”


선영의 눈에 만나지 못했던 2년동안 그는 더 멋있어져 있었다.


의대에 입학하고 동기인 그를 보았을 때 선영은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잘생긴 외모도 그러했지만 그보다는 그의 무심한 차가움이 더 그녀를 빠져들게 만들었다.


결국 그 무심함에 질려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어 버렸지만, 그의 헤프지 않고 변함이 없는 절제된 감정이 또한 그녀를 서인우에게 집착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매력이었다.


“병원 개원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인가? 최선영?”


그녀의 지나친 자신감은 여전했다. 때로는 그 자신감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해 상처를 준다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인우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선영의 말이 거슬린다는 듯 대꾸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랬으니까.”


그녀의 아버지는 많은 사업체를 가진 국회의원이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결혼까지 재벌가와 했으니 주위에 관계를 맺고 존재하는 사람들은 마음만 있다면 어떤 것에도 제약을 받지 않고 개원정도야 쉽게 할 수 있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주변 인물들이 다들 대단한가 보군.”


인우는 조소했다.


가지고 싶은 건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


선영은 처음에는 의대 동기로서 다음은 자신과 같은 길을 가는 동료로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선영에게 자신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의 대상이었다. 시작은 순수한 관심이었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억지스럽게 요구하는 감정은 바로 인우가 여자에게 더 무관심하도록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훗, 그런가?”


선영은 비웃는 듯한 그의 딱딱함에 헛웃음을 웃었다.


자신에게 유일하게 싫은 소리를 할 줄 알았던 남자. 그녀는 통상 미인으로 인식되는, 어디 한 군데 묻힌 곳 없는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졌다. 거기에 똑똑한 두뇌와 집안의 넘치는 재력까지.


그러다 보니 그녀에게 싫은 소리를 할 수 있는 강한 사람은, 아니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들 그녀의 비위를 맞추고 살펴주기에 급급했지 그녀의 행동이나 말투에 대해서 충고나 야단을 하지 않았다.


선영은 언짢음을 나타내느라 잠시 휘어졌던 그의 눈매에 대한 자신의 욕심이 줄어들지 않음을 느꼈다. 그와 좀 더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선영은 불쑥 그의 근황을 물었다.


“넌 어때?”


“뭐가?”


인우는 검정의 시계줄이 매여진 손목을 언뜻 확인하며 저음의 목소리로 되물었다.


“전부. 병원일을 포함해서 네가 좋아하는 모든 것.”


그리고 한번도 네 입으로는 말해주지 않는 너의 개인적인 생활들. 선영은 궁금함으로 인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좋아. 좋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인우가 명쾌하게 대꾸하자 선영은 그를 만나자마자 가장 먼저 묻고싶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었다.


“서인우, 아직도 혼자니? 여전히 결혼할 생각 같은 거 없이?”


아직 혼자이고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늘 그의 소식을 소문으로 듣고 있었으니 모르는 일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인우에게서 직접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혼자인 건 맞는데 이젠 그 생각을 바꿔보려고.”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서인우는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허튼 소리를 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선영은 잘 알고 있었다.


“왠지 상대를 두고 하는 말 같구나.”


단순한 친구로서의 호기심이 아닌지라 선영의 목소리는 표 나지 않게 떨렸다.


“우리 먼저 움직여야겠다. 진성이는 좀 늦을 거 같으니.”


인우가 점점 이해를 할 수 없는 선영의 분위기에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그녀의 눈빛이 크게 출렁거렸다.


“정말 상대가 생겼니?”


“최선영, 난 결혼한 여자 동기한테서 그런 눈빛 받는 거 별로야. 그건 네 남편도 마찬가지겠지. 그만 나가자.”


그의 말에 선영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어졌다.


‘결혼한 여자 동기? 내가 겨우 그 정도 존재야?’


선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굳이 내 남편 걱정까지 네가 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 이혼한 전 남편이 아내의 눈빛 가지고 기분 나빠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니까.”


문손잡이를 돌리려던 인우는 등을 돌린 채 선영의 말을 끝까지 듣고 서 있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저없이 문을 열고 자신의 방을 나가 버렸다.


‘내가 바라는 건 단 한 번이라도 너의 따뜻한 눈빛을 받는 것뿐이었는데….’


선영은 다시 확인하고 느껴야 되는 인우의 냉정함에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


어지러움은 나아졌지만 온몸을 얻어맞은 듯한 욱신거림은 명현의 손이 자연스럽게 2층 침대를 내려가는 사다리를 붙잡게 만들었다.


인우와 부딪친 후 의국 침대에 누워있던 명현은 응급실 콜을 받아 일어나야 되는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명현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굽이 낮은 자신의 단화에 발을 집어넣었다.


“윽! 정말 흠씬 두들겨 맞은 거 같네.”


그녀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러고 오늘 당직을 무사히 버틸 수 있을지.


여느 때 같으면 얼마 걸리지도 않는 복도 중앙의 엘리베이터까지가 지금의 명현에게는 어떤 먼길보다도 도착하기가 힘들었다. 응급실 콜이니 당연히 빨리 내려 가봐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현의 마음일 뿐이었다.


명현이 지나치는 사람들과 행여 또 부딪칠까봐 조심스럽게 몸을 비켜가며 엘리베이터 근처까지 거의 다가갔을 때였다. 갑자기 명현의 걸음이 우뚝 멈추어졌다.


나란히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와 여자가 명현의 시선 끝에 잡혔다. 그들은 마치 잡지 속 그림에서 갓 빠져나온 아름다운 연인들 같았다.


멋지게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와 복고풍의 블라우스와 검정의 바지를 우아함으로 연출한 여자.


우두커니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명현의 시선을 느꼈는지 순간 인우의 시선도 명현에게로 돌려졌다.


당황한 명현의 눈길과 여전히 서늘하기만 한 인우의 눈길이 잠시동안 얽혀들었다.


‘땡’하고 엘리베이터의 도착음이 울리자 인우는 명현으로부터 눈길을 돌리고는 뚜벅뚜벅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여자도 당연한 순서처럼 인우와 함께 움직였고, 그 작고 네모난 공간 안에서도 그의 가까이에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안과 밖의 일정한 경계를 두고 그들과 명현은 그렇게 마주하고 있었다. 짧은 기다림의 시간이 끝났는지 엘리베이터의 문이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안 탈 건가?”


닫히려던 문이 다시 갈라지면서 그의 목소리가 어쩌지도 못하고 서 있는 명현의 행동을 일깨워 주었다.


“네?”


어리둥절해 있던 명현의 표정이 다시 되돌아왔다. 그리고 어디로 향해야 되는지 목적도 생각이 났다. 명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미리 위에서 타고 내려 온 두 명을 제외하고는 앞쪽에 선 그들이 전부였다.


“몸은 좀 어때?”


정면을 바라 본 채로 대뜸 묻는 인우의 물음은 다른 사람이 듣기에는 누구에게 향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괜찮습니다.”


그와는 반대편 쪽에 자리한 명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잔잔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선영은 자신을 사이에 두고 오가는 두 사람의 대화에 저도 모르게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몸은 좀 어째? 서인우가 그런 다정한 말을 할 줄도 알았나?’


무뚝뚝한 음성이긴 했지만 선영이 알고있는 그는 그런 말을 내뱉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도 여자에게는 더더군다나.


선영은 인우에게서 신기한 말을 이끌어 낸 여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얀 가운 사이로 수술복이 보였다. 짧은 커트 머리에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큰 키에 약간 마른 듯한 체격, 그리고 투명한 무테안경.


그저 단정하고 차분하다는 것 외에는 별 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 여자였다.


그때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는 자신의 눈길을 느꼈는지 여자의 몸이 살짝 틀어졌다. 그러자 선영은 툭 하고 자신의 내부 중 하나가 떨어지는 듯한 나쁜 기분이 들었다.


선명하게 꾸며지지는 않았지만 여자는 흉내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순백의 하얀 눈꽃같이 맑고 깨끗했다.


낯뜨겁게 부딪친 시선을 감춰야 하는데도 선영은 그럴 수 없었다.


‘이 여자구나, 서인우.’


엘리베이터의 숫자판이 1층임을 가리키자 명현은 인사를 하고 내릴 준비를 했다.


“먼저 내리겠습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명현은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재빨리 뛰쳐나왔다.


***


서로 각자의 차를 타고 엇비슷하게 약속 장소에 도착한 인우와 선영은 주차도우미에게 차키를 맡기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2층으로 이루어진 클럽식 바(bar) 헤라(Hera)는 동기 모임이 항상 열리는 곳이었다.


편안한 음악이 흐르는 홀 가장자리에는 2층으로 향하는 대리석 계단이 윤이 나게 놓여있었다.


둘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 직원이 안내해주는 곳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모임을 위주로 설계된 구조답게 헤라의 2층의 방들은 커다란 방 하나가 쓰임이 다른 여러 개의 작은 방들을 품고있는 구조였다.


두 사람이 익숙한 곳의 문을 자연스럽게 열고 들어가자 이미 와 있던 동기들의 시선이 둘에게로 집중되었다.


“야, 서인우! 잘 돌아왔냐?”


“그래. 덕분에.”


셔츠 차림에 넥타이가 느슨하게 매여진 중키의 남자가 인우에게 반가움의 악수를 청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우르르 일어나 웅성거리며 재회의 인사를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


“너 혹시 미국에서 몰래 여자랑 사고 치고 그러진 않았겠지?”


“야, 인마. 서인우가 너냐? 사고는 미성년자나 너 같은 유부남들이 치는 거지. 얘 같이 완벽한 성인남자가 치는 게 아냐.”


격의 없는 농담들과 술잔이 오가며 그들은 어느새 자신들의 주변 얘기를 시시콜콜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다 누군가가 조금 전 인우와 선영이 함께 들어온 사실을 가지고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야, 최선영. 너무 인우만 좋아하지 마라. 동기사랑은 모나지 않고 두루뭉술한 게 최고다.”


남자의 농담으로 동조하는 듯한 웃음소리가 제법 크게 배어 나오면서 열대 여섯 명의 시선은 인우와 선영에게로 또 다시 모아졌다.


“그만해, 이준호. 그런 농담으로 킬킬거릴 여유 있으면 연구논문에나 신경 쓰지 그래.”


그와 마주앉은 인우가 서늘한 충고를 하자 그 말을 들은 준호의 얼굴이 파르르 떨리면서 일그러졌다.


준호는 대학에서 연구 강사(fellow) 2년차로 재직 중이다.


펠로우는 전문의 자격 취득 후 의과대학 교수가 되기 위한 첫 과정을 말하는데 펠로우에서 전임강사나 조교수 혹은 부교수로 발령을 받기 위해서는 연구 논문을 발표해야 한다.


인우는 얼마 전 학회 준비를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준호의 논문을 볼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그때 준호의 논문이 외국의 논문을 표시 나지 않게 잘 엮어서 만든 카피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우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동기들은 수군대었고, 비밀을 들켜버린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험악한 눈빛으로 인우를 쏘아보기만 했다.


“아니, 분위기가 왜 이래?”


때마침 등장한 진성이 왠지 밝지 않은 분위기를 꼬집어 말하며 주위를 살폈다.


“하진성, 왜 이렇게 늦었냐. 보고싶어 죽는 줄 알았다.”


또 누군가가 어색한 분위기를 띄워 보려고 진성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웃기지 마, 인마. 내가 너한테 그딴 소리나 들으려고 과장님 눈치보면서 나온 줄 알아? 재수 없어, 이 자식아. 자아, 자. 한잔씩 돌려봐.”


진성은 빠른 속도로 몇 잔의 술잔을 비워내고는 인우의 옆에 잽싸게 다가와 앉았다.


“많이 마신 거 같은데?”


“조금.”


인우는 한쪽 손으로는 관자놀이를 계속 누르고 있으면서도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지난 일요일부터 이번 주 내내 술이구나. 아니다. 어제는 빠졌나?”


진성은 일부러 묻지 않고 매일 인우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대충 짐작으로 이유를 가늠하고 있었기에 그냥 함께 마셔주었다.


“그래, 어제는 너와 안 마셨지. 매일 너 붙잡고 있다고 제수씨가 날 미워할까 무서워서 어제 하루는 널 놓아줬지.”


“하! 서인우가 무서워하는 사람이 하진성 마누라냐? 됐네, 웃자고 하는 소리인가 본데 하나도 안 우스워. 그럼, 어제는 누구랑 마셨는데, 혼자서?”


“아니, 우리 과장님.”


인우의 대답에 진성은 애써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어떤 위기상황이 와도 초연함을 잃지 않을 친군데 이 정도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진성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간 다음 생각했던 걸 물었다.


“서인우, 너 접는 중이었냐?”


“…노력을 해 봤지.”


인우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나직이 말했다.


“그래? 결과는?”


“내가졌다.”


그것도 깨끗하게.


억지로 마음에서 떼 놓으려 했지만 스치기만 해도 붙잡고 싶었고, 붙잡았을 땐 안고 싶었다. 결국 그녀를 가지고 싶은 욕심만 더 커져 버렸던 것이다.


인우의 술잔엔 술이 또 다시 채워졌다.


***


다음날 아침 8시.


병훈에게 아침 보고를 끝낸 명현은 의국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나흘간은 그녀의 휴가였다. 들뜨고 흥분되어야 할 일인데도 명현의 얼굴은 그러지 못했다.


피곤함이 누적되어서인지 그녀의 눈 밑은 파랗게 색이 들어있었다.


흰빛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분홍의 셔츠 자락을 폭이 좁은 감색의 치마 속으로 깨끗하게 정리한 다음 명현은 의국을 나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뻐근하게 전해오는 통증에 명현은 인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젯밤 그의 옆에 당당하게 서 있던 여자의 모습도 함께 그려졌다.


당직을 서는 동안에도 문득문득 그들이 생각났었다.


둘은 무슨 사이일까. 보이는 느낌대로 여자와 남자의 관계일까. 그렇다면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걸까….


‘네가 밀어냈잖아, 윤명현. 그러면서 왜 그래?’


여름의 아침 햇살이 병원을 도망치듯 벗어나는 명현의 얼굴에 따갑게 내리쬐였다. 그리고 명현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지어졌다.


***


머릿속에서는 분명 더 자라고 명령이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명현의 손은 그러한 생각과는 상관없이 습관적으로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귀 가까이로 가져왔다.


“네, 저예요.”


명현은 고단한 잠이 그대로 묻어나는 목소리를 힘들게 꺼내었다. 그리고는 침대에 누운 채 손으로 눈을 가리더니 전화를 받는 내내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먼저 끊으세요.”


한참들 더 그렇게 듣고만 있던 명현은 지극히 무심한 말투로 통화를 끝냈다.


명현은 완전히 달아나 버린 잠을 아쉬워하며 이마를 쓸어 올리며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맞선이라…. 자신 있어? 결혼이라는 거? 하긴, 그게 날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는 완벽한 장치라면….’


여자에게 평범한 삶을 살게 하는 공식적인 제도가 남자와의 결혼이라면 어쩌면 아무 기대도 없는 결혼이 나을지 모른다. 적어도 배신의 위험은 1%도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될 수 있는 한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적 기운이 미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할 것이다. 그게 따뜻함이었던 혹은 차가움이었던 아프게 하는 건 다르지 않으니까. 의미 있어 아픈 것보다는 무의미를 택해서 자신을 고요하게 머물도록 할 것이다.


생각의 정리를 마친 명현은 그렇게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명현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원목 시계를 들어올렸다. 오후 4시가 넘어 가고 있었다. 병원에서 아파트로 돌아와 씻고 바로 잠들었으니 여섯 시간을 잔셈이다. 휴가가 아니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면 시간이었다.


‘이렇게 비축을 해두었다가 평소에 조금씩 꺼내어 쓸 수 있다면.’


명현은 자신의 엉뚱한 생각에 피식 웃었다.


그래, 웃자.


일부러 라도. 그녀의 몸이 다시 침대위로 천천히 쓰러지듯 뉘어졌다. 그리고는 눈이 감겨졌다.


또로록.


감긴 명현의 눈꺼풀 사이에서 차가운 이슬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


다음날 토요일 오후 5시. 명현은 약속장소로 잡혀있는 ‘W' 호텔에 도착했다.


여름 오후는 햇살의 능력을 과시하듯 뜨거울 대로 뜨거웠다. 택시를 타고 내리는 그 만큼의 시간에도 명현은 더위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거기에 24시간 병원에만 있어서 그런지 어지러운 바깥 공기에 대한 면역이 사라져 마음이 차분하게 진정되지가 않았다. 외계에 홀로 발을 내딛은 듯 낯설고 조금은 두려운 기분이었다.


명현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호텔입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세밀하게 짜인 검정의 마 소재 재킷 안으로 무릎길이까지의 하얀색 원피스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마를 스치듯 가볍게 지나가는 앞머리는 귀 뒤로 단정하게 넘겨져 있고, 안경을 쓰지 않는 얼굴에는 화사한 화장이 곱게 먹혀 있었다.


평소보다 높은 구두 때문인지 명현의 모습은 키 큰 모델의 등장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확 잡아끌었다.


명현은 차분한 걸음으로 호텔 입구에 이르렀다.


쉬이익, 바닥과 회전 문 사이에서 생기는 공기의 마찰음이 그녀가 힘을 주어 밀어야 할 때를 말해 주었다.


그 좁은 공간에서 벗어나자마자 순식간에 차갑게 식혀진 실내공기가 아무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더위에 지친 명현을 정상적으로 돌려놓았다.


여름이라는 계절에 맞도록 호텔의 로비는 밝고 시원한 분위기로 코디네이션 되어 있었다.


널따란 잎사귀가 반들반들 윤이 나는 이름 모를 열대 식물들로 상큼하게 꾸며진 실내 정원을 가로질러 명현은 미리 약속이 된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커피숍에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볼일들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내부를 슬쩍 둘러보는 명현의 눈에 오늘의 그녀처럼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얌전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여자들이 더러 보였다. 사명감을 띤 비장함으로.


쿡, 순간 명현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창가 쪽 자리를 앉은 명현을 저절로 유리창 밖으로 시선을 주게 되었다. 호텔 정원의 중앙 분수대에서 튕겨져 나오는 하얀 포말들이 평화로움의 메시지처럼 보는 사람의 마음을 하염없이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명현의 눈이 분수가 뿜어내는 물방울에 흠뻑 젖었을 무렵이었다.


“혹시 윤명현 씨 되십니까?”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명현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둥글게 쌍꺼풀 진 눈이 선해 보였다.


명현은 자리에서 살며시 일어나 조용히 그를 맞았다.


“네.”


“안녕하세요. 제가 좀 늦었나 봅니다. 정경민입니다.”


넉넉해 보이는 덩치와 어울리게 경민은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31살로 현재 S그룹 경제 연구소 연구원이라고 했던가?


명현은 오늘 아침 부친으로부터 전해들은 그의 신상을 기억해 내었다.


할아버지 때부터 친분이 두터워 경민의 든든한 성장과정을 지켜 본 명현의 할아버지는 진즉 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했다.


“아니에요. 늦지 않으셨어요. 제가 조금 빨랐어요.”


저 사람과 과연 결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명현은 경민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이 조금만 더 갸름했으면. 이마가 좁구나. 반듯하게 펼쳐졌으면 훨씬 보기 좋은 얼굴일 텐데. 그리고 음성이 조금만 더 낮다면 훨씬 따뜻하게 들릴텐데.


갑자기 경민의 얼굴위로 다른 사람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 바람에 잔잔했던 명현의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어렸다.


끼어들지 말아요. 서인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전 오늘 별 기대 없이 나왔습니다. 할아버님께서 명현씨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도 주시지 않으셨거든요. 심지어 사진도 한 장 안주시더라구요. 그래서 나름대로 마음을 비우고 나왔는데. 왠지 마음을 비운 복을 받는 기분입니다.”


경민은 부친인 정 교수의 성화로 마지못해서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참이었다. 아직까지는 결혼을 서둘러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경민은 부친의 재촉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듣고 보니 여자 쪽의 할아버지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해서 당신의 손녀와 짝을 지어주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궁금해하는 그에게는 사진 한 장 보여주지 않고 무조건 한 번 만나 보라고만 했다.


“실망스럽지 않다는 뜻으로 들려서 다행이네요. 그럼 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으신 가요?”


“실망이라뇨. 두려울 정도로 아름다우신데. 그리고 세진병원 외과 1년차라는 거 하나는 말씀해 주시더군요.”


경민은 부친에게 물었었다. 대체로 선이라는 걸 보라고 할 때에는 상대방의 모습이 담긴 사진 정도는 보여줘야 되지 않느냐고. 혹 너무 쳐지는 외모라 그러시는 건 아니냐고.


그러자 부친은 지나가는 투로 짧게 대꾸해 주었다. 예쁘더라.


그 한 마디 뿐이셨다. 경민은 그저 못 봐줄 정도는 아닌가 보다 하고 위안했었다. 그러나 막상 실제로 보게 된 그녀는 지금 당장 어디에라도 감춰두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경민은 자꾸만 벌어지는 입가를 단속하느라 힘이 들 정도였다.


“의외네요. 할아버지께서는 제가 의사라는 걸 부끄러워하시는 분이신데 미리 말씀하셨다니. 놀라운 일이네요.”


윤 옹은 명현이 의대 진학을 희망하는 순간부터 강력하게 반대를 했었다. 여자의 본분에 맞고 조용한 기운을 쏟을 수 있는 학문을 택하라고 그녀를 다그쳤었다.


끝내 명현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지만 늘 못마땅해했었다.


그런 분이 직접 그 사실을 밝히셨다니. 하얗게 수염을 늘어뜨린 윤 옹의 완고한 모습이 떠오르자 명현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워낙 힘든 일이니 걱정하시는 거겠죠. 근데 외과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그녀는 보여지는 외향과는 다르게 맺고 끊음이 확실한 말투나 빛을 내는 눈이 결코 평범한 성격 같지는 않아 보였다. 경민은 명현이 들려 줄 대답이 심히 궁금했다.


“힘들 거 같아서요.”


경민과의 대화 중간에 주문되어진 찻잔을 들어올리며 명현은 선뜻 솔직한 대답을 해주었다.


사실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괴롭히는 상념들을 몰아부치기 위해서는 숨쉬는 것조차 잊을 만큼의 바쁘고 힘든 일이 필요했다.


남자 동기들도 꺼려하는 외과를 명현이 지원했을 때에도 지금의 경민처럼 그 이유를 궁금해했다. 다른 거창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고.


“네? 하하. 재미있네요. 요즈음은 일부러 다들 힘든 진료과는 피해가는 추세라는데. 혹시 생각했던 것 보다 너무 힘들어서 후회해 본 적은 없습니까?”


경민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크게 웃으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명현을 은근한 눈길로 응시했다. 줄곧 머뭇거리지 않고 명쾌한 대답만을 하던 그녀가 어쩐 일인지 이번엔 생각의 길이를 길게 가져가는 듯 보였다. 그러더니 서늘한 눈빛으로 나직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있었어요. 단 한 번.”


밤사이 간신히 마음 한편에서 누군가를 밀어냈는데 다음 날 맑은 아침 냄새를 묻히고 나타난 그 사람을 어김없이 봐야 했을 때. 명현은 후회했었다. 그런 그를 매일 봐야 한다는 현실을.


“대단하네요. 단 한 번뿐이라니. 의외로 강한 면이 있나 보네요. 훗, 겉으로 보기에는 위태할 정도로 약해 보이거든요.”


단순히 병원 생활에서의 힘든 점을 그 이유로 받아들인 경민은 대견한 눈빛으로 명현을 향해 따듯하게 웃어 주었다.


이 사람은 잘 웃는 모양이다. 마주 앉은 이후 잠시도 웃음이 그의 입가를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 웃음은 명현에게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명현은 확신했다. 그와는 감정적으로 안전할 거 같다고.


“겉보기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물려받는 거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다른 건 노력하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죠.”


조용하지만 소극적으로 들리지 않는 명현의 목소리에 경민은 중요한 걸 찾기라도 한 듯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명현씨가 어머님을 꼭 빼 닮았군요.”


들뜬 경민은 눈치채지 못했다. 명현의 표정이 얼음보다 더 차갑게 굳어지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저희 엄마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명현이 낮고 냉랭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요? 당신이 우리 엄마를 언제 봤죠? 명현은 마음속으로 끝없이 물었다.


“아, 얼마 전 저희 아버님 회갑 식사때 한 번 뵀었죠. 아주 미인이시던데요?”


당당한 그의 말투. 예상했던 대답. 명현의 입가에 복잡한 의미의 웃음이 어렸다.


“경민씨는 아무래도 눈썰미가 그리 좋으신 편은 아닌 거 같아요. 그 분과 닮았다는 말을 이때까지 들어 본 적이 없거든요.”


그분? 웃는 얼굴이긴 하지만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냉정해 보였다.


실수라도 한 건가? 경민의 표정이 다소 어둡게 변했다.


“그래요? 하하하. 사실은 제가 그런 쪽으로는 좀 둔한 편이기는 합니다.”


경민은 어색해진 상황을 재빨리 얼버무렸다.


“저녁 식사를 하기에는 좀 이른가요? 여기 주위에 맛있는 음식점은 제가 다 장악하고 있는데.”


“오늘은 아니고요. 다음으로 부탁드릴게요.”


명현은 자신의 싸늘함으로 무안해졌을 경민에게 미안함으로 웃어 보였다.


예쁜 웃음이었다. 붉게 색칠해진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기다란 속눈썹을 살포시 내려 앉혔다.


경민은 웃음으로 자신의 제의를 정중하게 사양하는 명현을 보고는 그만 마음이 멍해지고 말았다.


“그럴까요? 그럼, 맛있는 것부터 순서 정해놓고 기다리겠습니다.”


명현은 계산을 마치고 다가온 경민이 데려다 주겠다는 것을 다른 약속을 이유로 예의를 갖춰 거절했다. 경민이 지하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자 명현도 호텔 입구를 향해 움직였다.


훅. 명현은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가능할까. 저 사람에게는 끝까지 연연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주지만 않는다면 받을 상처도 없는 거 아닌가?


불안해하는 명현의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늘씬한 차림의 그녀를 흘깃거리는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명현은 생각에 빠져 걸었다.


그러다 그녀는 차분한 걸음을 잠시 멈추고 눈앞으로 다가온 회전문을 밀기 위하여 무심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가 느낀 건 시원하게 닿아야 할 유리의 감촉이 아니었다.


따뜻하면서도 거대한 힘을 가진 남자의 손이었다. 명현은 자신의 손목을 잡고있는 기다란 손가락을 숨을 멈추고 바라보기만 했다.


***


토요일은 일렉티브 수술(elective, 스케줄이 미리 잡혀있는 정규수술)이 없는 날이다. 이번 주는 네 번의 일렉티브 수술 외에도 두 번의 온콜 수술(on call, 응급수술)이 있었다.


그리고 어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마신 탓에 인우는 누적된 피로감을 느꼈다. 그는 책상 모서리에 살짝 걸터앉아 손끝으로 까칠해진 턱을 쓰다듬으며 일과표를 확인했다.


오전에 있을 저널 컨퍼런스(journal conference) 이외에는 별다른 스케줄이 짜여있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오후로 잡혀있는 집안행사에도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인우는 일과표를 책상에 내려놓고는 회진을 돌기 위해서 그의 방을 재빨리 나갔다.


회진이 시작되어야 할 병실 앞에 병훈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회진을 함께 돌 여섯명 남짓의 레지던트들과 서브인턴들도 보였다. 그러나 항상 제자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눈동자가 어제부터 계속 눈에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인우의 심기가 뒤틀렸다.


왜 보이지 않는 거지?


인우는 병실로 들어가 전 병훈을 향해 딱딱한 음성으로 명현의 부재를 물었다.


“1년차 어디 갔어?”


병훈은 뜻하지 않은 인우의 물음에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명현이요? 휴갑니다. 어제부터 휴가 스케줄이 비어 있기에 먼저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불안했던 마음이 놓여야 되는 확실한 이유인데도 불구하고 인우의 심장 박동은 자꾸만 거칠어졌다.


***


날렵한 은회색의 차체가 호텔 입구에 급하게 멈춰섰다. 이어서 깔끔한 정장차림의 키 큰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호텔 주차 직원에게 차키를 넘긴 후 바쁜 듯이 호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로비에 들어선 남자는 손목에 찬 시계를 들어 확인하고는 프론트 뒤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성큼성큼 뛰듯이 걸어갔다. 그리고는 엘리베이터의 숫자 불빛을 바라보며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주말 저녁의 호텔 로비는 많은 사람들로 결코 한산하지 않았다. 자연 남자의 시선은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향해졌고, 그러다 어느 한 곳에 꼼짝없이 묶여 버렸다. 그곳을 바라보던 남자의 눈이 위험스럽게 빛이 났다.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남자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이 지나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려 밟았다.


남자는 정해진 목표를 향하여 정확하고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가냘픈 여자의 손목을 힘주어 잡았다.


“여긴 웬일이지? 윤명현?”


창백하고 말갛기만 하던 얼굴은 은은한 색을 품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파랗게 시린 눈동자는 고스란히 드러난 채였고 단아하게 다물어진 입술을 생기있게 붉어 있었다.


왜 이런 모습이지? 그리고 여긴 왜?


인우는 잡고있던 명현의 손목을 자신 가까이로 끌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놀란 눈동자와 같은 투명한 알갱이가 명현의 귓불에서 달랑거렸다.


“다시 물을까? 어쩐 일이야, 여기는.”


인우는 사납게 물었다.


‘널 그렇게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남자는 또 누구지?’


로비 중앙에 서서 그녀와 얘기를 나누던 남자를 보는 순간 인우는 아침부터 그를 괴롭혀온 이유 모를 불안함의 실체를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인 일까지 말해야 될 이유 없어요.”


놀람의 빛으로 출렁거리던 명현의 표정이 그의 다그침으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면서 명현이 그의 물음을 피해버리자 곧 그녀의 손목에 끊어질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개인적인 일? 훗, 잊은 모양이군. 난 충분히 네게 그 개인적인 일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설마 여기에서 그걸 확인 시켜주길 원하는 건 아니겠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만큼 명현은 인우의 가슴 가까이로 끌어당겨졌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이 조금씩 깊게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설마….


명현은 점점 다가오는 그의 냉정한 눈빛을 끝까지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결국 그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이 거의 맞닿으려 할 때 명현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하지 말아요.”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의 거리에서 명현이 조용히 말하자 그대로인 상태에서 그도 낮게 입을 열었다.


“그럼, 말해. 그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 뭔지.”


어금니를 지그시 물고 내뱉는 그이 말에 감고있는 명현의 속눈썹이 잔잔히 떨렸다. 당장이라도 훔치고 싶을 만큼 예쁜 물이 든 그녀의 입술이 대답을 하기 위해 살짝 벌어졌다.


“선 봤어요.”


갑자기 그녀의 얼굴을 덮고있던 두꺼운 온기가 한꺼번에 싹 걷혀 버렸다. 그의 얼굴이 멀어지고 있다는 걸 감지한 명현은 그때서야 천천히 눈을 떠 무서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인우를 마주 보았다.


“선? 혹시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의미와 같은 말인가?”


되묻는 그의 물음은 차가운 바람 끝처럼 시리게 명현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이렇게 화낼 일 아니에요. 당신은 그냥 모른 척 하기만 하면 돼요.


명현은 흐트러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예요.”


이것으로 그로 인해 아팠던 가슴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이제는 문득문득 떠오르는 누구를 지우기 위해서 머리를 흔드는 일 따위에서도 벗어 날 것이다.


명현은 지금 자신의 대답으로 인우가 완전히 등을 돌려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훗, 며칠 사이 용감해졌군. 행여 누가 다가올까 봐 도망만 치던 겁쟁이가 그런 모험도 다하고. 그래서 선은 잘 봤나?”


인우는 아주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감히 이런 일을 꾸미다니. 심장을 데워주는 작은 감정 하나 못 받아들여 밀어낼 생각만 하면서 어떻게 이런 황당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하지만 그는 명현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냉기 어린 그의 음성은 자신의 화를 다스리고 있을 뿐이었다.


“만족스러운 결론을 내리게 된 걸 보면 그런 거 같아요.”


날 그런 식으로 자극하지 말아요. 명현은 그의 조소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지만 변화 없이 단정한 표정으로 인우를 마음속에 베어내었다.


제발 이 말이 끝이 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렇게 되기를 명현은 간절히 빌었다.


“기대하지. 네가 내린 결론.”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눈에서 섬광이 일면서 그녀의 간절함을 바닥으로 꼬꾸라져 버렸다.


인우는 그대로 명현의 손목을 움켜쥔 채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명현이 당황한 듯 작게 외쳤다.


“어디 가는 거예요.”


“어떤 대단한 결론을 내렸는지는 들어봐야 할 거 같아서. 내게 그 정도 배려쯤은 해 줘야 되지 않나?”


한 걸음정도 앞서 걷고있는 그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명현은 그가 당기는 완강한 힘에 의해 무작정 이끌려야 했다.


잠시 후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그러다가 지하 2층에서 문이 열리자 인우는 지체없이 움직였다.


‘Ritz'라는 영어 글자가 형광의 네온불빛으로 반짝거렸다. 그는 마치 예정되어 있던 일을 행하는 사람처럼 당당하게 짙은 색의 유리문을 밀었다.


낮은 톤으로 품위 있게 인테리어 된 바(bar) 내부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빈자리가 좀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인우는 멀리서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오는 직원을 향해 자리 안내를 부탁했다.


그에게 손목을 잡혀 어쩔 수 없이 거리를 좁혀 걷고있는 명현이었지만 모르는 이들의 시선이라면 그 누가 보아도 다정한 연인에게 사랑을 받고있는 행복한 사람으로 비춰졌다.


입구에서 깊숙이 안쪽으로 안내된 자리에 그녀만을 억지로 앉히고 나서야 인우는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놓아주었다. 그러면서 명현의 시선을 싸늘한 자신의 눈빛에 고정시켰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오래 안 걸려. 참고로 오늘은 네 덕분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충분히 화가 나 있는 상태니까 더 보탤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혹시나 그래도 기다리지 못하겠다면 네 마음대로 해. 그 다음은 나도 내 마음대로 할 테니까.”


인우는 주문(呪文)같은 경고를 명현에게 하고는 등을 돌렸다.


입구를 빠져나가는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던 명현은 가슴이 급격히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 9장


오늘은 인우의 어머니인 김 여사의 환갑을 맞이해서 가까운 친지들만을 모시고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러나 스케줄을 미리 조정해두었기에 약속 시간을 넉넉히 두고 병원을 나서던 인우에게 응급수술을 해야될 상황이 닥쳤다.


수술 예후가 과히 좋지 않았던 환자의 수술 부위 혈관이 결국 터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수습 때문에 인우는 한시간 가량 늦게 호텔에 도착하게 되었다.


워낙 위급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인우는 미처 가족들에게 늦겠다는 연락을 미리 취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급한 마음에 주차도 맡긴 채 호텔 안 엘리베이터까지 한달음에 뛰어 들어갔다.


높은 층수에서 내려오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는 호텔 로비를 슬쩍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러던 중에 로비 중앙에서 남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명현을 볼 수 있었다.


빨간 불빛의 숫자가 20에서 멈춰 서자 인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소소한 가족들의 행사를 간혹 했던 곳이라 인우는 20층에 위치한 한식당 ‘청(靑)’을 편안한 발걸음으로 찾아 들어갔다.


“좀 늦었습니다.”


친척들이 모여있는 예약된 곳으로 들어서면서 인우는 늦음을 죄송해했다.


“수술 있었냐? 토요일인데?”


서 원장이 아들의 변명을 대신해주듯 수술 얘기를 꺼내자 인우는 의자를 조용히 뒤로 빼내어 부친 옆에 닮은 모습으로 자리했다.


“네.”


“심각하냐?”


“조금요.”


담담하게 대답을 하고는 있지만 인우에게서 흐르는 긴장감을 서 원장은 알 수 있었다.


“이모님 오셨어요.”


인우가 길쭉한 식탁의 맞은편으로 시선을 두며 점잖게 인사를 챙겼다.


“그래, 너도 귀국했다고 해서 한 번 볼겸 질색하는 비행기를 어쩔 수 없이 탔다. 이번엔 내가 너 보러 왔으니 다음엔 네가 일본으로 와. 알겠니?”


모친인 김 여사와 나란히 앉아 김 여사의 언니는 젓가락을 살며시 내려놓으며 흐뭇한 눈길로 조카를 쳐다보았다.


한식당 청(靑)의 다(茶)실에는 서 원장의 동생 내외들과 김 여사의 언니와 동생 내외, 또 그들의 아들과 딸들로 스무 명 가량의 친척들만 오붓하게 가족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른들과의 대화는 나무람에서 시작해서 서운함으로 마무리되었고 잠시 뒤엔 2차 주제인 자신의 결혼 문제를 거론하게 될 것을 인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얘, 아무리 남자라고 해도 35살이면 서둘러야 해. 너무 늦으면 능력과는 상관없이 보기 싫어. 언니, 신경 좀 써 봐요. 아니면 나라도 나서 볼까? 도대체 난 쟤를 이해할 수가 없어. 어디 하나 빠진 데라도 있으면 또 몰라. 누구한테라도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애가 왜 지금까지 결혼을 안 해서 어른들 걱정을 듣는지 원.”


서 원장의 동생인 인우의 고모는 고운 이맛살을 찌푸리며 올케 되는 김 여사를 향해 조카의 늦은 결혼을 안타까워했다.


“인우, 아가씨 있대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의 주인공답게 제비꽃 색깔의 여름 투피스로 우아하게 단장한 김 여사는 식탁에 가슴을 바싹 낮추며 속삭이듯 말했다.


“정말이우? 누구래요? 아니, 인우야 누구니?”


김 여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이모 고모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인우를 향해 사실 확인을 하기 위해 흥분해 있었다.


하지만 그새 간단히 식사를 끝낸 인우는 서 원장과 진지한 얘기를 주고받는지 건너편 여자들의 물음에는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누구라고 얘기는 안 해 줘요. 아, 의사라는 거 하나는 말해 줬어요.”


김 여사는 아들의 표정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잔뜩 줄였다.


“의사? 얘, 얘, 의사 지겹지도 않니? 서 씨로도 모자라 들어오는 다른 성 씨 까지도 의사여야 되겠니?”


인우에게 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껏 목소리를 가라앉힌 김 여사는 대뜸 목청을 높인 시누이에게 그러지 말라는 손사레를 쳤다.


아버지와 오빠들이 의사였던 집안에서만 생활해오다 의사인 남편과 결혼한 그의 고모는 반응이 영 시큰둥했다.


“정말 쟤가 여자가 있다고 말을 했단 말이지? 언니 그것만해도 한 시름 덜었겠수. 폭풍이 몰아쳐도 끄떡도 않을 거 같더니. 그러고 보면 인연이라는 게 있긴 있나봐. 쟤 눈에 들어오는 여자가 있는걸 보면. 나도 이렇게 궁금한데, 언니하고 형부는 그 궁금증을 어떻게 다스린데? 대단들 하시네.”


딸 셋 중 셋째 딸인 인우의 이모는 까다로워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편안한 말투로 대화를 재미있게 이끌어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쟤 뒤를 밟아서라도 한 번 봤으면 좋겠어. 오죽하면 누굴 시켜서 사진이라도 한 장 찍을까 하는 생각을 너희 형부랑 했겠니? 우습지 않니?”


김 여사는 남편의 옆에 훤칠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아들을 쳐다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촌들과의 얘기 중에도 인우의 생각은 온통 호텔의 지하에 있는 명현에게로 가 있었다. 과연 아직도 그곳에 있기는 한 건지. 그녀의 고집이라면 기다리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만일 그렇다면….


인우는 그의 부모님과 친척들에게 먼저 일어남에 대해 양해를 구해야 했다. 그런 후 큰 보폭으로 식당을 가로질러 복도를 향해 걸었다.


‘그녀가 없으면 어떡할 거지, 서인우? 우선 화가 나겠지. 말할 수 없을 만큼. 그리고는 그녀를 찾겠지. 미친 듯이.’


인우는 스스로에게 자문하며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


그녀는 있었다.


훗, 인우는 한껏 긴장하고 있던 게임이 싱겁게 끝났을 때처럼 웃음이 나왔다. 어디서부터 찾을까를 생각하고 있었던 그로서는 허무할 정도로 기쁜 순간이었다.


초조했던 마음이 여유를 가졌는지 그는 명현을 향하여 시간을 두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겨갔다.


명현은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다 대로 머리를 옆으로 무겁게 고이고 있었다. 단정하게 손질되었던 머리칼이 이마에 부드럽게 흘러내려 있어 이전의 그녀에게는 찾아볼 수 없었던 나른함이 느껴졌다.


명현은 누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낮고 느린 리듬에 맞춰 눈을 감은 채 풀기 없이 머리만 까딱이고 있었다.


예민하던 그녀의 신경들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는지 바로 코앞에 서 있는 인우조차도 명현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지켜보아도 그녀의 감은 눈이 떠지지 않자 인우는 그녀의 얼굴 위로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내렸다.


잔잔하던 눈가에 어두운 그림자가 지는 걸 느꼈는지 그제야 그녀의 속눈썹은 깜빡이기 시작했다.


억지스러운 일을 간신히 하는 듯 그녀의 눈은 느리고 힘들게 떠졌다. 그리고 마침내 깨끗한 그녀의 눈동자가 완전히 그리고 제대로 드러났다.


평소 같으면 눈앞에 다가와 있는 그의 얼굴에 놀라거나 당장 고개를 돌렸을 텐데 지금은 그저 동그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경계도 없어 보였다.


그러다 그녀가 웃었다. 인우를 그 자리에 꼼짝없이 굳어지게 웃어 보였다. 슬퍼 보여서 애틋하기만 했던 얼굴이 선명한 입술을 살짝 늘이며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신기함과 의아함으로 인우의 잘생긴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기울였던 허리를 천천히 일으켰다.


“어…. 정말 빨리 왔네? 무슨 일인데 이렇게나 빨리 끝날까. 시시하게. 흐으음, 그나저나 안타까워. 마지막 잔 마시고 가려다 붙잡히고 말았어. 그냥 놔두고 일어날 걸.”


가까이에 있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제 높이대로 올라가 버리자 그를 보고 있던 명현의 얼굴도 천천히 뒤로 젖혀졌다. 그녀의 뽀얀 낯에 엷은 황색의 불빛이 그대로 스며들면서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순간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인우는 아찔한 어지러움을 경험해야 했다. 지금의 명현은 치명적이리만큼 매혹적이었다.


“어차피 붙잡혔는데 마시지 그래.”


인우는 예의바른 말만을 내뱉던 명현의 입술에서 예기치 않은 반말이 나오는 걸 보고는 빙긋 웃었다. 그러면서 그녀와 마주 앉았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어요. 아까우니까.”


그녀는 단박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날씬한 술잔을 가볍게 거머쥐었다. 그리고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입술로 가져가더니 목선이 매끈하게 드러날 정도로 고개를 젖히며 한꺼번에 술잔을 비워냈다.


탁.


그녀는 빈 술잔을 제법 소리나게 내려놓고는 손등으로 입술에 묻은 술을 문질렀다.


인우는 그녀를 지켜보던 시선을 진한 색깔의 유리병으로 잠시 돌렸다.


그녀 말대로 조금 전 마셨던 게 마지막 잔이었는지 유리병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취했군.’


하지만 순간 그의 생각을 반박이라도 하듯 평소와 같이 또렷한 명현의 음성이 인우를 향했다.


“뭘 물어본다고 하지 않았나요?”


명현은 낮은 한숨과 함께 입술을 닦아내던 손등을 떨어트리며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한 손으로는 머리를 받치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차분하다 못해 서늘했다.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가능할 것 같지 않아.”


인우가 갑작스레 달라진 명현의 모습을 뚫어질 듯 눈여겨보자 풍성한 그녀의 속눈썹이 깊게 깜빡이더니 그를 묘한 눈빛으로 자극했다.


“취한 거 같나요?”


“위스키 큰 병을 40분 만에 혼자서 깨끗하게 비워냈으면 당연히 그래야 할거 같은데?”


희미하게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인우는 그녀의 상태를 되짚어 주었다.


“맞아요. 하지만 묻는 말에 대답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스스로를 취했다고 인정하면서도 내 놓는 말에 힘을 주는 명현을 인우는 말없이 한참동안 응시했다.


“그럼, 대단한 윤명현에게 묻도록 하지. 이렇게 우스운 일을 만든 이유가 뭐야?”


그의 물음으로 잔잔하게 마주 친 두 시선이 갈라졌다. 그 중 하나는 뜨거웠고 나머지는 차가웠다.


“결혼하려구요.”


대답의 내용은 심각했지만 명현은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깨끗하게 정리된 순서를 말하듯 간단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적으로 튀어나오는 그녀의 대답이 인우의 반듯한 이마를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결혼? 도대체 어떤 거지? 네 머릿속에 든 결혼은?”


선을 봤다는 그녀의 대답한 대꾸를 들었을 때 이미 떠올린 단어이지만 그녀의 입술을 통해서 확인하듯 들으니 인우는 잠시 가라앉아 있었던 화가 다시 세차게 일어남을 느꼈다.


“날 고요할 수 있도록 지켜주는 장치죠. 미리 잠그는 거.”


그녀의 음성은 지나치게 낮았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군. 어떻게 널 지켜준다는 건지.”


인우는 강해 보이는 턱을 힘껏 당기며 호흡을 늦추었다.


“적어도 나이가 채워진 여자가 공식적인 제도에 매이지 않았을 때 받는 성가신 편견과 선입견에서 조용하게 지켜주겠죠. 그리고 혹시나 다가올지도 모르는 두근대는 감정으로부터도.”


“그게 전분가?”


“전부예요.”


그녀가 들려주는 형편없는 결혼의 의미에 인우의 눈빛은 날이 섰다. 반면 명현은 알코올의 지배를 받는지 차츰 눈동자에 빛을 잃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얘긴가?”


“아뇨. 나에게 감정적으로 아무 기운이 미치지 않은 사람이여야 돼요.”


명현은 자꾸만 흔들리는 그의 모습에 눈을 감고 말았다. 취기를 빌렸다 해도 그를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아무런 교감이 없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 왜!”


빠져나갈 틈을 찾고 있던 그의 분노가 서서히 차가운 말투 속에 조금씩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마음 아플 일은 없을 테니까요.”


기대가 없으면 서운함도 없을 테니까 무의미가 차라리 내겐 행복일 거예요.


명현은 감은 눈동자 속으로 자신을 한번 더 다독였다. 그러나 곧 명현은 눈을 떠야 했다. 뜨거우면서도 강력한 손길이 힘없이 기대어져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반듯하게 세웠다.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최악의 경우에 네 마음 하나 건지겠다고 그런 결혼을 하겠다는 건가?”


“그거면 족해요, 난.”


그녀의 턱을 감싸 쥔 그의 손에 은근한 힘이 가해졌다. 명현은 잡힌 턱보다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지만 이미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네 생각처럼 만만한 일이 아니야.”


“문제될 거 없어요.”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명현이 불길에 휩싸인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자 인우는 알 수 없는 말만을 남기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훗, 이젠 정말 끝인가 보네. 잘 했어, 윤명현. 별거 아니었어.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 만들지 마.’


꼿꼿하게 앉아있는 명현의 어깨가 약하게 떨렸다. 솟구치려는 눈물을 애써 막아서인지 눈이 못 견디게 따끔거렸다.


명현은 울 수조차 없는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하여 테이블을 힘껏 누르면서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명현은 천천히 걸음을 떼어 보았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꺾일 것 같은 무릎에 힘을 주며 입구까지 아슬아슬하게 걸었다.


간신히 계산대에 몸을 기댈 수 있게 된 명현은 딱딱하게 각이 진 검정색 손가방에서 지갑을 꺼내어 카드를 찾아 내밀었다.


“손님, 이미 계산이 되었습니다.”


“누가요?”


“조금 전 키 큰 남자 분이 하셨는데요.”


유니폼을 갖춰 입은 여자 직원이 카드를 명현 쪽으로 다시 내밀며 생긋 웃었다.


“그 사람은 한 잔도 안 마셨는데.”


명현은 기분이 나쁜지 미간을 살짝 접으며 혼잣말처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돌려 받은 카드와 지갑을 가방에 아무렇게나 집어넣은 다음 미로를 벗어나는 느낌으로 바(bar)를 빠져나왔다.


부러질 듯 가느다란 발목이 높은 구두 위에서 휘청거리는 명현의 몸을 위태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거울처럼 깨끗하게 닦여진 엘리베이터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춰주자 명현은 손으로 눈을 가려 버렸다.


보기 싫었다. 비틀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위이잉,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명현은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느리게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커다란 손이 불쑥 나와 명현의 손을 끌어당겼다.


가뜩이나 힘겹게 버티고 서 있던 명현의 몸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당겨지자 결국 그의 품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대로 있어.”


넘어지려는 명현을 거의 안다시피 한 인우는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어쩔 수 없이 명현은 그의 가슴을 밀치려던 손을 둘의 가슴 사이에 가만히 둘 수밖에 없었다.


얄팍한 손바닥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심장소리에 명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잔인했다. 그러지 않을 건데 욕심나는 걸 자꾸만 가지라고 들이민다.


명현은 인우의 어깨쯤에 닿아있는 자신의 뺨을 그에게로 살며시 기울였다. 잠시동안 만이라며 흔들리는 자신을 달래었다.


시원한 옷감의 감촉과 함께 그의 향기가 명현을 편안하게 감싸주었다. 그가 알 수 없을 만큼 조금만 더 닿을 듯 말 듯 뺨을 그의 어깨에 더 가까이 대었다. 그와 동시에 명현의 허리에 감겨있던 인우의 팔에도 힘이 더해졌다.


멈칫,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명현은 마음이 조마조마해져 버렸다.


“내려야 돼.”


인우는 건조하게 말을 내뱉으면서 명현의 손을 잡고 17층에서 내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객실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한 객실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키를 꽂아 문을 열었다.


“뭐 하는 거예요.”


그가 열어 둔 문안을 응시하며 명현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성큼 객실 안으로 발을 들이려던 인우는 명현의 제지에 의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네게 확인할 게 있어.”


“아직 뭐가 남았나요?”


그의 시선을 피해 객실 안을 바라보며 명현은 조용한 목소리로 불안을 속여야 했다.


“아마도.”


인우는 한곳만을 바라보며 경직되어 있는 그녀의 손을 힘주어 움켜쥐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움직임으로 객실 입구의 실내등이 제 색을 내며 그들의 모습을 더 또렷하게 보여주었다. 인우의 몸은 완전히 문안으로 사라졌고 명현은 채 그러지 못한 상태였다.


“여기서 말해줘요. 그게 뭔지.”


더 깊숙이 움직이려는 인우를 명현이 붙잡았다.


“왜 그래, 윤명현? 처음 보는 남자와 결혼할 생각까지 한 네가 뭐가 두렵지?”


“…….”


순간 명현은 온몸이 냉각되어 버린 듯 했다. 이렇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이 내게 알려주고 싶은 게 뭔가요.’


명현은 물음 가득한 눈빛으로 차가운 표정의 인우를 마주 보았다.


“못 들어가겠나? 그럼, 네가 생각한 결혼은 포기해. 이 정도 수치심을 비할 바가 못 되니까.”


인우는 늦춰 줄 생각이 없다는 듯 명현을 부추겼다. 그녀의 눈망울이 극심하게 일렁거렸다.


그의 부추김에 명현이 반응을 보였다. 그러더니 그에게 잡혀 있던 손과 또 그를 붙잡고 있던 자신의 손을 명현을 거칠게 뿌리쳐 버렸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이런 식으로 몰아 부칠 정도로? 어렵지 않아요. 이깟 몸뚱어리쯤은.”


명현은 화난 음성을 낮게 내뱉으며 인우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인우에게 오래 머물지 못했다.


확 채어가듯 명현의 몸을 잡아 끈 인우는 성큼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침대위로 던지듯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바다 빛의 매트리스에 등을 대고 있는 명현의 어깨를 위에서 힘껏 눌렀다.


“네 몸이 그렇게 하찮아? 아무와도 상관없을 만큼? 널 가지고 싶어 미칠 거 같은 내게 잘도 그런 말을 지껄이는군.”


인우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애써 억누르며 싸늘하게 말했다.


인내심을 시험 당한 느낌이었다. 자신이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가늠해보기로 일부러 마음먹지 않는 한은 저렇게 우스운 대답을 내놓을 리가 없었다.


명현은 충격으로 감겨진 눈을 뜨면서 치열한 분노를 내뿜고 있는 인우를 올려다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쏟아져 내려 그의 잘생긴 눈매가 가려져 있었다. 명현은 손을 올려 그의 머리칼을 쓸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손을 올릴 수 없었다.


여기서 멈춰버리면 그를 밀어낼 수강 벗을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그를 자극해서 밀어내 버릴 것이다.


“갖고 싶으면… 가져요.”


핏기가신 얼굴로 명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넌 도대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초연하게 자신을 내주는 명현을 인우는 집어삼킬 듯이 노려보았다.


그녀는 말간 눈동자를 차분하게 가라앉히면서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는다는 듯 편안하게 말했다.


“단지 육체일 뿐이에요. 그러니 나중에 못 잊어 가슴 아픈 일 따윈 없을 거예요. 아무 의미가 남지 않으니까.”


뚜둑! 인우는 간신히 탄력을 조절하고 있던 이성의 끈을 끊어 버렸다.


그는 살갗을 파고들 듯 죄고있던 명현의 어깨를 순식간에 끌어당겨 그녀를 매트리스 위에 반듯하게 앉혔다.


“의미가 없다?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단시 육체적인 관계일 뿐이니까. 부디 아무 의미가 없기를 바래주지. 윤명현.”


인우는 얼음 파편같이 찌를 듯한 시선을 마주앉은 명현에게 쏟아 부었다.


그는 그녀의 검정 재킷을 거칠게 벗겨내었다. 고운 목선과 갸름한 팔이 하얀색의 민소매 원피스 밖으로 드러나자 인우는 거침없이 원피스의 지퍼도 내려 그녀의 어깨 아래로 밀어 뜨려 버렸다.


한 줌의 배려도 없는 인우의 차가운 손길에 명현도 함께 굳어져 갔다. 그녀의 투명한 살결 위에는 상아빛의 얇은 슬립만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인우는 자신의 성난 행동에도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는 명현을 사납게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난 인우는 쥐어뜯듯이 단숨에 슬립과 브래지어를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게 했다.


“날 봐. 윤명현. 아무리 의미하나 없는 육체적인 관계라 하더라도 상대의 얼굴 정도는 봐 줘야 되지 않나?”


인우는 그의 어깨 너머로 향해있는 명현의 시선을 그녀의 턱을 쥐어 그에게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떨고 있었다. 뽀얀 젖가슴을 드러내 놓고서야 명현의 시린 어깨는 잔잔하게 떨렸다.


당장이라도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할 정도로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지만 인우는 개의치 않기로 했다. 아직은 그녀의 고집이 그대로 남아있어 보였다.


“마지막 기회야. 네가 생각하는 결혼은 틀렸어. 그러니 안돼. 네가 그걸 인정한다면 지금 그만둘 수 있어.”


인우는 이제까지의 거친 태도와 달리 애절한 목소리로 명현의 얼굴을 감싸쥐며 안타깝게 말했다.


“싫어….”


그는 명현의 대답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이 고집불통, 윤명현.


인우는 양손으로 명현의 얼굴을 힘껏 고정시키면서 벌이라도 주듯 그녀의 입술을 강하게 머금었다. 그는 더 거세게 명현의 입술을 빨아들이기 위하여 그녀의 고개가 꺾일 정도로 완력으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단단하게 닫힌 그녀의 입술은 그의 입술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인우는 그녀의 입 속으로 파고들기 위하여 명현의 아랫입술을 힘주어 깨물어 버렸다.


“아….”


아픈 신음이 터지면서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자 그의 혀가 안으로 난폭하게 파고들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든 침입자처럼 그녀의 입속을 남김없이 건드린 후 명현의 혀를 휘감았다. 한참을 그녀의 입속을 탐하던 인우는 그의 가슴을 밀어내는 힘없는 반항을 느꼈다.


“하아….”


그가 입술을 떼자 그녀는 막혔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 내었다. 그러나 그는 명현의 작은 반항을 무시했다.


“늦었어. 더 느껴봐. 혹시 모르지. 없던 의미가 생길지도.”


인우는 그녀의 달싹거리는 붉은 입술을 지나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기다란 목선과 깊게 파인 쇄골에 입술을 머금고 핥는 동안 그의 손은 명현의 보드라운 젖가슴을 아프게 움켜쥐었다.


명현의 눈에서 눈물이 고였다. 그가 억지스럽게 거친 행동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견디기 힘들었다. 수치심이 아니라 모욕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건 숨쉬는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고 여겼으니까. 감정이라는 게 굳이 없어도 몸이 시키는 대로 응하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던 모양이다. 배려 없는 그의 행동이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걸 보면.


명현은 그녀의 가슴 쪽으로 점점 내려가는 그의 얼굴을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슬픈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만, 그만해요.”


인우는 그의 얼굴을 감싼 작은 손을 내리면서 명현의 가슴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상처 입은 얼굴로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결국 그와 부딪친 그녀의 시선이 고여있던 눈물을 떨어뜨렸다. 인우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내어버린 눈물방울이었다. 그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안타까움을 괴롭게 전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미안하다.”


인우는 차마 명현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에 난 생채기와 손자국이 뻘겋게 남은 젖가슴이 그의 심장에 날카롭게 각인 되었다.


차가웠던 그의 손길이 조심스럽게 파란색의 시트 자락을 들추어 명현의 드러난 살결들을 가려주었다. 그리고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채 가려지지 못한 울긋불긋해진 그녀의 목덜미를 스치듯 어루만졌다.


“이젠 완전하게 나쁜 놈이 되었군.”


그는 씁쓸한 눈빛으로 그녀를 외면하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흘러내린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인우는 창가로 걸어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처럼 그의 모습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감색의 정장도 말끔한 그대로였고 가라앉은 그의 표정도 이곳을 들어오기 전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바지 주머니 속에 감춰진 그의 손만이 힘줄이 불거지도록 주먹이 쥐어져 있었다.


명현은 앞가슴에 여며진 파란 천을 떨리는 손으로 꼭 누르며 하염없이 크게만 느껴졌던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완벽하고 언제나 무한의 힘만이 존재할 거 같은 그에게서 명현은 외로움의 공간을 볼 수 있었다.


진심으로 다가가 마음을 열어 보여도 무조건 밀어내기만 하는 안타까운 사랑이 그에게 없던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명현은 그의 쓸쓸한 외로움이 싫었다. 그러다 그녀의 가슴속에서 가장 슬픈 말을 내뱉었다.


“…사랑해요.”


흐느낌으로 탁해 있었지만 그녀의 음성은 인우가 듣기에 충분히 강했다. 그가 천천히 뒤돌아 섰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명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고요한 그의 눈빛이 눈물 막으로 흐려진 그녀의 눈을 가만히 담았다.


짧은 순간 그러고 있더니 인우는 많은 뜻을 품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맨 어깨를 서늘하게 드러낸 명현의 앞에 그는 다시금 조용히 앉았다.


“다시 말해달라고 하는 건 내 욕심이겠지?”


그의 목소리가 약하게 떨렸다.


인우는 호흡을 정지한 채 그녀의 젖은 뺨을 어루만졌다. 자꾸만 채워지는 습기로 그녀의 말간 눈동가가 보이지 않자 인우는 손가락으로 명현의 눈가에서 물기를 훔쳐내었다.


“…….”


냉기가 흐르던 그의 손끝에 따뜻함이 흘렀다. 하지만 핏물이 밴 그녀의 입술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다만 그와 같은 마음으로 침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정도로도 충분해. 부족하지 않아.”


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명현을 가만히 응시했다. 마음껏 그녀의 모습을 담고있는 인우에게 명현은 조금씩 그녀의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시트를 움켜쥐지 않은 손으로 그의 다리를 짚으며 그녀의 입술을 인우의 입술에 살포시 갖다 대었다.


단정한 그의 입술이 뜨겁게 와 닿자 명현은 자신의 입술을 살짝 열었다. 촉촉하게 열어진 입술을 그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핥으며 절실한 마음을 감미롭게 새겨 주었다.


“사랑해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돼버렸나 봐요.”


인우는 자신의 입술을 머금으며 사랑을 들려준 명현의 입술을 격렬하게 삼켜 버렸다.


서로의 숨결을 더 깊게 가지기 위해서 두 사람의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급기야 명현의 가느다란 두 팔이 인우의 목을 힘껏 휘감았다.


여며진 시트 자락이 흘러내리면서 노출된 그녀의 연약한 살결은 인우의 겉옷에 무방비로 쓸렸다. 그녀를 있는 힘껏 당겨 안던 인우는 매끈하게 드러난 명현의 등을 쓰다듬으며 얼굴을 잠시 떼었다.


“난 이제부터 내 사랑을 가질 거야.”


인우가 짙은 눈빛으로 그녀의 입술을 덧그리며 명현의 허락을 구했다. 그리고 허락의 말 대신 명현의 손이 그의 얼굴 윤곽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다.


반듯한 이마를 시작으로 곧게 내리 뻗은 콧날과 진중한 입술까지. 명현은 문득문득 만지고 싶었던 그의 얼굴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인우는 자신의 얼굴을 손끝으로 세밀하게 그리고 있는 명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네가 떠나보냈어. 널 닫아둘 진짜 마지막 기회를. 그러니 온전히 내게 줘야할 거다. 너의 모든 것을.”


그는 자신의 옷을 차례대로 벗었다. 흐트러짐 없이 매여진 넥타이가 단숨에 풀어졌고 하늘빛이 돌았던 셔츠의 단추도 거침없이 헤쳐졌다.


그가 벗어 던진 셔츠가 침대 아래로 떨어지자 아름다워 보일 정도의 탄탄한 가슴과 복부가 아무런 방해 없이 명현의 눈앞에 자리 잡았다.


“…예뻐요.”


그의 벗은 상체를 바라보던 명현은 참고있던 숨을 내놓으며 수줍게 말했다. 순간 그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뭐?”


놀라는 인우의 기색에 명현이 작게 웃었다. 홍조 띤 얼굴로 크지 않게 웃음을 베어 물고 있었다. 인우는 그 웃음을 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입술로 먹어 버렸다.


그의 맨 가슴에 그녀의 말캉한 살들이 부딪치자 인우는 아찔한 숨을 그녀의 입술 위에서 빨아 들여야 했다.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 명현은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열었다.


그가 상처낸 입술을 미안함으로 부드럽게 핥아두던 인우는 그녀가 내어준 입술 속을 마음껏 파고들었다. 수줍은 듯 머뭇거리며 그를 받아들이기만 하던 그녀의 혀를 인우는 부드럽게 휘감아 자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명현은 숨이 막혔다. 조금만 멈춰주면 견딜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는 명현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의 어깨에 올려진 그녀의 손가락에는 힘이 들어갔다.


끝내 어느 순간 참지 못한 명현은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숨을 뱉어야 했다.


“하아… 하아….”


투명한 살들을 내놓은 채 그의 무릎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명현은 정신을 앗아버릴 정도로 고혹적이었다. 인우는 그런 명현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넌 지금 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를 거다. 지나치게 그리고 불안할 정도로.”


인우는 투명한 윤기가 흐르는 그녀의 어깨에 입술을 부비며 가라앉은 음성을 뱉어냈다. 어깨뼈를 따라 잔잔한 입맞춤을 뿌리던 그의 입술이 차츰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는 여린 살들이 눈부시게 차 올라 있는 명현의 젖가슴을 사랑스럽게 감싸쥐면서 입을 맞추었다.


깨끗한 그녀의 향기를 맡으며 보드라운 살 무덤에 얼굴을 묻은 인우는 서둘지 않고 느리게 그녀의 가슴을 탐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하얀 즙이 떨어질 것 같은 여린 살들을 입 안 가득 머금으며 또렷하게 솟아난 유두도 함께 물었다. 자신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온 유두를 인우가 지그시 물어버리자 아픔의 신음이 명현에게서 절로 튀어 나왔다.


“아…!”


그에게 가슴을 내주느라 명현의 허리는 자꾸만 뒤로 젖혀졌다.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매달려도 명현의 몸은 휘청거렸다. 그 바람에 그녀의 등은 푹신한 매트리스에 닿고 말았다.


그리고 흘러 내려간 채 걸쳐져 있던 원피스와 나머지 속옷들이 그의 손에 의해 재빨리 벗겨져 나갔다.


이윽고 드러난 그녀의 나신을 내려다보는 인우의 뜨거운 시선에 명현의 가슴은 떨리는 숨을 쉬느라 평소보다 높이 달싹거리고 있었다.


인우는 그런 그녀의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에 대었다.


“날 안아봐. 윤명현. 힘껏.”


그의 몸이 아래로 숙여지자 명현은 넓기만 했던 그의 등을 넘치도록 껴안았다. 가슴 가득 빈곳을 남기지 않게 그를 최대한 깊게 끌어안았다.


그렇게 마침내 자신의 품에 안은 남자는 눈물이 솟구칠 만큼 따뜻했다. 그리고 하나의 다른 세상처럼 넓었다.


“날 안은 기분은? 난 미칠 거 같은데.”


그녀의 귓불에 그의 입술이 닿아 속삭이자 명현은 표현할 수 없는 전율로 몸을 떨어야 했다. 그리고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좋아요. 눈물이 날 만큼.”


“기억해 둬. 지금 느낀 감정이 이제부터 네가 아는 사랑의 전부가 될 테니까.”


인우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쏟아낸 그녀와 입술을 겹치면서 그의 나머지 옷들도 벗어 던져 버렸다. 두 사람은 어떠한 것도 침범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맞닿아 있었다.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쓸어주던 그의 입술은 점점 열망에 사로잡혀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온몸을 휘감는 그녀의 보드라운 감촉에 인우는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 명현의 모든 것을 가져오기라도 하듯 그녀의 입술을 힘차게 빨았다. 그러다 인우는 상처난 그녀의 입술이 다시 터져 버린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미안함으로 그만 둘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갈망이 너무도 비대해져 있었다.


드러내놓고 다니는 게 늘 못마땅했던 하얀 목덜미를 그의 입술을 은근한 애무로 감미롭게 점령해 나갔다. 간지럽기도 하고 때로는 짜릿하기도 한 감각에 명현은 고개를 비틀었다.


“어떻게….”


눈을 뜨고 있어도 보이는 게 없었다. 오로지 그의 입술이 자신의 살갗을 쓸고 깨무는 자극적인 감각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명현은 어느새 자신의 가슴을 탐하고 있는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는 살 오른 그녀의 가슴을 거칠게 베어 물면서 유두도 함께 빨아 당겼다. 그는 입안을 맴도는 유두를 끝이 아릴 정도로 끈질기게 애무했다. 명현은 유두를 휘감고 있는 뜨거운 혀로 인해 입안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제발.”


그러나 명현의 신음은 억눌러져 거의 새어 나오지도 못했다. 인우의 손길이 그녀의 몸을 움츠려들게 하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의 복부를 조심스럽게 쓸면서 손길을 조금씩 아래로 움직였다. 그의 손이 아랫배를 스치듯 지나 그녀의 다리 사이를 살며시, 그리고 애틋하게 쓰다듬자 명현은 그에게로 다가가고 싶은 간절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런 마음은 명현의 등이 위로 휘어지게 하면서 그의 머리칼을 헤집는 그녀의 손길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하아, …이젠 날 안아주면 안 되나요?”


향긋한 명현의 음성에 인우는 그녀의 가슴에서 얼굴을 들었다. 열기로 아득해진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명현의 모습은 인우의 심장을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트릴 정도로 색스러웠다.


“너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어.”


인우가 거친 호흡을 속삭이듯 내뱉으며 명현의 입술을 격렬하게 훔쳤다.


서로를 절실하게 끌어당기던 둘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인우는 나긋해진 명현의 무릎을 세우고는 그 안으로 깊숙이 밀고 들어갔다.


명현은 자신의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낯선 통증에 그의 목덜미를 세차게 안아버렸다. 악, 하고 신음이 나올만한 고통이었다. 인우의 어깨 위에 입술을 꾹 누르며 명현은 터져 나오는 비명을 감추었다.


움찔하며 그녀의 허벅지가 그의 허리를 가볍게 스치자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인우가 물었다.


“힘들어?”


명현은 그의 목덜미에 감았던 팔을 느슨하게 풀면서 그 못지 않게 낮은 소리로 웅얼거렸다.


“아, …조금.”


“멈출까?”


인우는 더 깊이 들어오려던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지만 입술로는 명현의 귓불을 지그시 씹으며 초조하게 지분거렸다. 그의 애무에 명현은 신음 섞인 호흡을 억지로 삼키며 인우를 놀렸다.


“…가능하다면요.”


“전혀 아니야.”


명현의 귓속으로 불어넣은 입김을 끝으로 인우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귀에 매달린 채 투명한 빛을 발하는 보석 알갱이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애잔하게 흔들렸다. 땀으로 얽힌 머리카락들이 곱게 찌푸려진 이마에 흩트린 채로 명현은 열기에 잠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누구도 보아서는 안 될 그녀의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에 인우는 그만 격정적으로 치닫고 말았다.


더 깊이 그녀를 가지기 위해 그녀의 입술을 탐욕적으로 빨아들이면서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살짝 안아들어 올리고 자신을 열정적으로 묻었다.


그 바람에 명현의 가느다란 다리는 그의 단단한 허리에 감아졌고 둘은 더 깊숙한 곳까지 닿기 위해서 하나가 되어야 했다.


냉방으로 서늘하기까지 한 공간이 후덥지근하게 데워질 만큼 서로를 탐하는 그들의 호흡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한 동작으로 움직이던 두 사람은 거친 절정에 올라 그들의 욕망을, 그리고 사랑을 동시에 터뜨리고 말았다.


아무런 사고도 할 수 없었던 아찔한 절정의 순간이 지나자 명현은 아직도 자신의 위에 쓰러져 있는 그의 등을 가만히 쓸어 내렸다.


그냥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의 따뜻한 체온을 오래도록 느끼고 싶었다.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의 온기를.


그러자 어느 순간 눈물이 배어나더니 그치지 않고 거세게 귀 옆을 적시며 떨어졌다.


명현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슬픔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그녀의 침묵에 인우가 움직이려 하자 명현은 그를 더 꼭 끌어안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에게 눈물을 보여 주기 싫었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을게요.”


인우는 명현의 음성이 젖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놓지 않으려는 듯 그의 등을 힘주어 안고있는 그녀의 손을 인우가 느긋하게 풀었다. 그리고는 그의 몸을 그녀의 옆에 조용히 내렸다.


“그러다 압사해. 그러면 누구는 억울해서 죽겠지. 두 사람을 죽게 만드는 그런 일을 계속 할 순 없어.”


“훗, 억울할 거 같아요?”


마디지지 않은 명현의 하얀 손가락이 그녀의 눈물을 깨끗하게 훔쳐냈다. 그리고는 말간 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간신히 얻었는데.”


인우도 웃었다. 진지하고 단정했던 입가가 부드럽게 풀어지면서 마주 누워있는 명현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넘겨주었다.


“후회할 수도 있어요. 그 간신히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솔직히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사랑이란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그걸 끌어가는 방법이나 배려의 마음을 알 리 없다.


명현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네 경우도 마찬가지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인우는 불안함이 엿보이는 명현을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맞닿은 가슴으로 전해 주었다. 인우는 한 팔로도 충분히 감싸지는 명현의 가녀린 몸을 어디에도 내 놓지 않으려는 듯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누가 얘기해 주지 않던가? 네 웃는 얼굴이 보는 사람 심장을 뺏어갈 정도로 예쁘다는 걸? 웃지 마, 윤명현.”


그의 가슴팍에 묻힌 명현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 것도 선뜻 약속이라는 말로 묶어 둘 용기가 서질 않았다. 간단히 웃는 일 정도인데도 명현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노력할게요.”


명현은 그의 가슴에 입술을 대고 스스로에게 들려주듯 조그맣게 다짐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 10장


엄마? 엄마!


하얀 꽃들이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들판에 펼쳐지더니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꽃대롱이 사르르 흔들거렸다. 그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그녀의 엄마가 웃으며 서 있었다. 명현을 향해 활짝 웃어주고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엄마의 웃음이란 없었다.


엄마, 참 예쁘다.


명현은 웃음 띤 얼굴로 팔을 벌려 그녀를 부르는 엄마에게로 다가가기 위해서 꽃들을 헤치며 열심히 뛰어갔다. 그녀의 얼굴이 보드라운 꽃잎들을 스치고 지나가자 하얗게 꽃눈이 휘날렸다.


온 힘을 다해 뛰어가도 다가간 만큼 엄마는 멀어져 있었다. 할 수 없이 명현은 손을 내밀며 뛰었다.


조금만 더 가면 그리운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손을 닿지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엄마!


무거운 눈꺼풀이 올려졌다.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거 같은데…. 빛이 스며드는 걸 보면 벌써 부지런한 여름 아침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명현은 실눈을 떠 빛 조절을 하면서 커튼 사이로 보이는 밝음을 눈에 익혔다.


과연 어제와는 다른 세상일까. 자신의 마음 전체가 뒤바뀐 만큼 세상은 달라져 있을까. 아니 달라 보일까. 내가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또 그 사랑은 변하지 않을까.


명현의 눈동자는 수많은 물음과 두려움으로 흔들렸다.


자정이 지난 이른 새벽, 그에게 물었다. 당신의 사랑이 변하지 않을 거란 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그러자 그는 망설임 없이 말해 주었다.


‘나는 내 심장을 믿어. 쉽게 변할 거면 그렇게 아프게 뛰지도 않았겠지. 그러니 너도 네 심장을 믿어.’


명현은 등뒤에서 자신의 몸을 두르고 있는 그의 기다란 손가락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나직이 혼잣말로 얘기했다.


“내 사랑은 불안해도 당신의 사랑을 믿을래요.”


혼란스러움으로 쿵쿵대는 자신의 심장을 달래 듯 명현은 그의 손가락을 느리게 쓸어 내렸다.


“더 자.”


명현의 정수리 위에서 인우가 쉰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명현은 어깨 위에서 가슴 쪽으로 비스듬히 내려온 그의 팔을 풀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꽤 흘러 있을 것이다. 일어나기 위해 명현이 몸을 들썩이자 그가 처음보다 더 강한 힘으로 그녀를 자신의 품에 가둬 버렸다.


“그대로 있어. 일요일이야.”


엄지손가락으로 명현의 쇄골을 문지르고 있는 인우는 아직까지 잠이 잔뜩 묻어 있었다.


항상 수평을 이루고 있던 서늘하고 단단한 그녀의 어깨가 그의 가슴 안에서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사랑으로 머물기를 부정하던 가시 돋친 바람이었던 그녀가 그에게 바람결을 내주었다. 그것도 아주 용감하게 가시를 걷어 내면서.


“속 쓰려요.”


인우의 손등을 토닥거리면서 명현이 불편함을 호소했다. 그의 팔을 풀기 위한 어느 정도 진심이 섞인 핑계였다. 그때서야 몸을 감싸고 있던 인우의 팔이 천천히 풀어지면서 명현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명현은 곧 후회했다. 냉방 된 실내의 차가운 공기들이 몸 속으로 파고들면서 생각지도 못한 허전함을 몰고 왔다. 그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으니 서글픈 마음에 가슴이 찡하고 울고 말았다.


끔찍한 불치병이 맞나보다.


업고있던 자신을 내려놓으면 그 포근한 품이 그리워 다시 안아달라고 떼쓰는 아기처럼 그녀도 조르고 싶었다. 계속 안아달라고, 떼어 놓지 말고 항상 품어 달라고….


명현은 얇은 시트 자락을 끌어올리며 맨 가슴을 드러낸 채 앉아있는 인우와 마주했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둘은 서로를 살피면서 깊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더 맑아진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인우가 싱긋 웃으며 명현의 눈가를 쓸어주었다.


“괜찮아?”


유난히 하얀 얼굴이라 그런지 체력적으로 한계가 왔을 때 그녀의 눈가는 파랗게 그림자가 지곤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랬다. 밤사이 몇 번에 걸친 자신의 격정적인 사랑을 고스란히 받아내느라 명현은 핼쑥해 보였다.


“뭐가요?”


명현은 그의 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소중한 손길로 얼굴을 쓰다듬는 그의 걱정스러움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아직은 그런 속내를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을 거 같았다.


“뭘 묻는 거 같아?”


명현의 딴청을 눈치 챈 인우는 느긋한 표정으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말했잖아요. 속 쓰리다고.”


이쯤에서는 그녀의 상태를 얘기하리라 생각했던 인우는 고집스러운 명현의 대답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몇 번에 걸쳐 술 마시는걸 봐서는 예사로운 실력이 아닌 것 같던데. 그런 만큼 숙취에 대한 사정은 네가 더 잘 알 테지. 설마 이런 순간에 그런 걸 물어볼 바보 같은 남자가 있을까?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줘야 하나? 내가 뭘 궁금해하는지?”


“아뇨! 하지 말아요. 그럴 필요 없어요.”


명현은 그렇지 말라는 듯 재빨리 손을 가슴높이로 들어 보이면서 그가 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설명을 저지시켰다. 그러면서 미안한 듯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솔직히 말해야 되겠죠? 음, 이러다 언젠가는 내가 오징어가 되겠구나.”


“뭐? 훗, 윤명현다운 감상이군. 하여튼 넌 날 슬프게 만드는 탁월한 재주가 있나보다.”


슬프다면서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명현은 뜨끔했다. 진지하지는 않았지만 슬프다는 인우의 말은 그녀의 마음을 왠지 모르게 안타깝게 만들었다.


명현은 잔잔하게 떨리는 눈동자로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에 입맞춤했다.


“미안해요. 당신을 슬프게 만들어서.”


명현의 수줍은 다가섬에 인우의 심장은 전율했고, 그의 입술을 불덩이가 되어 그녀에게로 빠져들어 버렸다.


‘확실히 내 심장은 이제 내 것이 아닌가 보다. 너로 인해 빨라지고 느려지는 걸 보면. 나의 윤명현….’


***


아침을 빙자한 이른 점심에 명현의 속쓰림도 해결할 겸해서 인우는 그녀의 부탁대로 ‘향수(鄕愁)’를 향해 차를 몰았다.


점심때가 다 되어서 그런지 주차장엔 제법 많은 차들이 있었고 벌써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준비된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함께 대문을 넘다 문득 명현은 커다란 그의 손에 얌전히 잠긴 자신의 손을 이상한 마음으로 내려보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그의 완력으로 아프게만 잡혔던 손이 지금은 소중하고 부드럽게 감싸져 있었다.


그때의 일을 기억을 못하는지 태연하고 능청스럽게 그리고 원래부터 제 자리인 양 편안하게 들어 있었다. 명현은 잠시 어이없는 웃음을 웃었다.


사랑이란 건 도대체….


“아이구! 이거, 명현씨 아니세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이 녀석이 연애에 젬병인건 모르는 사람 빼고는 다 아는 사실인데. 아직 명현씨가 이놈 옆에서 무사하신 걸 보면 제 버릇 개 줬나 봅니다. 여자에게는 무심병 걸린 녀석이었는데. 자, 자. 어서 들어오세요…. 알아서, 인마. 그만하면 되잖아.”


인우가 과하다는 듯 눈썹을 들어올리자 경수는 그 많은 말들을 재빨리 수습하고 두 사람이 처음 왔을 때의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같은 곳이라 하더라도 밤에 느꼈던 정취와 낮에 보게되는 풍경은 그 공통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달랐다.


여전히 정원의 사물들은 마치 처음부터 거기가 자기 자리인양 능숙해 보였고, 색색의 꽃들은 자연의 빛을 머금어 보는 이의 눈을 감탄 시켰다.


얼마 기다리지 않았는데도 밥상을 채울 음식들이 맛있는 냄새와 함께 방안으로 들어왔다.


거의 하루 반 이상을 아무 것도 먹지 못했던 명현은 눈앞에 차려진 음식들을 감동스러움으로 바라보았다.


“얼른 먹어. 음식에게도 질투가 생겨난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어쩌면 그렇게도 반가워 할 수 있지?”


“하루 이상 굶었어요. 그리고 어제는 과음도 했었죠.”


시장기로 마음이 급할텐데도 정갈하게 음식을 먹고있는 명현을 인우는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조금씩 차분하게, 그리고 작은 소리 하나 내지 않는 모습이 무척이나 기품 있어 보였다.


명현의 밥공기가 비워질 때쯤 인우는 맛있게 먹고있는 그녀가 대견하면서도 궁금했다.


“칭찬 하나 할까? 보기와는 달리 뭐든 잘 먹는군.”


먼저 수저를 놓은 인우가 싱긋 웃으며 물 잔을 건네자 명현은 수줍게 멈칫하면서 조용히 건네 받았다.


“1년차들 철칙이잖아요. 기회가 주어질 때 잘 먹자. 하루 한 깨 간신히 먹을 수 있는 입장들은 뭐든 잘 먹게 되어있죠. 오죽하면 잠신, 걸신, 일에는 병신이라는 1년차의 저주가 생겼겠어요. 불쌍하게도. 하지만 당신은 전혀 상관없었을 거 같이 보여요.”


넥타이를 매지 않은 셔츠 차림으로 느긋하게 등을 벽에 기댄 채 웃음을 머금고 있던 그는 명현의 말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되물었다.


“뭐가?”


“1년차의 저주 말이에요.”


아무리 1년차였다 해도 그는 달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방에서의 실수도 없을 것이며 졸음으로 아무 곳에서 졸지도 않았을 것 같았다. 명현은 1년차인 그의 모습이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글세? 누구나 다 그랬다면 나라고 피해 갔을까? 마찬가지였겠지. 하지만 스태프에게는 내가 알고있는 1년차보다 확실히 공손했었지. 그리고 누구처럼 술도 많이 마시지 않았고. 존경스럽게도 위스키 큰 병을 한 시간도 채 못되어 바닥을 보이게 만들었더군.”


인우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어젯밤 바(bar)에서의 명현을 떠올렸다. 낮은 불빛 아래에서 나른하게 웃던 그녀의 모습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의 기억 속에서 지워질 것 같지 않았다.


“다행히 주정 같은 건 부리지 않아요.”


후식으로 들여 온 오미자차의 화려한 붉은색에 눈길이 가 있던 명현은 뭔가가 있음을 드러내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취중에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한다면 그건 주사가 있는 거야.”


명현이 조금은 불안한 눈빛을 하면서도 확신에 찬 대답을 들려주자 인우는 슬쩍 웃으며 정정해 주었다.


“어제 내가 그랬다는 건가요?”


명현은 그럴 리 없다고 믿으면서도 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아주 인상 깊었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인우와는 달리 명현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뭐였어요? 혹 큰 실수라도 했나요?”


명현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조심스레 물어보자 인우는 장난스럽게 싱긋 웃어 주었다.


“뭐, 별로. 웃는 얼굴로 친근감 있게 대해줘서 나쁘진 않았어.”


그로서는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 순간 그녀 앞에 세워진 높은 벽 하나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었다.


“친근감 있게?”


명현은 신경 쓰이는 단어를 꼬집어 물었다.


“씨익 웃으며 반말하던데? 내 의향은 묻지도 않고.”


다분히 장난스러운 그의 말투 때문이었는지 명현도 한결 누그러져 보였다. 그러면서 무심코 툭 내뱉었다.


“거짓말.”


그의 말이 못미더워 명현은 새침하게 콧잔등을 살짝 찌푸렸다. 느슨하게 풀어졌던 인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난감했다. 명현으로서는 단순하게 지어 보이는 표정일 텐데도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불러 일으켰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서 찡그린 콧잔등을 만지고 싶었다. 그런 다음 입도 맞추고 싶었다.


훗, 인우는 자신의 심각한 증세에 피식 웃고 말았다.


“거짓말 같은 거 안 한 지는 꽤 됐어.”


인우는 가까스로 열기를 감추고 진지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명현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는 저번에도 했어요. 아파트에 왔던 날. 휴대폰 확인해 보니 걸려온 전화였어요. 누구 말대로 먼저 건 게 아니라. 그러니 못 믿겠어요.”


“그땐 네가 미워서 잠시 심통이 났었지. 하지만 어제는 정말이야.”


새삼스러웠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이 한참이나 지나버린 기억 속의 일 같이 느껴지니.


인우는 편안한 자세로 세워 둔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려두고 기다랗고 모양 좋은 손가락으로 까칠해진 자신의 턱을 느릿하게 쓸었다.


명현은 인우의 표정을 살피면서 다시 한 번 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그랬어요?”


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코.”


“많이 취했었나 보네요.”


왜 그랬을까. 그런 적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 반말이라니.


명현은 시선을 찻잔에 떨어트린 채 잠자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낯빛이 부끄러움으로 찻잔 속 찻물처럼 빨개져 있었다.


“듣기 좋던데 뭘. 평소에도 그러고 싶다면 동의해 줄 수 있어. 기꺼이.”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인우가 가볍게 지나치듯 제안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명현의 엄격하게 나무라는 눈빛이었다.


“위로치고는 좋은 방법이 아닌 거 같아요.”


어디서 저런 위엄이 나오는지. 차갑고 고집스러운 것만으로는 그녀를 표현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바로 쉽게 근접할 수 없는 위엄이었다.


저 자그마한 얼굴에 얼마나 많은 다른 모습들이 숨어 있는 건지. 인우는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깊숙이 빠져드는 늪처럼 명현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유전인가? 아니면 맹렬한 노력 때문인 건가? 알코올에 강한 거 말이야.”


그녀를 잠시 놀리느라 주정이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그가 볼 때 어제 밤 명현은 거의 정상이었다.


걸음걸이가 조금 흔들리기는 했어도 그 정도의 양을 마신 사람치고는 정상의 범주에 속했다. 서너 잔이 한계인 인우로서는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둘 다 아니에요. 그냥 쉽게 얻어진 것 중 하나죠.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대학 다닐 때 작정하고 할아버지께 대들어 보려고 처음 술을 마셔 봤는데 그 효과를 못 봤어요. 어느 정도 마셨다고 생각했는데도 또렷한 정신이 그대로 남아 있더라구요. 그 후에도 제법 많은 시도를 했었는데도 생각만 넘쳐날 뿐, 대들 수 있을 만큼은 못 됐어요.”


“할아버지께서 운이 좋으셨네. 아직도 대들고 싶어?”


“아직도 그래요.”


명현은 우스운 이유라며 담담하게 들려주긴 했지만 인우는 그녀의 담담함이 씁쓸함을 대신하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앞 뒤 내용이 생략되긴 했지만 그녀의 지독한 슬픔에는 부모님 외에 할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왜?”


“미우니까. 감당할 수 없는 무게만큼 미워요.”


그녀는 극도의 미움을 표현하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그러다 한순간 지금까지 보여 준 모든 표정들을 싸늘하게 덮어버리는 얼굴로 명현은 허리를 곧추 세워 앉았다.


“배부르니까 졸려요.”


지독한 슬픔에서 차가운 도도함으로 그리고 불같이 뜨거운 사랑을 가진 여자, 또….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명현의 모습을 바라보는 인우의 기다란 눈매가 점점 짙어가고만 있었다.


***


“윤명현, 다 왔어.”


아파트 앞에 차를 세운 인우는 잠이 든 명현을 조용히 불렀다.


하지만 깨우기 미안할 정도의 곤한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아 인우는 목소리에 힘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명현은 부름에도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다.


“지금 안 일어나면 오늘도 집에 못 들어가.”


인우는 명현의 뺨을 살며시 건드렸다. 그러자 옆으로 기울어져 있던 그녀의 머리가 간신히 바로 세워지더니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눈이 떠지지가 않아요.”


명현은 몇 번씩이나 눈을 비비면서 작게 웅얼거렸다.


“그만 비벼. 눈 망가져.”


“괜찮아요. 마사지하는 거니까.”


“자신이 렌즈 꼈다는 거 잊어버렸어?”


명현이 눈가를 꾹꾹 누르며 정신을 차리려 애쓰는 명현의 손을 그가 휙 잡아 내렸다.


“렌즈 안 꼈으니까 괜찮아요.”


“엄청난 시력이던데 맨 눈으로 일상생활이 가능한가?”


인우는 안경을 끼지 않은 명현이 당연히 렌즈 착용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알고있는 그녀의 시력은 안경 없이는 보통의 생활조차도 불편했을 정도였다.


“불가능하죠.”


“그러면서 왜….”


“그냥요.”


가벼운 미소로 뒷말을 얼버무리는 명현을 인우는 잠시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단순히 그냥?”


“…실은 아니에요. 뭐든 뚜렷한 게 싫은 날이었어요. 어제는.”


“선을 봐야되는 중요한 날이었는데도?”


“겉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으니까.”


그랬다. 어제는 작은 부분까지 보여지는 선명함이 부담스러운 날이었다. 행여 그 작은 게 계속 눈에 거슬려 결혼 결정을 머뭇거리게 할까 봐 보지 않는 쪽을 택했다.


보여지는 게 적으면 마음 꺼려지는 일도 줄어들 테니까.


그 순간 명현의 대답을 듣고있는 인우의 얼굴이 조금씩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네 머릿속을 한 번 열어 봤으면 좋겠다. 어떻게 생겨 먹었기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만일 호텔에서 그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하는 생각만으로도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인데, 그런 마음으로 선택한 남자와 결혼을 할까 생각했다니.


결국 인우는 화를 참지 못하고 명현의 어깨를 다그쳐 잡았다.


“다음으로 준비된 또 다른 생각이 있어?”


“없으니까 화내지 말아요.”


명현은 그가 느끼고 있는 불안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불투명함으로 불안해하는 그의 모습은 명현의 마음까지 언짢게 만들었다.


“잘 들어. 다른 사람은 안돼. 내게로만 노력해서 와.”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명현에게 인우는 분명하게 밝혀 두었다.


“그럴 게요.”


명현이 어느 때보다 더 차분하고 또렷하게 대답했음에도 인우는 부족해했다.


“약속해.”


“약속해요.”


붉은 입술과 맑은 눈동자가 동시에 약속해주자 비로소 인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의 피를 들끓게도 하고 또 차갑게 식혀주기도 하는 명현을 인우는 꼭 껴안았다.


‘윤명현, 열심히 노력해. 그리고 서인우에게로 잘 찾아와.’


“들어가. 도착하면 전화 줄게.”


그의 차가 아파트 단지를 유연하게 빠져나갔다. 한 번의 짧은 멈춤도 없이 단숨에 사라져 버렸다.


명현은 꼼짝도 않고 그가 사라진 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자신에게 마음과 입술은 그렇게 정의를 내렸고 또 그에게 전했다.


다만 그의 온기가 그리웠었고 짙은 눈빛으로 자신을 지켜보던 긴 그림자를 잡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입술이 사랑이라고 전해 버렸다.


사랑이라니….


낭떠러지 끝에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래를 내려보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휘청거리는 자신을 뒤에서 끌어당겨 준 사람이었다.


그는 억지로 자신의 몸을 돌려세우지 않았다. 스스로 돌아서길 기다린다 했다. 서로 마주 볼 수 있게 노력하라고 했다.


뒤로 돌아서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 되면 낭떠러지는 자신의 등뒤에 버티고 있게 될 테고 두려워질 것이다. 그가 밀어 버리지는 않을까 항상 조바심 낼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돌아서고 싶다. 거기에는 그가 있으니까.’


***


전화벨이 울렸다.


언제나 귀를 열어두고 자야 되는 습관 때문에 명현의 손은 금방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눈을 뜨지 못했지만 익숙하게 통화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잤니?]


“…네.”


[아직 눈을 못 떴군.]


그의 낮은 웃음이 살풋 들린 것 같았다.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기라도 하듯 그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명현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어떻게 알아요?”


[잠들고 깬 얼굴을 몇 번 봤는데 그 정도 모를까.]


뭐든 틀린 적이 없는 남자. 명현은 불쑥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도 틀릴 수 있다고.


“누가 들으면 오해사기에 적당한 말이네요. 그리고 틀렸어요. 눈 크게 뜨고 있어요.”


속아넘어가지 않는 그의 웃음에서 명현은 상쾌함이 느껴졌다.


[훗, 저녁때가 다가오는데 한 끼 정도는 먹었나? 아, 그럴 리 없겠군. 아직 눈도 못 떴으니. 외래만 있는 날이니까 회진 끝나고 8시까지는 갈 수 있을 거야. 외출 계획 있어?]


일부러 힘주어 뜨고있던 명현의 눈이 다시 슬슬 감겨졌다.


“…오늘은 힘들 거 같아요.”


[그럼 퇴근하면서 전화하도록 하지.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없어요.”


[잘자, 윤명현.]


그의 목소리가 가물가물해지면서 명현은 곧 잠이 들었다.


***


잠투정하는 아이처럼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녀와 함께 잠들고 싶을 정도로 그를 자극했다.


풍부한 속눈썹을 깊게 내리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하얀 손으로 만지면서 전화를 받았을 것이다. 눈은 뜨지도 못하면서도 허리는 또 얼마나 곧추 세우고 있었을까?


그녀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인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오늘은 수술이 없었던 탓에 늦게까지 상태를 지켜봐야 되는 환자도 없었고 중환자실도 위급을 넘겨 다른 날보다 스테이블(stable)한 저녁이었다. 회진을 끝내고 치프인 병훈에게 전할 것만 간단히 하고는 그의 방 쪽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선생님 약속 있으신가 봐요.”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한 후 바쁜 듯이 뛰는 걸음을 걷는 인우를 보며 함께 6층을 향하던 병훈이 신기한 눈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보여?”


“네. 급해 보이시는데요? 늦으셨나봐요. 선생님이 병실복도 뛰는 거 처음 봤으니까요. 중요한 약속이신가 봐요.”


“훗, 그래. 내가 복도를 뛸 정도면 중요한 일인가 보다. 내일 보자.”


병훈은 복도를 성큼성큼 뛰어가고 있는 인우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를 뛰게 만든 중요한 약속이 궁금했다. 병훈이 인턴시절부터 알던 인우는 응급과 위급 환자가 발생해도 뛰는 걸 보지 못했다.


그의 긴 다리로 성큼거리면 다른 사람들의 빠른 걸음과 비슷하니 뛰지 않아도 언제나 늦는 법이 없었다.


병훈은 그런 그가 뛸 정도니 상상도 못 할 만큼 대단한 약속임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조금은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명현이 문을 열었다.


그녀는 아기 손톱 만한 앵두들이 앙증맞게 프린트 된 원피스를 소녀같이 입고는 하얀 맨발을 그대로 내놓은 채 어색해 하고 있었다.


인우가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면서 종이 가방을 내밀어도 가방만 조용히 받아 들었다.


어제 오후 헤어지고 난 순간부터 그녀가 그리웠던 인우로서는 자신이 내민 가방에만 시선을 주는 명현이 못내 아쉬웠다.


“마치 도시락 배달 온 사람 보듯 하는군. 냉큼 가방만 받아들고. 그래도 배달원은 적어도 눈은 마주치면서 계산은 해 주지 않나? 그렇게 가방만 쳐다보고 있으면 계산은 어떻게 하지?”


인우가 쑥쓰러워하는 명현을 놀렸다. 그러자 순간 그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 가방만을 보고있던 명현이 그를 향해 얼굴을 들면서 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훗, 얼마죠? 그런데 참고로 난 도시락 배달 온 사람에게는 신발을 벗도록 허락하지 않아요.”


“뭐?”


명현이 재치 있게 그의 놀림을 되받아치자 인우는 멍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명현은 편안한 인사를 들려주었다.


“외래만 있는 날이라 그나마 덜 힘들었겠네요.”


“게다가 늘 신경이 쓰이던 1년차도 없었지.”


그 말에 명현의 눈썹과 콧잔등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귀엽게 일그러지는 그녀의 얼굴을 인우는 빤히 쳐다보더니 싱긋 웃고는 거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람의 온기라는 것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공간 안에 나 이외에 다른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혼자 있을 때만 느낄 수 있었던 어깨의 섬뜩함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한 지붕 아래의 온기를 내가 그리워했던 적이 있었던가? 감히 그랬던 적이 없을 텐데도 그가 들어서는 순간 은연중에 느껴진 걸 보면 나도 나 이외의 온기를 그리워했던 모양이다.’


명현은 그가 사온 도시락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었다. 그리고 카키색 소파로 다가가는 인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구에서 귀엽게 골이 난 그녀의 표정을 본 후 인우는 미소를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등을 깊숙이 묻으면서 상의와 넥타이를 소파 팔걸이에 걸어두고는 고개를 두로 젖혔다.


매일 이럴 수 있다면. 자신이 두드리는 문소리에 맨발로 달려나오는 그녀를 매일 볼 수 있다면.


자연이 가장 아름답고 건강할 때의 시골풍경이 사진으로 찍혀 그의 맞은 편 벽에 걸려있었다.


작은 시내와 좁다랗게 이어지는 동네길들 그리고 파랗고 새하얀 하늘. 인우는 사진 위에다 그의 바람들을 함께 얹어 놓았다. 한 곳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을.


“차 안 끓였어요. 안 좋아한다기에.”


어느새 다가왔는지 그의 가까이에 명현이 서 있었다.


인우는 젖혀진 고개를 살짝 옆으로만 돌리고는 하루의 피곤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그래?”


“치프 선생님이. 물만 있으면 된다고 하던데. 정말 아무 것도 안 마셔요?”


어느 날 병훈이 그랬었다. 서인우는 차나 음료는 전혀 안 마신다고. 이유는 모르지만 아무튼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공식적인 정보라 했다.


“안 마셔.”


“왜요?”


“이것저것 혼합된 게 싫어서.”


깔끔하고 맛있는 차가 얼마나 많은데.


명현은 쟁반에 받쳐 든 물 잔을 그의 눈앞으로 쑥 내밀었다.


“단순한 물이에요.”


의미가 섞인 듯한 명현의 말에 그의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면서 그것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차가운 컵이 손끝에 와 닿자 인우는 컵을 든 그녀의 손목을 당겨 버렸다.


“앗, 물 쏟아져요.”


명현은 컵을 어쩌지도 못하고 든 채고 인우의 다리위로 앉혀졌다. 그 바람에 출렁이면서 넘친 컵의 물은 그의 셔츠를 흠뻑 적셔놓았고 그녀는 젖어버린 셔츠만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다 젖었어요.”


인우는 그녀의 손에 어중간하게 들려져 있는 컵과 콧등에 걸쳐진 안경을 나란히 소파 앞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허리를 바싹 끌어당겼다.


순간 명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말려 올라간 치마 때문에 매끄러운 그녀의 허벅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조금은 감추고 싶어 명현이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허리를 움켜잡고 있는 그의 손은 그녀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두지 않았다.


“괜찮아 단순한 물일뿐이니까. 깨끗해, 너처럼.”


첫 단추가 풀어진 원피스 목 깃 사이로 그의 입술이 들어왔다. 자신의 목덜미에 닿은 그의 입술이 놀랄 만큼 뜨거워 명현은 훅하고 숨을 들이마신 뒤 겨우 입을 열었다.


“틀렸어요. 그 말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요.”


“훗, 맞아. 넌 당연히 그렇게 얘기해야 돼. 자기 입에서 ‘나 깨끗해요’라는 말이 나오면 너무 뻔뻔하지.”


목덜미에서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던 그의 입술에서 웃음이 쏟아졌다. 그녀의 살갗을 태우면서 깊게 파고드는 그의 웃음은 명현의 모든 것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겸손할 만큼 착하지도 않아요.”


그녀의 원피스 앞섶이 점점 넓게 벌어졌다. 가슴 부분까지만 이어진 단추가 그의 손에 모두 풀어지면서 가쁜 숨이 오르내리는 명현의 가슴이 살짝 드러났다.


“좋아, 정정해 주지. 콩깍지가 덮인 서인우의 눈에만 깨끗해.”


그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그녀의 뽀얀 가슴 언저리에 입을 맞추며 부드러운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명현의 치마 속으로 깊게 손을 집어넣더니 브래지어를 가볍게 풀어버렸다.


“아….”


헤쳐진 옷 사이로 하얗게 솟아 오른 가슴을 인우가 움켜쥐었다. 그리고 입술로 베어 물었다.


“하루종일 네게 이러는 생각만 했다면 믿을래?”


명현은 자신의 가슴 끝을 입술로 어루만지며 만족스러워하는 그의 뒷머리를 나긋한 손길로 쓸어 내렸다.


“응큼했네요. …아!”


순간 신음을 참기 위해 앙다물어져 있던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가 명현의 유두를 이로 약하게 깨물어 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아픈 듯한 신음에 인우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이런!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사과는 해야겠지? 미안.”


너무나도 진지한 그의 사과에 명현은 웃고 말았다.


“그럼, 난 뭐라고 대답을 해야 되나요? 괜찮아요, 그러니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요 라고 할까요?”


느슨해진 옷이 흘러내려 한쪽 어깨가 완전히 드러난 흐트러진 모습인데도 명현은 우아했다. 실핏줄이 비치는 투명한 가슴팍을 그의 눈앞에 내놓고 있어도 당당하게 아름다웠다.


그녀의 말간 웃음에 인우는 할 말 조차 잃어버린 듯했다.


“뭐 하는 거예요?


가뜩이나 흘러내리기 전까지 벌어진 앞섶을 그가 거의 벗겨내듯 헤치고 있었다.


“한번 봐야겠어. 상처가 났을 수도 있으니.”


인우는 걱정스러웠다. 신음소리가 제법 날카로웠었는데. 그가 명현의 가슴을 보기 위해 다시 고개를 숙이자 그녀의 손이 그를 밀어냈다.


“아니, 괜찮을 거예요.”


“그건 내가보고 판단해.”


급기야 그녀가 열려진 앞섶을 손으로 잡아 꼭 여며버렸다. 그리고 고집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싫어요.”


이상할 만큼 완강한 그녀의 태도에 인우는 의아해했다.


“아프잖아.”


“지금은 안 아파요.”


“왜 그래?”


명현은 곤란했다. 멀쩡하게 이성의 지배를 받는 지금, 그곳을 그가 고개를 숙여 자세히 살피게끔 보여줄 수 없었다. 그와 사랑을 나눌 때의 부끄러움과 수줍음보다 지금의 경우가 명현에게는 더 낯뜨거운 일이었다.


그의 표정이 이제는 굳어지려 하고 있었다. 명현은 이유를 설명해서 그를 포기하게 만들어야 했다.


“내 몸이니까 내가 느낄 수 있어요. 괜찮아요.”


비밀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저렇게 감추는 이유를 인우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전부를 자신에게 준 날 밤 내보여진 하얀 육체에는 숨겨야 할 그 어떤 것도 없었었다. 오히려 숨이 막힐 만큼의 아름다움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그녀의 행동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 괜찮은 상태를 왜 안 보여주는 거지? 내 눈으로 확인만 하면 금방 끝날 일인데.”


“진찰하듯이 살피며 볼 거잖아요. 이렇게 자세히.”


명현은 고개를 깊게 숙이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게 왜.”


놀리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모르겠다는 인우의 태도에 명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수줍게 대답했다.


"…민망해요. 그렇게 보여주는 건.“


그제야 그의 눈썹이 살짝 휘어졌다. 그리고 잠시 아무 말도 없더니 그녀의 뺨을 감싸면서 천천히 키스하기 시작했다. 명현의 입술선을 그대로 그려가듯이 얕으면서도 감미로운 입맞춤을 하더니 이내 그녀의 촉촉한 입속을 뜨겁게 파고들었다.


그의 키스가 조금씩 더 깊어지면서 명현은 옷을 여미고 있던 손을 그의 어깨에 두어야 했다. 그에게 가까이 끌어당겨지면서 그녀의 머리는 점점 뒤로 넘겨지고 있었다.


빨라지는 심장의 울림처럼 열정적으로 거세지는 그의 키스로 명현은 조금씩 수줍음을 잃어갔다.


그녀의 숨결도 인우처럼 뜨겁고 거칠어졌을 때쯤 그의 손이 명현의 원피스를 아래에서 위로 급히 벗겨내 버렸다.


땀이 배어있던 좁다란 등줄기에 식혀진 실내공기가 사르륵 내려앉자 서늘함을 느낀 명현은 그의 품으로 묻힐 듯이 찾아들었다.


인우는 명현의 등을 따뜻하게 쓰다듬으며 격렬한 키스를 느긋하게 멈추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빙긋 웃었다.


“이젠 봐도 되겠지?”


발그스름하게 상기되었던 명현의 얼굴이 순간 짙은 홍조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팔은 그가 단단히 잡고 있었다.


“…나빠요.”


시선을 떨어뜨리는 그에게 명현이 낮게 항의했다.


“훗, 알아.”


명현은 자신의 가슴에 인우의 눈길이 멈추어져 있자 온몸이 붉어지는 화끈거림을 달랠 수가 없었다.


“보기에는 괜찮은 거 같은데. 정말 안 아파?”


걱정스러움이 섞인 그의 음성이 얄밉게 들렸다. 냉큼 그의 얼굴을 들어올려서 쏘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행여 움직일까 봐 자신의 팔을 힘주어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을 뿌리치기에 너무도 강했다.


명현은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그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


“…안 아파요.”


그 대답으로 그녀의 몸은 서서히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들어올려지지 않았다. 깨물어졌던 그녀의 유두를 그의 입술이 따뜻하고 촉촉하게 머금고 있었다. 그녀의 등을 지그시 누르며 쓰라린 부분을 핥아주는 그의 입술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사랑한다. 윤명현.”


얄미워야 되는데. 나쁘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야 하는데.


차분하게 내려져 있던 명현의 팔이 인우의 목에 둘러졌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그녀의 마을을 들려주었다.


“나도 그래요.”


명현의 인형같이 곧고 가느다란 다리가 인우의 허리에 감겼다. 그리고는 잠시 후 침대에 이른 명현은 탄탄한 그의 몸을 뜨겁게 받아들여야 했다.


***


여명이다.


병원에서 밤을 새고 난 다음이면 늘 맞이하게 된 희뿌연 빛. 그런 어슴푸레한 신 새벽의 빛이 날렵한 그의 옆모습을 서서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명현은 무릎을 세워 그 위로 얼굴을 묻고는 잠든 인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짙은 눈동자가 가려져 있는 그는 왠지 모르게 또 낯설었다. 깊은 잠에 빠져있는지, 안고 자던 그녀가 둘러진 팔을 풀면서 품속을 벗어나는데도 작은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넓은 등을 허리 위쪽까지 남김없이 드러낸 채 그녀 쪽으로 비스듬히 엎드려 있었다. 명현은 손끝으로 그의 등을 살짝 쓸어 보았다.


차가움 듯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쓸어 내리던 그녀의 손에 따뜻함이 올라왔다. 온기라고는 품어보지 못한 자신의 심장에 처음으로 더운피가 흐르도록 해준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당신의 온기가 날, 그리고 우리를 끝까지 지켜줄 수 있을까요?’


명현은 그의 등을 쓸어 내리는 걸 멈추고 침대 머리맡에 놓인 귀여운 모양의 자명종을 집어들었다.


“일어나야 돼요.”


잠을 깨우기에는 턱없이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소리에도 인우의 눈썹은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늦어요.”


그녀가 한 번 더 조용히 말하자, 그는 손으로 눈을 가리며 탁한 음성으로 물었다.


“몇 시지?”


“여섯 시쯤. 집에 들러야 되나요?”


“그래야 될 거 같아.”


인우는 낮은 신음과 함께 엎드려 진 몸을 똑바로 돌아누웠다. 눈을 뜨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한지 그는 여전히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있지 않아 그의 손이 내려졌다. 동시에 뚜렷하게 짙은 눈동자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왜 이렇게 차가워?”


그가 옆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명현의 등을 무심결에 쓰다듬으며 언짢게 물었다.


“일어나 있었더니 그런가 봐요.”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명현은 누워있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인우도 밤과는 달리 가라앉은 표정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명현을 마주 응시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인우가 먼저 둘 사이의 짧은 정적을 깨뜨렸다. 그러고도 명현은 좀 더 침묵한 후에 입술만 살짝 움직였다.


“그냥 눈이 거기서 멈췄어요.”


“멋진 이유군. 내 얼굴에서 멈췄다니.”


인우는 슬며시 입가를 늘이며 일어나 앉았다. 기습하듯이 던지는 그녀의 대답은 그를 꼼짝없이 웃게 만들었다. 거기에서 멈췄을 뿐이라니.


인우는 꾸미지 않고 자신의 속마음을 내보여준 명현을 등뒤에서 소중하게 감싸안았다.


“잠을 잘 못 잔 모양이군.”


사실은 왜 그리 가슴 철렁한 표정을 짓고 있느냐고 그는 묻고 싶었다. 꽉 움켜쥐고 있던 모래 알갱이들이 손가락 새로 힘없이 빠져나갈 때처럼. 때때로 어느 순간의 그녀에게서는 이처럼 막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아뇨, 어제부터 너무 많이 자서 그래요.”


명현은 자연스럽게 몸을 기울여 그의 팔에 뺨을 살며시 갖다 대었다.


“훗, 그런데 목소리에는 졸음이 가득해. 지금 상태로는 휴가 마지막 날인 오늘도 잠 보충만 할 거 같은데?”


인우는 웅크리고 있던 자세를 풀고 친근하게 부대껴오는 명현의 정수리에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대로 그녀는 졸음으로 더 깊숙이 뺨을 묻으면서 이미 어느 정도 잠이 든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러고 싶지만 오후에 약속이 있어요.”


“그럼 내일 병원에서나 볼 수 있겠군.”


자상하고 부드러운 울림만이 그녀를 다독거렸다.


“어떤 약속인지 궁금하지 않나요”


명현은 단지 그의 생각을 물었다.


“궁금해.”


“그런데 왜 안 물어보죠?”


“물어보면 대답해 줄 건가?”


“…해 줄 수 있어요.”


명현은 등뒤의 그가 웃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아마 입 꼬리만을 살짝 들어올리면서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다.


궁금하다 하면서도 아무 것도 묻지 않는 사람. 명현은 무겁지 않게 기다려주는 그가 말 할 수 없이 고마웠다.


“윤명현. 천천히 와. 네가 아프지 않게.”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배려였다. 순간 명현은 마음이 아릿해져 사그라지는 목소리를 간신히 끄집어내었다.


“그럴 게요.”


인우는 그녀를 안고있는 팔에 촉촉하면서도 보드라운 게 와 닿는 걸 느꼈다. 그녀의 입술이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넌 이미 내게 닿아 있으니까.’


그는 그녀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완전히 다가서지 못한 미안함을 그렇게 보여주고 있었다.


해사한 웃음을 가만히 지어 보일 때나 자신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고백할 때도 그녀의 눈을 나타내지 못한 습기를 머금고 있다는 것을 인우는 알고 있었다.


그 속에는 말로는 표현하지 않는 그녀의 불안한 두려움과 거둬지지 않은 슬픔들이 가득 고여있었다. 하지만 인우는 그것들이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녀에게 이유를 재촉하듯 물을 수는 없었다. 그건 그녀를 온전히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 스스로 슬픔과 아픔의 마음을 열어줄 때까지 그는 기다려 줄 것이다. 어느 정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게를 덜어내야지만 그 슬픔들은 열어질 것이다.


그때까지는 따듯하게 지켜봐 주는 걸로 만족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그녀가 다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올 수 있도록 배려해 줄 것이다.


# 11장


명현은 걷고 싶었다.


정문 앞에서 택시를 세운 다음 나무들이 만들어 놓은 그늘진 곳을 밟으며 조금은 가파른 길을 주저 없이 올라갔다.


울창한 여름의 녹음이 폭식하는 괴물처럼 학교전체를 초록색으로 삼켜버려 건물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학생들의 발랄함으로 몸살을 앓던 건물의 입구 계단은 방학기간을 맞이해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참을 바깥은 지나친 뜨거움 속을 걸어 온 탓인지 회색의 건물 안은 명현의 땀을 식혀줄 만큼 충분히 청량했다. 어쩌다 지나치는 학생들과 희미한 웃음을 주고받으며 명현은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급하지 않게 올랐다.


똑똑.


그녀는 손등으로 문을 두드려 조용한 복도를 울리게 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높지 않은 책장들에 꽂혀있는 전공 서적들과 논문집들, 책상 가득한 프린트 물들, 그리고 아담한 체구의 중년남자.


문을 열고 들여다 본 방안은 고요한 성 같았다.


“바쁘세요?”


명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공손하면서도 친근하게 인사했다.


“어, 왔니?”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른 체격에 선이 굵지 않은 갸름한 얼굴의 남자는 큰 표정 변화 없이 명현을 반겼다.


남자는 한영대학교 경영학부 회계학과에 재직중인 정영훈 교수였다. 영훈은 명현의 엄마인 영주의 동생, 명현의 외삼촌이었다.


“방학인데 왜 나와 계세요.”


“나야 학교가 편한 사람이잖니. 어떻게 시간이 난 모양이구나. 밥 먹을 시간도 없다더니.”


영훈은 그가 기억하는 아름다웠던 누이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명현을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며칠 휴가 받았어요. 외숙모도 건강하시죠? 지성이와 지인이 본 지도 오래되었네. 잘 들 있죠?”


명현은 책상 앞에서 일어나 소파 쪽으로 다가가는 영훈에게 가족들의 안부를 챙겨 물었다.


“그래, 다들 잘 있다. 지성이 놈 제대가 다음 달이니까 그때 병원으로 찾아가라 이르마. 지인이도 함께.”


“안 그러셔도 돼요. 제가 집으로 갈게요. 외숙모께도 너무 오랫동안 인사를 못 드려 죄송한데.”


영훈이 소파에 먼저 앉기를 기다리던 명현은 사촌 동생들이 엄격한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의 입에서 살며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릴 때부터 그녀와는 사이가 좋은 동생들이었지만 선택이 아니라 당연히 받아들여야 되는 영훈의 지시는 그 의미가 다를 것이다.


“힘들더라도 좀 부지런히 챙겨 먹어야 할 것 같구나. 요 앞전보다 더 마른 듯 하니.”


“잘 먹어요. 외삼촌도 잘 드시는데도 마르셨잖아요. 이건 물림이라 어쩔 수 없어요.”


명현은 영훈의 걱정과 애정이 줄어들지 않는 물줄기처럼 자신에게 흘러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얘기 들었다. 국문과 정철환 교수 장남과 선을 봤다면서. 어떻게 할 참이냐.”


어제 명현에게서 잠시 들르겠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영훈은 그녀가 선 본 사실을 알려주러 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명현이 결혼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그로서는 일차적으로 그녀의 솔직한 마음을 듣고 싶었다.


“어떻게 할까요.”


“정철환 교수 인품이야 나도 보고 들어서 잘 알고있는 바지만, 중요한 건 상대에 대한 네 생각이겠지. 마음에는 들었니?”


영훈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정 교수의 아들에 대해서 나름대로 알아보았었다. 들리는 말들에 의하면 나무랄 데 없는 상대 같았으나 영훈은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마음에 들었다면 결혼해도 될까요?”


그건 특정인을 염두에 둔 결혼이 아니었다.


“마음에 들었다니. 첫 인상이 나쁘지는 않았나 보구나. 이제 한 번 봤을 뿐이니 천천히 시간을 갖도록 하자. 그러고도 늦지 않으니까.”


영훈은 그나마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남자에 대해 무감하리 만치 냉정하게 구는 명현을 내심 아픈 마음으로 안타깝게 지켜 볼 수밖에 없었는데. 결혼까지 물어 볼 정도로 마음이 움직였다니.


영훈의 얼굴에는 반가운 화색이 돌았다.


“외삼촌, 그러면 달라질까요? 가진 적도 없는 결혼에 대한 기대가 생겨날까요? 아마 전 마찬가지일 거예요. 여전히 큰 상처를 입게 될까봐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있을 거예요.”


영훈은 암담했다.


“장례가 끝난 그때 널 그 집에서 데려나오는 거였는데…. 그랬다면 네 마음이 덜 다쳤을 텐데. 하지만 어린 녀석의 고집이 웬만했었어야지. 널 혼자 거기에 두고 온 것 때문에 외할아버지가 그렇게 편찮으셨는데도 넌 꼼짝도 하지 않았었지.”


맑은 눈동자에 숨겨진 그녀의 고집을 바라보며 영훈은 속상함을 털어놓았다.


“어느 곳이었던지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그곳을 벗어난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어지지는 안잖아요. 그리고 전 그 집에서 견디고 싶었어요. 엄마처럼 도망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제 의지로 무의미한 곳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영훈은 열세 살의 어린아이가 절망스러운 아픔을 혼자서 다독였을 시간들을 생각하니 미어지는 답답함에 가슴이 제대로 펴지지가 않았다.


“명현아, 다른 사람들도 좀 만나 보면 어떻겠니? 넌 행복하게 살아야 될 의무가 있다. 그러니 급하게 서두를 필요 없어. 분명 네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걸 자연스럽게 나눠줄 수 있는 상대가 있을 거다.”


당부라기보다는 간절한 애원이었다. 명현은 조용한 영훈의 애원에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런 의무가 제게 있었다니…. 이제부터라도 생각해 봐야겠어요.”


‘행복해야 될 의무라니. 누가 그렇게 벅찬 의무를 내게 줬다는 건가.’


명현은 알고 있었다. 아무도 그걸 자신에게 주지 않았다는 것을. 외삼촌인 영훈의 뜻도 그럴 것이다.


그 누구도 네게 주지 않으니 더 열심히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라는 부탁의 말일 것이다.


‘노력해서 가질 수 있는 거라면. 노력할게요.’


명현은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자기 암시를 걸었다.


***


휴가를 끝내고 돌아온 병원은 명현을 위해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일들을 쏟아 내었다.


가뜩이나 휴가 후 풀어진 마음에다 휴가를 맞은 2년차 승수의 일까지 처리하려니 걷는 걸음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서둘러 출근한 6시부터 8시가 거의 다 된 지금까지 그녀는 환자의 드레싱 때를 제외하고는 잠시도 한 곳에 머무르지 못했다.


외과계 환자들은 성공리에 수술을 마쳤다 하더라도 환부에 염증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하루에도 서너 차례 소독을 해줘야 했다.


중환자실내 회의실에서 치프인 병훈의 주재로 하루 일정을 논의하는 간이 회의를 끝낸 명현은 치프 가이드를 위해 며칠사이 새로 입원한 신환들의 상황과 인계 받은 환자들에 대해 꼼꼼하게 파악해야 했다.


명현은 스태프 회진 전 치프 가이드를 위해 병훈과 병실을 먼저 돌아야 했다. 치프를 환자 앞으로 안내해서 ‘무슨 수술을 받은 환자로, 수술 후 며칠째 입니다.’ 하고 설명을 하는 게 치프 가이드이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스태프 회진을 위하여 처음 시작했던 병실 앞으로 돌아와 인우를 기다렸다.


“언니, 휴가 때 뭐했어요? 피부색을 보아하니 야외 활동과는 무관했을 거 같은데.”


인턴인 은정이 명현의 어깨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낮게 소곤거렸다. 정신없는 아침 시간들을 보내느라 조금은 멍해진 명현은 은정의 기대를 만족시켜 줄 만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응? 그냥 쉬었어.”


“언니, 우리 인생을 그렇게 살지 맙시다. 언니는 어려 사람과 많이 어울려 주는 게 인류애와 인술을 베푸는 거니까, 오프 때도 제발 집에만 있지 말고 여기저기 좀 다녀요.”


결론은 즐겁게 보내지 못한 휴가에 대한 타박인 거 같은데 은정의 얘기 중간에는 명현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말들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외출하는 게 인류애와 무슨 상관이니?”


“미의 사절단이라는 게 있잖아요. 혼탁한 사회 분위기 정화를 위해 탁월한 외모의 소유자인 언니는 자주 외출을 해주는 수고쯤은 해야 된다는 거죠. 내 말은.”


은정은 눈을 장난스럽게 찡긋거리며 그것도 모르냐며 명현의 팔뚝을 툭하고 쳤다.


어이없는 은정의 궤변에 명현은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은정아, 넌 아무래도 진로를 잘못 선택한 거 같아. 아까워, 너의 그 재주가.”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언니.”


은정에게는 부러운 나머지 조금은 훔쳐오고 싶을 정도의 밝음이 있었다. 은정은 처음 보는 누구와도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적극적인 성격과 긍정적인 태도로 병원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병동의 환자들 사이에서도 은정의 명랑함은 음료수 공세로 이어지곤 했다. 명현은 금세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개구쟁이처럼 웃고있는 은정을 보고는 덩달아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 중앙 통로의 계단을 올라와 간호사실 모서리를 지나는 인우가 명현의 눈에 들어왔다.


웃느라 올라갔던 그녀의 입꼬리가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코끝이 찡하고 울림을 토해냈다.


‘왜 정확한 시간으로 만 하루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 그 사이 그리워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볼펜을 쥐고있는 명현의 손에 차가운 땀이 촉촉하게 배어 났다. 아직 그의 목소리와 시선이 닿지도 않았는데도 몸이 파르르 떨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피할 길 없는 사람처럼 떨고있는 명현에게 하얀 그림자는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눈동자는 그의 시선과 부딪쳤고 얼마 있지 않아서 명현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대로 라면 그가 전부 다 알아버릴 것 같았다. 이런 자신의 마음 속 떨림을.


병훈이 가이드로 회진은 진행되었다.


마지막 병실에서 한 환자의 상태를 듣던 인우는 직접 환부의 반창고를 열고 살펴보았다. 수술 부위의 상처 드레싱과 이상 여부를 확인하고는 액팅(acting, 지시를 이행하는 것)을 해야되는 명현에게 오더를 남기고 병실을 나갔다.


“윤명현, 드레싱 정리하고 병훈이가 챙겨주는 연구자료 받아서 내 방으로 가져와.”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명현은 자신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살짝 미관을 찌푸렸다.


그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평소처럼 냉정하고 건조했다. 혼자만 애꿎게 떨려 했었나보다.


명현은 풀어진 반창고와 붕대를 다시 깔끔하게 정리를 하면서 복잡했던 심정을 다 잡았다. 그런 후에 병훈에게 자료를 받기 위해 의국으로 내려갔다.


***


한 달 가까이 준비해온 학회가 이틀 뒤로 다가오면서 컴퓨터로 자료 정리를 하고있는 인우의 손놀림은 더 없이 빨라졌다.


어제도 두 건의 수술 스케줄과 막바지 학회 준비로 여느 날에 비할 바 못되게 시간들은 바쁘게 흘러 가버렸다. 그러는 중에도 명현은 들고 나는 뚜렷한 시점도 없이 하루종일 그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


늦은 밤 병원을 나섰을 때에도 그녀의 아파트 쪽으로 차를 돌려 잠시 동안만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만일 그랬다면 얼굴만 보는 걸로는 만족하지 못 했을 것이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명현이 파일북으로 처리된 자료들을 가슴 높이까지 들고는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모는 사람도 부담스러울 만큼 무거워 보이는 자료들을 그녀는 내려놓을 생각도 하지 않고 한참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명현은 키보드 위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그의 기다란 손가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언제쯤 멈춰질까 기다리고 있었다. 오로지 그의 손의 움직임에만 집중해있을 때였다.


부드럽고 낮은 그의 목소리가 여운이 퍼지듯이 그녀를 일깨웠다.


“안녕?”


명현은 얼른 눈만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눈짓으로 그녀의 무거운 짐을 가리켰다.


“그만 내려놓지? 무거울 텐데.”


“아….”


그제야 자신이 뭘 들고 있다는 것을 느낀 명현은 책상의 빈자리에 자료들을 내려놓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지? 팔이 빠지는 줄도 모를 만큼?”


“어, 그냥…. 아무 것도 아니에요.”


말까지 더듬다니. 명현은 회진 전 그를 본 이후 다잡아도 쿵쿵거리기만 하는 자신의 가슴을 원망스러워 했다.


‘진정 좀 해.’


“훗, 내가 맞춰 볼까?”


그를 향한 두근거림을 달래고 있는 명현에게 인우는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아뇨. 그러지 말아요.”


얼떨결에 그녀는 머리도 좌우로 흔들어 버렸다.


“이리 와 봐.”


인우는 의자를 뒤로 밀어내면서 명현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주며 그녀가 더 이상 피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가 허락한 자리로 명현이 들어가자 인우는 한 쪽 다리 위로 그녀를 끌어내려 앉혔다. 그리고는 순서인양 명현의 안경을 벗겨낸 다음 그녀의 눈을 감정하듯 들여다보았다.


“숙제를 너무 무리해서 했나 보군. 천천히 해도 된다고 했을 텐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녀의 눈동자에는 실핏줄이 몇 가닥 빨갛게 성이 나 있었다. 외삼촌이 했던 마지막 말에 생각이 깊어져 자야 될 시간을 놓쳐 버리고 말았던 탓이다.


“이번엔 틀렸어요. 그냥 쉬기만 했어요. 아무 생각도 없이, 편안하게.”


명현은 떨림이 표시 나지 않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래? 그것도 맘에 들어. 널 괴롭히지만 않으면 돼.”


“괴롭지 않아요.”


‘다만 두려울 뿐이에요. 이렇게 깊어지다 견딜 수 없이 아프게 될까 자꾸 무서워져요.’


명현은 어제 밤새 고민하면서도 극복하지 못 했던 말들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다행이네. 그런데 난 너 때문에 오늘 아침 좌절을 겪었는데 어쩌지?”


“왜?”


눈동자가 커지면서 이유를 묻는 명현을 여유 섞인 웃음으로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그녀의 하얀 목덜미로 입술을 가져갔다.


“다음부터는 절대 그렇게 눈감지 마. 약속해, 윤명현.”


아, 이유를 알은 듯 명현의 입술이 소리 없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말로 약속해.”


“약속해요. 눈감지 않을게요.”


인우는 명현의 목덜미에서 얼굴을 들어 손으로 입술선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약속을 다시 한 번 강조시켰다.


인우의 방을 나온 명현은 등뒤로 문이 닫힘과 동시에 병원 복도를 뛰었다. 무작정 비상구 문을 열고 계단을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몇 층까지 뛰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숨이 내쉬어 지지도 않을 만큼 층계를 오르고 나서야 명현은 멈춘 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턱까지 차 오른 숨을 고르면서 차가운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도저히 자신의 의지대로 감정들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저 혼자 제 멋대로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고 싶은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내 마음이고 내 감정인데 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걸까. 그를 보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오르는 것 같아. 예전 같으면 적절히 조절 할 수 있었을 텐데.’


명현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윤명현’을 찾고 싶었다.


호흡이 거의 정상적으로 잦아 들 때쯤이었다. 간호사실에서 콜이 들어왔다. 명현은 계단에서 벌떡 이러나 층수를 먼저 확인해 보았다.


11층! 세상에 6층에서 11층까지라니, 평소에는 잘 뛰지도 못하는데.


명현은 이마를 쓰윽 문지르고는 비상구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빠져 나가버렸다.


그리고 병실 환자들의 오더를 다시 내려달라는 간호사실의 콜을 해결하고 다른 환자들의 검사 결과들을 받아 들고 의국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의국에는 수술복 차림의 소영이 책상에 앉아 수술지 작성을 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명현이 들어서자 소영은 얼굴만 냉큼 확인하더니 하던 일로 곧장 그녀의 시선을 가져갔다.


“수술지 쓰니?”


명현이 옆 책상에 앉으면서 소영의 일거리를 쳐다보았다.


“어, 생후 4개월 된 아기가 장중첩증 수술 받았다. 애처로웠지, 아직 핏덩인데.”


“원래 돌 전 애기들이 잘 걸리잖아.”


명현은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는 책상에 앉으면서 심각하지 않은 목소리로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고칠 수 있는 병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컨퍼런스 자료를 정리하는데, 그런 명현을 흘끔 돌아본 소영이 갑작스레 큰 소리를 내었다.


“그야 그렇지만…. 야! 너, 이게 뭐야? 응?”


소영이 명현의 목덜미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왜, 뭐 묻었니?”


“이거 말이야, 다른 사람이라면 그건 볼 것도 없이 키스 마큰데, 그게 윤명현일 경우에는 뭐지? 다친 거 같지는 않은데, 벌레에 물렸냐? 아니면 옷 같은데 쓸렸거나….”


소영의 키스마크라는 단어에 명현은 벌떡 일어나 거울 쪽으로 가서 자신의 목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빨갛게 그림자가 진 부분을 찾아내고는 망연해있자 소영의 중얼거림이 위로처럼 뒤에서 들려 나왔다.


“네가 아무리 이건 키스마크예요, 떠들고 다녀도 이 병원에서는 그거 믿을 사람 하나 없으니까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마라. 나이가 몇 갠데 저런 벌레에 쏘인 자국에 애가 사색이 되냐. 에구, 불쌍한 윤명현.”


소영의 말과는 다른 의미로 놀란 명현이었다. 인우가 있는 곳에서나 없는 곳에서나 그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어버린 자신에게 놀람이었다.


‘정말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들어 놨어….’


***


오전 시간 동안 명현의 할 일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CT 촬영이다. 환자가 많은 세진병원에서 제 시간에 CT 촬영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15개의 CT 촬영방을 일일이 다니며 담당 파트 환자를 먼저 해달라고, 언제까지 촬영을 마치지 않으면 지장이 생긴다고 은근한 압력과 부탁을 하게된다.


우습지만 이렇게 방마다 찾아다니면서 푸시(push)를 하면 어떻게든 제 시간에 맞춰 CT 촬영을 할 수 있으니 오전의 많은 시간을 푸시에 공을 들이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인턴인 은정이 명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의욕을 보였다.


둘은 이방 저 방 뛰어 다니면서 촬영 부탁을 해놓고 병실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해야 될 일들 중 큰 일 하나를 처리한 두 사람은 풀어진 다리를 난간을 의지해서 한 칸씩 올려놓고 있었다.


“언니, 감기 왔어요? 여름에 웬 감기.”


무릎 위를 누르면서 힘겹게 계단을 오르던 은정이 명현의 목에 둘러 진 얇은 스카프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응? 응, 그런가 봐.”


명현은 소영의 얘기를 듣고 모르는 척하며 의국 문을 나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옷장을 열어서 목 부분을 가릴 것을 찾다보니 다행이 봄에 사용했던 아이보리 빛 스카프가 보란 듯이 눈에 띄었다.


그거라도 두르고 나니 불안했던 허리를 펼 수가 있었고 의국을 벗어날 수 있는 용기도 났었다.


그녀는 인우의 행동이 의도적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약속을 받아내기 위한 단순한 접촉이라 여겼었는데, 그에게는 한순간의 짧은 애정의 표현이 아니라 다른 의미도 함께였다는 걸 거울 속에 비춰진 자신의 목을 보고 알았다.


여름이라 목 깃이 없는 옷을 입은 탓에 목은 더 길어 보였고 도드라진 쇄골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누구라도 그녀의 목덜미를 쉽게 눈에 담을 수 있는 상태로 보였다.


명현은 그의 생각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은 인우의 얼굴을 바라볼 자신이 서질 않았다.


“언니, 저번에 병원 찾아왔었던 사람, 동생이라면서요. 아직 학생이에요? 그렇게 보이던데.”


문득 생각난 듯 은정이 갑자기 석현을 기억해 내었다.


“응. 그런데 왜?”


“아뇨, 잘생겼기에 궁금해서요. 여자친구 있어요? 없으면 외로움에 몸부림 치고있는 이 후배 다리 좀 놔주지. 아, 아니다. 아직 학생이면 나보다 어린가? 뭐, 한두 살쯤이야.”


다른 생각으로 눈 아래의 계단만 쳐다보며 걷고있던 명현이 혼자 묻고 또 거기에 결론을 내리고 있는 은정에게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글세, 여자친구가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미국에서 혼자 학교 다니고 있으니까 물어 볼 기회도 없었고. 나이는 아마 같을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석현에 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미국으로 간 지 벌써 6년이나 되었으니 여자 친구쯤은 있으려나?


명현은 항상 먼저 다가와 준 석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국? 웬, 미국? 어떻게, 그 먼 미국이라니. 하긴, 같은 하늘 아래에 있다 하더라도 인턴 주제에 데이트가 가당키나 하겠어요. 동기들도 남자친구가 면회나 와야지 겨우 얼굴 보는데. 전화도 자주 못해, 만날 시간 없어. 고무신 거꾸로 신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에이, 그냥 안 들은 걸로 해요. 연애는 뭐 아무나 하나요? 있는 놈도 다들 못 지켜서 눈물 바람들인데, 인턴 주제에 새로 만들 생각을 하다니. 아… 그래도, 사랑은 하고싶다. 절절한 사랑으로.”


“절절한 사랑? 그게 어떤 건데.”


걸음을 멈추면서 명현이 진지하게 물었다.


은정은 잠시 고민하더니 명현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생기 있게 대답했다.


“음, 그건 사랑하는 상대를 보면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이랑은 또 다른 거예요. 왜, 우리가 감동 먹었을 때 코끝이 찡해지면서 매워 오잖아요, 그런 것처럼 그를 바라보면 말 할 수 없는 어딘가가 뻐근해져 오고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어서 가슴만 가득 차 올라 넘쳐 버리는…. 그런 게 절절한 사랑이라는 거죠. 아, 말하고 나니까, 더 하고싶네. 휴!”


“고작 그런 반응들이 절절한 사랑임을 말해준다는 거니?”


납득할 수 없다는 명현의 대답에 놀란 듯 은정의 눈과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언니, 사람에게 그것도 이성에게 그런 극한의 감정을 느끼는 게 쉽다고 생각해요? 에이, 언니가 경험과 이런 쪽으로는 이론이 약해서 잘 모르나 본데, 그건 누구나가 다 느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물론 사랑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그런 울컥하는 감정은 좀처럼 힘들어요. 아, 누가 우리 이쁜 언니에게 빨리 와야 할텐데. 그럼 이 오묘한 감정을 언니가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느낄 수 있을 텐데. 명현언니! 우리 함께 애써 보아요. 성공의 그날까지, 파이팅!”


굳건한 다짐이라도 하듯이 명현의 손을 꽉 잡으며 은정은 의지를 보이는 웃음을 싱긋이 보여주었다.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은정의 마무리에 명현도 잡은 손을 흔들어 웃어주며 동조해 주었다.


그리고 속으로 다시 한 번 읊조려 보았다.


‘절절한 사랑을 위해서, 그 감동적인 감정을 위해서. 또 그것을 지켜주는 믿음을 위해서.’


***


10F 수술실.


은정과 나눈 사랑의 대화 이후 명현은 일들이 너무 많아 차라리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어 버렸으면 하는 심정으로 오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미 뇌는 하나의 단어조차도 떠올리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명현을 침묵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녀는 익숙한 손길로 환자의 가슴과 복부의 갈색의 소독약으로 닦아내고 소독포로 그 부위를 덮어두는 수술 준비를 재빨리 끝내고는 수술대에 선 채로 집도의인 인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실 문이 열리면서 인우가 들어왔다.


수술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양손을 가슴 높이로 올린 채 집도해야 될 환자 앞으로 다가왔다.


마스크 속에서 일 자로 다물어져 있던 명현의 입술을 바로 옆으로 인우가 다가오자 저절로 깨물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왜 그랬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 그녀의 마음만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행여 누가 알아챌까 명현은 혼자 전전긍긍해야 했다.


“김 간호사, 음악.”


인우가 수술의 시작처럼 써큐레이팅 간호사에게 음악을 부탁하자 간호사는 기꺼운 표정으로 민첩하게 행동했다.


맑은 음을 내는 건방들이 동시에 튕겨져 올라가는 피아노 협주곡과 함께 오디오 작동을 위해 자리를 비웠던 수술방 간호사가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명현의 불안은 터져 버렸다.


오디오의 작동을 위해 잠시 비워뒀던 자리로 돌아오던 간호사의 눈에도 수술복 때문에 노출되어 있는 명현의 목덜미가 의미심장하게 보였는지 흥미로워하는 얼굴 표정을 지었다.


“어머, 윤 선생님. 거기 왜 그러세요?”


간호사는 수술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노출된 명현의 목덜미를 장갑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한 사람을 제외한 수술방의 모든 시선들이 명현의 목으로 향하자 그녀는 들이쉰 숨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이대로 나가 버릴까 하는 마음으로 명현은 얼어붙은 눈빛만 내놓은 채 어떠한 변명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3년차 재환의 애매한 확인의 물음은 기어코 그녀의 입술에서 피를 내게 만들었다.


“그거 같은데?”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의 일에는 관심없어하던 재환까지 그녀의 목덜미를 빤히 쳐다보자 늘 한 발 늦은 병훈도 명현의 목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게 뭔데?”


호기심 어린 병훈의 목소리가 명현의 얼굴을 향해 떨어질 때쯤 그와 동시에 인우의 명령도 함께 들렸다.


“메스!”


수술실에서 집도의의 말 한 마디는 움직이는 법과도 같았다. 순식간에 환자의 수술부위로 시선들이 집중되었고, 그 이후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수술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환자는 일흔의 시골 할머니로 아예 위를 통째로 들어내야 했다.


이미 다른 장기로 전이도 많이 된 상태여서 수술이 힘든 상황이었는데도 자식들은 그간의 불효에 마음 아파하며 어떡해서든지 최선을 다하고 싶어 수술을 원했었다.


미리 수술 과정을 설명하면서 연세가 많으셔서 오랜 시간의 수술을 잘 견디실 지 모르겠다는 인우의 염려에도 할머니의 자식들은 수술이라도 한 번 받게 해달라고 애원했었다.


위를 잘라낸 뒤 식도와 장을 연결하는 과정도 거의 끝나갈 무렵, 갑자기 환자의 머리 쪽에 위치해 있는 마취과가 소란스러워졌다.


“선생님! 잠깐만 수술 좀 중단해 주십시오.”


심전도를 보니 심장이 제멋대로 뛰고 있었다. 마취과의 손놀림이 부산스러워졌다. 그러는 중에 심전도가 일직선을 그리며 멎어 버렸다.


“심폐정지!”


마취과 스태프가 소리쳤다.


환자한테 덮어놓았던 소독포가 황급히 걷어지고 재환이 심폐소생술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병훈은 급히 혈관으로 바이카보네이트와 칼슘 글루코네이트를 주입하면서 심장 마사지를 하고있는 재환을 올려다보았다.


수술방이 마취과 스태프들의 발소리로 요란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다행히도 환자의 심장이 어렵게 다시 뛰기 시작했다.


밖에 있는 보호자들은 지금쯤 수술이 다 끝나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을 텐데 암담한 일이었다. 명현은 재빨리 인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속마음을 알 길 없는 냉정한 눈빛만 날카롭게 번쩍이고 있었다.


다시 뛰기 시작한 환자의 심장은 어느새 진정되어가고 있었고 혈압도 희미하게 잡히더니 80까지 올라가졌다. 문제는 수술을 이 상태에서 중지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마쳐야 하는 것이다.


한 번 심장이 멈췄으니 비록 바로 발견은 했을지라도 뇌나 다른 장기에 입은 손상의 정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땀이 등으로 줄지어 흘러내렸다.


“보호자 불러.”


눈 밖으로는 일체 다른 표정을 내비치지 않던 인우가 한참만의 침묵 끝에 병훈에게 지시했다.


항상 칼을 잡아야 되는 외과의사는 고독하다. 수술 중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을 혼자 결정해야 한다. 그 문제들은 수술 후의 환자 회복과 예후 또 환자의 남은 삶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현명한 결정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환자들은 수술 전에 간접적으로 예측했던 것과 막상 열어서 눈으로 확인한 것과는 차이가 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했다.


“선생님, 보호자 분 오셨습니다.”


환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인우에게 병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인우는 마스크를 내리면서 수술방으로 들어서는 보호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지금의 환자 상태를 보호자에게 설명했다. 영문도 모르고 들어온 보호자의 얼굴이 점차 창백해져 갔다.


“그럼, 지금 이 상태에서 수술을 중단해야 하나요?”


수술대 위에 의식 없이 누워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거의 탈색된 듯 하얗게 질린 아들은 입술을 떨며 정신없이 울먹였다.


자식으로서 수술대 위에 의식 없이 누워있는 어머니를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할 텐데 피 자국들이 그대로 펼쳐져있는 수술장면까지 봐야했으니, 그 충격은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을 것이다.


얼마 후 고개를 떨구며 수술방을 나가는 보호자를 뒤로하고 인우가 다시 마스크를 올리면서 수술대로 걸어왔다. 그리고 수술은 다시 시작되었다.


다들 심장이 멎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수술에 임했고, 다행히 환자는 끝까지 잘 견뎌 주었다.


포기할 수도 있었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환자는 수술 중 기관지에 삽입했던 튜브를 그대로 꽂고 앰부 배깅으로 인공호흡을 하면서 수술방 밖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중환자실로 내려가기 위해 환자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보호자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흐윽, 어머니…!”


3년차 재환과 간호사 그리고 환자와 보호자를 태운 엘리베이터가 문이 닫혔다.


심장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잘 뛰었고 소변도 잘 나왔다. 혈압도 그런 대로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수술이 끝났다. 하지만 의식회복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인우는 닫힌 엘리베이터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뒤에 서 있던 병훈에게 다음 수술 스케줄을 확인했다.


“삼십분 정도 남았나?”


“네, 선생님.”


“그래, 가서 준비해.”


인우는 홀로 남게된 공간에서조차도 자신의 가라앉은 기분을 드러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간 수술실 복도가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진공 상태처럼 느껴졌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잇는 경우였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가볍게 들어지지 않았다. 수술을 한다고 해서 병이 완치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사망한 경우도 더러 있었고 또 이렇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었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서로의 생명을 존중해야 되는 인간으로서 겪어야 되는 안타까움은 시간이 지나도 무뎌지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그의 심장은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아픔도 감수해야만 했다.


의사로서 할 수 없는 한계를 절감하는 순간들이었다.


수술실 복도 끝에 있는 의자에 그가 앉아있었다.


팔꿈치를 의자 등받이에 올려두고 다리를 길게 뻗은 채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수술방 마무리를 끝내고 나오는 명현이 보게 되었다.


뚜렷한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면 차라리 쉽게 다가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에게서는 아무 것도 읽어지지가 않았다.


명현은 거리를 두고 인우의 침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그를 향한 다른 시선을 느꼈는지 인우가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고 서 있지? 병훈이 다음 수술방 들어갔는데. 얼른 가서 준비해.”


전혀 변함없는 담담한 음성이었다. 인우는 채도 낮은 목소리로 명현의 신경 쓰임을 다른 쪽으로 돌려 버렸다.


“네.”


명현은 그의 쉼을 배려해주고 싶었다.


그는 외부와의 교류가 아니라 완전한 자신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내면의 시간을 원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고 다음 수술이 잡혀있는 방으로 천천히 사라져 주었다.


# 12장


밤 10시가 되어서야 연이어 잡혀 있던 수술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어시스트들은 두 건의 이어진 수술로 10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계속 서 있게되자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다리를 폈다 오므렸다 하면서 인내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집도를 하고있던 인우는 마지막까지 흐트러지지 않고 조용하고 절제된 몸놀림으로 자신의 일은 마쳤다. 그런 후 3년차인 재환에게 봉합을 지시하고 단 몇 걸음만으로 수술방을 빠져나갔다.


“하여튼, 대단하시죠? 그 수술 테크닉하며 첫 수술도 다들 그쯤 되면 손이 떨릴 지경인데 냉정하게 성공적으로 마치시더니 지금도 전혀 흔들림 없이 완벽하게 끝내셨잖아요. 왜 서인우, 서인우 하는지 진면목을 확실히 보게 되었네요.”


고개를 흔들면서 3년차 재환이 감탄을 연발했다.


“그래, 솔직히 부러울 지경이지. 노력만으로는 닮을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서인우 선생님에게는 틀림없이 있어.”


병훈이 가지고 있던 평소의 생각을 내뱉자 재환의 고갯짓이 아래위로 연신 움직였다.


수술이 끝난 후 명현은 병훈의 지시로 중환자실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들은 바로는 아직까지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


삑삑거리는 규칙적인 기계음만 들릴 뿐 주위는 정적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가끔씩 전화벨이 울리고 자기네 환자의 검사 결과를 챙기는 인턴들과 환자 상태를 보고하는 간호사들의 목소리만이 답답함을 깨는 살아있는 소리였다.


명현이 첫 수술을 받았던 할머니의 병상 쪽을 쳐다보니 수술복 차림 그대로 인우가 검사 결과를 확인하며 서 있었다.


“그만 들어가세요.”


인우는 차트를 넘기던 손을 잠시 멈추면서 명현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차트를 그녀 쪽으로 건네주었다.


“결과는 괜찮은데….”


“오늘 밤 잘 지켜볼게요.”


명현은 내미는 차트를 받아들이면서 그의 퇴근을 재촉했다.


특별히 다급하게 순간 순간을 지켜보고 처치해야 하는 위급의 상황도 지났는데 인우는 팔짱을 낀 채로 병상을 지키고 있었다.


“당직인가?”


“네.”


“내일 아침 회진시간에는 눈 빨간 토끼를 보겠군.”


인우는 정면을 응시한 채로 바로 옆의 명현만 들을 수 있는 낮은 어조로 두런거렸다. 자신만의 여유를 잃지 않은 인우임이 느껴지자 명현도 조용하게 맞대응 해주었다.


“차라리 눈이 빨간 게 나아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예요.”


“말로는 소문내지 못하게 했을 테니까. 다른 방법일 뿐이지.”


“…….”


너무나 예상 밖의 대답이라 명현은 달리 할 말을 차지 못하고 있었다.


“파르르 떠는 걸 보니 누가 정확하게 보긴 봤나 보군.”


“어쩌죠? 다행스럽게도 윤명현이라 아무도 그 사실을 안 믿었어요. 실패했어요.”


“훗, 의심도 못 받는 윤명현, 불쌍하군. 다음엔 더 확실한 방법으로 꼭 성공하도록 하지.”


병상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자세로 둘은 고단했던 하루를 서로 위로라도 해주듯이 편안한 마음을 주고받았다.


‘내게 절절한 사랑이 되어버린 사람이 서인우라서 다행이에요. 자꾸만 당신이 좋아져요.’


아무런 반응도 없이 누워있는 수십명의 사람들.


명현은 병실과 응급실 콜을 받는 이외의 시간들을 중환자실에서 보내고 있었다. 의사가 환자 옆에 바짝 붙어 간호한다고 해서 혼수상태의 환자가 갑자기 눈을 뜨고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중환자실 간호사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 가끔씩 가래가 폐에 고이지 않도록 뽑아주고, 나가는 검사 결과를 좀 더 일찍 챙겨볼 수 있다는 정도이다.


나머지는 시간과의 싸움이며 시간이 길어질 경우를 대비해 욕창이 안 생기도록 환자 포지션을 좀 더 자주 바꿔주도록 요구하는 게 전부였다.


죽음의 문턱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드는 중환자실의 환자들, 이들에게 의사들의 지극한 정성으로 예상치 못했던 기적을 가져다주지는 못하는 것일까.


‘할머니, 조금만 더 힘내세요.’


명현은 기계에 의지한 채로 호흡하고 있는 할머니의 얼굴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잠깐 동안만이라도 의식이 돌아오기를 희망했다.


***


띠릭~.


소리의 종류가 간호사실에서 보내는 콜 벨소리도 아니고 응급실 벨도 아니었다. 이미 새벽이라 불리는 시간이라 명현의 사고는 피곤함으로 빠른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중환자실 의자에 앉은 채로 잠이 들었던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었다. 그리고 조그만 물체를 손에 잡는 순간에서야 그 소리가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신호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작은 소리하나 생각해 내려고 졸음으로 꼼짝도 않는 뇌세포를 들볶은 자신이 어이가 없어 명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댔다. 그러다가 메시지 확인을 위해 휴대폰의 버튼을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다.


[얼굴 좀 보여주지.]


재빨리 시간부터 확인했다. 새벽 4시50분.


이렇게 이른 시간에 벌써 출근을 했다는 건가? 의아해 하면서 명현은 중환자실을 나왔다.


명현은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바빴던 시간들 때문에 잊고 있었던 부분이 제일 먼저 그녀의 눈을 잡아채었다.


상처자국도 이틀째 되는 날 더 짙어지듯이, 그 자국도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확실히 촘촘하게 붉어져 있었다.


그곳에 손끝을 가볍게 올려놓자 팔딱거리는 맥박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전해왔다. 그녀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정확한 자리였다. 그리고 심장의 울림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거세게 뛰고있던 자신의 심장 소리를 느꼈을 거라고 생각하니 명현은 혼자인데도 그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엘리베이터가 멈추려 하자 명현은 안경 밑으로 손을 넣어 압박하듯이 눈가를 꾹꾹 눌러댔다. 통제가 되지 않는 그녀의 심장을 누르듯이.


똑똑.


노크 후 인우의 방안으로 들어서던 명현의 눈이 살짝 감겼다가 다시 떠졌다.


“퇴근 안 했어요?”


그의 모습은 밤 12시쯤 그녀가 봤던 그대로였고 정리되지 않은 책상 위를 보니 컴퓨터가 켜진 상태로 화면 가득 학회자료가 떠 있었다.


“보다시피 할 일이 많아서.”


인우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얼굴을 쓰윽 문지르고는 책상 맞은편에 서 있는 명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서 있으면 얼굴을 어떻게 보라는 거지? 이리와.”


“…….”


인우는 어제 아침과 같은 자리를 명현에게 제의했지만 그녀의 눈동자만 잔잔히 흔들릴 뿐이었다.


“훗, 난 실패한 작전은 다시 쓰지 않아. 설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뭐가 문제야? 이번엔 틀림없다고 네가 우기면 되지 않나? 생각해보니 그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하지만 네 눈을 보니 여기 올 의사가 없는 것 같으니 내가 가야겠군.”


하나의 산봉우리가 일으켜 지듯이 인우의 사내다운 몸이 책상 건너편에 서있는 명현에게로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뭐가 문제지?”


인우의 두 손이 명현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살짝 들어올리자 그녀는 힘없는 눈으로 떨리는 음성을 떨구어냈다.


“두려워요. 하루종일 당신의 온기만을 그리워하게 되는 내가 두렵고 당신이 내 곁에서 사라지고 없을 때의 내 존재가 두려워요. 그리고….”


그의 입술이 명현의 나머지 말을 먹어버려 두려움의 이유는 끝을 맺지 못했다.


인우는 그의 입술이 멎은 곳을 조심스럽게 물어버렸다. 명현의 아랫입술은 이어진 상처로 아픔의 신음을 흘렸다.


“아….”


소리를 뱉느라 벌어진 입속으로 인우의 따뜻한 혀가 들어와 그녀를 거세게 몰아부치며 그의 입술이 명현의 두려움을 가져가기라도 하는 듯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그의 뜨거움으로 명현의 무릎이 점차 낮아지자 인우의 손 하나가 내려와 그녀의 허리를 받혀 안았다. 그리고 급한 숨을 내쉬며 그녀의 입술 위에 속삭여 주었다.


“그렇게 예쁜 말을 무섭게도 내뱉는구나. 네가 존재하는 이상, 난 사라지지 않아.”


그의 불꽃같은 시선이 명현의 얼굴위로 떨어지자 그녀는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힘껏 감아 매달렸다.


그녀의 갑작스런 매달림으로 인우의 상체가 흔들리면서 앞으로 숙여졌지만 그는 맞닿은 명현의 가슴까지 진동이 느껴지도록 울림 있는 웃음을 내뿜었다.


“조금 더 지나면 징징거릴지도 몰라요.”


그녀는 두 다리로 지탱하고 있는 것이 힘에 겨워 그에게 매달렸다. 수술실의 강한 소독약 냄새가 그의 체취에 묻혀 희석된 채로 명현의 가슴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손을 내미는 것은 항상 인우가 먼저였지만 그 손을 잡기만 하면 명현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제대로 된 저항한번 못하고 그에게 파고들게 되었다.


“부디, 제발 그런 날이 빨리 와야 할텐데.”


인우는 그의 목을 껴안느라 더욱 좁아진 그녀의 등을 살살 달래어 가라 앉혀주면서 긴 포옹을 풀었다.


“이젠 얼굴 좀 봐도 되겠지?”


인우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명현의 뺨을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빙긋이 웃어주었다.


그녀는 한 톨의 어린 불씨 같았다. 그가 조금씩 입김을 불어 넣어줄 때마다 사르륵 타올랐고 불길이 높이 치솟지 않아도 충분히 뜨거웠고 잘 사그라지지도 않았다.


“눈이 빨개졌어요.”


“그래? 하지만 보고싶은 사람을 봤으니 곧 가시가 걷히겠지.”


“정말 소문낼 생각으로 그런 거예요? 만일 진심이라면 이해할 수 없어요.”


명현이 눈썹을 찡그리면서 흘겨보자 인우가 낮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목에 난 자국을 손 내밀어 만져보았다.


“본능이라고 해두지. 내 것에 대한, 또 내 영역을 지키고자 하는 본능.”


인우를 가만히 바라보며 미소만 짓고있던 그녀의 입술이 갑자기 웃음으로 터져 버렸다.


“훗, 그런 유치한 생각도 할 줄 아나봐요. 그런데 어떡하죠? 난 그 누구의 것도 아닌데. 그냥, 윤명현일 뿐이지.”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면서도 고집스러운 대답을 잊지 않았다.


“기분 나쁜 모양이군. 그럼 이건 어때? 난 네 거야. 서인우는 윤명현의 것. 그래도 나쁜가?”


인우가 부드러운 눈길로 장난처럼 말을 바꾸며 이어서 나올 그녀의 대답을 흥미롭게 기다렸다.


그가 내 것이다? 명현은 말이 주는 묘한 어감에 눈살을 살짝 찌푸리기는 했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이름의 순서를 바꿔버렸다.


“서인우는 윤명현의 것이 낫겠어요.”


“그게 더 마음에 든다면 너 좋을대로 해. 난 두 가지 다 좋으니까.”


인우는 책상모서리에 걸터앉으며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명현은 그렇게 눈높이가 낮춰진 그를 한참동안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상하죠? 난 이렇게 마주보고 있어도 내 것에 표시하고 싶다는 본능이 안 생기는 걸 보면.”


하여튼, 그는 싱긋 웃으며 명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훗, 그건 네가 남자가 아니라서 그래. 남자들은 틀려. 표시 내고 싶어하지.”


말도 안돼. 명현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또 그러겠다는 말이에요?”


“네가 언어사용의 자유만 인정한다면 그럴 필요가 없겠지. 한 마디 말로 충분할 테니까. 하지만 그게 안 된다면 아마도 다른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까? 궁금해?”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명현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 호기심을 해결하고자 물어보게 되면 꼼짝없이 그에게 말려 들 것 같았다.


“궁금해요. 하지만 사양할래요.”


“현명해. 네가 알던 모르던 간에 어차피 결과는 같은 테니까. 서인우가 윤명현의 것이라는 건.”


눈은 채우지 못한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면서도 입술로는 그 반대를 얘기하고 있는 명현을 인우는 다시 한 번 끌어안았다.


***


아무리 힘들어도 새벽 6시 이전에는 드레싱을 시작할 것.


어렵고 힘든 일은 습관으로 만들도록 노력할 것.


콜 벨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즉각 받을 것.


모든 검사 결과와 촬영 결과는 직접 확인할 것.


신의를 지키고 동료들 일을 도와줄 것.


아무리 피곤해도 환자가 불평한다는 연락을 받으면 꼭 가서 확인할 것….


1년차가 지켜야 할 수칙들을 반복하면서 명현은 어제 하루를 보냈었고, 그 다음날 아침 회진을 막 끝낸 지금 명현은 인우의 메시지를 받았다.


[아침을 받아놓고 나니 굶고있을 네가 생각났다. 불쌍한 윤명현.]


훗, 명현은 우습고 어이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가 진심으로 전해주고 있는 안타까운 마음을 지나치지 않았다.


고마워요, 불쌍하게 여겨줘서.


인우는 어제부터 오늘까지 제주도에서 열리고있는 세계 위암 학회에 참석 중이었다.


늘 같은 일상이었지만 그의 방 앞을 지나치거나 병훈이 집도하는 수술방에서, 그리고 회진을 돌던 병실에서도 명현은 그의 부재를 의식하게 되어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니, 더 정확하게 드러내자면 불안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녀의 마음을 표현하기엔 부적합했다.


‘서인우, 당신이 그리워요….’


명현은 그 사실을 인정하며 그가 없는 이틀째 날을 보내고 있었다.


중환자실에 환자를 둔 보호자들은 하루 두 차례의 면회시간이 마냥 짧기만 했다. 그들은 한 번이라도 환자의 손을 더 잡아보고 또 알아듣지도 못하는 환자에게는 한 마디의 말이라도 더 하고 싶어했다.


그렇게 환자들에게 매달리고 있는 보호자들에게는 면회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간호사들의 무표정한 목소리는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안타까움과 담담함이 교차되면서 중환자 실은 밤을 준비하고 있었다.


만 이틀이 지나도록 명현은 중환자실의 같은 병상 앞을 지키고 있었다. 얼마 전 수술 도중 심장이 멎은 할머니의 병상이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자식들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알아봤으면 하는 게 보호자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저녁 면회 시간이 끝나고 보호자가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할머니가 주위 자극에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끝만 떨리더니 차츰 눈꺼풀에도 힘이 들어가는지 위로 올리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임경순 씨? 할머니? 제 말 들리세요? 들리시면 손가락 움직여 보세요.”


명현의 요구에 할머니는 손가락을 움직여 대답했다.


감격스러웠다. 명현은 걱정하고 있을 인우에게 이 사실을 제일 먼저 알려주고 싶었다.


뚜우, 뚜우, 신호음이 흘렀고 곧 굵은 저음이 저쪽에서 흘러나왔다.


[네.]


기껏 한 마디에 불과한 소리였는데도 명현은 그에 대한 진한 그리움으로 목이 잠겨왔다. 그녀는 중환자실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벗어나면서 조금은 들뜬 목소리를 내었다.


“기쁜 소식이 있어요.”


그녀의 밝은 어조에 그는 잠시 웃고있는 듯했다.


[기대되는군.]


은근히 기다리는 그의 음성에 명현은 무대 위를 소개하듯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감격스럽게 말했다.


“임경순 할머니 의식 돌아왔어요. 조금 전에.”


[다행이군…. 또?]


그가 또 웃었다. 그러면서 다음을 물었다.


“뭐가요?”


명현은 어리둥절해 했다.


[기쁜 소식.]


“조금 전에 말했잖아요.”


[그게 전부라는 건가?]


그 정도면 충분히 기쁠 텐데 뭘 더 바라는 거지?


명현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그의 반응에 의기소침해졌다.


“네.”


[시시하군. 그래도 선물은 주도록 하지. 나와.]


하지만 조용하면서도 느긋한 그의 목소리는 시무룩해 있던 그녀를 금방 생기 있게 만들어 주었다.


“병원이에요?”


[뒤쪽 공원에 있어. 잘 찾아서 와.]


오늘밤만 지나면 내일 아침에 볼 수 있다고 자신의 마음을 위로했었는데. 명현은 지금 당장 인우를 볼 수 있다는 두근거림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명현은 무작정 공원으로 들어섰다. 넓은 공원을 다 찾아다닐 수는 없을 것 같아 우선 산책로를 따라 걷기로 했다.


바깥의 주차장이나 도로들은 한낮의 열기가 남아 아직도 후끈거렸지만 공원의 안쪽은 나무들이 뜨거운 열기를 차단시키고 또 스스로 흡수하면서 적당한 온도를 유지시켜 놓았다.


밤이라 내려앉은 습기로 여름풀들은 그 냄새가 더 짙어졌고 가로등 불빛에 모여드는 벌레들의 움직임도 바빠 보였다.


뚜렷한 장소도 말하지 않고 찾아오라는 말에 나섰다가 벌써 20분 넘게 흘렀다는 생각이 들자 만일 여기에서 응급실이나 병실 콜을 받는다면 얼마나 뛰어가야 하는지 등의 걱정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산책로의 끝이 보이는데도 인우의 모습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장난친 건가?’


명현은 산책로 끝에 이르러서도 그를 발견하지 못하자 다른 곳을 찾아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며 명현이 전화라도 해 볼까 하고 망설일 때였다.


산책로에서 오솔길로 빠지는 곳에 드리워진 기다란 그림자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길을 잃어버렸던 아이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는 엄마를 발견했을 때처럼 명현은 반가움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녀의 감정은 지배당하기를 거부한 상태이니 두 발이 저절로 그를 향해 달린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었다.


인우는 단정한 정장을 그대로 입은 채 그녀가 뛰어오는 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라는 작은 성의 닫혀있던 문이 자신에게만은 활짝 열리며 보이는 매력적인 환영인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멈출 기세도 보이지 않고 부딪칠 듯 달려오는 명현을 인우는 자신의 몸으로 막아서 멈추게 했다.


“그러다 다쳐.”


인우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명현은 발끝을 세워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힘찬 심장 박동 소리와 고르지 못한 숨소리를 그에게 선물로 들려주었다.


“헉, 헉…. 보고싶었어요. 아주 많이.”


그의 목을 휘감고있던 그녀의 팔에 힘이 더해졌고 심장도 두근거림도 더 거세게 들렸다. 알싸한 병원냄새를 묻히고 더 가벼워진 듯한 몸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훗, 참았다가 내일 볼 걸 그랬나? 이틀에 이 정도면 사흘은 날 쓰러지게 만들 수도 있겠군.”


“콜 울리면 나 업고 뛰어야 해요. 서 있을 힘조차도 없을 만큼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아요.”


명현의 발끝이 내려지면서 그녀의 팔도 자연스레 그의 목에서 풀어졌다. 땅위에서 거의 떠있다시피 했던 발을 명현이 딛으려 하자 그녀의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거렸다. 순간 넘어지려는 그녀를 인우는 재빨리 낚아채었다.


쑥스러웠던지 명현은 그를 향해 고운 눈으로 웃어주며 그녀의 손바닥을 인우에게로 내밀었다.


“선물 줘요. 빨리요.”


인우는 강하지 않은 힘으로 명현의 손을 당기며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선물을 걸어 주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마음에 들어요. 누가 뭐래도 내게는 제일 좋은 선물이에요.”


명현의 손에는 지난번과 같은 모양의 종이 가방이 들려 있었다.


"학회는 잘 끝났어요?“


“그런 대로.”


벤치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면서 둘은 서로의 하루를 물었다.


잠시 후, 그들이 처음 만났던 곳에서 명현은 그가 선물로 준 초밥 도시락을 조금씩 비워내고 있었다.


맛있게 먹고있는 그녀의 입가를 인구가 손가락으로 쓰윽 문질렀다.


“널 여기에서 처음 봤을 때 ‘왜 울고 있을까?’ 하고 궁금했었는데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초밥을 집어서 입으로 가져가던 명현은 자신의 손으로 입가를 다시 한 번 더 정리하고는 잔잔하게 미소지었다.


“그 이유가 뭘 거 같아요?”


“그건 분명 배가 고파서였을 거야. 저녁도 못 먹고 밤까지 새야했으니. 이렇게 잘 먹는 네게는 눈물이 날 만큼 슬픈 일이었겠지.”


저렇게 차갑고 건조한 표정으로 내뱉으니 모든 게 사실처럼 느껴졌다. 배가 고파서 울었다니. 잠시 그를 가만히 쳐다보던 명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는 듯 웃고 말았다.


“맞아요. 배가 고파서 그랬던 것 같아요. 아마 점심부터 못 먹었을 거예요. 게다가 밤새 응급 수술도 있었죠. 배고프고 잠 못 자니 이게 뭔가 싶어 슬펐나 봐요.”


“내일 새벽에도 서글픈 인생 되기 싫으면 얼른 먹어.”


그는 웃으면서 말하고는 고개를 뒤로 젖혀 여름의 밤하늘을 눈에 담았다. 편안한 느낌에 그의 눈이 자연스레 감겨졌다.


명현은 조용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심결에 그에게 살짝 입을 맞추었다. 고마움의 표시 같은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이미 닿은 입술인데 조금 더 베풀지 그래.”


그에게 숙였던 몸을 일으키려던 명현의 허리를 인우가 당겨 안았다. 어느새 바로 앉은 그가 그녀의 눈을 사로잡듯이 깊게 바라보자 명현이 그의 눈을 손으로 슬쩍 가려버렸다.


“키스할 때는 눈을 감는 게 예의예요.”


“훗, 누가 그래?”


“윤명현이요.”


명현은 두 손으로 인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면서 그의 입술 가까이에서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리고 작은 속삭임이 이어지듯 보드라운 그녀의 입술을 그의 뜨거운 숨결에 천천히 맞닿게 했다.


입술이 맞닿은 상태 그대로 잠시동안 가만히 있던 그녀는 입술을 살짝 벌려 그의 입술을 촉촉하게 머금었다. 그러더니 일자로 다물어진 그의 입술 사이를 혀끝으로 조심스럽게 갈랐다.


그때 그녀가 하는 대로 잠자코 있던 인우가 웃음을 내놓았다.


“훗, 왜 이렇게 잘하는 거지?”


인우는 그의 얼굴을 감싸쥐고 있는 명현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으며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난 배우면 뭐든 잘 해요.”


명현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꽃잎 같은 입술이 벌어지는 소리가 날 만큼 활짝 웃었다.


그 웃음에 인우의 눈빛은 열망으로 짙어졌고 그의 입술은 그녀의 웃음을 삼켜버렸다. 서로를 향한 부드럽고 깊은 입맞춤에 명현은 그의 목을 휘감았고 그녀의 허리에 있던 그의 손은 점점 위쪽으로 옮겨갔다.


속옷이 풀어지면서 그녀의 말캉한 가슴이 그의 손안으로 완전하게 들어갔다.


“그만…해요.”


명현은 그녀의 가슴과 복부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더 뜨거워지기 전에 멈추기를 부탁했다.


“걱정마. 이런 곳에서 널 안지는 않아.”


인우는 깊은 키스로 도톰하게 젖은 그녀의 입술 위에서 명현을 안심시켰다. 잠깐 혹시나 하는 걱정으로 일렁거리던 그녀의 눈동자에 그는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훗, 잘난척하더니 겁먹기는.”


그녀에게서 입술을 뗀 그가 싱긋이 웃으며 놀렸다.


명현은 그가 놀려대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게 그의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부끄럼마저도 없애주는 마술 같은 사랑을 그를 통해 알게 된 것이었다.


***


임경순 할머니는 결과가 좋지 않을 것 같다던 신경과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일반병실로 옮길 수 있을 만큼 호전되었다. 아직도 정확히 사람을 알아보고 대화를 하지는 못하지만 무의식상태에 비한다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호전인 것이다.


오늘밤은 병실 퍼스트 콜(first call, 당직)인 날이다.


명현이 간단히 저녁 드레싱을 끝내 놓고 간호사실에 앉아 차트 정리로 바빠 있을 때 응급실 당직인 동료에게서 전화가 왔다. 좀 고생할 환자가 올라갈 거라고.


오십 대 중반의 남자로 술을 장기간 마셔왔고 간경화증 진단을 받은 병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간경화증 합병증으로 간문 맥으로 가는 정맥압이 높아져서 생기는 상부 위장 관 출혈이었다.


명현이 응급실로 내려가 보니 코를 통해 삽입된 L-tube로 차가운 생리식염수를 주입하고 있었다.


야간의 종합병원 응급실은 그야말로 응급상태다. 생명과 직결되는 위험한 상황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명현은 출혈 부위가 스스로 멈추도록 생리식염수를 주입했다 다시 빼내는 작업을 반복했다. 이미 수혈도 시작했고 또 혈액 준비도 많이 해놓은 상태였다.


“야, 아직 병실 안 났대?”


응급실 당직인 동료가 종종거리며 성마른 목소리를 냈다.


“기다려 봐. 곧 날 것 같으니까.”


명현은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차분하게 대꾸를 해주었다.


찬 식염수가 계속 들어가면서 피 나오는 것을 멈춰지게 하면 좋으련만, 새빨간 피는 쉽게 멈추지 않고 잠시라도 식염수 주입을 중단하면 울컥울컥 그간 고였던 핏덩이를 토해냈다. 의식이 멀쩡한 환자와 보호자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어휴, 술을 어지간히 먹어야지. 왜 이 모양으로 살아, 응? 어이구 속 터져.”


남자의 아내는 답답한 마음에 환자를 몰아세웠다.


“선생님, 피가 왜 저렇게 많이 난대요? 언제쯤 멈출까요?”


“글쎄요. 좀 더 지켜봐야겠어요.”


명현은 장갑을 벗으면서 응급실 데스크로 다가가 차트에 오더를 내리고 전화로 병실상황을 알아보고 있었다.


마침 병실이 비었다는 간호사의 연락이 왔다. 응급실에서 거의 멈춘 듯 했던 출혈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뽑아내는 물에 섞여 나오는 피는 옅어지며 잠시 멈췄다가 다시 진해졌다.


“일차 진단 받으셨을 때 조심 하셨어야죠. 술을 계속 많이 드시면 어떡해요. 이렇게 고생 하시잖아요.”


명현이 환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조용하게 충고했다.


그리고 드디어 피가 나오는 것이 멈췄다. 그리고 벌써 날도 밝아 버렸다. 근본적인 치료를 아니지만 급한 생명을 구했으니 밤을 새운 보람은 있었다.


***


명현은 벌써 며칠째 응급으로 인해 밤을 새고 있었다.


그녀는 의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밀치고 들어가 바로 침대위로 쓰러졌다. 10분이라도, 아니 5분이라도 자고싶었다.


그러다 5분이 10분이 되었고, 10분이 20분이 되어 버렸고 그녀는 그렇게 잠이 들어 버렸다.


띠리리~!


죽은 듯이 잠들어 있어도 1년차는 전화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귀는 열어둬야 했다. 명현도 무의식중에 손을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으며 휴대폰을 더듬거리며 꺼내었다.


“네.”


[1년차, 어디야.]


“누구세요.”


[윤명현.]


“네.”


[회진 안 돌아? 당장 뛰어와.]


“…….”


침대에 앉아있긴 했지만 그녀는 눈을 뜨지 못했다. 그리고 통화상대가 누구였는지 조차도 가물거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명현은 일어서더니 시계부터 확인하느라 의국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을 크게 벌리며 놀랐다.


얼굴을 문지르면서 다시 한 번 더 확인을 해도 시간은 8시였다.


명현의 얼굴 색이 희게 바래지고 여지없이 입술을 깨물면서 벗어두었던 안경을 가지고 의국을 나서 뛰기 시작했다.


두 시간이나 잠들었다니.


환자들의 드레싱은 간단히 끝낸 걸로 기억이 되었고 신환의 입원기록지도 정리를 했었다. 짧은 시간동안 그녀의 머릿속은 간밤의 응급실보다 더 위급하고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문제는 회진 준비인데, 치프 가이드가 끝났어야 하는 시간이니 병훈이 화가 많이 나 있을 터였다.


간호사실을 지나 병훈을 찾아가려는 명현을 수간호사인 미진이 불러 세웠다.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하세요. 지금은 좀 곤란해요. 치프 선생님 뵈야 하거든요.”


“김병훈 선생님 서 선생님 방에 계시는데요. 그리고 이거. 서인우 선생님이 출근하실 때 과 식구들 아침 해결하라고 샌드위치 사오셨거든요. 따뜻할 때 드셔야 했는데.”


명현은 종이 포장지에 싸여진 부드러운 물건을 건네받으면서도 다음 순서를 생각하고 있었다. 빨리 스태프 회진이 있기 전에 치프에게 알릴 건 알려야 했다.


그리고 그때 마침 복도 저쪽에서 병훈이 걸어오고 있는 게 보여 그녀는 재빨리 다가가 솔직히 자백을 하려 했다.


“죄송합니다. 잠이 들었나 봐요. 뭐라고 하셔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잘못을 먼저 시인하고 있는 명현의 얼굴을 병훈이 한숨을 내쉬며 쳐다보았다.


“그래, 얼마나 못 잤고, 또 얼마나 잤니?”


“삼일하고 두 시간요.”


“휴, 할 말이 없다. 좀 더 잘 견뎌봐. 누구나가 어차피 겪어야 되는 1년차잖아. 그리고 넌 잘하고 있으니까 걱정 안 한다.”


병훈의 목소리에 공감을 느끼는 측은함이 배어있었고 큰 야단을 각오하고 있던 명현은 더 불안한 마음으로 신환들에 관한 설명을 간단히 끝냈다.


“그래도 넌 용케 회진 전에는 깨어났구나? 조상님이 돌봐주신 줄이나 알아. 아닌 놈들은 깨어나도 회진시간 끝남과 동시에 깨니까. 서둘러.”


명현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의아한 듯 물었다.


“저에게 콜 하지 않으셨어요? 분명 콜 받고 깼는데.”


“그러니까 너희 조상님이 꿈속에서 너 깨우려고 전화를 하셨나 보다. 진심으로 감사나 드려라.”


명현은 정말 자신이 꿈속에서 전화를 받은 건가 하는 의심이 들었고 그녀의 기억은 그게 사실임을 부정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잠정적으로 그녀는 조상의 돌보심으로 꿈속에서 전화를 받은 걸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 후 병훈의 도움으로 치프 가이드는 생략되었고 스태프 회진이 바로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명현에게는 무척이나 길었던 숙명이었기에 또 하루를 보낼 수 있는 힘이 비축되어졌다.


지하에 있는 방사선과를 다녀오면서 명현은 잠시 동안이나마 아침의 난리로 인해 생겨버린 자신의 정신없음을 누르기 위해 로비의 엘리베이터까지 걷기로 했다.


로비 산책의 묘미는 사람 구경이다.


천천히 시야를 넓혀 가면서 그녀는 작은 여유를 찾는 듯했다. 외래 진료를 위해 들어오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그녀에게 신기한 외계의 것을 접할 때의 느낌처럼 생소하게 다가왔다.


더운 여름을 나기 위한 그들의 모습은 아슬아슬함과 동시에 살아있는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 같아 저절로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서 있는 곳이 병원만 아니라면 행복해 보이는군요.’


명현은 오전 중으로 확인해야 되는 필름들을 챙겨서 의국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의사 가운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관심이 한 번씩은 스치고 지나갔다.


수백명의 의사들을 볼 수 있는 종합병원에 있는데도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는 듯 힐끔거린다. 그러다가도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항상 그렇듯이 1초의 여유도 주지 않고 발을 서로 먼저 들이미느라 그녀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면서 그들의 몸을 네모난 박스 안으로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명현이 들어가자 문이 닫히고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릴 사람들을 위해 구석진 자리로 조금씩 자리를 옮기자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전달되었다.


“병훈이가 널 살려주었나 보지? 나 같으면 어림없는 일인데.”


‘어떻게 저렇게 큰 키를 보지 못할 수가 있지?’


확실히 드러나는 장신인데도 명현은 인우를 발견하지 못했다.


“내려갔다 오세요?”


“누가 다녀가셔서 배웅하느라.”


그 순간 혹시나 싶어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통화정보를 살펴보고는 살짝 찌푸린 얼굴로 나란히 서 있는 인우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치껏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침에 전화했었어요? 아까 확인해 본다는 게….”


“누구세요? 콜 받으면서 ‘누구세요’는 무슨 뜻이야?”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사무적으로 조용히 내뱉는 말투였지만 딱딱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내가 누구세요 라고 물었어요? 하, 정말 가당찮은 대답이네요. 기가 막혔을 테고. 또 날 잡고 흔들고 싶었겠네요. ‘윤명현!’ 하면서요.”


자조하는 듯한 명현의 반응에 그의 표정이 좀 더 개인적인 감정을 담아 부드러워졌다.


“네가 뱉은 말 다 합치면 정답 맞아. 그래서 오늘은 네가 잘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야.”


내과 진료실이 있는 4층이 지나자 엘리베이터 안은 두 사람을 제외하고 두 명 정도가 더 있었을 뿐이었다. 명현은 목소리를 조금 크게 한 다음 담담하게 말했다.


“눈꺼풀 내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서 도움은 별로 필요하지 않아요. 그냥 내리기만 하면 잠들 수 있으니까.”


잠자코 정면을 보고있던 그의 얼굴이 명현의 얼굴 옆으로 갑자기 다가오더니 웃음기 섞인 음성으로 그녀의 상태를 일깨워주었다.


“잠 때문에 아침 회진도 못 지킬 뻔한 1년차가 자신의 잠 자랑을 그렇게 당당하게 하면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아?”


“할 말 없게 만드네요.”


“그래도 ‘누구세요’ 보다는 덜 당황스러워.”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혔는지 인우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아도 그는 크게 웃어댔다. 아주 크게.


# 13장


오후 6시. 응급실에서 환자가 대기 중이라는 연락이 왔다. 저녁 시작부터 응급이 생기는 걸 보면 오늘도 잠은 아마 포기해야 될지 싶었다.


명현이 콜을 받고 응급실에 내려간 사이 외과 병동 간호사실에는 호남형의 남자가 명현을 찾고 있었다.


“윤명현씨 지금 어디 계실까요?”


당직 간호사는 말쑥한 차림의 젊은 남자를 호기심 있게 쳐다보면서 그녀가 응급실에 있음을 알려주었다.


“급하신 일인가요? 언제 올라오실 지 정확하지 않은데.”


“아, 아닙니다. 기다리죠.”


남자가 간호사실에서 멀어지자 뒤에 앉아있던 나머지 간호사들이 동시에 일어나더니 남자가 사라진 쪽을 살피면서 동시에 야단들이었다.


“뭐야, 이번에는 오빤가? 근데 윤 선생님 주위엔 인물 훤한 남자들만 있나. 뉘 집 아들인지 잘생겼네. 아, 대체 누구지? 윤 선생님 진짜로 연애하나?”


“친오빠 같지는 않은데? 그때 동생은 닮았었잖아. 분위기까지도 비슷했는데 뭘.”


“어머, 선생님 잠깐만요.”


응급이긴 했지만 다행히 위급은 아니어서 명현은 생각보다 빨리 병실 쪽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런데 막 당직 간호사의 부르는 소리가 급하게 들려 명현은 반대편으로 향하던 몸을 간호사실 쪽으로 돌렸다.


“무슨 일 있어요?”


“누가 찾아오셨는데요. 응급실 내려갔을 때.”


명현은 간호사보다 더 궁금한 얼굴로 그녀를 방문할 수 있는 확률선상의 대상자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잘생기신 남자 분이던데요?”


“남자라구요? 누구라고 밝히지 않던가요?”


“네. 하지만 기다리겠다고 했으니 다시 오겠죠.”


손끝으로 이마를 살살 문지르면서 명현은 생각에 잠겼다.


누굴까?


자신을 찾아올 수 있는 젊은 남자는 동생 석현과 외사촌 지성뿐이었는데 그 둘은 하나는 미국에, 다른 하나는 군 입대를 한 상태이니 아닌 게 분명했다.


8시가 훨씬 지나서 저녁 회진이 시작되었다.


며칠사이 수술을 앞둔 신환들이 많아서 회진은 좀 더 긴 시간을 요구했다. 수술의 성공, 예상되는 합병증, 그리고 달라지는 치료방법들 그들의 궁금함은 여러 사람들에게 재차 확인을 하고 싶어했다.


우선 명현이 병실을 돌면서 설명했고 2년차 또한 그러했을 텐데도 마지막으로 스태프인 인우의 얘기를 듣고서야 안심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생명에 관한 문제이니까. 누구라도 그러할 테니까.


그리고 마지막 병실이었다. 인턴이 병실 문을 열고 명현과 함께 한 발 앞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불편하신 데는 없으신지요.”


병훈의 설명 이전에 인우가 먼저 인사말을 꺼내었다.


“좋아요. 병도 우리 서 선생님이 잘 고쳐줄 거니까 걱정 안 합니다.”


인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다행스럽게도 조기 발견하셔서 예후가 좋으실 겁니다. 사모님은 어디 가셨나 봅니다.”


“아들놈이 와서 저녁 먹으러 갔어요.”


“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내일 뵙죠.”


환자는 후덕한 인상의 신사다움이 느껴지면서 말속에는 누구라도 듣기 좋아할 인자함이 들어있었다. 그는 초기 위암 환자로 이틀 뒤 수술이 잡혀있었다.


“예쁜 선생님은 살이 좀 더 오르면 더 보기 좋으실 텐데.”


환자가 마지막으로 병실을 나가는 명현에게 웃으면서 친근함을 표하는 것에 그녀도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문을 닫았다.


***


오늘밤은 인우의 말대로 조금이라도 잠이라는 걸 잘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명현은 간호사실 책상 앞에서 남아있는 차트의 처방전 기록을 컴퓨터에 열심히 입력하고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간호사가 그녀의 팔을 연이어 쿡쿡 찔렀다.


“네, 왜 그러세요?”


명현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지나가는 투로 대꾸하자 간호사는 곧장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윤 선생님, 누가 찾아 오셨어요.”


그 말에 명현의 시선이 데스크 너머에 서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남자는 싱긋 웃으며 그녀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명현씨?”


“네.”


‘누구지? 누구였더라.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아, 누구지?’


남자의 얼굴에서 정답이라도 찾겠다는 듯이 명현은 시선도 떼지 않고 일어나더니 그가 서 있는 복도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뚫어지게 쳐다보면서도 그녀는 아직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못 알아보시니 서운한데요. 제 이름이 정경민이라고 소개하면 기억하시겠습니까?”


그녀의 무심함에 경민은 아쉬움을 표했고 명현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죄송하게도 못 알아 뵀어요. 죄송합니다.”


명현은 무안할 정도로 쳐다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한 미안함을 정중하게 사과했다.


“아니, 아녜요. 못 알아볼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렇게 심하게 사과를 합니까?”


오히려 더 미안해진 경민이 장난스럽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여기는 웬일이세요?”


밤 시간이니 외래 진료를 받으러 온건 아닐 테고, 병실 환자방문 때문인가? 명현은 몇몇 가능한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경민의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훗, 명현씨 만나러 왔죠. 더 빨리 연락하려고 했는데 어제까지 출장이 있었거든요.”


“절 만나러 오셨다고요? 이 시간에 말이에요? 아니, 미리 연락 정도는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러면 조금은 덜 놀랐을 텐데.”


차분한 어조였지만 명현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훑으며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명현의 모습에 경민은 슬그머니 웃음 짓고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은 아버지가 여기 병원에 갑자기 입원하시게 되었어요. 건강 검진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거든요. 주치의가 명현씨라고 들었는데.”


“그런가요? 어느 분이시죠?”


그렇구나 하며 명현은 그 환자분이 누군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철환씨요. 엊그저께 입원 하셨다는데.”


그녀는 조금 전 병실에서 만났던 중년신사의 얼굴을 금세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 닮아 있었다.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하지만 조기에 발견하신 거라 수술 받으시면 좋아지실 거예요. 너무 크게 걱정하지 마세요.”


“명현씨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는군요. 아버지가 입원해 계실 동안은 자주 보겠군요.”


그 사실이 기쁜 듯한 경민과 달리 명현은 바라지 않던 일이었다. 그녀 자신부터가 선을 봤었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출장 다녀온 뒤 연락을 하겠다고 한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너무도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현실감 없이 인식되어졌다.


뭐라고 말을 해야 될까. 당신과는 결혼할 의사가 없으니 다른 여자를 찾으세요? 아니면 몰랐었는데 당신과 선이라는 걸 볼 때 이미 나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어떤 말을 들려줘야 하는 것일까.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여 마음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죄스러울 것 같았다.


생각의 망설임으로 바로 앞에 서 있는 경민도 잊고 있었던 명현은 자신의 뒤쪽에서 들려오는 인우의 목소리에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뭐해?”


퇴근하기 전 서 원장의 호출로 원장실을 다녀오던 인우는 엘리베이터의 벨 울림을 듣고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문이 열리고 걸음을 떼려는 순간 눈감고도 느낄 수 있는 명현의 가녀린 등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 앞에 서 있는 다른 남자도 보였다.


남자는 환자의 보호자일 수도 있었고 단순히 아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항상 도도하고 당당했던 그녀가 주춤하는 것이 느껴져 인우의 움직임은 그녀 옆에서 멈춰지고 말았다.


“9층 8호실 정철환씨 아드님 되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깔끔했다. 망설임도 숨김도 없이.


“그러세요. 제가 아버님의 수술 집도의입니다. 뭔가 궁금한 게 있으신가요?”


인우는 경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웃음 띤 얼굴로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정경민입니다. 궁금한 건 명현씨가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해결되었습니다. 저희 아버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


경민의 입에서 그녀의 실명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자 인우의 눈썹이 잠시 휘어졌다. 그것도 성을 제외한 이름을 친근감 있게 부르자 고요하고 여유롭던 그의 눈동자가 조금씩 차가워지고 있었다.


“의사는 환자에게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또 뵙도록 하죠. 그럼.”


그녀의 옆에 존재하던 인우의 음영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자 명현은 경민에게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경민씨, 혹시 저와 결혼할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고 계셨나요?”


경민은 그녀의 질문이 갑작스럽고 직설적이긴 했지만 건방지거나 매몰차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사실은 그렇습니다. 저는 명현씨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리고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도 했었죠.”


“저에게는 경민씨와 결혼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제가 경민씨에게 미안함이 있다면 결혼할 의사가 없었음에도 선이라는 걸 보러나간 무책임한 제 행동에 대한 사과예요. 그 외에는 다른 감정이 없습니다.”


그녀의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의 맑은 눈이 어디 틈 하나 주지 않고 상대를 압도해 버렸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명현의 단호한 모습이 경민에게 포기라는 단어를 멀리하게끔 만들었다.


“제가 알기론 특별히 사귀는 사람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위안을 삼도록 하겠습니다. 그것도 안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확실한 건가요.”


“네. 확실해요.”


그녀의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행운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행운의 주인공이 경민 자신이 아님이 명확해지자 피식하고 웃음이 빠져나왔다.


“외과의라서 그런지 정말 단숨에 잘라버리는군요. 조금의 여지라도 남겨뒀으면 이렇게 우습지는 않을텐데. 무섭게 자르시네. 하지만 인연은 길고도 튼튼한 거라고 믿고싶군요. 어쩔 수 없겠지만 한동안 병원에서는 부딪히겠네요. 제가 먼저 움직여도 되겠죠?”


얼마 되지 않는 시간동안 멀어지는 두 남자의 등을 바라보게 된 명현은 어렵고 힘든 감정의 무게를 고의적으로 조절하는데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느낌대로라면 경민과의 관계가 단순한 환자 보호자와의 만남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우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명현의 허리가 반듯이 세워질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의 사랑을 신뢰하면서.


잠시 그 자리에 머물던 명현이 걸음을 떼려할 때 메시지 도착음이 울렸다.


[잘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데.]


명현은 웃었다. 그는 자꾸만 자신을 웃을 수 있게 만드는 존재였다.


***


오전 10시부터 경민의 부친인 정철환 교수의 수술이 인우의 집도로 이루어졌다.


세 시간 여에 걸친 수술은 예상보다도 더 성공적이었고 회복 속도도 아주 양호했다. 명현이 회복실에 들렀을 때 경민은 그 곳에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단 거리를 정해놓고 정지선을 정해놓고 나면 거기까지 내보일 수 있는 부분만 보여주게 된다.


명현도 그랬다. 자신이 담당하는 환자의 보호자. 그녀가 인정하는 경민의 실체였다.


“감사합니다.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하더군요. 집도하신 선생님이 젊으신 데 비해 굉장히 유능하신가 봅니다. 자신감도 있어 보이고. 신뢰가는 분 같았습니다.”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특별히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불안하지는 않았지만 명현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사람임은 틀림없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의사로서 배울 점이 아주 많은 분이죠. 분명 수술은 잘 되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아, 네.”


“환자 분 상태를 보고가야 되는 게 제 일이예요. 뵀으니까 이만 가 봐야겠네요. 불편하다고 말씀하시면 연락주세요. 그럼.”


명현은 껄끄러움으로 더 오래 있을 수도 없을 것 같아 재빨리 회복실을 벗어났다.


경민은 그녀가 자신을 대함에 있어 아무런 감정이 없이 더 맑아져 있음을 느끼게되자 마음이 씁쓸해졌다. 그러는 반면 명현에 대한관심은 자꾸만 늘어나서 상관 있었던 일들이 아무 상관없는 일로 바뀌어 버렸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한다고 해서 결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인우는 명현에게 절대 먼저 묻는 법이 없었다. 무관심의 표시가 아니라 그의 궁금함보다는 그의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일 수도 있듯이.


명현이 병원에서 경민을 만나게 되었던 날도 인우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의 방에서 미리 준비해둔 야식을, 아니 그녀에게는 저녁을 먹었고 다음날 있을 수술 자료들을 확인하는 인우의 등뒤에서 명현은 또 잠이 든 게 전부였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열쇠와 메모만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널 깨워서 같이 나갈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


저녁회진이 다른 때보다 이른 시간에 간단히 빨리 끝이 났다.


공원에서 열리게 될 음악회 때문이었다. 모두들 들떠 있는 듯 보였고 빨리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은 표정들이었다.


“선생님, 음악회 가실 거죠?”


간호사실에 있는 명현에게 당연한 대답을 기대하며 병동 간호사인 성희가 물었다.


“아뇨.”


‘그 시간에 난 잠을 자겠어요.’


뒷말을 생략하고 명현은 간단히 고개를 저었다.


여러 사람의 말소리들로 병동의 복도가 시끌시끌해지는 걸 보면 공연시간이 다 된 듯 싶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동기인 소영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복도는 더 소란스러워졌다.


“명현아, 명현아, 구경가자. 빨랑. 난 꼭 봐야겠거든? 어서어서!”


소영은 공연의 처음이라도 놓칠 새라 명현을 부추겼으나 그녀는 호응을 보여줄 자세가 아니었다.


명현의 시큰둥한 반응에 소영은 호들갑을 떨며 억지로 친구의 팔을 끌어당겼다.


“야, 넌 너희 스태프가 공연에 나오는데도 안 가겠다는 거야? 너, 그거 불충(不忠)이다.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 사부가 연주를 해주시면 꽃은 못 드릴 망정 감사한 마음으로 청취도 하고 그러는 거지, 왜 그렇게 룰(rule)을 몰라. 너 불참을 스태프가 알았다간 병원생활 빡세져서 안돼. 어여 일어나.”


명현은 인우가 공연에서 연주를 한다는 소식에 지금껏 눈을 마주치고 있었던 차트에서 소영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서인우 선생님이 무슨 연주를 한다는 거야?”


“피아노 연주할 거라고 그러던데?”


인우가 피아노를 친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 음악회에서 연주까지 한다니 명현에게는 쉽게 와 닿아 이해가 되는 부분이 아니었다.


“웬 피아노? 서인우 선생님이?”


“야, 나라고 믿기겠냐. 수련의 시절부터 음악회 고정 게스트라는데? 음, 뭐 듣기로는 실력도 프로 전향해도 될 정도라는데 백문이 불여일청이니 가서 들어보면 될 거 아냐. 근데 솔직히 믿기지는 않는다. 그 메스가 피아노 연주라니. 으, 살 떨린다.”


“살 떨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명현의 질문에 소영의 눈길이 곱지가 않았다.


“아, 전율, 전율 몰라? 생각만으로도 감동적이다. 뭐, 그런 뜻이거든요, 마마!”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 단어는 좀 쓰지 마.”


***


당직을 제외하고는 공원 쪽으로 벌써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려한 색깔의 조명들은 어둠이 내리고 있는 무채색의 하늘을 향해 눈부신 불빛들을 쏘아주고 있었다.


음향 테스트용으로 틀어놓은 흥겨운 음악들은 대형 스피커를 통해 공연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리듬감을 주었고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공연의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축제의 시작과 내용보다는 그 분위기가 우리를 더 흥분되게 만드는 것처럼 스피커를 울리면서 터져 나오는 노랫소리는 사람들의 심장소리와도 호흡을 같이하고 있었다.


많은 자리를 차지하며 빽빽하게 놓인 의자들엔 환자와 간병인 그리고 가족들이 빈 곳 하나 찾을 수 없도록 가득 메우고 있었다.


휠체어에 링거를 매달은 환자들도 많이 보였고 팔다리 깁스를 한 환자, 겉모습으로는 전혀 아파 보이지 않는 환자, 그리고 유독 큰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는 꼬맹이 환자.


그 외에 의료진들과 병원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은 공연장 맨 뒷줄에서 빙 둘러 공연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굳이 정해진 자리가 아니더라도 공원내의 벤치, 분수대, 나무사이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어느 곳에든 사람들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을 조금 넘어서 여름의 어둠이 까맣게 제 색깔을 띠기 시작할 때 공연은 시작되었다.


처음은 전 국민 누구나가 좋아한다는 중년의 여자가수가 등장해 파워풀한 가창력과 시원시원한 무대 매너로 온 관중들을 축제로 끌어들였고, 그 다음으로는 소녀들의 우상인 4인조 댄스그룹이 나와 화려한 춤 솜씨로 공연을 점점 무르익게 만들었다.


그 외에도 가수는 아니지만 유명한 영화배우도 나와서 자신의 애창곡을 쾌유의 선물로 멋들어지게 불러주어 많은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았다.


한껏 공연의 절정에 취해서 모두들 시간이 끝을 향하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서 요즘 개그 프로그램에서 인기가 한층 오르고 있는 사회자가 다음 순서를 알려주기 위해서 무대위로 올라왔다.


[자, 이제 거의 마지막 순서입니다. 우선 이 분은 섭외 하는데 다리품과 돈이 전혀 들지 않았다는 게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기대를 안 하셨다가는 심장마비가 올 수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하긴, 의사 선생님들이 이렇게 많으신데 뭐, 걱정하지 마십시오. 심장이 좀 놀라면 어떻습니까. 제가 장담하건데 충분히 심장을 마비시킬 수 있는 분입니다. 제가 무대 뒤에서 좀 전에 뵈었거든요. 놀랬습니다. 특히 여성 여러분들 눈 크게 뜨시고 집중하셔서 잘 꽂으십시오. 제가 알기로는 미혼으로 알고 있거든요? 자, 오늘의 게스트로 나오실 분은 세진병원 일반외과 전문의이신 서인우 선생님입니다.]


무대 뒤쪽에서 하얀 가운 차림의 인우가 자심감있는 걸음걸이로 사회자가 있는 중앙쪽으로 다가가 사회자 바로 옆자리에 서자, 사회자가 위로 흠칫 한번 쳐다보면서 자신과의 키 차이를 가늠해 보는 제스추어를 보여줬다.


[선생님, 혹시 길 가시다가 누가 명함 같은 거 내밀면서 뜰 것 같으니 같이 일해보자. 이런 제의 안 받아 보셨어요?]


가운 차림이었지만 넥타이로 중심이 잡혀 깔끔했고 환자들에게는 그의 낯익은 모습이 훨씬 편안하게 받아들여졌다.


[전혀 없습니다. 있었다면 아마 진지하게 고민했겠죠.]


[에이, 아무래도 거짓말하시는 것 같은데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명함 돌리는 사람 여럿 있는데 소개받으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아마 그 분들이 하루도 못 되어서 절 내쫓을 겁니다. 거기에다가 후회도 곁들이시겠죠.]


[아주 말씀도 재미있게 잘하시는 의사 선생님이시네요. 연주 실력은 벌써 여기저기 소문이 많이 나셨던데요?]


[공짜니까 당연히 좋은 소리들만 해주시는 거겠죠.]


인우와 사회자가 주고받는 재치 있는 말에 관객들은 이미 웃는 얼굴로 기대를 하고있었다.


[그건 오늘 제가 들어보고 진위를 판단하겠습니다. 연주 부탁드리겠습니다.]


인우는 중앙에서 조금 비켜난 곳에 광채 나는 몸매를 뽐내면서 거만하게 앉아있는 검정색 그랜드 피아노 앞으로 다가가 관중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 다음 피아노 앞 의자에 자세를 잡고 앉았다.


많은 악기들이 믹스되어 리듬감을 주었던 가수들의 노래 때와는 달리 그의 연주를 귀담아 듣기 위해서 모두들 말소리를 줄여가며 아름다운 소리를 기다렸다.


무대 위의 인우와 제일 먼 거리에 위치한 명현은 자신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넓은 가슴을 내어준 서인우라는 사람이 조명을 받으면서 군림하듯이 당당하게 앉아있는 낯선 모습의 남자와 동일한 인물인지 의심이 들었다.


초반의 빠른 템포를 예고하는 왼손 반주를 시작으로 오른손 반주가 본격적으로 연주되면서 환상적인 선율이 흘러나왔다.


쇼팽의 네 개의 즉흥곡들 중 가장 많은 찬사를 받고있는 ‘환상’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즉흥 환상곡이 인우의 손끝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쇼팽 자신이 밝히기를 꺼려했던 곡인 만큼 급변하는 선율은 현실의 세계에서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것 같았고 그 느낌 그대로 인우의 손가락은 자유스럽게 건반 위를 스치면서 밑바닥에 가라앉은 감정의 원천들을 서서히 위로 떠오르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명현은 자신의 심장을 죄어오는 그의 선율에 눈조차도 깜박일 수가 없었다. 속박에서 풀려나 자유를 찾은 인우의 손이 기쁨으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아 그녀의 눈이 애잔함으로 일렁거렸다.


피아노를 마주하고 있는 그의 표정은 피아노와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절실한 가를 나타내 줄만큼 인우의 연주는 최고의 피아니스트들보다 훨씬 감동적이었고, 위로 치닫는 절정을 지나 웅장함을 바탕으로 마지막의 시적인 선율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인우가 피아노 건반에서 손을 내리고 무대 아래쪽을 향해 일어설 때까지 공연장은 정적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인우가 허리를 숙이면서 감사의 인사를 하는 순간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은 저절로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었고, 명현도 약하나마 손바닥을 부딪치면서 소리를 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작은 마찰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열정을 보았다. 그의 절제되지 않은 진정한 자유스러움을 보았기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아름다운 자유인이었다. 피아노 앞에서만은.


‘앵콜’을 외치는 사람들의 환호에 사회자가 인우의 자리로 다가가더니 잠시 얘기가 오가는 것 같았다.


아마 앵콜곡을 부탁하는 말일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사회자가 동조하는 듯한 표정으로 중앙으로 다시 걸어나와 다음으로 진행될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앵콜곡을 부탁드리려 했더니 서 선생님께서 아주 멋진 제안을 하나 해 주셔서 저도 찬성을 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좋아하실 거라 저는 생각합니다. 이분도 공짜긴 마찬가지지만 실력은 계산이 안 될 정도랍니다. 아직까지 세진병원 내에서조차도 소문나지 않은 매력적인 가수시라는데요? 뒤에 앉은 피아니스트 선생님이 그렇게 전해 주더군요. 자, 소개해 드립니다. 일반외과의 윤명현 선생님. 윤명현 선생님? 어디계세요? 혹시 뒤에 많이들 서 계신 하얀 옷들 중에 안 계신가요?]


그의 다음 연주를 기다리면서 명현은 죄어 왔던 가슴을 손으로 살살 달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비벼도 뻐근한 아픔은 사라지지 않아 소리라도 힘껏 지르고 싶었다. 명현이 옆 사람과의 작은 틈으로 몸을 돌려 공연장을 빠져나가려고 하자 왼쪽에 서 있던 소영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어딜가? 다들 너 찾고 난린데.”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들 속에 명현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어지고 있는 이유를 팔을 붙잡고 있는 소영에게 물었다.


“나를 왜 찾아?”


“서인우 선생님이 네가 숨은 가수라는데? 잔말 말고 어서 올라가기나 하셔. 빨 리가. 아, 빨리.”


영문을 몰라하는 명현을 억지로 공연장 사이로 난 길로 밀어 넣으면서도 소영은 내심 불안해했다.


‘웬일이래. 명현이가 숨은 가수? 내가 쟤 안 지가 햇수로 8년인데. 웬 가수? 그리고 나도 모르는 걸 저 메스는 어떻게 알지?’


여러 사람들이 명현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면서 박수를 치며 그녀를 격려해 주고 있었다.


마침내 명현이 어쩔 수 없는 표정으로 무대 중앙으로 걸어가면서 인우를 향해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인우는 싱긋 웃기만 했을 뿐 다른 어떤 동작도 없었다.


곧이어 사회자의 너스레가 또 시작되었다.


[야, 세진병원은 의사선생님 뽑을 때 외모심사도 하나 봅니다. 아니면 오늘을 위해서 동료 선생님의 도움을 받으셨던지. 이거 장난 아닌데요.]


그녀는 사회자의 뒷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한번 얘기해 달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이, 선생님도 그걸 못 알아들으실까. 외과시니까, 성형외과에도 친분이 많으실 것 아닙니까. 물론 직원 할 일은 해 주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전 선생님 얼굴 무공해 자연산이라는 거 안 믿습니다. 그냥 이 참에 병원 홍보도 할 겸 동료 의사들의 사기도 높여줄 겸, 한 말씀하십시오.]


사회자의 의도를 알아차린 명현은 이해의 미소를 보이며 마이크를 입 근처로 가져갔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맛있는 저녁 사준다는 친구의 꼬임에 눈이랑 코를 실습용으로 한번씩 해보게끔 했습니다…. 소영아, 그때 잘못되었다고 불평해서 미안해. 이런 칭찬 듣는 걸 보면 생각보다 괜찮은가 봐. 이번엔 내가 밥 사줄 테니까 가슴도 부탁해. 이렇게 말씀드리면 되나요?]


재치 있는 명현의 대답에 공연장 전부가 웃음바다로 변했고 사회자도 요구한 답보다 훨씬 흡족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선생님, 나중에 연락처 좀 주세요. 상의 드릴 일이 있으니까요. 저희 집에도 해결해야 될 문제가 많습니다. 어쨌든 비밀도 들통 났으니까 선생님 노래 실력도 오늘 몽땅 드러내 주시죠. 피아노 선생님 반주 준비 되셨어요?]


노래가 미리 정해지기라도 했는지 인우에게 바로 반주를 부탁했고 그는 준비된 사인을 보내주었다.


사회자가 무대 뒤로 사라지자 명현은 뒤쪽의 인우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그녀의 귀에 평화를 들려주었다. 그녀가 인우에게 진정제라고 칭했던 바로 그 곡이었다.


명현이 잘 알고 있는 곡은 인우의 솜씨가 더해져 전주는 평소에 듣던 것보다 더 멋있게 편곡되어 슬프도록 감미롭게 느껴졌다.


인우의 연주 때부터 통증을 느꼈던 심장은 노래의 멜로디를 감지해서인지 점차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공연장을 덮고있는 검고 푸른빛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I can see the pain living in your eyes


And I know how hard you try


You deserve to have so much more


I can feel your heart and I simpathize


And I'll never criticize all you've ever meant to my life


I don't want to let you down


I don't want to lead you on


I don't want to hold you back from where you might belong


You would never ask me why


My heart is so disguised


I just can't live a lie anymore


I would rather hurt myself


Than to ever make you cry


There's nothing left to say but goodbye


Huh uh


Good bye


눈에 고인 아픔이 당신이 얼마나 노렸했는지 알게 하네요.


그래서 당신은 더 많이 사랑 받을 만하죠.


내 삶에 커다란 존재였던 당신을 탓하지 않아요.


당신을 실망시키고 또 속이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하게 막지도 못해요.


제 마음을 숨겼냐고 당신은 묻지도 않을 거예요.


하지만 더 이상 거짓된 삶을 살수가 없어요.


당신을 울게 하느니 차라리 제가 아픈 게 나아요.


이 말밖에 할 말이 없어요. 안녕.


슬픔, 그리움 그리고 사랑.


노래는 그녀에게 있어서 유일한 감정의 표출구였다. 노래를 부를 때만은 감정이 이끄는 대로 솔직할 수 있었고 또 그때만은 모든 감정들을 잊고 편안해 질 수 있었다.


인우의 피아노 반주가 따뜻하게 흐르자 명현은 담담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깊은 중음의 목소리가 숲 전체에 울려 퍼지자 객석의 사람들은 노래의 애잔함에 전율을 느끼는 듯 했다. 노래가 흐를수록 그녀의 목소리는 슬픔과 아픔의 감정들이 짙게 배어들었고 그로 인해 탁해진 음색은 듣는 이들의 가슴을 절실하게 울려버렸다.


마지막 노랫말이 끝나고 인우의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가 흐를 때 명현은 재빨리 무대를 벗어났다. 큰 박수와 그녀의 노래를 더 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의 소리가 드높았지만 명현은 이미 공연장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사회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인우에게 앵콜곡을 대신해서 연주를 부탁했고 인우는 흔쾌히 그것을 수락했다.


연주를 경청하기 위해 사람들이 다시 조용해지자 인우는 병원 내 환자들은 위해 잔잔히 기도서를 읽듯 야상곡을 연주했다. 그는 피아노 음률로 아파하는 모든 영혼들을 위로했고 그들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그렇게 환자들의 고통과 그들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가족, 의료진들을 위한 한여름 밤의 음악회는 인우의 야상곡 연주를 마지막으로 다음을 기약하는 약속을 하면서 끝을 맺었다.


***


병원의 특성상 즐거움과 유쾌함을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두 시간을 넘도록 병동을 비운 셈이라 그 두 시간에 해당되는 일들이 명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응급실 콜이 들어왔고 그녀는 힘주어서 뛰어야되는 상황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녀가 응급실에 도착해보니 아이의 울음소리가 심각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인턴은 아이의 상태를 명현에게 설명을 해주면서 그녀의 뒤를 따라 다녔다.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울고있던 아이는 무섭게 보이는 남자 의사들 틈에서 부드러운 외모를 지닌 명현이 나타나자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울음소리를 낮추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계속된 출혈로 당장은 냉정해지기 어려워 보였다. 명현의 입장에서 피는 찢어진 부위만 봉합하면 멈추게되는 간단한 이치의 쉬운 문제였지만 모성을 가진 엄마라는 사람에게는 풀지 못하는 난해한 문제일 것이다.


아이의 울음에 가슴이 먼저 멜 것이며, 더군다나 자식이 흘리는 피는 모성을 녹아 내리게끔 만들어 강한 그들을 흔들 수 있을 만큼의 큰 위력을 가지고 있다.


봉합하는 내내 목이 쉬도록 울어대더니 붕대를 감을 때쯤엔 아이는 정화된 눈물을 매달고만 있었다.


그리고 아이의 엄마는 세상의 끝에서 살아 돌아온 것처럼 다행스러워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명현은 문득 생각했다.


‘엄마…. 오늘은 나도 엄마가 보고싶어.’


***


[사인 좀 해주지.]


내일로 넘어가는 시간에 인우의 장난이 그녀에게 건너왔다. 아직까지 병원 내에 있다는 의미였다. 계단을 통해서 의국으로 향하던 명현은 통화버튼을 길게 눌렀다.


“줄서야 되요.”


명현이 담담하게 말하자, 인우가 피식 웃으며 서운한 말투를 흉내내었다.


[아는 사이에 너무하는군.]


“그런 것 때문에 우리 사회가 병들어요.”


[부탁을 해도 안 될까?]


느릿하게 들려오는 그의 음성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부탁하고 싶을 정도예요? 그럼 어디 해 봐요. 들어본 후에 결정하죠.”


[사인 받으려고 지금까지 기다렸어. 두 시간이나.]


“뭘 믿고 1년차를 기다려요.”


자신을 두 시간이나 일부러 기다렸을 그를 생각하니 그녀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해 줄 건가? 빨리 결정해. 오늘은 나도 졸려.]


“해 줄게요.”


[주차장이야.]


직원전용 주차장은 많은 차들이 빠져나간 시간이라 한적했다. 그가 알려준 번호의 기둥을 찾아 명현은 차 유리를 두드렸다.


정말 졸렸는지 인우는 운전석 의자를 뒤로 충분히 넘겨놓고 누워있었다. 투박한 소리에 그의 눈썹이 위로 올라가면서 상체도 일으켜졌다.


인우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명현은 그가 들려준 피아노 선율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분명 같은 사람인데도 달랐다. 그와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자연스럽게 잘된 것 같군.”


둘은 서로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도 지나칠 만큼 다른 생각을 서로 하고 있었다. 우선은 그렇게 보였다.


“뭐가요?”


“눈이랑 코 수술했다면서. 다음엔 가슴도 부탁해? 그렇게 된다면 사이즈는 내가 정해야 되나?”


“훗, 그러세요. 대신 제가 지탱할 수 있는 크기여야 되요. 너무 커지면 디스크 위험 있어요.”


인우는 말을 하고있는 입과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지닌 그녀의 슬픈 눈을 놓치지 않았다.


“울었군, 혼자서.”


시원한 차안 공기가 갈수록 차가워져 가고있었다.


“음, 왠지 엄마가 보고 싶더라구요.”


그녀에게서 눈물의 이유를 들은 인우는 그에야 하나 남은 퍼즐 조각을 찾은 느낌이 들었다.


명현의 눈에는 이미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물방울들이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고 눈물은 인우가 손가락으로 저지를 시켜도 막무가내로 흘러내렸다.


명현의 눈물은 어깨가 떨리지도 흐느낌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아래로 흐르는 미지근한 물줄기였다. 안구 안에서 자꾸 밀어내는 바람에 밖으로 밀려나오는 액체였다.


그의 가슴으로 기댄 다음에도 그녀의 소리 없는 눈물은 셔츠를 흠뻑 적실 때까지 멈춰지지 않았다.


“혼자서는 울지마. 기다리는 사람도 슬퍼지니까.”


아직까지는 그녀 혼자만의 슬픔인 것 같았다. 인우는 그녀가 슬픔의 이유를 그에게 내보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의 슬픔도 웃음처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


아침부터 병동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걸음이 부쩍 많아졌다. 이유는 어제의 노래 한 곡으로 인한 명현의 유명세 때문이었다.


새벽 드레싱을 시작으로 회진시간 동안에는 환자들과 가족들로부터 전해 받은 음료수가 챙길 수 없을 정도였고 간혹 사인을 원하는 환자들도 있었다.


병원 직원들조차 명현을 알아보고는 몇 마디씩 얘기를 건네곤 했다. 덕분에 그녀가 해야될 일들이 제 시간보다 더 오래 끌게되었고 그들의 눈길을 피하느라 걸음은 더 빨라졌다.


오늘은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피하고 싶은 그녀였지만 엘리베이터만은 그럴 수 없었다. 수술만 아니었다면 힘들어도 계단을 이용했을 텐데 그럴 수 있는 시간적 영유가 없었다.


다행히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서 명현은 혼자 서 있을 수 있는 편안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반나절도 이렇게나 신경이 쓰이고 부자연스러운데 매체를 통해 인기라는 것을 얻는 사람들은 특별한 신경구조를 더 갖고 있는 게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많은 매일 매일을 불편해서 어떻게 견뎌낸단 말인가. 그들에겐 분명 다른 신경 줄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지하에서 올라오고 있던 엘리베이터가 2층에 멈춰 섰다. 안에는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세명정도 타고 있었다. 명현은 뒤돌아 서서 10이라는 숫자를 누르면서 자신이 알고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분명 누구와 꼭 닮았어. 누굴까?’


뒤에 서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은 낯이 익었다. 명현은 입술을 손으로 비비면서 그 낯익음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쉽게 생각이 날 듯 하면서도 떠오르지 않아 안타까움으로 답답해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미지의 사람은 스스로 자처해서 누구와 관계가 있는지 친절하게 밝혀주었다.


“흠, 가수 선생님이시네.”


명현의 귀에 들린 음성도 겉모습만큼이나 자신이 알고있는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명현은 해답을 찾은 표정으로 몸을 비스듬히 돌려 말없이 허리를 숙였다.


“나 인우 아비 되는 사람인데….”


그녀의 시선이 차분하게 상대의 얼굴로 향했다. 그의 이름을 들려주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지만 입 밖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인우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연세의 세대에서는 굉장히 큰 키였을 것이다. 짙어 보이는 눈썹과 눈매도 거의 흡사했고 완벽하게 보이는 콧날도 부자(父子)는 너무도 닮은 모습이었다.


명현이 알기로는 그의 주변도 아직 둘의 사이를 아는 사람이 없는 게 확실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그녀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한 침묵에도 상대는 자상하게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다만 내 추측을 얘기했을 뿐이네.”


명현이 내려야하는 숫자에 엘리베이터는 도착했다는 신호를 주었다.


“먼저 내리겠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었던 말은 공손한 인사뿐이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숫자들은 한 층씩 때때로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이는 것을 반복하더니 20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


“여기가 병원이지, 가수 대기실이냐, 소속사냐? 왜 노래는 잘 해가지고 수술실 복도까지 붐비게 만들어? 하루종일 들락거리는 다른 병동 놈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병훈이 푸른 수술복 위로 팔짱을 낀 채 수술 준비를 하고있는 명현을 향해 빙글거렸다.


지루했던 일상에 색다른 일들이 생겨난 듯 병훈은 흥분되어 보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명현이 아무 말이 없자 병훈은 한껏 진지해진 목소리로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명현아, 이참에 우리 이렇게 힘들게 살지 말고 전향하자. 어때? 뭐, 네 나이가 요즈음 시대에 가수로 데뷔하기에는 좀 많기는 하지만 메이크업으로 변장을 하면 서너살 어려 보이는 건 문제도 없겠다.”


마치 대단한 의견이라도 제시한 듯 자신의 생각에 병훈이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명현은 그저 가만히 웃기만 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있던 2년차 승수는 반색을 하며 병훈의 장난을 거들고 나섰다.


“선생님, 지금처럼 막 부리셔도 되니까, 저도 데려가시죠.”


“너도? 근데 넌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내가 볼 땐 땡땡이 잘 치는 거 외에는 별 재주가 없는 놈인데.”


승수를 못미덥게 바라보며 병훈이 비죽거리자 수술방 모든 사람들은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러다 인우가 수술실로 들어오면서부터 그들의 수다는 잠시 동안은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것 같더니 수술이 예상대로 순조롭게 진행이 되자 2년차 승수가 인우에게 궁금증 해소를 위한 질문을 했다.


“선생님, 명현이 노래 잘하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저희 아무도 몰랐는데.”


인우는 마스크 속에 감춰진 목소리로 대수롭지 않게 명현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깨끗하게 정리해 주었다.


“벌 세울 때, 잘 부를 것 같아 시켜봤어.”


“쟤, 어디가 노래 잘 부를 것 같습니까? 제가 봐서는 영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요.”


승수의 머리가 부정하며 흔들거렸다.


명현도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그녀는 그의 말대로 노래를 불러준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에게 어떻게 노래를 시킬 생각을 했었는지 어제부터 줄곧 알고싶었다.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두 남자의 엉터리 같은 대화는 수술방 분위기를 가볍게 했고, 화제의 대상인 명현이 바로 옆에서 눈치를 주고있는 데도 둘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오늘 다른 과 동기 놈들도 명현이 본다고 얼마나 드나들던지 한동안 쟤 가드 붙여야 될지도 몰라요. 워낙 노리는 놈들이 많아서.”


“음, 1년차는 노리지 말라고 충고해주고 싶은데…. 기다리다 목 빠지기 쉬워.”


인우는 잘라야되는 혈관을 자른 다음 병훈에게 넘겨주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저도 선생님 말씀에 백퍼센트 지지합니다. 사귈 사람이 없어서 1년차를 사귑니까? 저도 1년차때 여자친구가 고무신 바꿔 신었는데 기다리다 목 빠지겠다가 인사말이었으니까요.”


“2년차는 괜찮나?”


수술에 집중해있던 인우의 시선이 승수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확인하듯 물었다.


“제 생각에는 1년차 때보다 오십 가지 정도 낫습니다.”


“다행이군.”


인우는 온화한 눈빛을 어쩔 수 없이 드러내고 말았다.


끊어질 줄 모르는 남자들의 목소리들이 그녀 주위를 둥둥 떠다니고 간호사와 명현은 가끔 눈을 마주치며 웃음으로 호응을 해 주고 있었다.


# 14장


인우는 부친의 호출에 의아해하며 보폭이 넓은 걸음으로 원장실이 있는 20층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부자지간임은 병원 내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있는 사실이었지만, 인우의 부친은 원장실로 개인적인 호출을 하는 일은 가급적 삼가는 분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그가 먼저 원장실로 찾아가 한동안 뜸했던 인사를 드렸었기 때문에 아무 이유 없이 아들과 차 한 잔 마시기를 원한다는 부친의 말은 설득력이 없었다.


분명 그를 불러야 할만큼의 중요한 이유가 있을 거라 확신한 인우는, 원장실 문을 조심스레 노크했다.


똑똑.


문안에서 허락의 기척이 떨어지자 인우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가 들어서자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던 서 원장은 곧장 책상 의자에서 일어나 소파 쪽으로 움직였다.


“왔니?”


서 원장은 흰머리가 군데군데 자리잡은 것을 제외한다면 중년의 나이로도 보일 만큼 활력이 있는 모습이었다.


“무슨일 있으세요?”


인우는 서 원장이 소파에 채 앉기도 전에 호출의 궁금함을 서둘러 나타내었다.


“아니, 없다. 마침 좋은 차가 들어왔기에 네게도 한 번 맛보여주고 싶어 불렀다.”


마주앉은 인우를 느긋하게 주시하며 서 원장은 빙긋 웃었다.


“잊으셨어요? 제가 그 차 맛과는 지독히도 사이가 멀다는 것을? 며칠 전에도 남기는 차가 아깝다며 물만 주시던 분이, 그런 이유로 부르셨다구요?”


인우는 서 원장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는 부친은 절대 그런 일로 호출을 하실 분이 아니었다. 이렇게 억누르는 듯한 웃음을 웃는 분도 아니고 이유가 없으면 없다고 인정하실 분이지, 억지 이유를 만드실 분이 아니었다.


“오늘부터라도 한 번 줘 볼까 하는데, 마셔보겠니?”


서 원장의 웃음에 인우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자신의 예민한 감각이 부친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았음을 생각해 내었다.


‘눈치 채셨군.’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인우는 단도직입적으로 서 원장에게 물었다.


“아셨어요?”


담담한 음성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한 사람의 긴장감이 인우에게서 느껴졌다.


“음, 그렇게 확연하게 표시를 내는데 모르리라 생각했냐?”


소파 팔걸이에 팔을 올려놓으면서 인우는 찌푸려진 눈살을 손가락으로 꾹꾹 펴주고 있었다.


“아버지니까 눈치채신거지, 확연한 표시는 아니에요.”


그답지 않게 이유를 다는 모습이 재미있는지 서 원장의 눈길이 한시도 아들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난 네가 연주하는 동안 피아노 외에 다른 것도 볼 수 있다는 걸 어제 처음 알았다.”


“반주는 상대의 호흡도 봐 줘야 하니까요.”


고집스러운 대답으로 섣불리 인정을 하지 않는 인우를 서 원장은 부드러운 눈매로 응시했다.


이미 여자가 있다는 말로 식구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으면서도 상대에 대한 정보는 일절 주지 않던 아들이,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서 원장에게는 놓칠 수 없는 힌트와도 같았다.


“사랑과 송곳은 숨길수가 없어. 언제 비집고 나올지 모르니까…. 조용하더구나.”


서 원장의 의미심장한 소리에 눈썹을 매만지고 있던 인우의 손이 갑작스레 멈춰졌다. 그리고 서 원장에게로 시선을 들었다.


“벌써요? 그럼, 서인우가 아버지 아들임도 밝히셨겠네요.”


인우는 우회해서 확인하는 법이 없는 부친의 성격을 넌지시 타박했다. 그 말 이외에 다른 곤란한 말씀은 안 하셨다 하더라도 명현은 충분히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녀에 대한 걱정으로 인우의 표정이 다소 굳어지는 듯 하자 서 원장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그 아이 눈도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아요.’라고 말하고 있었으니 크게 놀라지는 않았을 거다. 깨끗한 인상이 좋더구나.”


서 원장의 완벽한 변명에도 인우는 말없이 얼굴만 쓸고있었다. 두어 시간 후면 그의 어머니가 전화를 할 것이고 동생 정우놈도 아는 체를 해댈 것이다.


인우는 포기한 듯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에게 말씀하실 건가요? 아직은 아니에요. 아버지.”


서 원장의 생각을 읽은 인우가 단호하게 부탁했다.


인우는 이제 겨우 사랑을 인정하기 시작한 명현에게는 그의 가족들의 무한한 관심이 큰 부담일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 없다. 너도 내가 네 엄마에게는 이틀이 한계라는 거 알잖니.”


가뜩이나 아내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기색이 가득했던 서 원장으로서는 지켜내기 어려운 부탁이었다. 하지만 아들의 성격을 알고있는 그로서는 어떤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을 이미 자각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공연 때의 상황까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가면서 지금 당장이라도 집으로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무시하지 못할 아들의 진지한 표정에서 원장은 약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번엔 조금만 더 늘여보세요. 힘드시더라도 제가 직접 말씀 드릴 때까지는 절대 안돼요. 그럼 그렇게 알고 오늘은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인우는 다시 한번 더 약속을 당부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명현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그의 마음은 급해지고 있었다.


그런 아들의 모습에 서 원장은 곧게 빛나던 명현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여유 있게 충고했다.


“걱정 마라. 도망갈 눈은 아니더구나.”


***


드레싱의 마지막은 회진 때와 같이 정철환 교수의 병실이었다. 편안한 성격 때문인지 정 교수의 회복 속도는 예상보다도 더 빠른 듯했다.


명현은 인기척을 내며 조용히 정 교수의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좀 어떠세요?”


정 교수는 환자복을 깔끔하게 여미고 침상에 앉아있었다. 1인실 병실이다 보니, 정 교수는 수술 부위 통증이 줄어들면서부터는 늘 한적하게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아이고, 선생님 오셨습니까?”


반갑게 맞이하는 정 교수의 인사에 명현도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병상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첫 걸음도 다 떼기 전에 명현은 멈춰서고 말았다. 그리고 눈빛을 싸늘하게 굳혀버렸다.


정 교수는 저녁 회진 전인 오후 드레싱 때만 제외하고선 언제나 병실에 혼자 있는 편이었다. 그의 아내가 하루 한 번 집에 다녀오는 시간이 바로 그때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환자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아내가 아닌 방문객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방문객은 그녀도 알고있는 사람이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차가움으로 방문객을 응시를 하던 명현은 표정을 가다듬고 천천히 병상으로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환부 좀 보겠습니다.”


명현은 드레싱 통을 병상 위에 내려놓으며 앉아있던 정 교수가 눕도록 도와주었다.


병상 곁에 서 있는 방문객은 명현의 행동을 애틋한 표정으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는 방문객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초록색의 소독포를 펼쳐놓으며 정 교수의 복부에 감겨진 붕대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묵묵히 의사로서 해야될 일만 하겠다는 무언의 말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그녀의 모든 동작들은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이 건조해 보였다.


“흠, 저 때문에 불편해서 부녀지간에 정담을 못 나누는 것 같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얼른 자리를 비워드리고 싶은데 처지가 이렇다보니 그럴 수도 없고. 허허. 우리 예쁜 선생님이 바빠서 두 분 오랜만일 텐데.”


어떠한 알은 체도 없이 드레싱에만 열중인 명현에게 정 교수는 헛웃음을 지으며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에도 명현은 하던 일을 계속해서 민첩하게 해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줄곧 딸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성균이 어렵사리 첫 말을 열었다.


“많이 바쁘니? 차 한 잔 할 시간 없니?”


“다 됐습니다.”


성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명현은 조용히 드레싱 통을 정리하며 정 교수를 향해 친절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가운 자락을 붙잡는 듯한 성균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명현은 침착하게 문손잡이를 돌렸다.


그대로 열고 나가고자 하는 것이 그녀의 마음이었지만 명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뒤돌아 서서 문손잡이를 잡은 채 조용히 말했다.


“십 분 후에 로비로 내려가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성균에게 잔잔하게 전달되었다.


결국 대답을 해주고 사라지는 딸의 마음이 고마워 성균의 눈은 애잔하게 가라앉았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명현이 빠져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는 성균에게 정 교수는 칭찬으로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어린 나이에 큰 아픔이었을 텐데도 명현 양이 반듯하게 잘 컸습니다. 제 아들놈도 아주 좋아하더군요. 퇴원하면 어르신을 찾아 뵙고 혼사 청을 넣어야 될 것 같은데요?”


은근히 의중을 타진하는 정 교수의 말에 성균은 평소의 생각을 말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제대로 된 사랑을 마음껏 줘보지도 못한 허울뿐인 아비로서 그나마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제게는 저 아이의 의사가 제일 중요합니다.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노릇이죠.”


등을 돌리고 나가는 딸의 뒷모습은 자신이 버린 신뢰의 죄 값처럼 시리고 차가웠다. 하지만 성균은 그런 모습이라도 자신에게 보여주는 딸이 오히려 고마웠다. 염치없는 아비의 욕심으로 자식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렇게 라도 달래고 싶었다. 볼 수만 있다면.


***


로비에 일렬로 마련된 의자에는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과 보호자, 그리고 코너의 좀 떨어진 자리에서는 몇 명의 의사가 자판기 커피를 뽑은 종이잔을 들고 서로에 대한 이야기에 분주했다. 환자들과 의사간의 어중간한 중간 위치에 성균이 앉아있었다.


깨끗하게 다려진 체크무늬의 여름 셔츠를 입고있는 성균은 오십대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준수하고 젊어 보였다. 멋진 중년의 모습으로 점잖게 앉아있는 성균에게서 두어칸 떨어진 곳에 명현은 타인처럼 앉아있었다.


“아픈곳은 없니?”


성균이 창백하다 못해 파란 기운까지 엿보이는 명현의 안색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정확하게 어디를 보고있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명현은 한참을 더 그렇게 가만히 침묵하고 있더니 마침내 까칠하게 잠긴 목소리를 간신히 밖으로 끄집어내었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야위어진 얼굴 때문인지 안경이 올려진 명현의 콧날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차가운 눈길이라도 보여준다면 안타까운 부정(父情)을 조금이나마 내비칠 수 있을 것 같은데, 딸의 냉담한 옆모습은 그것마저도 주지 않았다. 죽은 아내가 마지막으로 보여준 그 눈빛처럼 명현은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문득 성균은 명현이 태어나던 날이 생각났다. 아내보다도 먼저 안게 되었던 딸의 새까만 눈동자가 성균은 갑자기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원망스럽고 미웠다.


그 예뻤던 딸의 눈망울을 버렸던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후회하고 절감했다. 신의를 지키지 못한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을.


“혹시 정군과 결혼할 생각이 있니?”


로비의 웅성거리는 소음 속에서 성균은 조심스럽게 명현의 솔직한 마음을 물었다. 결혼 얘기를 언급하던 정 교수의 말은 딸이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성균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아뇨.”


여전히 시선을 외면하고 있던 명현의 대답에는 망설임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완강한 부정이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니?”


벌써 청혼을 꺼내고 있는 상대편과는 너무나도 단호한 거부에 성균은 혹시나 하는 염려가 불현듯 떠올랐다. 명현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윤 옹의 억지스러움이 개입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로 성균은 확실한 이유를 알고싶었다. 하지만 명현은 그의 관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 궁금하시죠? 제 결혼인데?”


명현의 무표정한 얼굴이 돌려졌다.


그럴 수 있는 자격을 묻는 듯한 딸의 말에 성균의 심장은 지옥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아픔인데 고통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내색해서는 안 되는 아픔을 누르느라 성균의 눈빛은 애잔함으로 점점 짙어졌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만 그게 궁금하구나.”


“제가 그 사람과 결혼하길 바라세요?”


명현의 차분한 목소리는 의견을 구하고 있지 않았다. 그 속에는 당신이 어떠한 의견을 내놓아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무시가 은근하게 감춰져 있었다.


“그건 네 뜻에 달렸겠지.”


비스듬히 몸을 돌려 성균을 바라보고 있던 명현은 자신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제가 알기로는 윤씨에게는 제 뜻대로 결혼할 자유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그러니 윤씨인 제게 ‘내 뜻대로’라는 말은 당연히 어울리지 않죠. 윤씨라는 성을 버리지 않는 다음에는.”


명현이 가지고 있는 미움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자조적인 말투에 성균은 잠시 할 말을 잇지 못했다. 차마 ‘그래서 네가 덜 아플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버려라.’는 말을 해주지 못했다.


한순간 그렇게 목안으로 차 오르는 말들을 가두고만 있던 성균은 깊은 눈빛으로 명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가 싫다면 내가 막아주마.”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싫다는 말 한마디 내뱉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전 당신처럼 약하지도 않죠.’


의미를 품은 명현의 눈동자가 불빛 아래 잔잔하게 반짝거리자 그 모습을 담고있는 성균의 얼굴에는 서글픔이 어렸다.


“그래, 어렵지 않은 일이지.”


성균이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많은 옛날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비집고 들어왔다. 강요되었던 의무와 욕심 내어선 안 될 사랑, 온 마음을 다해 지켜냈어야 하는 신뢰….


성균은 자신의 눈시울이 차츰 뜨거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딸에게는 절대 보여줄 수 없는 뜨거움을 감추기 위해 성균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곧 회진 시간이에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 할아버지께서 맞선에 대한 제 뜻


을 물으신다면 마음에 안 들어 하더라고 전해주세요. 애정도 없는 결혼에 정 씨(氏)를 또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고…. 안녕히 가세요.”


명현은 간간이 떨리고있는 성균의 어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 앞에서는 그 떨림을 완벽하게 숨겼어야 했다.


명현은 굳은 얼굴로 성균을 응시하다가 그대로 뒤돌아 그에게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


퇴근을 하기 위해 가운을 벗고있던 인우는 드르르 거리는 익숙한 진동음에 책상위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옷걸이에 걸린 짙은 색의 재킷을 벗겨내면서 간단한 동작으로 휴대폰을 열었다.


[도망갈 생각하고 있어요.]


무슨 뜻이지?


인우는 명현이 보낸 메시지를 잠시동안 노려보았다. 그러다 저절로 움켜쥐게 된 재킷을 의자위로 던져버리고 거친 문소리와 함께 그의 방을 나왔다.


조금전 회진때만 해도 살풋 웃어주더니 도대체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복도를 지나치는 인우의 얼굴은 이미 차갑고도 딱딱하게 변해있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붙잡아 가둬버릴 것이다.’


성큼 걷는 그의 발걸음이 간호사실로 움직였다.


“윤명현 선생 지금 어디 있습니까?”


다급함으로 명현의 소재를 묻는 인우의 음성에는 잔뜩 힘이 실려 있었다.


“윤 선생님, 8층 병실 올라가셨는데요. 호출해 드릴까요?”


“됐어요.”


인우는 간호사실 옆 중앙계단을 단숨에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틀렸어, 윤명현. 네가 떠날 수 있는 기회같은 건 이젠 없어.’


그는 8층 비상구 문을 힘껏 밀쳐 버렸다. 그리고 그가 있는 쪽과는 반대편으로 뒷모습을 보인 채로 걸어가고 있는 그녀를 인우는 서둘러 따라잡았다.


“어…!”


가느다란 손목이 그의 손에 꼼짝없이 들어왔다. 뒤쪽에서 갑작스레 다가온 힘에 의해 명현이 놀라는 소리를 내었지만 인우는 묵묵히 엘리베이터를 향해 큰 보폭으로 걷기만 했다.


“화났어요?”


인우에 의해 끌려가듯 무조건 태워진 엘리베이터 안에서 명현은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나 그는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는 동안 명현은 아프게 죄여오는 손목을 그에게서 빼보려 노력했지만 화가 난 남자의 힘은 어떻게 해도 감당이 되지 않았다.


차 문이 열리고 명현이 자리에 앉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녀의 손목은 저릿한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진짜 아팠어요.”


조수석에 앉아 인우를 바라보고 있는 명현과는 달리 그는 한 손을 핸들 위에 올려놓은 채 굳은 표정으로 앞만 보고있었다.


“무슨 뜻이야?”


인우는 극도의 화를 중화시키기 위해 턱을 바싹 당겨야 했다. 그러면서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메시지의 내용을 물었다.


“뭐가요?”


오히려 명현이 알 수 없다는 듯이 되묻자 그가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대로였다.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담아두던 정직한 눈동자도 그대로였고 수줍어 소리 없이 가지런히 웃어주던 붉은 입술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런데 왜….


인우는 매서운 눈초리로 명현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숨으려고 했지? 이젠 사랑도 알아버렸는데.”


그의 음성에는 명현에 대한 분노가 차갑게 박혀있었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명현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훗, 사랑을 알았으니 사랑 뒤로 숨으면 되죠.”


그녀의 입가에서 보시시 미소가 피어오르자 그의 얼굴은 더 이상 굳어질게 없을 만큼 경직되었다.


“뭐하는거야, 너.”


이해되지 않는 명현의 태도에 인우는 위험스럽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눈을 명현이 손으로 가려버렸다. 그녀는 서늘한 손바닥으로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지그시 누르며 부드럽게 말했다.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물었잖아요. 다짜고짜 화부터 내면 어떡해요. 무서우니까 그러지 말아요.”


화가 난 그를 잔잔하게 달래주는 그녀의 다정함에 인우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는 손을 올려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명현의 손을 내리려 했다.


“안돼요. 화낸 이유부터 말해줘요.”


명현이 다른 손으로 그의 손을 잡으며 은근히 따졌다. 그러자 인우의 입술이 조용히 열렸다.


“정말 도망갈 생각했던 거야?”


“지금도 하고있어….”


명현의 두 손이 그에 의해서 확 끌어 당겨졌다. 크게 떠진 그녀의 눈동자 위로 인우의 화난 얼굴이 파고들었다.


“어디, 갈 수 있으면 가 봐.”


“나 혼자서요?”


“…….”


명현의 어이없는 대답에 인우는 단단하게 굳혔던 눈매를 의문스럽게 치켜올리기만 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같이 가요.”


그를 향해 아련히 속삭이는 명현의 목소리에 인우는 온몸의 기운이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거 같았다.


‘오해라는 건가?’


순간 명현의 두 손은 스르르 내려졌고 그의 머리는 뒤로 쓰러지듯이 넘겨져 운전석 목받침에 제법 강하게 부딪혔다. 긴장이 풀어진 인우는 한동안 그러고 있으면서 그녀의 장난 아닌 장난에 자신이 완전히 당한 걸 알았다.


명현의 마음이 완전하게 다가설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우는 자꾸만 불안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 초조했다. 그녀의 눈빛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어도 막연한 두려움은 인우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나쁜 윤명현.’


***


인우는 골목마다 각각 개성 있는 모습들로 꾸며져있는 빌라촌으로 차를 천천히 진입시켰다.


건축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 지었는지 사소하고 작은 공간들도 실용적이고 아름답게 꾸며져있었다. 앞쪽의 주도로를 제외하고는 예쁜 정원들이 빌라들 사이사이를 아담하게 연결시켜주고 있어, 저마다 다르게 지어진 건물들의 모양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있었다.


그의 빌라는 모든 차들을 지하 주차장에 주차시키게 되어있어 두 사람은 1층에 있는 그의 집까지 계단을 통해 천천히 올라갔다.


“아파트가 더 편하지 않나요?”


명현은 신발을 벗기 위해 현관에 선 채로 먼저 안으로 들어선 인우를 향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곧장 냉장고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 물병을 꺼내던 그는 명현을 바라보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높은 곳을 좋아하지 않아.”


“무서워하는 모양이네요.”


명현은 자연스럽게 구김이 간 면블라우스 아래로 드러난 팔을 문지르며 소파에 편안하게 기대앉았다.


“좋아하지 않으면 무서워하는 건가? 그리고 높은 곳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인우는 손에 든 작은 물병을 거의 다 비워내고는 명현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조금은 풀어진 모습으로 긴 다리를 쭉 뻗으며 소파에 앉았다.


“좋아하지는 않아도 다들 어느 정도까지는 별 상관없어 하죠. 몇 층까지 상관없어요?”


명현의 질문은 끈질겼다.


“3층까지는 견딜 수 있어.”


그는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낮게 웅얼거렸다. 대수롭지 않게 대꾸는 해 주어도 명현이 내린 그의 진단은 고소공포증이었다.


‘말도 안돼. 고소공포증이라니.’


“그 정도면 무서워하는 거 맞아요.”


웃음기가 느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인우는 그 자세에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말없는 표정에 명현도 미소를 거두었고 둘은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 괴롭힌 거 재미있었나?”


깊고 진지한 눈빛으로 괴로웠다고 표현하는 그의 마음이 명현에게 가슴 철렁하도록 전해졌다.


“전혀요.”


“그런데 왜 그랬어?”


“그렇게 오해할 줄 몰랐어요.”


인우는 살짝 찌푸린 얼굴로 미안해하는 명현을 보더니 뒤로 젖혔던 고개를 바로 했다. 그리고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에게 충격을 주었던 말을 지적해 주었다.


“도망이라는 말은 쓰지 말았어야 했어.”


“내겐 진짜 도망이잖아요. 들키지 않게 사라져야 하는.”


1년차는 오프 이외의 날은 병원 내에서 24시간 상주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 규칙도 어겼고, 해야 될 일들까지 내버려두고 나왔으니 명현에게 내일 아침을 곤욕스러울 것이 확실했다.


부친인 성균이 다녀간 다음부터 정착되지 않은 생각들로 마음이 어지럽고 답답해져 메시지를 보냈던 것인데.


“적어도 나에게는 다른 단어를 썼었어야지.”


인우는 옆으로 앉은 채로 명현을 쳐다보면서 팔꿈치를 소파 등받이에 대고는 손으로 머리를 받치듯 괴었다.


명현은 씁쓸하고 어두워 보이는 그에게 망설이듯 물었다.


“내가 불안해 보이나요?”


명현의 파랗게 시린 눈동자가 안타깝게 흔들리는 걸 본 인우는 이미 머리를 바치고 있던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혼란스러운 듯 쓸어 올렸다.


“아니, 너 때문이 아니야. 나도 모르겠어. 왜 이렇게 불안한 건지.”


‘미안해요. 내 약한 사랑이 당신을 힘들게 하네요.’


항상 자신감이 명확하게 드러나던 그의 얼굴에 막연한 걱정의 빛이 어리는 게 명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그런 인우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마음을 달래고 안심시키듯 명현은 가는 손가락을 펼쳐 그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는 그녀의 손길에 인우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동작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녀의 달램에도 그는 여전히 복잡함이 깃든 눈빛으로 명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명현이 그의 무거운 생각들을 밖으로 끄집어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서인우가 싫어지면 분명하게 알린 후에 사라질 테니까.”


명현의 예상대로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다. 조용히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던 그의 눈매가 위험스럽게 꿈틀거렸다.


“뭐?”


단단히 화가 난 목소리였다. 해서는 안 될 말이었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명현은 그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가만히 내리고는 그에게로 다가가 앉았다.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그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명현은 그의 가슴에 천천히 얼굴을 갖다대었다. 그리고 안타깝게 입을 열었다.


“그런 말해서 미안해요. 나도 알아요. 내가 불안해 보인다는 거. 하지만 당신 모르게 어디로 숨진 않아요.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인우는 심장 부근에 쏟아지는 명현의 숨결을 잠시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후…. 널 어떻게 할까.”


그러다 숨을 크게 내쉬며 살짝 기대어진 그녀의 어깨를 자신의 품으로 더 깊게 들여 안았다.


화조차도 낼 수 없게끔 만든 그녀를 꼼짝도 하지 못하게 힘껏 끌어안아 버렸다.


명현은 자신의 몸을 한참동안이나 숨이 막힐 정도로 껴안고 있는 인우에게 힘든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미워하지는 말지.”


답답해하는 명현의 불평에 인우는 그녀의 등허리를 더 힘주어 감아 안았다.


“이 정도 벌은 그냥 달게 받아.”


하…. 명현의 입에서 희미한 한숨이 터져나왔다.


가뜩이나 숨쉬기 힘들어 끙끙대며 간신히 소리를 내었는데 그는 보란 듯이 그녀를 감고있는 팔에 힘을 더 보태어 버렸다. 명현은 그의 귓가에나 겨우 들릴 듯한 소리로 다시 투정했다.


“많이 미운가 보네요.”


“조금 전까지는 그럴 뻔했지.”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명현이 억지스러운 표현을 하자 인우는 그녀의 등 너머에서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을 느꼈는지 명현이 곧장 조르듯 물었다.


“지금은요?”


“희한하게도 그렇지 않아.”


딱딱해져 있던 그의 음성이 다시 느긋하고 낮게 들려왔다. 평소처럼 그녀를 안도하게 하는 듣기 좋은 울림에 명현이 지금까지 어쩌지 못하고 있던 자신의 손으로 그의 옆구리를 톡톡거렸다.


“그럼, 이 팔 좀 풀어줄래요? 계속 이러고 있으면 내가 미워할 거 같으니까 빨리 좀 풀어봐요.”


이젠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는 쉽게 그럴 생각이 없는 듯 태연하게 제약을 걸었다.


“그냥은 안돼.”


명현은 잠시동안 망설였다.


“밥 살게요.”


두 사람만의 알 수 있는 의미가 담긴 대답에 인우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안겨있는 그녀의 몸이 앞뒤로 흔들릴 만큼 그는 크게 웃고 있었다.


하하, 지금은 그것만으로는 안돼. …약해.“


그가 웃는 바람에 명현의 몸은 이미 편안하게 풀어져 있었지만 품을 벗어날 수 있을 정도는 못 되었다.


그때 명현이 약속이라도 하듯 차분하게 속삭였다.


“내가 안아줄게요.”


유쾌하게 흔들리고 있던 그의 몸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인우는 명현의 어깨를 자신의 품 밖으로 천천히 밀어냈다. 그리고는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복수하고 싶어? 그 팔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농담을 내뱉고 있어도 그의 입가에는 웃음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갑자기 모든 소리들이 그들의 주위에서 사라졌다. 명현은 진지하게 그의 짙은 눈빛을 마주했다.


“할 수 있어요.”


명현은 머뭇거림 없이 자신했다. 인우는 미심쩍은 표정을 슬쩍 지어 보이며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내려놓았다.


“기대하지.”


곧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의 움직임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명현은 꼼꼼하게 채워진 자신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끄르고 있었다. 그렇게 가슴 부근까지 단추가 열려지자 희뿌연 살결들이 옷자락 사이로 언뜻 내비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거의 마지막 단추에 이르렀을 때 인우가 물었다.


“어떻게 안을 건데 시작이 이렇게나 거창해?”


드디어 인우의 뜨거운 눈동자 속에서 명현의 블라우스는 소파 아래로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우아한 목선과 흰색의 얇은 레이스가 둘러진 브래지어가 눈부시게 드러났다.


명현은 수줍음과 긴장감에서 오는 떨림을 최대한 감추며 담담하게 말했다.


“힘으로는 가슴 터지도록 안아줄 수 없으니까.”


그러면서 그녀는 하늘빛이 도는 그의 정장 셔츠로 손을 가져갔다. 손끝의 떨림 때문인지 명현의 손길은 더 조심스러웠고 잠시 후 셔츠의 단추들도 막힘 없이 모두 풀어졌다.


“바쁜 와중에 다른 공부도 하고있는 모양이군.”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자극적인지도 느끼지 못한 채 명현은 셔츠단추에만 열중해 있었다. 인우는 그런 그녀를 은근히 놀렸다.


“공부는 아니더라도 고민 정도는 했었죠.”


명현은 처음보다는 줄어드는 용기에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자신이 열어놓기는 했지만 셔츠 안으로 보이는 그의 맨 가슴을 보는 순간 선뜻 다음으로 넘어 가지지 않았다. 생각으로는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명현은 자신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시선에 한참을 멈칫거렸다. 그러다 셔츠깃을 서서히 열어 젖혔다. 인우의 넓은 어깨가 그녀의 손끝에 따뜻하게 스쳤다. 점점 그의 벗은 상체가 완연하게 드러나면서 명현의 떨림은 그도 느낄 수 있을 만큼이 되어버렸다.


셔츠가 완전히 그에게서 벗겨지려 할 때였다. 인우에게서 간신히 참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윤명현, 다음에는 소매단추도 꼭 확인하도록 해.”


어쩐지…. 쉽게 빠져야 되는 팔이 어딘가 걸려있는 느낌이 들었었다. 명현은 직접 소매단추를 끄르고있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자, 다음은?”


자신의 블라우스 옆에 허무하게 떨어지는 그의 셔츠를 보며 명현은 허무함에 고개를 저었다. 그깟 단추 두 개 때문에, 자신이 먼저 안아주려 했던 계획이 우습게 무너져 버렸다.


“아, 몰라요. 노력했는데….”


명현은 손으로 이마를 가린 채로 고개를 숙이며 작게 중얼거리자 인우가 그녀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어디까지 고민해 둔 거야? 시시하게 여기까지는 아닐 테고, 그렇지?”


자신을 보며 싱긋이 웃는 그의 모습에 명현이 그의 목을 끌어안아 버렸다.


“취소예요. 내가 했던 말.”


무안함에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버리는 명현에게 인우는 웃음을 거두며 다정하게 속삭여주었다.


“취소 안 해도 돼. 내 가슴은 이미 터지도록 두근거렸으니까.”


명현은 그의 고백이 말 할 수 없이 기뻤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시큰둥한 대꾸를 하고 말았다.


“보기보다 심장 약한가 봐요. 그 정도에 터질 것 같았다니.”


꼭 뭐라고 할 것만 같았던 그가 의외로 잠잠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벗은 등만 부드럽게 쓸어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너무 조용히 있다보니 명현은 새삼 그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명현은 그의 목에 둘러진 자신의 팔을 살짝 늦추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천천히 뒤쪽으로 물렸다. 그의 옆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눈도….


“으앗!”


갑자기 명현이 소리를 질렀다. 인우는 그녀의 팔을 앞으로 당기면서 순식간에 소파에 쓰러뜨려 버렸다.


“무슨, 겨우 이 정도에 놀라다니…. 튼튼한 심장을 가진 윤명현.”


쓰러진 명현의 입술 위에서 인우가 웃었다.


당황한 듯 명현이 눈만 커다랗게 뜨고있자 인우는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였다.


“남자의 진심도 몰라주고.”


남자의 진심이라니.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에 명현은 인우의 입술에다 웃음을 뿜어내고 말았다.


“풋, 알아요. 그 진심.”


“그렇게 재미있게 웃으면서 어떻게 안다는 거지?”


인우는 마음껏 소리내어 웃고있는 명현을 생각이 깊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가까이에 있던 그의 얼굴이 위로 들려버리자 명현은 웃음을 잔잔하게 지었다. 그러면서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알아요. 내 마음도 그랬으니까 틀림없이 당신도 그랬을 거예요.”


“네 마음이 그러면 내 마음도 당연히 그렇다고 누가 그랬지?”


대답하는 그의 눈동자가 조용히 빛났다.


인우는 자신을 향해 짙어지고 있는 그녀의 마음을 물었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하는지 알면서도 명현은 오히려 되묻기만 했다.


“아닌가요?”


“아니야.”


인우는 대답을 슬쩍 피해버리는 명현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어서 말하라는 재촉같았다.


“요즈음, 한밤중에 누가 자꾸 보고싶어졌어요. 그래서 아침이 어서 오기를 얼마나 기다리는 줄 몰라요. 정말 바보 같은 1년차죠? 그 바쁜 아침을 기다리니 말이에요. 이젠 됐나요?”


인우는 잠시동안 명현의 입술을 눈으로만 담아두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내 그의 입술 속으로 단숨에 가둬버렸다. 그대로 더 두었다가는 그의 심장이 흥분으로 남아있을 거 같지 않았다.


그의 손이 명현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인우의 입술 속에서 촉촉이 젖은 그녀의 입술이 조금씩 뜨겁게 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작은 호흡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명현은 머릿속의 모든 생각들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그의 입술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그 사이 그들은 부딪치는 손길로 서로의 나머지 옷들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그녀의 보드라운 허벅지 사이를 그가 거침없이 파고들면서 맞닿아있는 둘의 육체는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서로를 소유하기 시작했다.


마치 오랫동안 몹시도 그리워했던 연인들처럼 그들은 서로의 체온을 아낌없이 느끼려했다. 더 가까이 끌어당기고 더 깊숙이 입술을 나누면서 그들은 서로의 육체를 완전히 나누었다.


“하…, 사랑해요.”


명현이 얕고 지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와 동시에 폭주하던 그의 움직임도 차츰 잠잠해졌다.


인우는 한동안 그녀의 목덜미에서 거친 숨결을 고르고는 얼굴을 들었다. 땀으로 젖어있는 머리카락들이 명현의 이마에 제 멋대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를 깨끗하게 쓸어 넘겨주면서 잠긴 목소리를 내었다.


“네 사랑이 자꾸만 커져서 걱정이다. 더 이상은 키우지 마. 충분하니까.”


***


인우는 정리가 필요했다.


명현이 보낸 몇 자의 메시지에 평상시 드러내지 않았던 불안이라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었다. 그것은 감추고는 있었지만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이유 없는 기우같은 것이었다.


자기만의 색으로 온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조용히 걷자 투명한 유리에 깜깜한 어둠이 그대로 배여 빛이 있는 곳의 모든 것을 비춰주고 있었다. 새벽도 아직 저만치 멀리 있는 깊은 밤이었다.


면바지에 티셔츠를 간단히 챙겨 입은 인우의 모습과 그 뒤로 매끄럽게 다듬어 놓은 듯한 명현의 하얀 등은 사진처럼 검은 유리에 찍혀 있었다.


지난밤 인우는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버려 명현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안아버렸다.


때로는 거칠게 몰아붙이는 그의 움직임에도 그녀의 말간 눈은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인우는 그 속에서 자신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점점 순수한 결정체로 굳어져가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의 행로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질 않았다.


직접적인 물음으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게 된 것과 그 사랑을 더 단단하게 지키기 위해서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가 추측해 본 퍼즐에 의하면 그녀의 부정적인 결혼관은 불행한 부모의 결혼생활, 그 중에서도 엄마의 불행이 그녀를 힘들게 지배하고 있는 것 같이 묻어나는 그녀의 눈은 그로 인한 상처의 지독함을 충분히 나타내 주었고, 누구도 들어내 줄 수 없는 혼자만의 아픔으로 보였다.


그녀는 아직 아픔에 관해서는 자신에게 확실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 가슴을 열어 보여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오늘처럼 그녀가 사라질까 하는 불안함이 계속 자신을 괴롭히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잠을 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명현은 머릿속으로 전달되는 부드러운 소리에 몸을 뒤척였다.


“아….”


몸을 일으켜 세우던 명현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지난밤 인우와 나눴던 사랑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통증을 유발시켰다. 명현은 몇 번의 신음을 더 뱉어내고서야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릴 수 있었다.


침대 옆 스탠드 불빛은 방안 어디에도 그가 없음을 말해주고 있었고, 살짝 열려진 커튼 틈의 어둠은 잠을 더 청해야되는 시간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명현은 걷히지 않은 어둠에 안도해하며 연보라의 얇은 시트로 몸을 감싼 후 침실문을 열었다.


침실문이 열리자마자 감미로운 소리의 진동이 들려왔다. 명현은 자시의 귀울림을 따라 실내등이 켜있는 거실을 지났다. 그리고 소리가 흐르는 방의 문을 두근거림으로 열어보았다.


그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인우는 최상의 여유로운 모습으로 피아노와 교감을 나누고 있는 듯 보였다. 정해진 악보가 펼쳐져 있지는 않았지만 그의 섬세한 손가락은 머뭇거림 없이 익숙한 곳을 정확하게 누르면서 달콤한 선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건반의 양쪽 끝을 가볍게 여러 번 훑고 지나가면서 기교 섞인 음감으로 그는 자신의 감정을 마음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명현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그가 전해주는 평화에 빠져있었고, 인우 또한 피아노를 탐닉하느라 그녀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같은 공간에서 둘은 한참을 스스로에게만 몰두해 있었다.


“시끄러웠나?”


언제 발견했는지 인우의 눈이 명현을 향해 열렸다. 그리고 간단히 물음을 던졌다.


“옆집이 그렇지 않을까요?”


명현은 좁게 열린 문 사이에 그대로 선 채로 조용히 말했다.


“방음설치 때문에 그렇지 않을 거야.”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 것도 읽어낼 수 없었지만 명현은 그가 많은 생각에 빠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이러고 있어요? 얼마 못 잤잖아요.”


명현이 염려하는 듯한 목소리를 내자 그가 싱긋 웃었다.


“반성 좀 하느라.”


그의 대답을 의아하게 여긴 명현은 진지하게 물었다.


“잘못한 것 있나봐요?”


인우는 이미 걱정으로 심각해진 명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간밤에 사랑하는 여자를 죽일 뻔했지.”


순간 명현의 눈썹이 찡그려지면서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얼굴이 붉어져 버렸다.


“살인미수는 반성으로 해결될 수 없어요. 대체로 처벌이란 걸 받죠."


문가에 서 있던 명현이 나지막하게 말하고는 곧장 몸을 돌려 나가려 하자 인우의 목소리가 그녀를 다시 돌려 세웠다.


“이리 와서 처벌을 하던지 용서를 하던지 마음대로 해.”


인우는 팔을 벌려 그녀에게 자신의 품을 내주었다. 그 작은 공간은 명현이 온몸을 맡길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신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몸을 가리고 있는 시트를 더욱 힘주어 잡아당겼다.


“전혀 반성하는 얼굴이 아니라 용서는 안 될 것 같아요.”


명현은 잠깐동안 자신이 했던 걱정이 너무도 어이가 없어 그를 얄밉게 쳐다보았다.


“그럼, 처벌을 할건가? 네 마음도 아플 텐데. 그리고 난, 엄살이 심해. 나중에 달래려면 너만 골치 아파져.”


사실이 아닐텐데도 그의 표정은 그게 정말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런 그를 명현은 조용히 나무랐다.


“처벌 대상자가 협박을 하게 되면 가! 중! 처! 벌에 해당돼요. 점점 자신을 불리하게 만들지 말아요.”


“상관없어. 어서 처벌하러 오기나 해.”


그의 입술에서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커다란 시트를 대충 둘러 감아 어깨와 팔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명현이 피아노를 향해 다가가자 인우는 자신의 무릎 위에 그녀를 앉혀놓고 조금전 끊어진 곡을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내가 연주할 동아 무슨 벌을 내릴까 결정해 둬.”


인우는 명현의 한쪽 어깨에 얼굴을 올려놓으며 느긋하게 선율을 만들어 나갔다. 그는 명현을 앞에 두고도 편안한 자세를 유지한 채 그녀만을 위한 사랑의 곡들을 연주해 주었다.


피아노 선율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는 축복을 선사하고 사랑을 잃은 사람들과 사랑을 찾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는 빈 마음을 다독여주는 아름다운 바람이 불어오는 느낌이었다.


“훌륭한 손가락이네요.”


명현은 건반 위를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는 그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훗, 그런가? 좋아하는 걸 잘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렇지 못한 것을 잘할 수 있는 가능성보다 월등하게 높지. 얘를 많이 좋아했었거든.”


그녀의 맨 어깨에, 행복해하는 그의 숨결이 퍼졌다.


“행복했겠네요. 좋아하는 걸 할 수 있었으니…. 모르고 지내왔는데, 그러고 보니 난 좋아했던 게 없었던 거 같아요.”


그는 손가락으로 부지런히 멜로디를 만들어 내면서 명현의 어깨를 턱으로 문질렀다.


“지금이라도 가지면 돼. 하고 싶은 거 생각해 본 적 있어?”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여유가 없었다. 다만 슬픔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그리고 아픔을 잊기 위해 그렇게 사라왔을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가질 수 있다는 그의 말에 명현은 고개를 살짝 저을 뿐이었다.


“없어요.”


짧은 고민의 시간도 없는 솔직한 대답이었다. 인우는 그녀의 어깨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보드라운 감촉을 한참동안 음미하더니 가라앉은 속삭임을 들려주었다.


“결혼해.”


피아노 소리가 멈췄다.


건반 위에 놓여있던 인우의 손이 명현을 힘주어 감아버렸다. 그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그녀의 등을 힘차게 두드렸다. 강하면서도 느긋한 리듬은 그녀의 불안을 다독이기라도 하듯 일정하게 울리고 있었다.


자꾸만 흔들리는 마음에 명현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잘할 자신 있어요?”


“그래.”


명현도 한 번쯤은 그와의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인우를 사랑할수록 그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자연스럽게 생겨났었다. 또 그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순간에는 그 많던 상념들이 자신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 기쁨과 편안함을 오래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걸 생각해 보았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여전히 두려움으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난 없어요.”


명현이 망설이듯 말했다.


“아니, 넌 아무 문제없이 잘할 수 있을 거야. 걱정했던 사랑도 이렇게나 잘하는 거 보면.”


그는 다정함만이 배인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었다.


명현은 차라리 인우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게 다행스러웠다. 지금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면 결혼에 대한 불안한 생각을 떨치지도 못한 상태로 허락의 말을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생각만 길어지는 명현에게 그는 대답의 한계를 그어주었다.


“안돼요, 그럴 수 없어요, 싫습니다, 그런 말은 이젠 해도 소용없어. 내게 이미 면역이 생겨버렸거든. 그러니까 거절하려면 다른 말들을 생각하도록 해.”


대수롭지 않은 듯 가볍게 얘기하곤 있지만 그로서는 정말 듣기 싫은 말일 것이다. 명현은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그의 손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자신 없어요. 알고있듯이 난 결혼에 대한 생각이 그리 밝지 않아요. 혹시나 잘못될까 하는 마음으로 전전긍긍해하며 살기 싫어요. 내게 그런 마음이 있는 한은 당신도 힘들어질 거예요. 그렇게되면 후회라는 것을 할 테고 우린 서로가 다치게 되겠죠.”


인우는 차분하게 불안을 털어놓는 그녀의 어깨에 입술을 문지르며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그녀의 생각을 고쳐주었다.


“시도하지 않는 것에는 자신이 생길 수가 없어. 네가 갖고있는 불안의 크기와는 물론 다르다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결혼에 대한 불안감은 크게 존재하고 있어. 다만 그들은 서로를 믿고 용기를 내서 한번 시도를 해보는 거지. 그렇게 안될 거라는 높은 확률을 향해서.”


상대를 믿고 시도해보는 것에 불과하다니. 그것도 모든 걸 감수하는 용기를 가지고서….


그가 얘기하는 결혼은 어렵지도 그렇다고 쉽지도 않은 도전 같은 것이었다. 누구라도 그 결과를 확실할 수 없어 끝까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과정의 연속.


거기에 따른다면 그는 분명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상대였고, 명현 자신은 그 정도의 노력은 기울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높은 확률만을 기대하고 결혼하자는 청혼을 기억 속에 남기기는 좀 곤란할거 같아요. 다르게도 한 번 해줄래요?”


인우는 안고있는 부드러운 온기를 그의 가슴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들어봐서 마음에 안 들면 생각을 다시 할건가?”


그가 편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럴 거 같아요.”


명현은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예쁜 청혼이 궁금했다. 어쩌면 별 상관없다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은 듣고싶어 하는지도 몰랐다.


“훗, 그럼 다시 하도록 하지. 윤명현, 나만 믿고 따라와. 내가 널 행복하게 해 줄게. 그러니 제발 나와 결혼해 줘. 어때? 마음에 드나?”


그녀를 안고있는 그의 팔에 은근히 힘이 가해지면서,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정해진 대본을 읽듯이 건조하게 청혼했다. 입가에는 웃음을 띤 채.


인우의 웃음으로 그녀의 등이 가볍게 들썩이게 되자 명현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기쁨인 것 같기도 하고 거기에 가슴이 훈훈해져 오는 만족스러움도 섞여 있어 분명한 하나의 감정이 아닌, 여러 가지 맛이 고루 포함되어 뚜렷한 감정의 경계를 알 수 없는 뿌연 덩어리 같았다.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말대로 그건 행복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뇨. 도저히 믿을 수 있는 마음이 생길 것 같지 않아요. 차라리 처음 게 나아요.”


명현이 조용히 고개를 내젓자 그제야 그는 태연하게 웃음을 섞어가며 대꾸했다.


“하하, 내 진심보다 확률을 믿겠다는 대답에 기뻐해야 되는 건가? 이상해, 내 머리는 슬퍼해야 되는 일이라고 말해주고 있는데도 웃음이 나는 걸 보면.”


그때 명현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웃고있는 인우의 입가를 그녀의 손으로 살짝 가리면서 엄숙한 음성을 낮게 퍼트렸다.


“슬픈데도 자꾸 웃으면 바보 되요. 그리고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난 바보와는 결혼 안할래요.”


웃고있던 그의 입술이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다물어지면서 인우의 짙은 눈이 명현을 응시했다.


“정말 나와 결혼이라는 걸 할건가?”


명현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면서 그를 향해 충실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상대를 믿고 시도해 보는 거라면서요. 난 여전히 불안해요. 그러나 서인우, 당신은 믿어요. 떨리지만 해 볼게요.”


인우는 자신의 입을 가로막고 있던 명현의 손을 내리더니 그녀에게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나도 윤명현을 믿어. 너 때문에 내가 행복해질 거야. 틀림없이.”


그의 손이 명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작은 입맞춤들을 손길이 닿는 곳마다 뿌려놓았다. 인우는 그가 내민 마지막 손을 잡아준 명현이 대견했다. 사랑의 고백보다도 어쩌면 더 내놓기 힘든 신뢰의 마음까지 명현은 그에게 내놓았다.


‘너의 믿음이 우리 둘을 영원하도록 지켜줄 거다.’


그는 마음속으로 명현에게 그 말을 읊조렸다.


믿음을 준 그녀의 모습은 이제 그의 가슴에 하나의 흔적을 새겨넣고 있었다.


***


“너 요즘 왜 그래? 너답지 않게. 연애라도 하는 녀석이면 내가 이해나 하지. 뭐야? 퍼스트 콜이 아니더라도 오프가 아니면 의국 지키고 있어야 하지 않아? 왜 안 하던 짓 하고 그래.”


1년차들은 밤사이 병실의 콜을 제일 먼저 받아야되는 당직(first call)이 병실이나 응급수술을 들어가고 없는 경우 응급실에서 울리는 콜을 받아야 했다.


병훈은 어젯밤 명현이 응급실 콜을 지키지 못했다는 소식을 출근하면서 듣게되었다. 처음에는 무슨 착각이 있었나 보다하고 확인차 명현을 불러 물어보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되었고 지금까지 그녀의 생활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 설명을 요구했다.


병훈이 알아온 명현은 자신의 오프날도 다른 이들을 위해 기꺼이 연기해줄 정도로 남의 입장을 배려하는 마음이 큰 후배였다.


그런 애가 아무 연락도 없이 병원을 비웠고, 그로 인해 응급실 콜을 받지 못해 다른 사람들을 곤경에 빠트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병훈은 지난밤 동안 병원 내에 없었음을 순순히 인정하고 있는 명현을 야단을 쳐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분명 큰 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죄송합니다.”


단정한 명현의 대답에 병훈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다른 말을 해봐.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 같은 거 말이야.”


결과를 두고 야단인 다른 섹션 치프들과는 달리 이유부터 물어주는 병훈이 못내 고마웠지만 명현은 달리 변명을 찾지 못했다. 어제는 그야말로 도망이었으니까.“


“없습니다.”


다른 사람처럼 변명이라도 하길 바랐다. 그렇다면 살짝 눈을 감아주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라는 말 한마디로 자리를 피할 생각이었는데 병훈은 일자로 입을 닫은 명현을 바라보며 대답을 채근했다.


“야, 윤명현. 너, 정말 이럴래? 너 무슨일 있지? 나중에 그것 때문에 더 큰 사고 치지 말고 지금 자수해서 막아. 뭐야?”


병훈은 허리에 손을 올려놓으며 명현을 다그쳤다.


“걱정하실 일 없습니다. 어제는 그냥 그랬어요.”


표정 없이 말간 눈을 뜨고있는 그녀의 모습에 병훈의 언성이 높아졌다.


“너, 스태프 선생님이 물으셔도 그냥이라고 대답할 수 있어? 사실대로 얘기하면 내가 살려줄게. 너니까. 그렇지 않고 엉터리 같은 말만 자꾸 되풀이하면 나도 너 스태프 선생님께 혼나는 것 못 막아줘. 불행하게도 어제 밤 응급수술이 두 건이나 있었어. 게다가 자고있던 3년차가 응급실에 불려나가 봉합을 했다지.”


“그래도 이유가 없는 건 없는 거예요. 윗년차 선생님들에게는 제가 개인적으로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명현은 눈길을 떨어뜨리며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집, 역시 그녀는 변명은커녕 자신의 실수만 인정할 뿐이었다. 병훈은 포기한 듯 고개를 저었다.


“좋아. 너 한달간 오프 없다. 이의 있어?”


“당연히 없습니다.”


명현은 순순히 대꾸했다.


“얼른 가서 회진 준비해.”


순간적인 이탈의 마음이 명현에게서 쉴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을 빼앗아갔지만 그녀는 아깝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휴식 같은 마음을 오랫동안 주겠다고 그녀의 사랑이 약속을 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그의 눈빛을 바라보며 항상 곁에 있어줄 것을 약속했다. 서로에게 쉼터 같은 사랑이 되어주기를.


***


이주일 후, 정철환 교수의 퇴원 날이었다.


정 교수는 인우의 방을 찾아 그간의 고마움을 전했고 다음 외래 진료일 등을 체크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이십년은 더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허허.”


소탈한 웃음소리를 내는 정 교수의 말에 인우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관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곳에서는 다시 교수님을 뵙고싶지 않습니다.”


인우의 재치에 정 교수는 흐뭇하게 웃음을 지으며 사적인 질문을 털어놓았다.


“서 선생님 같은 분이 왜 아직 결혼을 안하고 계시는지 모르겠군요. 딸내미라도 하나 있다면 당장 사위 삼고 싶은데.”


정 교수는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닌 진심이었다. 보름이 넘는 입원기간 동안, 환자들을 대하는 진지한 모습의 인우를 보고는 연배를 떠나서 잔잔한 감명을 받았던 참이었다.


“언젠가 저와 맺어질 인연과 하게 되겠죠.”


“하하. 맞아요, 맞습니다. 그 인연이라는 건 따로 있는 법이죠. 제 아들놈도 얼마 전에 좋은 인연을 만난 것 같다고 무척이나 설레어하고 있습니다.”


순간 나타나지 않는 떨림이 인우의 눈썹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인우는 저녁회진 때 간혹 만나볼 수 있었던 정 교수의 아들이 관심 이상의 눈빛으로 명현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며칠 전에는 결국 그가 먼저 물었었다.


-아는 사인가?


-그날, 선본 사람이에요.


그건 인우가 경민에 대해서 물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물음이었다. 그것은 대답을 한 명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경민에 관해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드님에게 행운을 빈다고 전해주십시오.”


평온하게 기원해주는 그의 눈동자가 조용히 빛을 내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도 부디 좋은 인연 만나시기를 제가 소원하겠습니다.”


부친인 정 교수의 퇴원을 위해 경민은 병동 입구로 들어섰다. 정 교수의 옆 병실에서 명현이 막 나오고 있는 것이 보이자 따로 찾지 않고 쉽게 만날 수 있어서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민이 느끼는 명현은 위태하게 보이지만 처연한 아름다움이 있었고 약하지만 부러지지 않는 강함이 도드라져 사람을 끌어당기는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여자였다.


자신이 들어 알고있는 그녀의 유년시절은 외롭고 어두웠다. 그런 안타까움조차도 경민은 감싸주고 싶어질 정도로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명현은 자신을 향한 인사말인 것 같아 시선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목소리였다.


“네. 아버님 퇴원 때문에 오셨나 봐요.”


지극히 사무적인 모습이었다. 경민은 명현의 건조하지만 투명한 눈을 모두 가질 듯이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차 한잔하시겠어요? 명현씨에게 할 말이 있는데.”


정 교수의 입원기간 동안 한 번씩 부딪힐 때의 그와 지금의 경민은 전혀 다른 사람의 눈빛을 띄우고 있었다. 뭔가 생각해둔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단단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잠시밖에 내드릴 수 없어요. 그리고 전 여기서도 상관없습니다.”


잠시의 시간밖에는 아무 것도 내 줄게 없다는 듯 명현의 무심한 말투에 경민은 강하게 잘라 말했다.


“아뇨. 여긴 제가 불편하군요. 위쪽에 휴게실이 있던데 거기가 어떻겠습니까?”


“그러시죠. 오분후에 뵙겠습니다.”


명현이 그의 시야에서 어느덧 사라지고 있었다.


***


간간이 의사가운을 입은 그녀에게도 익숙한 얼굴들과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들, 그리고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어울려있는 휴게실의 풍경은 다른 곳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한쪽에 늘어져있는 자판기 음표 판매소가 있었고, 사람들의 손에는 일률적으로 음료가 든 종이컵이 들려있었다.


사람들의 여유로운 행동과 달리 명현은 경민이 자신에게 하고자하는 말이 예상하고 있는 그것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마주하고 앉았다.


약간은 긴장을 한 듯 보이는 경민의 경직된 얼굴을 명현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하세요. 제가 생각하고 있는 내용이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그녀의 음성은 부드러운 듯 들렸지만, 실상 간결하면서 차가웠다.


경민은 알려주고 싶었다. 분명한 선을 긋고있는 그녀의 태도가 상대를 얼마나 무섭게 자극하는지 얘기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자극에서 승리하고 싶은 그의 의지까지도.


“할아버님께 청혼을 넣었습니다.”


명현의 하얀 얼굴이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핏기를 거둬버리고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이내 그녀는 얼굴색 못지 않은 싸늘함으로 경민을 대했다.


“현재까지 제가 알기로는 저에겐 언니나 여동생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명현씨와의 결혼을 말하는 겁니다.”


그에게 어떤 각오라도 숨어있는지 경민의 눈빛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제 의사를 분명히 밝혀 드렸는데도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는 있으시겠죠.”


경민은 말이 보태어 질수록 더욱 당당하게 나타나는 명현의 차가운 아름다움에 급속도로 빠져들고 있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명현씨에게는 현재 사귀고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제 결정입니다.”


명현은 예의를 잃고싶지 않았다. 또 그럴 정도로 그와는 엮어진 부분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 좋아 보이던 첫인상을 최대한 존중해주고 싶었다.


“어떻게 알아보셨는지 몰라도 틀렸어요.”


그러나 그는 명현의 정중함을 변명으로 잘못 이해하고 말았다.


“거짓말이라는 거 압니다. 저를 뿌리치기 위한 방편일 뿐이죠.”


경민이 단호하게 말했다.


거짓말이라는 말에 명현은 더 이상 그의 억지를 들어주지 않기로 했다.


“제가 고작 정경민이라는 남자를 뿌리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세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적어도 제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할 때가 있다면, 그것보다는 훨씬 더 의미가 있는 일일 거예요. 안타깝네요. 즐거운 대답을 들려드리지 못해서. 그래도 아직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또 할아버지께 의논 드려보세요. 다른 방법을 알려주실 테니까.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전 그분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핏줄이에요. 내 피를 뽑아버려서라도 끊고싶은 분일 뿐이죠. 충분히 설득력 있는 대답인 것 같은데…. 부족하신가요?”


그녀의 말은 끊어지지 않고 또박또박 이어졌다. 그리고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차분했다.


명현의 지독한 반감에 경민은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사자의 의견보다 윤 옹의 지지를 너무 의지했던 자신의 실수가 몹시도 신경 쓰였다. 순서를 지켰어야 했는데.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그녀와 조부인 윤 옹 사이에는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의 깊은 분노의 골이 존재하고 있었다.


경민은 지체없이 등을 돌려버리는 명현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뒤돌아 서서 휴게실을 나서고있는 명현은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조부인 윤 옹의 고집은 아들과 며느리의 삶을 흩트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죄스러워 해야했다.


명현은 이젠 자신의 삶까지 흔들고 싶어하는 윤 옹을 향해 망설임 없는 분노를 퍼부었다.


‘할아버지, 전지지 않을 거예요. 당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아요.’


그녀는 입술을 아프게 힘껏 깨물었다.


***


2년차 승수가 부탁한 저널 컨퍼런스 자료들을 챙겨든 은정은 엘리베이터가 빨리 올라오기만 기다리고 서있었다.


B3, B2, B1. '땡‘하고 벨이 울리면서 문이 열리자 은정은 냉큼 발을 집어넣으려고 엘리베이터 안을 쳐다보았다.


멈칫거리던 상체를 바로 세우면서 이미 엘리베이터 안을 비중 있게 차지하고 있는 남자에게 은정은 고개를 꾸벅거리며 인사를 하며 최대한의 거리를 띄웠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래.”


인우는 의학 저널을 잔뜩 껴안고있는 은정을 내려다보며 편안한 대꾸를 해주었다. 인턴이라 어쩔 수 없이 1년차인 명현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같은 여자의 입장이라 제법 사적인 얘기들도 주고받는 것 같았다.


한번씩 명현은 인턴이 들려준 우스운 얘기들을 인우에게 재미있게 전해주곤 했는데, 그 장본인이 바로 지금 자신 옆에 긴장하며 서 있었다. 인우는 그런 은정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복돌이는 잘 있나?”


은정은 자신이 숨을 내뱉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의지대로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을 정도로 놀라있었다. 복돌이 얘기를 어떻게 하늘보다 두배, 세배 높은 스태프가 알고있는지에 대해 은정의 놀란 뇌가 다시 움직임을 시작하며 치밀하게 추측하기 시작했다.


인턴실 동기들에게는 얘기를 했으니 당연히 인턴들은 다 아는 얘기일 테고, 그리고 지금 돌고있는 과에는 레지던트들 중 한둘에게만 말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은 최근 소식을 스태프가 알고있다면 남자들의 수다 세계도 과히 언급을 피하고 싶을 정도로 막강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복돌이는 일주일 전쯤 남자친구가 있는 동기를 달달 볶아서 얻게된 만남의 주인공이었다. 은정이 화가 나서 그 사람을 첫인상대로 이름대신 부르게 된 것인데, 부르다보니 어느새 이름은 생각도 나지 않게 되어버렸다.


동기가 만남을 주성하기 전에 개성이 어떻고 자유로운 영혼이 어쩌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은정은 갇혀 지내는 자신의 불쌍한 영혼을 달래줄 수 있겠구나 하며 되레 희망을 품고 그 피같은 오프날을 바쳤다.


그러나 역시 자유로운 영혼은 많은 이해와 노력과 깊은 사랑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우선 개그프로로 봤던 ‘택아’라는 코너에서 나온 개그맨의 부풀린 파마머리가 은정의 눈을 한가득 채웠다.


그 하나만으로도 은정은 이해의 폭을 최대한으로 키우고 있었고, 상대 남자가 손가락 부분이 없는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내려오지도 않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면서 카페의 아르바이트학생을 ‘언니’하며 부르는 것까지도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난 파인 주스, 그리고 저 언닌 커피.’하면서 주문하는 것을 보고 은정은 먹지도 않은 아침이 쏠리는 것을 참아야 했다.


말투는 얼마나 나긋나긋한지, 자유로운 영혼을 조금이라도 맛보기 위해서 참고있었던 은정은 눈을 질끈 감고 그 자리를 뛰쳐나와야 했다.


그리고 그 후로도 상대 남자는 은정이 급한 병원일 때문에 급히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주선자의 거짓말을 믿고 하루 두세 통이나 자상한 전화를 계속 해대고 있었다.


쿠션감있는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말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은정은 팔을 문지르고 나서야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선생님이 복돌이를 어떻게 아세요?”


어차피 인우도 복돌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아 은정은 두 눈 질끈 감고 궁금증이라도 풀 요량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누가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데…. 물어봐서 불쾌하나?”


은정은 확신했다. 수다와 소문의 위대한 능력이 저 냉정한 메스의 입가를 늘어지게 만들었다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어쩜 살짝 위로 당기기만 했을 뿐인데도 저렇게 멋있는 미소를 만들 수 있는지.


은정은 불공평한 외모를 만든 창조주 이하 부모님 그리고 그 전대 조상님들에게까지 잠시동안 불만스러움을 투덜거려야 했다.


‘이보세요, 당신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완벽하니까 미소 따위와는 친하게 지내지 않아도 되거든요. 아, 생각할수록 화나네, 나쁜 복돌이.“


아침부터 복돌이라는 이름 하나에 기분이 밑으로 한없이 하락하는 은정의 이마에는 굵은 줄이 생겼다.


“아침은 먹었나? 의국에 가서 나눠먹어.”


“감사합니다.”


그때서야 은정은 비워있는 위장을 자극하는 달콤한 냄새를 찾아 손을 내밀었다. 생과일 주스와 따뜻한 빵으로 보이는 내용물이 얌전히 가방 속을 지키고 있었다. 은정은 인우의 인격 단계를 두어칸 올려주면서 감사히 받아들였다.


***


아침 회진 전 치프 가이드를 위해 명현과 병훈은 간호사실 앞에서 차트를 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 은정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엘리베이터에서 함께 내리는 인우와 은정이 보였다.


“선생님, 잘 먹겠습니다.”


인우는 은정의 인사를 눈으로만 받고 방향을 돌리려 했으나 출근길 내내 마음속으로만 그리고 있었던 명현의 모습이 찰나처럼 스쳐지나가자 그의 시선이 그녀를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떼 놓던 걸음을 붙잡았다.


매일 만날 수 있는 공간 안에 있었고 몇 시간씩 수술실에서 함께 할 수도 있지만 인우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꼈다. 그녀의 눈길이 자신에게 와서 부딪치면 손을 뻗어 만지고 싶었고 빠르게 뛰어가는 모습을 볼 때면 불러 세워서 안아주며 잠시 쉬게도 해주고 싶었다.


피곤해 보이는 눈가도 쓸어주면서 사랑한다는 말도 함께 전해주고 싶었다. 인우는 곧 그럴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여유를 찾고는 나머지 걸음을 걸었다.


“선생님, 이거 드시고 하세요.”


뿌듯한 표정의 은정이 스테이션 위에 빵과 주스를 나열해 놓으며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웬 거냐? 어머니 다녀가셨냐? 아니면 혹시 복돌이가?”


은정은 범인을 찾았을 때 형사의 눈처럼 번뜩임을 보이며 병훈에게 날카롭게 물었다.


“치프 선생님이 서인우 선생님께 복돌이 얘기 하셨어요?”


병훈은 반가운 듯 바라보던 빵과 주스에서 눈길을 황급히 떼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놀란 듯 눈이 커질 대로 커진 그의 모습을 날카롭게 살피는 은정이었다.


“내가? 미쳤나? 내가 서인우 선생님과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 하냐? 절대 그런 일은 없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과에는 그런 강심장 없다.”


무슨 그런 험한 소리를 하냐는 듯 병훈은 손까지 내저으며 부인을 해댔다. 하지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은정은 캐내듯 그를 재촉하고 나섰다.


“그럼, 서인우 선생님이 복돌이를 어떻게 아시죠? 엘리베이터 안에서 복돌이 잘 있냐고 물으시던데요?”


은정의 말에 처음에는 놀라는 표정에서 이제는 자못 궁금함이 가득 묻어나는 모습을 한 병훈이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와 동시에 명현의 인상이 순간 잠깐동안 찡그려졌다.


“그래? 그런 말씀 잘 안 하시는데. 정말 선생님이 왜 네 복돌이를 궁금해 하셨을까?”


복돌이 얘기에 빠져있던 은정에게 간호사가 주스와 빵의 기원을 물어왔다.


“아, 서인우 선생님이 과 식구들 먹으라고 주셨어요.”


“지난번에도 사다주시더니, 아시는 분이 가게를 열었나?”


간호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종이 가방의 상호명을 유심히 살폈다.


“뭘 그리 깊이 생각하세요. 먹을 거 앞에 두고. 맛있게 먹고 감사드리면 되지. 은정이 병훈과 명현의 손에 빵을 쥐어주면서 빨리 먹기를 재촉했다.


# 15장


명현은 자정이 넘어서 걸려온 인우와의 전화통화에서 가라앉아 있는 기분을 추스를 겸해서 복돌이 얘기를 그에게 해주었다. 은정이 했던 만큼 재미있게는 하지 못했지만 인우는 한번쯤은 만나보고 싶다는 즐거운 반응을 보여주었다.


남의 얘기는 좀처럼 아는 내색을 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은정에게 복돌이 얘기를 꺼낸걸 보면 만나보고 싶다는 말이 완전히 농담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을 사다줄테니 먹고싶은 걸 말하라고 했을 때, 명현은 새벽 일찍 문을 열어 갓 구운 빵을 내놓는 가게를 들먹이면서 정말 맛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인우의 빌라에서는 제과점이 병원과 반대편에 위치해 있는데도 그는 그곳까지 들르는 수고로움을 한 것 같았다. 명현은 빵을 바라보며 그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가슴까지 훈훈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명현은 오전부터 상태가 안 좋아져 중환자실로 옮겨진 40대 위암 환자를 10분 간격으로 바이탈 사인을 체크하고 소변양도 30분 간격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주위 임파절에도 전이가 있었고 주변의 혈관에도 암세포가 침투해있어 혈관은 위태하게 겨우 제 기능을 하고있는 경우였는데, 수술한 부위의 혈관이 터져 위장 내로 삽입해놓은 튜브를 통해 피를 내놓고 있었다. 그 양도 점점 증가해서 수혈을 하면서 혈액 검사와 가슴 검사를 내보내야 했다.


병훈은 명현에게 환자 옆을 잠시도 비우지 않도록 하고 스태프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중환자실을 나갔다. 1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외과 중환자실로 돌아온 인우는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수술 가능한가요?”


명현은 자신이 봐 왔던 인우의 표정을 생각해보면 대답이 부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아무 것도 읽을 수가 없다면 환자의 상태는 아주 심각했다. 미간이라도 찌푸렸다면 분명 다른 방법을 찾고있는 경우일텐데 지금처럼 고요하게 지켜보기만 할 때는 대체로 며칠 안으로 좋지 않은 결과로 나타나곤 했다.


“계속 지켜봐. 보호자는 밖에 있나?”


명현과 병훈에게 각각의 말을 하고 인우는 중환자실 문을 나섰다.


그가 나가자 바깥의 환자 보호자들은 어떻게 몇 달만이라도 더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인우에게 애원하며 매달렸다.


“지금 현재로는 수술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수술을 들어간다 해도 출혈 부위를 찾아낼지 의문이고 또 흐물거리는 주위 조직들을 봉합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연이은 전신마취를 환자분이 견뎌낼 수 있는 상태가 못됩니다. 이런 경우 수술중 혈관이라도 터져버리면 바로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출혈이 멈추기만을 기다려야 됩니다. 잘될 겁니다.”


인우는 무거운 마음으로 복도를 걸어나왔고 남겨진 병훈은 벽을 의지해서 간신히 서 있는 환자의 보호자에게 세세한 설명을 들려주고 있었다.


명현이 중환자실에 들어온 지 네 시간이 훨씬 지나있었다.


갑자기 간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있는 걸로 봐서는 누군가가 또 생명의 끈을 놓으려 하는 모양이었다.


담당 주치의가 뛰어 들어왔고 전기자극을 주자 환자의 몸이 공중으로 펄쩍 튀어 오르면서 규칙적인 심장 박동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심장은 멈춘 지 4분 이내에 소생술을 실시해야만 뇌 조직이 손상을 입지 않는다. 심장박동이 돌아온 환자의 담당 1년차도 명현처럼 안타까운 마음으로 같이 밤을 새야할 것 같았다.


잠시후 수술이 끝났는지 2년차 승수가 교대를 해주기 위해서 중환자실로 들어왔다.


“두 시간 후에 수술 있으니까 알아서 내려와.”


중환자실 문을 닫고 나오면서 명현은 깊은숨을 들이쉬었다가 참을 수 있을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모든 공기를 다 빼내었다.


도대체 무덤덤해 질 수 없는 곳이라 생각하며 명현은 가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복도를 벗어나자 좀 더 넓은 공간이 나타났고 몇 개의 의자들이 가장자리에 붙어있었다. 저녁 면회 시간을 기다리는 환자 보호자들이 좀 더 환자 가까이에서 그들을 독려하기 위해서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명현은 소리를 내어 헛기침을 약하게 뱉으면서 미안함으로 사람들의 눈을 피하면서 그 자리를 지나치려 했다.


“윤명현, 기다려.”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인우가 수술마스크를 목에 걸은 채로 팔짱을 끼고 명현도 안면이 있는 성형외과 스태프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인우가 명현을 부르자 시선들이 소리나는 곳으로 잠시 모아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명현이 기다리는 사이, 얘기중인 두 사람은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대화를 마무리 짓는 듯 보였다.


“어때?”


인우가 명현이 있는 쪽으로 성큼 다가오면서 환자상태의 궁금함을 물었다.


“출혈양만 조금 줄었어요.”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그녀의 대답에도 인우는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앞의 물음과 연장선에 있는 말처럼 재빨리 명현의 컨디션을 물었다.


“넌?”


“좋아요”


명현은 어깨를 낮게 으쓱하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어제보다 나아졌나?”


어제는 유난히 병실에서 콜이 많이 울리던 날이었다. 환자들에게 밤은 낮보다 훨씬 힘든 시간들이었다. 그 고요한 정적이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어젯밤에는 유독 그런 환자들이 많았던 날이었다.


“아침에 빵 먹고 말끔해졌어요.”


“대여섯명분 아침을 먹이려면 돈을 더 벌던지 해야지. 원.”


그의 너스레에 명현은 풋하고 웃음으로 입술을 터뜨렸고 인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9층의 중환자실에서 6층의 병동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둘은 편안한 일상을 공유하듯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은정이한테 복돌이 얘기했어요?”


조금 전보다는 훨씬 생기가 도는 표정으로 명현이 인우를 올려보았다.


“잘 지내냐고 물어봤지. 왜?”


인우는 걸음을 계속 걸으면서 가볍게 물었다.


“발설자로 치프 선생님이 지목됐거든요. 진짜 만나보고 싶은가 봐요.”


“조금, 호기심 충족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


그 역시 치프인 병훈이 엉뚱하게 범인으로 지목이 되었다는 말에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근데 은정이에게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면 날 죽이려 들 수도 있어요. 미치도록 싫다고 했거든요.”


웃음기가 감도는 명현의 목소리를 잠자코 듣고있던 인우가 슬쩍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면 전화를 받지 말아야지. 자꾸 받아주니까 가능성을 품고 있잖아. 단번에 자르는 건 윤명현이 최강인데. 비법 좀 전수해주지 그래.”


인우가 하는 말에 샐쭉 삐친 것처럼 명현이 손을 잡아 빼자 그의 웃음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 멈춰서 있는 명현과는 달리 인우는 걸음의 속도를 줄이지 않고 앞서 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명현이 작게 말을 이어갔다.


“싫은걸 싫다고 하는데 무슨 비법씩이나요. 물론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싫은 건 내가 더 못 견뎌내니까.”


한 발자국 앞서 걷던 인우의 등이 우뚝 멈추자 뒤따라 내려서는 명현의 걸음도 그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왜요?”


“정말 네 마음도 아팠나? 좀 더 미리 알았더라면 내 마음이 덜 다쳤을 텐데.”


인우와 같은 계단에 서 있게되자 명현의 시선이 위로 향해지면서 그의 지난 상처를 걱정했다.


“그렇게 심했어요? 미안해요. 윤명현 참 못됐네요.”


그러지 않아도 되는 지난 시간의 미안함을 안타깝게 내비치는 명현의 모습에 바라보던 인우의 눈빛이 깊어졌다.


“여기저기 여지를 남기는 것보다 내겐 못된 윤명현이 훨씬 나아. 다 나았으니까, 그런 얼굴 하지마. 수술 팽개치고 도망가고 싶어지니까.”


명현의 손이 다시 인우의 커다란 손안으로 감춰지면서 둘은 숫자를 세듯이 한칸 한칸 걸어 내려갔다.


“언제가 오프야?”


“한 달간 없어요. 도망간 벌이에요.”


계단과 계단이 이어지는 여유 있는 곳이 나타나자 인우는 허리에 손을 얹고 이쪽저쪽을 불안하게 서성거렸다.


“미치겠군. 한달이면 결혼도 할 수 있는 시간인데.”


“말도 안돼요. 한달 안으로 결혼을 어떻게 해요. 더군다나 난 1년차예요.”


명현은 말도 안되는 소리를 너무도 진지하게 하는 인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1년차라는 것을 강조했다.


“할 수 있어. 너 1년차 끝나려면 얼마나 남았는지 알아? 안돼, 그때까지 안 기다려.”


모든 전후 사정을 알고서도 부리는 억지는 어떻게도 설득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낯선 성급함에 명현은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쨌든 한 달은 안되겠네요. 적어도 오프날이 있어야 결혼식이라도 올리지 않겠어요? 나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당직에 치이는 건 싫어요. 아니면 병원 복도에서 해야될 것 같은데. 그것도 괜찮다면….”


방법이라도 찾은 듯 그가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병훈이에게 비는 수밖에 없겠군.”


빈다는 말에 명현의 웃음이 더 커지고 있었다.


“훗, 어떻게요. 무릎꿇고 손바닥 비비면서?”


명현이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미리 단정을 지어버리자 그의 눈썹이 슬쩍 올려졌다.


“못할 것 같아?”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지만 왠지 그라면 또 할 것도 같았다. 그 모습을 언뜻 떠올려보던 명현은 못마땅함에 이마를 살며시 찌푸렸다.


“매일 볼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서둘러요. 그러지말고 조금만 더 있다가 해요.”


“안돼. 오프날 받아둘 테니까 집에 인사드리러 간다고 연락해둬.”


결국은 그의 말을 따라야 될 것 같은 결론에 이르렀지만 명현은 망설이며 다시 한 번 더 그를 설득했다.


“우리집이 어딘지 가족은 누군지 또 나에 대해서도 아는 게 별로 없잖아요. 위험한 생각 안 들어요?”


하지만 그의 자신감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건 가보면 알겠지. 그리고 넌 윤명현이야. 더 알아야 할 게 있나? 너도 나를 모르잖아. 그래서 위험해?”


“아뇨.”


명현은 간결하게 대답함으로 자신의 마음을 대신했다.


***


갑작스러운 호출에 병훈은 가운의 앞자락 단추를 꼼꼼하게 채우면서 의국을 나와 인우의 방이 있는 반대편 복도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간단한 지시는 아닌 것 같았다.


방으로 호출할 정도면 병훈이 집도했던 수술에 관한 충고일 가능성이 제일 컸고 잠시 후에 있을 수술에 대한 질문이 있을 수도 있었다.


수술 전에는 모든 책들을 찾아서 해당되는 수술에 대한 내용은 모두 숙지한 상태로 들어가야 했고 수술후의 결과도 예측할 수 있어야 했다.


병훈은 긴장되어 있는 목을 가다듬으면서 문을 똑똑 소리가 나도록 크게 노크했다.


“부르셨어요, 선생님.”


안으로 들어서는 병훈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잔뜩 굳어있었다.


‘오늘따라 저 멋지구리한 얼굴이 왜 더 차갑게 보이지? 힘내자, 김병훈.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


병훈은 침을 꼴딱 넘기며 인우의 말을 기다렸다.


“김병훈!”


성까지 붙여서 부르는 조용한 음성이 예삿일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병훈은 슬며시 마주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네, 선생님.”


“네게 부탁이 있다.”


침이 꼴깍하고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긴장이 병훈을 덮쳤다. 차라리 평소처럼 직설적으로 자신의 잘못된 점을 지적한다면 속이 편안할 것 같았다.


부탁이라니. 병훈은 말이 떨어지는 인우의 입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 전문의 시험은 통과해야 되는데. 그래야지 개원이라도 할텐데. 여기서 찍히면 안될텐데.’


“윤명현, 오프 이틀만 살려줘.”


처절하게 떨구어져 있던 병훈의 얼굴이 갑자기 위로 들어지면서 턱이 저절로 벌어졌다.


“네?”


“해 줄 거지?”


이게 무슨 일이지? 병훈은 아직 어리둥절함에서 못 헤어나고 있었다.


“명현이 오프를 선생님이 왜?”


멀뚱거리는 병훈에게 인우가 낮게 말했다.


“이유 설명해야 되나? 내가 부탁이라고 했을 텐데.”


‘참, 개인적인 일은 절대 사절이지!’


병훈은 얼른 맞잡고있던 손을 앞으로 내저었다. 그리고 궁금증을 풀지 못한 찜찜한 표정으로 인우의 눈치를 살폈다.


“아, 아닙니다. 혹시 정확한 날짜도 부탁하실 건가요?”


인우는 마냥 조심스러워하고 있는 병훈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되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인우의 방을 나온 병훈은 유추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더하고 빼는 과정을 거쳐서 나름대로 인우와 명현의 관계를 정의 내려 버렸다.


‘뭐야! 내가 윤명현한테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되는 거야?’


순간 병훈은 황당함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


매달 첫째주 목요일 저녁은 모든 스태프와 전공의들이 참여하여 연구 진행 과정과 논문 진척 정도를 검토하여 발전적인 연구방향을 모색하는 리서치 미팅(Research Meeting)을 하게 된다.


명현의 가슴팍에는 오늘 논문 발표를 해야될 병훈의 프리젠테이션 자료들이 프린트물로 부피감있게 가득 안겨있었다. 그것들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들기 위해서 힘을 가한 명현의 팔은 가느다란 핏줄을 평소보다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회의실로 향하는 복도를 중키의 아담한 체격인 병훈이 앞장서 걸었고 마른 체형의 날카로운 인상인 3년차 재환이 병훈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 옆을 걷고 있었다.


명현은 흐트러지는 자료들을 다시 하번 더 추슬러서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 잠시 멈춰 섰다. 그때 갑자기 병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야, 이승수. 명현이가 들고있는거 네가 좀 들어줘.”


자료를 고쳐 안기 위해 자세를 낮추던 명현과 열심히 제 갈 길을 가고있던 승수는 치프의 뜻 모를 명령에 서로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뭐해, 빨랑 안 들어주고.”


병훈은 뒤돌아 서서 눈을 부라리며 고개짓으로 자료를 가리키며 승수를 재촉했다.


“왜 그러세요, 선생님. 저 얼마 전까지 저런 거 뼈빠지게 들었던 놈입니다. 벗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명현을 바라보던 승수는 앓는 소리를 해대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넌 저 가느다란 팔이 불쌍하지도 않냐? 네 튼튼한 팔뚝을 졸 때 턱 괴는데만 쓰면 좀 아깝다는 생각 안 들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쓰리게 아까운데.”


두 남자의 투덕거림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명현은 재빨리 중재를 하고 나서면서 곤란해했다.


“아니에요, 선생님. 제 일인데요. 보기에는 이래도 저 힘세잖아요. 새삼 왜 그러세요.”


명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승수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듯 커지고 있었다.


“거 보세요, 선생님. 자기 일이라잖아요. 설령 제가 들어준다 해도 윤명현이 뺏길 앱니까. 책임감에 밥 말아먹는 앤데. 나중에는 들고싶어도 못 드니까 실컷 들고다니게 놔두세요.”


1년차의 기특함이라 생각했던지 뿌루퉁해 있던 승수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져 보였다.


승수의 그런 모습에 병훈은 가슴을 치며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이구, 답답한 놈. 치프가 시킬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하냐? 내가 아무리 고스톱 한판으로 따낸 치프라 해도 치프는 치프야, 인마. 말 좀 들어.”


승수는 드러내지 않는 이유를 들먹이며 속터져 하는 병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참동안을 명현과 병훈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이, 선생님. 명현이한테 꽂혔구나. 그렇다면 선생님이 직접 들어주시면 되죠. 아, 아니다. 치프 선생님이 그러시면 안되죠. 마땅히, 당연히 제가 들겠습니다. 야, 윤명현. 너 그거 빨리 이리내. 그런데 저 녀석이 넘어가긴 했던 모양이네요. 다들 그렇게 열심히 찍어도 꼼짝도 않더니. 윤명현, 너도 참 취향 독특하다.”


알겠다는 듯 눈 모양을 가늘게 만들고 얼굴에 웃음을 흘리는 승수의 모습에 병훈은 기가 질린 듯 하얗게 안색이 변한 채로 목청을 드높였다.


“뭐? 이 미친놈, 너 누구 죽는 꼴 보고싶어? 내가 명현이한테 꽂긴 뭘 꽂아. 행여 그딴 소리 다른 곳에서 또 해라. 그땐 우리 둘이 다정하게 병풍 뒤에서 향냄새 맡게되는 일이 벌어질 테니.”


승수의 얼토당토않은 짐작에 병훈은 손사래까지 치며 확실한 쐐기를 박아주었다.


농담조로 던진 승수의 대답에 넘치도록 당황해하는 병훈의 모습을 보고 명현은 모든 의미를 파악했다는 듯이 눈동자를 찰랑거렸다.


***


인턴이나 레지던트에게 휴대폰은 생명줄과도 같았다.


병원 이곳저곳을 다녀야되는 명현의 휴대폰은 약간 과장하면 1분 단위로 한번씩 울리고 있었다. 환자를 돌보고, 처방전을 내리고, CT촬영을 부탁하는 중간 중간에도 그녀의 휴대폰은 쉼없이 신호를 주고 있었다.


“네, 윤명현입니다.”


조금은 지친 듯한 목소리였지만, 맑고 분명한 말투였다.


[목소리가 왜 그래. 사진을 빨리 안 찍어주나 보지?]


마치 그녀의 지금 상황을 눈앞에서 보는 듯 하는 인우의 말에 명현은 살며시 웃었다.


“네. 정확하게도 그러네요. 좋은 방법 있으면 알려줘요.”


[일단 거기에 있는 레지던트에게 다가가서 양손으로 목을 힘껏 잡아. 그리고 앞뒤로 흔들면서 말해. 서인우에게 죽고 싶으냐고.]


명현은 영상의학과 레지던트를 슬쩍 쳐다보며 인우가 시키는 동작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웃음밖에 나오지 않은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상상이었다.


“혹시 치프 선생님에게도 그렇게 했어요?”


인우의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며칠동안 자신을 바라보는 병훈의 시선에는 경계심과 호기심 등이 절묘하게 섞여있었다. 그것은 명현에게 그녀를 편안하게 대해 주었던 좋은 선배를 잃은 듯한 아쉬운 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오프 잡았나?]


그는 보채는 아이처럼 어제부터 몇 번을 거듭 물었다.


“아뇨, 아직.”


[왜 아직 이지?]


“그 생각을 못할 만큼 바빴어요.”


바쁜 이유도 있었지만 병훈에게 그녀의 입으로 오프 얘기를 먼저 꺼낼 순 없었다. 그건 병훈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병훈이가 알아서 말해주지 않았나?]


“파르르 떨면서 피하기만 해요.”


그녀에게 오더를 내리면서도 긴장한 얼굴이었던 병훈이 떠올라 명현은 약한 웃음을 살짝 내보냈다.


[훗, 병훈이가 파르르 거려? 무릎은 내가 꿇었는데 지가 왜 떨어.]


명현은 어쩌면 그가 정말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짧은 순간 해보았다.


“그럴 리 없어요. 끙끙대는 얼굴이 안쓰러웠어요.”


[걱정 말고 빨리 오프나 달라고 해.]


부드럽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는 거짓말처럼 명현의 걱정을 가져가 버린 듯했다.


“그럴 게요.”


그로부터 이틀 뒤 명현은 오프날을 받을 수 있었다.


***


명현의 이마높이로 펼쳐진 회색빛 하늘에 붉었던 해의 잔상이 낮게 내려온 구름들과 어우러져 감상의 말조차 떠오르지 않는 아름다운 노을이 펼쳐졌다. 어두워지려는 하늘처럼 날개가 달린 생명들도 부지런한 퍼덕임으로 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노을의 여운이 반사되어 명현의 얼굴빛은 주홍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해질녘 아파트 단지 내를 깔깔거리며 뛰어 다니는 아디들의 모습을 따라 잔잔히 움직였다. 우리는 웃음밖에 지을 줄 몰라요 하는 표정으로 아이들은 지칠 줄도 모르고 요리조리 헤집고 다녔다.


명현은 자신도 저렇게 목놓아 입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웃어본 적이 있었던가에 대해 가라앉아 있는 기억들을 들추어 찬찬히 훑어보았다.


분명코 한번쯤은 가슴에 남아있어야 했음에도 그녀의 기억은 한자락의 웃음도 떠올려 주지 않았다. 달갑지 않은 미소가 입가를 메우게되자 명현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윤명현.”


인우의 그윽한 음성이 그녀를 불렀다.


아파트 단지 내로 천천히 차를 진입시키던 인우는 금방 명현의 모습을 찾아내었다. 그녀는 허리 부위를 벨트로 고정시킨 미색의 폭이 좁은 원피스를 입고는 관리실 옆 화단 근처에 조용히 서 있었다.


특별히 지켜봐야 할 정도의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애틋한 눈빛으로 열심히 좇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에 들어온 명현은 가슴 철렁하도록 하얗고 말갰다. 인우의 마음은 큰 물결은 이루며 넘칠 듯 흔들거렸다.


그의 차가 그녀의 바로 앞까지 가까이 왔음에도 명현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윤명현, 타.”


그가 차창을 내리며 소리를 치자 그때서야 명현이 그를 알아보았다.


“왔어요?”


차문을 열며 명현이 조용히 말을 했다.


“그런 눈빛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보고있으면 퇴근하는 아저씨들이 집으로 들어가지 못해.”


회색의 여름정장을 보기 좋게 차려입은 인우가 나지막하게 벨트를 매고있는 명현을 놀렸다.


“바빴겠네요. 일찍 나오느라.”


그를 향해 소리 없이 미소를 지어주기는 했지만 오늘 그녀는 감출 수 없을 만큼 어두워 보였다.


“조금. 뭐했어?”


명현은 단잠을 깨울까 싶어 인우는 하루종일 전화를 참았었다.


“자다가 잠시 눈뜨고 또 잤어요.”


“시시하군.”


힘있게 뻗은 옆모습은 강렬한 선으로 그려진 듯이 또렷했고 운전을 하고있는 곧고 긴 손가락은 유연하고 섬세해 보였다. 인우를 가만히 살피던 명현은 자신의 손을 핸들을 잡고있는 그의 손위로 가볍게 올려놓으며 품고있던 말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서인우가 보고싶다, 라는 생각도 했죠.”


정면을 주시하고 잇던 인우의 시선이 명현의 쪽으로 기울어지더니 양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운전자가 심장마비 일으키면 본인도 위험하다는 걸 알텐데.”


“시시하다면서요. 내 좌우명이 시시하게는 살지말자 예요.”


인우는 다시 운전을 하느라 앞을 바라보면서도 한 손으로는 명현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럼, 시시하다고만 하면 그런 극약처방이 나오는 건가? 중요한 걸 알려주어 고맙군. 시시한 윤명현.”


응당 재미있는 대꾸를 해주리라 기대를 했지만 정작 명현은 말없이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


“왜 가만히 있어? 기다리고 있는데.”


신호를 받아 정차 중이던 그는 복잡한 생각이 어려있는 듯한 명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놀려먹는 재미는 윤명현이 제일이죠. 자꾸 그러면 나도 놀릴 거예요.”


명현이 그를 은근히 노려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기대하지.”


강 아래와 위를 이어주는 다리에는 퇴근시간이라 차들이 잔뜩 몰려 있었고, 그 틈을 타서 아늑히 스며든 어둠이 다리 위의 불빛들을 강조시켜 주면서 어수선함을 정리시켜 주었다.


수많은 차들은 그들의 쉼을 자유스럽고 무방비 하게 허락하는 곳으로 조금이라도 빨리 닿고싶어하는 마음인 양 브레이크등을 자주 밝혔고, 인우의 손가락도 핸들 위를 톡톡거리면서 정체의 흐름을 신경 쓰여 하고 있었다.


“늦겠군. 전화를 드리는 게 어때?”


예정되었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꼬리를 이은 차량들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인우의 눈이 시간을 확인하면서 명현에게 늦어짐을 알렸으면 했다.


“말할게 있어요. 지금 우리가 가고있는 집은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허울에 불과해요. 느끼고 있었겠지만 내가 사랑을 묶어버린 곳이기도 하고 벗어버리려고 몸부림쳤던 껍질의 본체이기도 하죠. 혹시 따뜻한 곳을 기대했던 거라면 미안하게 생각해요. 또 그런곳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내 마음은… 아파요.”


명현은 차안에 머무는 공기처럼 투명하고 조용했다.


앞만을 바라보면서 그에게 줄 수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인우는 곧은 시선을 돌리면서 명현의 손을 그의 손가락에 단단히 얽히게 잡으면서 그녀의 손끝을 어루만져 주었다.


“미안해 할 것 없어. 난 내가 보지 못한 윤명현의 지난 흔적들만이 궁금할 뿐이니까.”


단지 그것뿐이었다.


***


고택의 한쪽 담장은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들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함께 보낸 세월을 말해주었고, 대문을 세우고있는 굵은 기둥들은 집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위엄을 보이며 우람했다. 거기에 기와를 이은 지붕은 하늘의 기운을 받아들이려는 듯 고아하게 삐쳐져 그윽한 운치를 자아내어 고택의 격치 품격과 운치를 한층 더 높여주고 있었다.


우두커니 한곳만을 쳐다보고 있는 명현의 침묵을 인우는 잠시동안 지켜봐 주었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무거움과 힘든 기억을 일깨워주는 곳이기에, 열리면 당연히 들어가는 다른 대문들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이었다.


“들어가자.”


그의 재촉에도 명현은 꼼짝도 하지 않고 한참을 더 눈앞의 거대한 기와집을 서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내게로 오는 길의 끝이라고 생각해.”


망설임으로 주춤거리는 명현이 안쓰러워서 인우는 그녀의 뺨에 가만히 손을 대며 말했다.


그가 잡아주는 손에 지그시 압력을 가하며 명현은 대문을 향하여 걸음을 떼었다.


“확실한 건 나 혼자 넘을 때보다 나쁘지 않아요.”


두 사람이 대문을 지나 중문채로 들어서자 박씨 아주머니가 앞치마를 두른 채로 황급히 뛰어나오며 둘을 조심스럽게 맞아주었다.


“아이구, 어서 오세요. 귀한 손이신데 얼른 들어가세요. 덥지? 시간될때 전화라도 하면 내가 먹을 거 챙겨다줄 수 있는데 어찌 그리도….”


박씨는 인우를 의식해서인지 말끝을 잇지 못했다.


안채 문이 열리면서 대청마루에서 뜰층계 아래로 내려서고 있던 성균이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서 안뜰의 중간까지 빠르게 걸어나왔다. 그 뒤로 조용한 움직임의 석현모의 옷차림도 보였다.


여느 집과 다름없는 편안한 인상의 중년 부부였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의 삼가는 태도로 명현을 대하는 걸로 봐서 그녀와 부친과의 관계가 매끄럽지 않음을 인우는 느낄 수 있었다.


“어서 오시게. 너도 왔니?”


보기 좋게 진한 눈썹이 중년의 얼굴을 귀함이 남아있는 청년의 동안처럼 깨끗하게 보이게 했고 약간은 마른 듯한 몸집에서는 고지식함과 기품이 함께 배여있었다.


그의 옆 한 발짝 뒤에 서 있는 중년 여인은 두 손을 치마 근처에 모아 쥐고 깍듯한 태도로 손님을 맞았다. 선뜻 명현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여인의 눈은 이미 물기로 눅눅해져 있었다.


인우는 명현에게서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그도 묻지 않았다. 이 불편한 관계들은 아마도 그가 보게된 그녀의 첫 번째 흔적인 것 같았다.


“명현이에게 할아버지가 계시네. 먼저 인사를 드리겠나?”


조용한 음성으로 성균은 인우에게 순서를 일러주었다. 인우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명현과 함께 지금까지 지나왔던 문들과는 크기와 높이가 다른 아담한 문을 통과했다.


윤 옹이 기거하는 뒤채의 뜰에는 야산에서 흘러들어 온 물줄기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수로를 따라 졸졸거리며 맑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좁다란 쪽마루 위에는 밤이라 닫혀진 하얀 방문에서 투과되어 나온 빛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명현입니다.”


공손하게 문 앞에서 이름을 말하는 명현의 모습은 고고한 여인의 자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흠….”


짧은 허락의 기척을 들은 인우와 명현은 마루 위를 지나 종이가 곱게 발려진 문을 소리 없이 열고 들어갔다.


뒤채는 안채와 다른 곳보다는 천장이 낮은 편이라 키가 큰 인우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높이의 영유가 없어 불편해 보였다. 그렇게 커다랗게 서있는 인우를 바라보는 윤 옹의 눈길은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은 듯 보였다.


인우가 큰절을 준비하며 예를 올리자 저번과는 달리 명현은 간단한 형식의 절을 하고는 윤 옹의 찌푸려져 있는 시선을 받아내었다.


“앉아라. 밖에서 나돌더니 서투른 연애짓만 했나 보구나.”


윤 옹이 안광에 힘을 주면서 마주 앉아있는 둘을 노려보면서 무안을 주었지만 인우의 감정이 들어있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가 곧이어 흘러나왔다.


“다행히 저도 서툴러서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인우는 윤 옹 앞에 반듯하게 무릎을 꿇은 채 공손하게 시선을 조금 아래로 떨어뜨렸다.


백모(白毛)의 수가 훨씬 많은 윤 옹의 수염과 눈썹이 성을 내는 듯이 떨렸다. 노인의 눈빛이라기엔 너무도 형형하게 빛나고있는 윤 옹의 눈은 공손히 눈길을 부딪치고 있는 인우를 찬찬히 고루 살펴보고 있었다.


자신감 있고 당당해 보였지만 어깨에 힘은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말투가 낮고 조용한 것은 진중한 성격임이 틀림없었고 마음자리 굳어 보이는 깊은 눈매가 제 식구 건사는 확실하게 하게끔 보였다.


“어흠, 나는 저 아이를 집안에서 뻗어나간 가지까지 잘 알고 지내던 집안으로 성혼시킬 준비를 하고있었네. 혼인이란 그 윗대부터 내려오는 집안의 가풍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하는 게 아니지. 그쪽 어른들의 인품에 대해서나 가풍 또한 전혀 알지 못한 채 저 아이를 허락할 순 없어. 저 딴에야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대대로 믿을 수 있는 집안에다 저 애를 맡길 생각이니 그리 알도록 하게.”


흔들림 없는 윤 옹의 대답에 명현은 관망하듯 말을 숨겼고 인우는 어떤 감정이나 생각을 품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윤 옹을 마주 대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희 부모님의 인품 때문에 제 결혼이 어려울 거라고는 지금까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키려고 애쓰는 상식을 넘지 않는 선에서 정직하게 생활해 오셨고,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 늘 말씀하시며 아들들을 키우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조부모님들 께서는 부부금슬이 유난히 다정하셨고 부모님들께서도 아직 그러하신 걸 보면 저희 집안의 가풍 또한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추수(秋水) 가을철의 맑은 물 같은 눈맵시로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밝히는 인우의 태도에 굳어져있던 윤 옹의 턱이 처음보다는 부드러운 선으로 둥글어지고 있었다.


“그래? 그럼 자네에 대해서 말해보게. 저 애에게 내 들은 게 하나도 없으니.”


명현은 자신에게 몰아붙이듯이 계속되는 윤 옹의 배려 없는 질문에 감정을 돋운 목소리로 뾰족이 쏘아댔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그 의사 나부랭이예요.”


대립관계에 있던 두 남자의 시선이 갑작스런 대답을 게워내는 명현에게로 향해졌고 노한 윤 옹은 급기야 앞에 놓아진 오래된 서안을 소리나게 내리쳤다.


“네, 이놈! 버르장머리없이 이 무슨 짓이냐.”


호통소리로 인해 윤 옹의 수염은 오래도록 그 떨림이 계속 되었다.


“할아버지가 뱉으신 말씀이세요.”


지지 않겠다는 듯이 세차게 대드는 명현의 손위로 인우의 따뜻한 손이 가만히 와 닿았다. 인우는 점점 거세 지고 있는 명현의 감정을 진정 시켜주면서 윤 옹의 물음에 대답했다.


“저는 서인우라고 합니다. 지금 현재 세진병원 일반외과 전문의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크게 아팠던 병력도 없고 현재 지니고있는 병도 없습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제게는 이렇다하게 내세울만한 대의도 없습니다. 저 또한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상식을 지키기 위해서 간신히 노력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높지도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공손한 음성에는 그동안의 가정교육을 엿볼 수 있었고 거기에는 자신감이라는 것도 배어있었다.


“간신히 노력하며 산다는 사람치고는 너무 당당한 거 아닌가. 어흠, 양친께서 평생 어떤 일을 하셨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명현의 거센 항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굽힘 없어 보이는 단단한 인우의 태도 때문이었는지 윤 옹의 물음에는 한결 마음 쓰임이 엿보였다.


“아버지께서도 의사십니다. 어머니께서는 대외적으로 음악 활동을 하셨으나 요즈음은 그저 소일 삼으실 정도입니다. 그리고 밑으로 미술공부를 하고있는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윤 옹의 날카로운 노안이 인우의 얼굴을 한군데도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살폈다.


평소 봐왔던 정교수의 아들과 혼인을 성사시켰으면 하고 내심 기다리던 차에, 마침 정교수 쪽에서 청혼을 해주었다. 흐뭇함으로 결혼준비를 시키기 위해 명현을 집으로 불러들일 생각을 하고있었다.


그러나 명현에게 다른 상대가 있다는 이유로 청혼은 취소되었고, 윤 옹은 그 화를 누르기 힘들었었다. 인사를 온다는 연락에 마음속으로 혼을 내주리라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무릎을 맞대고 대답하는 음성을 들어보니 무어라 꼬투리 잡을만한게 없었다. 당당하면서도 여유로운 모습이 오히려 윤 옹의 마음에 흡족했다.


“허음, 됐네. 나머지는 저 아이 부모와 상의하도록 하게.”


윤 옹은 할말을 마친 듯 이미 펼쳐져있는 책으로 눈을 내렸다. 그리고 명현에게만 들리는 소리로 그녀의 가슴에 무거운 돌 하나를 어김없이 또 얹어놓았다.


“잊지말아라. 네가 부인하고 싶어도 넌 윤씨다.”


맺혀있던 숨이 터지면서 명현의 눈이 지그시 감겼다가 떠졌다. 차갑던 표정마저 그녀의 얼굴에서 사라져 버렸다.


“죽으면 되겠네요. 그걸 버리려면.”


다행히도 한발  앞서나간 인우는 듣지 못한 것 같았지만 앉은 자세로 죽음을 꺼내놓는 손녀를 치받아 보고있는 윤 옹의 얼굴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조금전보다 더 죄여진 상태로 마루를 내려와 그에게로 다가오는 명현을 향해 인우는 나직이 물었다.


“그렇게 힘들었나?”


“늘 힘들죠. 내겐 받아들일 수 없는 분이시니.”


명현의 가장 큰 흔적을 보게된 인우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있는 자신의 손에 힘이 들어감을 느꼈다.


# 16장


안채의 대청마루가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성균은 뒤채 쪽에서 모습을 보이는 인우와 명현을 확인하고는 얼른 마당으로 내려섰다.


“차 한잔하고 가시게. 안 되겠니?”


따로 묻는 말이었지만 의미는 같았다. 명현의 눈이 성균을 향했다. 무심한 눈빛이었지만 인우는 그녀가 떨고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이 미워요. 당신의 딸로 태어난 나도 미워요. 당신은 좀 더 강했어야 했어요. 아버지.’


안타까움과 아픔으로 떨리고있는 명현의 하얀 손을 인우의 커다란 손이 살짝 움켜쥐었다.


“죄송합니다. 사실은 병원일을 다 끝내지 못하고 왔습니다. 지켜봐야 될 위급한 환자도 있고해서 오늘은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없을 듯합니다. 하지만 다음엔 꼭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성균은 지쳐 보이는 딸을 조금은 쉬게 해서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쉽게 허락하지 않은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성균은 붙잡고싶은 마음을 보였다.


성균은 오늘도 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는 것에만 의미를 두고 그 곁은 가리듯이 서 있는 듬직한 나무를 향해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는 꼭 그렇게 하도록 하시게. 건강 조심해라.”


성균은 무언으로 인우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난 그 아이에게 사랑을 주지 못했네. 부디 많은 사랑을 주게나.’


어린 딸이 뿌리치고 거부한다고 해서 그냥 지켜만 본 자신이, 성균은 원망스럽고 후회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아줬었어야 했는데….


모든 기운을 다 소모해 버렸는지 명현은 차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꽃대롱의 흔들림처럼 차가 움직이는 대로 그녀의 머리도 힘없이 창문에 부딪치고 있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있었다면 덜 안타까워 보였을 텐데 그녀의 눈꺼풀은 한동안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작은 깜박임조차도 없었다.


“윤명현.”


인우는 자신이 느낀 걱정들을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게 명현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우는 정면에서 시선을 잠시 돌리고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명현은 입술뿐만 아니라 눈빛으로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목소리가 강하게 흘러나왔다.


“대답해. 날 위해서 대답해봐.”


그러고도 잠시 더 있은 후 명현은 겨우 입을 열어 주었다.


“네.”


“착하군. 창문에 그렇게 머리가 쿵쿵 부딪치는데도 내버려두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야. 나도 바보와는 결혼하기 싫어.”


“네.”


명현은 눈을 감지도 돌리지도 않은 채 최소의 사고(思考)로 인우를 위한 대답만을 해주었다. 그런 명현을 위해 인우는 언제나 해주어도 모자란 말을 부드럽게 내뱉었다.


“널 사랑해.”


“네.”


그 말에 안심한 듯 명현의 무거운 속눈썹이 조금씩 내려왔다.


그의 차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물기로 뭉쳐진 속눈썹을 내린 채로 명현은 얕은 숨을 쉬며 잠들어 있었다.


***


토닥거리는 듯한 차의 흔들림이 사라졌는데도 명현의 잠은 쉬 깨어지지 않았다. 인우는 명현의 치마위로 곱게 개켜져있는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어주며 드러나 있는 가녀린 팔도 함께 쓸어주었다.


차안의 냉방 때문이었는지 명현의 팔은 싸늘함을 넘어 한기가 느껴질 정도여서 인우는 손을 들어 명현의 노출되어있는 피부를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려 주었다. 타인의 체온이 살갗에 닿아서인지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지면서 속눈썹이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다왔어.”


“그런가 보네요.”


“무조건 잘 자는군.”


명현은 힘있게 밀어 올리지 못하는 눈꺼풀을 손가락의 도움으로 억지로라도 떼어놓겠다는 듯이 눈 주위를 오랫동안 비벼댔다.


“누구 옆에서는 우습게도 그래요. 아주 잘 자게되죠. 금방 스르르….”


눈가를 연신 문지르면서 그녀는 인우의 마음을 놓이게 만드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아, 어렵다. 내 몸에 달린 내 눈인데 왜 이렇게 안 떠지는 건지. 나 여기 한 대만 때려줄래요?”


창문에 기대어져 있는 반대편 뺨을 인우쪽으로 내밀면서 명현은 그의 손을 더듬거리며 찾아서 자신의 볼에 가져와 대었다.


대부분의 경우 타인의 잠을 깨워야 할 때는 차가움의 충격을 이용해서 섬뜩한 놀라움으로 성공을 일궈내곤 하지만 명현은 그 반대의 방법도 아주 훌륭하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 수가 있었다.


서늘함에 차가워진 뺨으로 적당히 데워진 인우의 손이 느껴지자 어둡고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박하향이 퍼지듯 개운해져 오는 것 같았다.


“내가 널 때려주면 넌 뭘 해줄 거지? 내게는 무척이나 힘든 일인데.”


풍성한 속눈썹이 길게 내려져 눈동자를 가린 채 그를 향해 자신의 뺨을 내밀며 엉뚱한 제의를 하는 명현을 인우는 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옛날 얘기해주면서 재워줄게요. 빨리 때려요.”


이런 순간에 그에게 다른 것을 요구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꽃잎이 떨어진 것 같은 명현의 입술을 그가 단번에 들이마셔 버리자 그의 손을 잡고있던 명현의 손은 갑작스러운 입맞춤으로 힘이 실어졌고 스스로의 의지로 뜨지 못한 눈꺼풀은 살며시 위로 올려졌다.


인우가 그의 방법대로 잠을 깨운 것이었다. 떨어진 명현의 눈동자에는 몹시도 검어진 그의 눈만이 하나 가득 이었다. 명현은 고개를 옆으로 롤리면서 그의 손을 자신의 얼굴에서 살짝 떼어내었다.


“이건 반칙이에요. 옛날 얘기는 없어요.”


반짝거리는 빛이 다시 피어오른 듯 맑아져 있는 명현을 보자 그는 웃어주며 명현의 이마를 손가락을 이용해 가볍게 튕겨주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함께 자자고 애끓게 부탁을 하는데 어떤 남자가 그 예쁜 입술을 그냥 두지? 안 그래, 윤명현.”


“그런 의미와는 달라요.”


“내겐 같아.”


잠시 떨어졌던 그의 입술이 명현의 귓가를 가만히 지분거리며 그의 숨결을 불어넣자 그녀는 한숨 같은 숨을 내쉬며 몸서리를 쳐댔다.


“오늘밤 난 아마도 아플 거예요.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래서 서인우가 필요할 것 같았어요. 이젠 혼자서는 아플 자신이 없어요.”


그녀의 음성은 가슴이 아릿하도록 서글프게 들렸다.


그가 필요하다는 말 한마디에 인우의 손길이 한번 퉁겼던 이마를 살짝 매만졌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듯 더없이 부드럽고 소중하게.


“좋아, 간호도 해줄 테니 옛날 얘기 취소는 없던 걸로 해.”


“실망할 수도 있어요. 재미없는 얘기라.”


명현의 말에도 그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감질나듯 조금씩 그에게 보여주는 그 작은 부분이라도 인우는 공유하고 싶은 욕망이 들었다.


***


욕실 안은 한 묶음의 안개꽃 같았다. 더운 김이 아래에서 위로 실비처럼 오르면서 둘만의 공간 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도 남자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때 절실하게 했던 적이 있었어요. 이런 단단하고 넓은 어깨를 못내 가지고 싶어했죠. 훗, 우습게도 말이에요.”


부드러운 점막 같은 물을 사이에 두고 인우는 명현의 가슴에 등을 기대었다. 명현은 그의 어깨와 목덜미를 눌러 딱딱해진 곳을 풀어주면서 터무니없었던 지난 소원을 말해주었다.


그때는 정말로 너무나 간절한 바람이었는데 소리내어 말을 하다 보니 우습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끔찍한 바람이었군.”


지그시 반복되는 명현의 손길에 그는 눈을 감으면서 나른한 목소리를 내었다. 명현은 욕조 밖으로 빠져나온 그의 팔에 따뜻한 물을 흘려주면서 조용히 얘기를 들려주었다.


“옛날에 한 여자가 있었어요. 예뻤어요. 꽃처럼. 부모님과 형제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아주 행복하게 자랐죠. 그러다 당연히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어요. 사랑으로 시작된 결혼은 아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여잔 남편에게서 사랑을 느꼈고 그 결실로 아이도 생겨났어요. 여자는 행복했었나 봐요.”


마치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잠시 옛 기억의 감정 때문인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러나 여자의 행복은 길지가 않았어요. 예정일보다 이른 조산으로 딸을 얻긴 했지만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슬픈 사실을 가지게 되었고, 여자의 시댁에서는 그 사실을 도저히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아들이 필요했던 거죠. 그리고 딸이 태어난 다음해 여자의 남편에게는 아들이 생겨났어요. 여자는 용서할 수 없었나 봐요. 그러면서 아파했죠. 자신의 지나간 행복이 아팠고, 자신만을 빼 닮은 딸이 아팠고, 남편의 집을 떠받들고 있는 나무기둥을 보는 것조차도 아파했어요. 그러다가 어느날 죽었어요. 스스로 세상을 버렸죠. 어린 딸을 혼자 두고.”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가 끝나면서 감겨져있던 인우의 눈도 떠졌다.


오래된 상처를 내보이는 중간에도 끊이지 않던 명현의 손길은 인우가 그녀를 그의 품쪽으로 끌어당기면서 멈춰졌다.


명현의 눈에는 이슬이 없었다. 일단 인우가 겉으로 들여다보는 얼굴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담금질로 저렇게 담담한 표정을 만들었을 지는 몰라도 그녀의 마음속은 아직도 시뻘건 쇳물이 고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 윤명현이 울 때는 누가 달래주었지?”


가슴을 짓누르는 아픈 상처였을 것이다. 인우는 어린 그녀의 눈망울을 안타까워하며 명현의 눈가를 쓸어주었다.


“울었을 것 같아요?”


쓴맛을 넘기지 못하고 머금고 있든 명현의 미소는 씁쓸해 보였다.


인우의 손이 그녀의 입술 자락을 모양대로 천천히 그려나가자 비로소 명현의 눈에서 맑은 눈물 줄기가 빠르게 흘러내렸다.


“그땐 지금처럼 울보가 아니었어요. 내가 귀찮아 한다는 걸 알았는지 어느 순간 말라버렸나 봐요. 눈에서 물같은게 흐르는데 안 닦을 수도 없고…. 성가셔했죠. 그래서 마르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날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이따위 것은 제발 가져가 달라고.”


그녀의 담담한 말속에 함축된 아픔과 상처가 고스란히 인우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울지 않기 위해서 어린 그녀가 빌었을 기도를 생각하니 그는 가슴이 짓눌러지는 듯한 쓰라림으로 먹먹해졌다.


“그래서 눈물을 보내버린 대신으로 입술을 깨물게 되었나 보군. 네 입술이 아파 보여. 눈물이 다시 찾아왔으니 이제 이걸 보내버려.”


명현의 입술에는 항상 핏망울이 남아있었다. 인우는 첫 만남이 있었던 그날, 붉어져있는 명현의 입술을 보고 미친 듯이 날뛴 자신이 떠오르자 머쓱함에 날카로운 눈매가 절로 찌푸려졌다.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나 잘 풀리지 않는 일에 집중할 때, 그리고 화가 났을 때 등 명현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게다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자신의 피부였음에도 있는 힘껏 깨무는 것 같았다.


인우는 손으로 그려내던 그녀의 입술로 자신의 얼굴을 내렸다. 그의 더운 입술이 오늘도 여지없이 붉은 점을 만들어 버린 명현의 입술을 부드럽게 타이르듯 빨아들였다.


윤 옹의 방을 나올 때 이미 그녀의 입술은 터져있었던 것 같았다.


“아….”


명현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욕실을 울렸다.


인우는 그녀의 척추를 느긋하게 쓸어주면서 자신의 품으로 명현을 힘껏 끌어안았다.


허리가 휘어지도록 안겨진 명현은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대로 자신의 몸을 내맡겼다. 탐스러운 그녀의 가슴이 그에게 뭉클하게 맞닿았다. 상처난 명현의 입술을 쓸어주던 입맞춤은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들이 부딪혀오면서 뜨거운 불길이 일었다.


인우의 입술이 조금씩 그녀의 고운 목선을 따라 내려와 심장과 함께 맥박이 뛰는 곳을 이로 살짝 건드리면서 자극했다.


“안돼….”


분명 그만두게 해야 되는데도 애를 태우는 듯한 그의 애무에 명현은 끝까지 말을 맺지 못했다. 또 자국이 남을텐데.


그러다 그의 입술은 좀더 아래로 향하면서 말캉한 살들이 모여있는 명현의 젖가슴을 입안 가득 머금었다. 그의 뜨거운 입속으로 그녀의 가슴이 깊게 빨려 들어갈수록 명현의 허리는 조금씩 뒤로 젖혀졌다.


“하….”


촉촉해진 그녀의 유두가 그의 혀끝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를 끌어당기고 싶은 마음에 명현은 자신의 가슴을 탐하고있는 인우의 얼굴을 연신 쓸어 내렸다.


“어서요….”


그녀의 고혹적인 신음소리는 인우의 참을성을 앗아가 버렸다.


몰아치던 강한 열기가 명현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하자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가 인우의 허리에 둘러지면서 둘은 하나의 모습으로 서로를 열어주었다.


그는 뜨거웠다. 그 뜨거움을 핏줄기를 타고 그녀의 온몸을 휘젓고 다녔다.


“하아, 아….”


명현은 거세게 흔들리는 몸을 따라 몰랐던 천연의 감각들이 터져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배어져 나오는 신음을 간신히 흘려내는 입술을 인우가 힘차게 흡입하면서 입술 안의 속살을 탐했다.


그러자 명현은 그의 목을 휘감아 안으며 모든 소리를 토해내었고 또한 모든 소리를 잃어버렸다.


“행복해져라, 윤명현. 다른 이들이 질투할 만큼 행복해라. 내 곁에서.”


그의 목소리가 가물거렸다. 그러겠다고 대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흐려지는 의식사이로 고요한 눈빛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


커다란 목욕수건을 애벌레처럼 두른 채 명현은 잠들어 있었다.


인우의 팔베개를 높다는 이유로 빼버리더니 그의 겨드랑 아래서 아이처럼 엎드려 깊은 휴식에 들어있었다.


젖어있던 머리칼은 군데군데 제멋대로 뻗어져서 말라있었고 단정하게 깎여진 손톱들이 얼굴 높이까지 올라와 볼을 건드렸다. 인우는 정확한 뼈의 모양을 드러내고 있는 쇄골을 삼가듯 어루만지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또 한소리 듣겠군.”


쇄골 위쪽으로 실핏줄들이 터져 붉게 무리 지어져 있는 자국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깨어나서 보게된다면 한참을 안절부절못할게 틀림없었다. 인우는 명현의 눈 흘김을 고스란히 감내하리라 마음먹었다.


인우는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출근전 데워진 우유라도 한잔 먹이기 위해서는 지금 깨워야했다. 인우는 차마 그녀의 얇은 어깨를 흔들 수가 없어 볼을 톡톡거렸다. 귀찮은 모양인지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려버려 그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했다.


자신 쪽으로 남아있던 손을 들어 손가락을 하나씩 깨물어버렸다. 처음엔 미동도 없던 그녀의 얼굴이 차례가 늘어날수록 점차 찡그려지더니 그의 입가에 있는 손끝을 빼내려 힘을 주며 움찍댔다.


여전히 눈은 뜨지 못하자 인우는 그녀의 새끼손가락을 힘주어 깨물었다.


“나빠요.”


한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일어나 앉으며 명현은 깨물어진 손가락을 위 아래로 흔들어 틀었다. 그녀의 뻗쳐진 머리칼을 헝클어대며 인우는 그윽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볼만하군. 남겨두고 싶을 정도로.”


그의 말뜻을 이해한 듯 명현은 손으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두어번 손길을 주는 듯하더니, 포기를 했는지 이내 그만둬 버렸다.


“벌써 다 봤을 테고 놀림도 당했으니 그만할래요.”


“좋은 생각이야. 포기하는 게 나아. 그렇지 않으면 지각이란 걸 하게 될 테니까.”


명현이 침대 머리맡에 놓인 시계로 팔을 뻗어 그녀의 코앞까지 바짝 당겨서 시간을 확인하자 인우의 눈썹이 이마 쪽으로 비켜 올려졌다.


“저 정도인데도 정확하게 보이지 않나 보지? 그럼 여기 앉은 나는 보이나?”


새삼 그녀의 시력이 의심스러웠다. 명현의 눈이 점점 좁아지면서 인우를 흘겨보더니 그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여긴 이마네요. 이건 눈, 코, 입 그리고 귀. 정확하죠?”


명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일일이 그 위치를 확인하듯 쓰다듬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으쓱대었다.


“기가 막히는군. 수술시켜야 되겠어. 솔직히 다른 사람들과 섞여있으면 서인우 못 찾지 않나?”


명현은 살포시 웃음지으며 그 사실을 인정하는 듯했고 인우는 걱정스러움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걱정 말아요. 서인우는 알아보니까. 검증을 거친 사실이니까 안심해도 되요. 가운입고 있으면 모두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누구는 키 때문에 단번에 알겠더라구요. 그래서 다행으로 생각해요. 키가 커줘서 고마워요.”


명현의 대답에 인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존재를 다만 키라는 잣대로 안다니.


“오히려 내 쪽에서 고맙군. 그렇게 라도 알아봐 준다니. 수술할 생각 없어?”


“없어요. 흐린 게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요. 싫어하는걸 또렷하게 보는 잔인한 짓은 하고싶지 않아요. 이해 안되겠지만 흐림의 미학을 포기할 순 없어요.”


더 이상 강요할 마음이 없어진 인우는 명현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놓아주었다.


“좋아, 흐림의 미학 포기하지마. 하지만 지금은 씻어.”


아쉽지만 인우는 명현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고는 침대를 벗어났다.


***


블라우스의 제일 높은 곳의 단추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차곡차곡 채워놓은 모습이 흡사 쇼윈도의 마네킹이 앉아있는 것 같았다.


늘씬한 목이라 답답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청량한 목덜미가 더워하지는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샤워를 하고 나온 후부터 차에 오를 때까지 명현은 ‘이럴 순 없어’를 반복적으로 읊어댔다.


“덥겠군. 하나 정도는 풀어도 보이지 않아.”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면서 인우는 그녀의 목 부분 단추를 열어주려 했다. 그의 손가락에 툭하는 단추의 파열음이 느껴지면서 명현의 목은 시원함의 자유를 찾은 듯했다. 꼿꼿한 마네킹에서 살아있는 그의 윤명현으로 돌아온 것 같아 인우는 만족스러웠다.


“수술방에서는 꼼짝없이 드러날 거예요.”


명현은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인우를 노려보며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오늘 수술 없어.”


“1년차는 다른 파트 지원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내일은 더 붉어져 있을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완벽하게 감출 수 없다는 걸 인정했는지 그녀의 얼굴에는 체념의 빛이 어렸다. 어느새 익숙한 장소에 차는 주차되었고 명현은 벨트를 푸는 인우의 손을 그녀의 손바닥으로 살며시 눌렀다.


“나부터 먼저 올라갈게요. 오분만 있다가 와요. 싫어하는 거 알지만 오늘은 그렇게 해요.”


“이유를 말해봐.”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는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보였다. 대충 짐작하고 있는 이유가 있긴 하지만 인우는 그녀에게서 명확한 이유를 듣고싶었다.


“쭈뼛거려질까봐 그래요. 나는 그렇지 않겠다 마음을 먹어도 아마 조금은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될 것 같아서 그래요. 단지 그게 싫을 뿐이에요.”


그래봐야 그녀 스스로만이 느낄 수 있는 미미한 감정의 변화일텐데도 명현은 그 조차도 용납할 수 없어했다. 자신의 사랑에 소량이라도 다른 불순물이 섞이게 될까봐 그녀는 조심하려했고 그럴 수 있는 경우도 만들지 않으려 했다.


“좋아. 윤명현의 순수(純粹) 결정(結晶)의 사랑을 위해 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는 것은 잠시 연기하도록 하지. 먼저 올라가.”


이해와 인정에 대한 고마움으로 해사한 웃음을 머금은 명현의 입술이 그의 입술 위를 연하게 스쳐 지나갔다. 어떤 다른 행위가 없더라도 지금은 그 감촉만으로도 충분히 그를 자극했다. 촉촉하고 보드라운 그 느낌만으로도.


“상이예요.”


팔랑거리는 나비의 움직임 같았다. 사뿐사뿐 눈앞에서 점차 멀어지는 그녀를 그의 눈은 마지막 움직임까지 쫓고있었다. 울지 못했던 어린 명현의 눈망울이 떠올랐고 사랑하는 이의 따뜻한 손끝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그녀의 아름다운 누도 떠올랐다.


메말라서 자신은 아무 것도 줄 수 없다고 그에게 말했었다. 인우는 넘치는 자신의 사랑으로 그녀의 마음까지 채워주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가 채워주어야 할 사랑의 공백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녀의 순수한 사랑은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당당하려 했고 숨김없이 솔직하려 했다. 그리고 둘의 사랑을 확인함에 있어서는 그보다도 더 뜨거운 열정으로 다가와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었다.


분명 그녀의 차가움에 끌렸었다고 생각했다. 얼음을 닮은 투명한 눈빛이 그의 갈증을 도발시키는 거라 믿었었다. 그러나 그녀의 투명함을 얼음의 결정체에서 부서지는 빛이 아니었다. 얼음을 녹여버릴 수 있는 뜨거움의 빛이었다는 것을 인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인정하게 되었다.


***


오늘은 격주에 한번씩 과 전공의들이 모여서 의국 회의를 하는 날이었다.


처방을 내고 각종 검사를 해야되는 오전중의 일은 급한 순서대로 처리를 해놓은 다음 명현은 회의실로 급한 걸음을 걸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하게되는 회의라 모두들 바빠 보였지만 수술을 들어가지 않는 한은 거의 참석을 하는 편이라 많이들 와 있었다.


섹션마다는 네댓명의 전공의들이 있어 (간, 담도, 췌장), (위암, 위장질환), (대장, 항문), (유방암, 유방질환)등의 섹션으로 분류되는 일반외과에는 스무명 가량의 레지던트들이 있게되는 셈이다.


의국에는 과 전체를 총괄하는 의국장인 메인 치프가 있고 섹션마다에는 섹션 치프가 존재하게 된다. 거기에 1년차들은 3개월 주기로 섹션 체인지를 하게 된다. 각 섹션의 스태프마다 전문으로 보는 분야가 다르니 골고루 수술 방법을 익히라는 배려에서이다.


외과는 다른 과들에 비해 여자 레지던트의 수가 극히 적었다. 일반외과에는 저쪽 편에서 손을 흔드는 소영과 명현 둘이라도 있지만, 신경외과나 흉부외과에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처음부터 명현과 소영은 눈에 띄게 되었다.


“수술 없어?”


점심 대용인 듯 소영은 책상위로 몇 종류의 비스킷을 뜯어놓으면서 그 중 하나를 명현에게 먼저 내밀었다. 명현이 하나를 집어들며 대답을 웅얼거렸다.


“오늘은 없어.”


1년차 동기들이 다가와서 몇 개씩 집어 가는 바람에 소영은 줄어드는 비스킷을 아쉬워해야 했다.


마지막 것을 입으로 가져간 다음 음료수로 마무리를 하고는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들을 손으로 탁탁 쳐내었다. 맛있는 간식을 먹고 난 후의 애들 표정이 이럴 것이다. 더 원하는 것도 같지만 만족스러워 하는 얼굴이었다.


“야, 서인우 선생님 결혼한다는 게 사실이냐?”


회의실 내 모든 사람들이 털털한 소영의 목소리에 집중을 하게 되었다. 그 소리에 섹션 치프들끼리 모여있던 병훈이 명현을 쳐다보게 되었다. 시선이 부딪힌 민망함에 명현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지만 병훈은 손을 저으며 자신이 아니라는 부정의 행동을 보여주었다.


“과장님이 우리 선생님한테 그러셨다는데? 서인우 선생님 결혼한다고. 상대가 의사라는데? 대체 집안에 의사가 몇이야. 근데 명현아, 난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서인우 선생님이랑 결혼하는 여자가 불쌍해.”


명현의 눈이 긴장감으로 또렷해지면서 자신의 귓가로 다가오는 소영의 입술을 따라 움직였다. 목소리를 낮춘 소영은 그녀에게 이유를 소곤거려 주었다.


“남자란 자고로 여자를 온화하게 품어줄 수 있는 따뜻함이 최고거든. 근데 너희 선생님은 너무 차갑고 냉정해. 두달 넘도록 웃는 얼굴 한번 못 봤으니까. 그리고 자기 여자에게 필이 팍 꽂힌 남자는 어딘가 실실거리게 되어있는데, 너희 선생님에게는 그런 푼수의 행복도 엿보이지 않으니 분명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냐. 당연히 폭발할 것 같은 열정은 기대하기 어렵지.”


소영은 살짝 찌푸려진 명현의 표정을 알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그녀의 귓가에 입김을 불어넣듯 속삭임을 계속했다.


“그러고 보면 보는 즐거움이 더 큰 사람이야. 넌 그 입술이 뜨거워 보이니? 그 손길에 살갗이 타 들어갈 것 같아? 아니, 차가울 거야. 왠지 온기가 없을 것 같아.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 같아서 자기 여자라 해도 온 마음을 다 주면서는 안아주지 않을 거야. 아, 하지만 그래도 아깝다. 그렇게 세뇌를 시켜도 그 여자가 부러우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그 여자가 부럽다는 말이었다. 그제야 조금 전만해도 찌푸려져 있던 명현의 표정과 입가가 자연스럽게 긴장으로부터 해방되고 있었다.


“왜 그리 갈팡질팡이야. 차갑고 열정도 없는 사람이 아깝긴 왜 아까워. 게다가 입술과 손길도 차가울 거라며.”


소영이 스스로를 세뇌시킨 내용을 집어주며 명현은 잔잔하게 웃어주었다.


“그거야, 맨입으로는 고이 못 보내주니까 만든 핑계지. 저기 휴게실 뒤편에 가 보면 질질거리는 간호사들 몇 있을 텐데 동참해서 같이 우울해지고 싶다. 설마 사람 입술인데 차갑기야 하겠냐. 그치?”


그의 병원에서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소영의 말에 명현은 비밀스런 행복에 젖어들고 있었다.


‘푼수 같은 행복이라…. 그도 날 보면 그럴까.’


혼자만의 생각으로 명현의 입가에 웃음이 스며들었다.


***


토요일이다. 매주 토요일 아침 8시부터 30분 동안은 저널 컨퍼런스(journal conference)가 회의실에서 진행된다. 두명의 전공의가 각각 1개씩의 해외 우수 논문을 선정하여 요약 발표하고 해당 스태프의 지도하에 토론을 하게되는 전공의 교육 프로그램중의 하나이다.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회의라 논문의 중요한 요점을 파악하는데 그 중점을 두게되는 편이라 30분의 시간은 잠시처럼 지나갔다.


응급이 아니고는 토요일은 대체로 수술 스케줄이 없어 외과 전공의들에게는 한결 편안한 날이지만 아침 시간은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시간에 쫓기는 건 매한가지이다.


의자가 들썩거리는 움직임을 시작으로 회의실 안은 이런저런 말소리들로 웅성거렸고 누군가는 오늘 발표된 논문에 관한 질문을 스태프에게 묻기도 했다.


논문에 관한 궁금한 부분을 몇가지 계속적으로 묻던 레지던트 하나가 진지하고 성실한 답변을 해주고 있던 인우에게 개인적인 호기심을 표현했다.


“선생님, 사적인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얀색의 스크린을 등뒤로 두고 책상 위에 살짝 기대어 앉은 인우는 사적인 질문이라고 미리 선전 포고를 하는 레지던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너그러워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자신에 관한 것은 작은 것 하나도 내보이지 않는 스태프로 유명한데 쉽게 허락을 하자 회의실에 앉아있는 모두가 의자에서 떼었던 몸을 다시 내려 바짝 다가앉으며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결혼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인지요.”


자리에 있던 모두가 무심한 척 하면서도 그의 말 한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리라는 것은 굳이 주위를 돌아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아마도.”


소문의 확산 루트는 인우도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현재 세진병원 내의 모든 이들이 그의 결혼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부인을 하고싶은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렇다고 자랑을 하면서 떠벌릴 생각도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알려지는 것에 불만을 내비칠 이유도 없었다.


“결혼하실 분이 의사 시라던데, 혹시 저희 병원에 계신 분인가요?”


교생 선생님의 연애사를 궁금해하는 학생들처럼 까만 눈동자들은 인우의 대답을 몹시도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들의 재촉하는 듯한 긴장된 숨소리를 들으면서도 인우의 시선은 뒷문 가까이 앉아있는 그의 갸름한 꽃에 잠시동안 머물렀다.


그리고는 이내 질문자에게로 돌려졌다. 떨어진 곳에서도 그녀의 시린 목덜미가 훤히 보일 정도로 허리를 반듯하게 세운 채로 단정하게 앉아있는 명현은 조금 길어진 듯한 머리칼의 굴곡 때문인지 부드러워 보였다.


“패스.”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시작되었고, 아직 호기심에 대한 만족을 하지 못한 질문자는 집요하게 다시 그의 입이 열리기를 바라며 못내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


“그건 긍정의 뜻인데요, 선생님.”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의 빛을 나타내자 인우는 단호한 표정으로 더 이상의 소문의 확산을 막았다.


“그렇게 들렸다면 알아서 찾아봐. 그리고 찾았으면 확인 받으러 와. 괜히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만들지 말고. 질문 끝.”


모두들 그의 대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듯했으나 이어진 인우의 당당함에 다시 헷갈려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사적인 질문에서 건진 건 그의 결혼 사실을 확인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셈이었다.


쉽게 허락을 해서 당연히 대답도 그럴 거라 예상했던 레지던트는 다른 전공의들이 왜 그에게 궁금해하면서도 묻지 않았는지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는 사소한 것조차도 자신에 관한 것은 공식적으로 노출시킨 적이 없었으며, 이미 알려진 사실들도 다른과 스태프로 있는 그의 동기들이 들려준 이력이 전부였다. 회의실은 움직이기 위한 소란스러움으로 술렁거렸고 인우는 그 사이를 주저 없이 유연하게 빠져나가 버렸다.


***


섹션 체인지(section change)를 하게되는 날이라 회의를 마친 1년차들은 그간 밀렸던 차트를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차트 정리를 제대로 해놓지 않고 가버리면 의무기록실에서 족집게처럼 찾아내 해당인은 벌점이라는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다.


특히 수술 기록지나 환자의 조직 검사 결과 등이 빠져있으면 나중에 환자가 다시 내원 했을 때 아주 큰 문제가 발생한다. 앞으로 재수술을 해야하는 환자의 경우 이전에 무슨 수술을 어떻게 시행했는지 모른다면 차후에 시행하게 될 치료에 대해 방침을 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섹션 체인지를 하면서 명현은 삼개월동안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준 섹션 치프인 병훈에게 고마움과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


“박 선생님은 겉으로 보이는 면이 전부는 아니야. 호탕하게 웃으셔도 다음까지 꼭 기억을 하는 편이시지. 그러니까 될 수 있는 한 실수는 금물이야. 치프 노기영은 시간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놈이거든. 좀 까다롭기는 한데 못 견뎌낼 정도는 아니야. 지금처럼만 하면 문제될 건 없어.”


병훈이 명현이 새로 만나야 될 스태프와 치프 그리고 윗년차들에 대한 정보를 꼼꼼하게 일러주면서 격려해 주었다. 일종의 배려였다.


“저 때문에 고생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배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에요.”


명현이 나긋나긋한 말투로 고마움을 전하면서 그간의 정듦을 아쉬워하고 있을 때 의국문이 힘차게 열리더니 인수인계를 하기 위해 소영이 들어왔다.


그녀에게 시선을 주고있던 병훈이 흘깃 소영을 바라보았지만, 금세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소영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개를 꾸벅거리며 앞으로 모시게 될 치프에게 소영은 씩씩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과 전공의들 중 여자라고는 둘밖에 없으니 소영을 모를 리 없지만 병훈은 처음 대면하는 사람처럼 사무적인 태도로 인사를 받아들였다.


“그래, 열심히 해보자. 명현이는 환자 인수인계 잘 하고 다음에 보자.”


인수인계를 할 수 있도록 병훈이 자리를 비켜주자 소영이 의자를 끌어당기며 명현에게 파트 동료들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야, 치프 선생님 네가 무지 편안한 사람이라고 그랬잖아. 근데 왜 저래? 빡빡하게 굴 것 같은데? 넌 치프 교육을 어떻게 시켜놨기에 1년차 대하는 태도가 저렇게 불손하냐.”


소영의 말에 명현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소영이라면 치프라도 교육을 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능란한 소영의 말솜씨에 명현은 환하게 벌어지는 웃음을 지으며 차트를 건네주었다. 그런 명현의 모습이 낯설어 소영은 의아한 눈초리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윤명현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다. 친구라는 명분 아래 8년을 제일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저렇게 밝은 웃음을 지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 자신의 친구 윤명현은 입술을 살짝 늘여주는 미소밖에 지을 줄 모르는 웃음결핍증 환자였는데 병을 고치기라도 했는지 같은 여자의 가슴까지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표정을 순식간에 만들어 보여주고 있었다.


낯선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소영이 아니었다. 벌써 얼굴부터 들이미는 모습이 간단히 넘어가지 않을 태세였다.


“윤명현, 너 말이야 수상해. 무슨 일이야. 빨리 불어.”


“내가 왜 수상해? 웃음 때문에 그래?”


단박에 말뜻을 알아차린 명현의 태도에 소영은 점점 더 얼굴을 그녀 앞에 들이밀고 있었다. 빨리 얘기하라는 신호였다.


“잘 아네. 변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숨기면 재미없다. 앞으로 병원생활 반듯하게 하고 싶으면 빨랑 말해.”


“글세, 그냥 저절로 웃음이 터져 버렸다면 네가 믿을까?”


“당연히 안 믿지. 내가 볼 때 네 병을 고친 약은 사람이야. 그리고 남자야. 맞지?”


소영은 혹여 빠트린 게 있는지 꼼꼼히 차트를 확인하고 있는 명현의 얼굴을 억지로 돌렸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게 했다. 절대 대답을 듣기 전에는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남자라….”


이상했다. 인우가 남자임은 틀림없는 일인데도 명현은 그 단어를 부인하고 싶었다. 그는 여자 아니면 남자라는 단순한 성별의 차이에서 오는 다른 성(性)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는 사랑일 뿐이었다. 자신에게 흘리지 못했던 눈물과 웃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주지 위해서 그는 가슴아파해야 했고, 차가워진 심장에 따뜻한 피가 흐르도록  하기 위해서 더운 숨결을 내어주며 안타까움으로 지켜보기도 해야했다. 그렇게 힘겨운 노력으로 명현은 웃음을 찾을 수 있었고, 또 눈물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남자가 아니라 자신의 가시를 감싸준 사랑이었다.


“아니야? 하긴, 네 생활이 빤한데 갑작스레 남자는 웬 남자. 하지만 변한 건 확실해.”


“맞아, 난 변할 거야. 처음으로 소리내어 웃어봤는데 그 느낌은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시원함 같은 거였어. 상쾌했다는 게 맞을 거야. 난 그 느낌을 계속 가질 거야. 그래도 되겠지?”


명현은 표정에서 청량함이 느껴졌다.


“어휴, 우리 마마께서 드디어 득도까지 하신 모양이네. 명현아, 너 보기 좋다. 이유가 무슨 상관이야, 네가 웃는 다는데. 예쁘게 많이많이 웃어라. 이, 예쁜 것.”


소영은 명현은 꼭 껴안아주며 고마워했다. 감정에 무심하던 친구가 이젠 웃겠다고 한다. 스스로를 위해 눈부신 웃음을 짓겠다고 한다. 그러하기를, 계속 영원히 그렇게 되기를 빌며 소영은 명현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


명현은 환자 인수인계를 끝내놓고 섹션 치프인 기역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그를 찾아 병실 복도를 바쁘게 걷고 있었다. 때마침 바로 앞 병실에서 기영이 나오는 게 보였고 명현은 곧장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윤명현입니다.”


“인수인계 끝냈어?”


차갑고 군더더기 없는 인상의 기영이 그의 성격답게 해야될 말만을 꺼내었고 명현은 소영에게 들은 대로 간단히 빨리 대답을 해주었다. 다른 지시를 기다리는 잠시동안 명현의 휴대폰이 울리자 기영은 먼저 확인하라는 눈짓을 주었다.


[스태프에게 인사 정도는 하고 가야되지 않나?]


“뭐야? 콜 왔어?”


흘깃 휴대폰을 바라보는 기영의 물음이었지만 별다른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뇨.”


기영이 파트에서 특히 신경 써야 될 몇가지만을 짧게 말해주고 사라지자 명현은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을 체크하며 인우의 방을 향해 뛰는 걸음을 했다.


당연히 스태프에게 인사를 했어야 했는데 잊었던 모양이다. 명현은 편안함으로 해야될 일을 지나쳐버린 자신을 난처해하며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선생님.”


명현은 인우를 스태프로서의 호칭으로 정중하게 불렀다.


방문객의 얼굴을 알아본 인우는 하던 일에서 손을 내려 의자 팔걸이에 올려두었다. 더 다가오지도 않고 문손잡이를 등뒤로 붙잡은 채 방문객은 미안함을 내비치며 서 있었다.


“인사도 제대로 안하는 1년차라…. 걱정스럽군.”


“미안해요. 스태프 선생님이란 걸 잊고 있었나 봐요.”


인우는 명현의 이유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만 받아들이고 잇는 것 같아 무척 만족스러웠다.


그의 반응과는 달리 명현은 자신의 행동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었다.


“용서할 테니까 입술 깨물지 마.”


애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인우는 그녀의 깨물어진 입술을 걱정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선생님.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속엣 말을 털어놓는 것처럼 명현은 진지해 보였고 형식적인 인사말 속에는 명현 자신을 향한 단단한 다짐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문고리만 붙잡고 어떻게 열심히 하겠다는 거지? 이리와.”


언제나 그녀가 걱정 없이 편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인우는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에게로 다가섬을 마중이라도 하듯 그의 손은 명현을 주저 없이 이끌었다.


인우는 앉은 그대로 명현을 끌어당겨 안았다. 그는 강한 포름알데히드 냄새 속에서 그녀의 살내음을 맡기 위해 오랫동안 명현의 가슴에 코끝을 묻고 있었다.


그녀의 옷 사이로 인우의 숨결이 파고들었고 명현은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심장 부근이 그의 호흡으로 인해 뜨거워졌고 또 다른 사람의 감촉이 두근거리는 박동수를 늘어나게 만들었다.


“내가 혹시 고맙다고 말한 적이 있나요?”


명현의 숨결이 그의 머릿결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마워요, 사랑을 알게 해 줘서. 그리고 서인우를 알게 해 줘서.”


그의 머리를 쓸어 내리며 명현은 조용하게 고백했다.


***


명현은 주말에 섹션 체인지를 하고 난 후 처음 맞는 월요일이라 평소의 몇 배는 더 바쁜 듯했다. 새로운 파트에서 새로이 담당하게 된 환자들의 상태를 파악하느라 하루종일 눈코 뜰 새 없었고, 게다가 응급실 콜은 왜 그리도 많은지 첫날 땜을 확실하게 하는 듯했다.


응급실 콜이 왔다. 생후 5개월 된 남자 아기로 만 2세 이전의 아기들에게 심한 복통을 유발시키는 장중첩증 같았다. 복부에 만져지는 혹도 그러했고 커피 색깔의 변을 봤다는 보호자의 대답도 그 증상이었다.


창자가 서로 겹쳐져서 뒷부분 속으로 앞부분이 끼어들어 간 것이다. 보통은 방사선과에서 바리움을 이용해 항문 속에 삽입된 관을 통해서 풀어보는 시도를 하지만 풀리지 않을 경우는 수술로 겹쳐진 부위를 뽑아줘야 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안으로 끼어들어간 부위의 혈액 순환이 좋지 않아 잘라내야 하는 응급수술이었다. 환자는 급히 수술방으로 옮겨졌고 기영의 집도로 수술은 진행되었다. 수술이 끝날 때쯤 응급실에서 또 환자가 있음을 알리는 콜이 왔다.


명현은 환자를 회복실로 옮겨놓고 바로 응급실로 뛰어 내려갔다. 명현은 검사 결과와 촉진 결과 충수염인 것 같다는 보고를 기영에게 하자 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있었다. 아마도 저녁시간에 중요한 약속이 있는 것 같았다.


“병실은 있어?”


기영의 까칠한 말투에 명현은 얼른 대답을 했다.


“네, 있습니다.”


“수술방은?”


“마취과에서 삼십분 정도면 방이 하나 빈다고 했습니다.”


기영은 30분 후에 수술실로 갈테니 빨리 준비하라는 말만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명현은 부지런히 수술 승낙서를 받고 준비해서 환자를 수술실로 옮겼다.


막 수술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마취과 의사가 나오면서 산부인과 쪽에서 급한 환자가 있는데 1시간만 늦춰서 하자는 부탁을 해왔다. 산부인과 전공의도 옆에서 함께 부탁을 하고 있었다. 정상 분만을 유도하는데 태아가 골반에 걸려서 더 이상 안 내려오고 태아 상태도 좋지 않다고 사정을 했다.


명현이 다시 기영에게 전화를 해서 수술실 사정을 보고하자 이번엔 싸늘한 목소리로 야단이었다.


“무슨 소리야! 한번 방을 배정 받았으면 빨리 들어가서 준비를 해야될 거 아냐. 바로 갈 테니까 마취해 놓고 기다리고 있어.”


전화를 끊은 명현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한 사람은 명현이 잡고있는 침대를 막고 다른 사람들은 산모를 수술실로 옮기기 시작했다. 분만을 지연시키기 위해 한 손으로 산모를 막고 있는걸 보면 급하긴 급한 모양이었다.


우습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해서 명현은 수술실 밖에서 헛웃음을 지으며 기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수술실 쪽으로 다가오던 기영이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명현을 발견하고는 짜증을 넘어선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배정 받은 방을 다른 과에 뺏겨!”


전후사정을 설명하는 명현의 말은 들을 생각도 없는 듯 기영은 자기가 할말만 할뿐이었다. 그 정도로 급하면 진즉에 손을 쓸 것이지 이제까지 뭐하다가 남의 방을 뺏고 들어오느냐며 앞에 서 있는 명현을 몰아세웠다.


불같은 화를 내며 억지스러움을 뱉어내는 기영이 명현은 이해가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덕분에 그의 약속은 두시간 이상 더 늦어졌고, 그 분풀이를 명현은 고스란히 다 받으며 서 있어야 했다.


“뭐야? 요즈음은 치프가 1년차에게 사정을 하나보지? 노기영, 사정하지 말고 그냥 한 대 차버릴게 어때? 여자라고 봐주는 건가?”


인우의 음성이 수술실 복도를 낮게 울리면서 가까워졌고 기영은 표정을 갈무리하며 깍듯이 인사를 했다.


명현도 고개를 간단히 숙이고는 아무 말 없이 담담히 서 있었다. 인우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차마 눈을 마주치기는 싫었다.


“수술 있으셨어요? 선생님.”


기영이 인우에게 깍듯하게 물었다.


“환자에게 치명적이지 않은 실수라면 용서해주지 그래.”


“네?”


별일이었다. 기영은 인우의 참견이 놀라워 지금의 상황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관심을 가진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거기에 불편한 부탁까지 얹고있는 그는 도저히 자신이 알고있던 인우의 모습이 아니었다.


“치명적인 거야?”


“아, 아뇨. 그런건 아닙니다. 배정 받은 수술실을 다른과에 내줘 버렸기에.”


“더 급한 환자가 있었나보지.”


수술실 입구에 들어온 ‘수술중’이라는 불빛을 바라보며 인우가 말을 하자, 기영의 눈빛이 다시 예리하게 명현을 훑고 지나갔다.


“네? 네.”


“그럼 수고들 해라. 윤명현, 다음부터 수술실 사수 잘하도록 해. 치프 선생님 화나게 만들지 말고. 알았나?”


“…네.”


빙긋이 웃으며 큰 그림자가 그들 옆을 지나가자 남은 두 사람은 그답지 않은 행동에 잠잠해질 수밖에 없었다.


***


수술을 마치고 나오자 시계 바늘이 10을 넘어서고 있었다. 명현은 자신이 왜 의사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처음으로 고민을 해보았다. 특별한 사명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하고 싶었던 희망사항도 아니었다.


몹시도 힘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 떠오른 것이 바로 의사라는 직업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바쁘고 힘든 일을 명현은 찾고 있었고, 그렇게 채택된 게 의사일 뿐이었다.


그런 의미로서는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명현은 알 것 같았다. 그런 마음가짐이나 부족한 생각으로는 의사가 될 수 없음을 느꼈다.


어느 정도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시작하게 된 뚜렷한 동기와 흔히 말하는 사명감이라는 것이 필요했다. 명현은 혼자만의 생각이 웃음이 새어나왔다. 자신이 의사가 된 동기가 우스워서였다.


‘힘들 것 같아서라니.’


꼬리를 물은 생각들은 끊어지지 않았고 끊을 마음도 없는 듯 명현은 그렇게 잠시동안 상념에 빠져있었다.


“여기에서 밤샐 건가? 수술실 사수는 이렇게 하는 게 아니야.”


그녀의 많은 생각들이 순식간에 잘려나갔다.


눈에 익은 구두코가 보였다. 시원하게 뻗은 다리가 짙은 색의 바지로 더 곧아 보였고 옅은 회색의 셔츠가 그를 말끔하게 단장시켜 놓았다. 명현의 시선은 그의 목에 머물러 더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의사는 힘들어요. 그걸 이제야 느꼈어요. 그리고 누군가가 존경스러워요.”


가엾게도 명현은 완전히 지쳐있었다. 그러자 곧 명현의 안경이 벗겨졌고 기다란 손가락이 눈가를 지그시 눌러주었다.


“맞아, 의사는 힘들어. 매일매일 하는 생각이야.”


“왜 퇴근 안 했어요?”


시원한 그의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이며 명현은 조용히 물었다.


“누가 배웅해 주길 기다렸지.”


눈이 바로 떠졌다. 명현의 시선이 인우의 눈으로 맞바로 향하면서 살포시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안경을 받아들어 다시 쓰고는 의자에서 재빨리 일어났다.


“가요, 배웅해 줄게요.”


엘리베이터 쪽으로 먼저 걸어가는 명현의 팔을 그가 잡더니 계단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뭐예요, 걸어서 십층에서 지하까지 가자구요? 나 좀 봐주지.”


그의 손에 딸려가면서 명현은 이마를 찡긋거렸다. 수없이 내려가야 할 계단을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나고서야 명현의 사정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어떡하라고요.”


“좀 봐주는 거야. 업혀.”


두 계단 정도 아래에 서서 명현이 업힐수 있도록 그가 등을 대주었다. 하지만 명현은 선뜻 그의 등에 몸을 맡길 수가 없었다. 그녀 스스로도 수없이 이어진 계단을 내려갈 생각에 몸서리를 쳤으면서 그에게 힘든 일을 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


“정말 업혀요? 몇 칸 내려간 다음 내리라고 하면 안 내릴 거니까 결정 잘해요.”


으름장을 놓듯 명현이 말을 했지만, 그는 숙인 허리를 펴지 않았다.


“후회는 그때 가서 나 혼자 알아서 할 테니 빨리 업혀. 허리 숙이고 있는 게 더 힘들어.”


명현은 계단 끝을 까치발로 딛고 서서 그의 목에 팔을 두른 뒤 서서히 자신의 가슴을 그에게 붙였다. 그녀는 웃었다. 고개를 돌려 얼굴도 대었다. 참으려 애쓰는 그녀의 입술은 터지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왜 그렇게 웃지? 그만 웃어. 뜨거워.”


“좋아서 그래요. 후회하고 있어요?”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경쾌한 걸음소리에 잠자코 귀를 기울이던 명현이 인우의 등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물었다.


“조금.”


“무거워서 그래요?”


명현은 자신의 얼굴을 앞으로 쭉 내밀고는 그의 얼굴을 살피려 했다.


“아니, 네가 뜨거워서 힘들어.”


그녀의 숨결이 그의 피부를 뜨겁게 간질이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무심결에 이루어지는 행동이라 해도 인우는 인내가 필요할 정도였다.


“이제 안 웃을게요. 당신이 힘든 건 나도 싫으니까. 그리고 오늘 안 잊을게요.”


“잊어도 돼. 앞으로 많이 업어줄 거니까. 그냥 잊어.”


명현은 누군가에게 이렇게 몸을 의지하며 업혀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그렇기에 명현은 그의 등에 파고들 듯 한치의 틈도 없이 몸을 바짝 기대었다.


“싫어요. 죽을 때까지 기억할 거예요. 서인우가 윤명현을 업어준 날.”


마치 특별한 기념일을 공표 하듯이 명현은 기억한다는 말을 진지하게 했다. 그의 어깨 부근에서 느껴지던 명현의 웃음이 가라앉았다. 아이처럼 좋아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그 뜨거운 입김이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무게감마저 없었다면 그녀의 존재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목에 감겨져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가 있는걸 보면 잠이 든 것 같지는 않은데도 명현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윤명현.”


그가 다정하게 불렀다. 눈물이 날 만큼 다정했다.


“응.”


“무슨 뜻이야?”


외마디 대답에 인우는 고개를 슬쩍 돌려보았다.


“너무 좋아서 부리는 어리광이라고 생각해요. 아까 치프 선생님에게는 왜 그랬어요? 놀라는 거 같았어요.”


지나치게 좋아도 가슴은 아픈가 보다. 가슴이 저린 듯한 느낌에 명현은 그의 목을 더 바싹 감으며 넓은 등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 설명하라고 하면 모르겠어. 글쎄 나도 모르게 참견하게 되었다고 해두지.”


명현은 기영의 놀라는 표정이 아직도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그의 말 한마디에 수없이 듣던 잔소리가 한순간에 뚝 끊긴 것은 반갑기도 했지만, 자신 때문에 그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편들어 주는 것 같았어요. 웃겼어요. 참견쟁이 서인우.”


명현에게 큰소리로 화를 내고있는 기영을 봤을 때 인우는 달려가 그가 말했던 대로 한 대 차주고 싶었다. 그냥 야단을 쳐도 봐줄 수 없을 텐데 듣고있던 상대가 날아갈 정도의 바람소리를 내뱉는 걸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걸음이 옮겨져 버렸다.


“목요일 날 분당 다녀와서는 곧장 결혼할 거야.”


인우는 한계단씩 천천히 걸어 내려가면서 순서를 일러주듯이 분명하게 말했다.


“날 싫어하실 수도 있잖아요.”


“그럴까봐 걱정되나?”


“조금은.”


명현은 정말로 걱정이 되었다. 그와 결혼을 약속하고, 둘 사이에서는 이미 기정사실로 굳어져 버리고 있었지만, 그의 부모님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 그것이 부모라는 이름이라는 사실은 명현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그래도 내가 결혼해 줄 테니 편하게 생각하고 있어.”


뭐든 쉽게 생각하는 남자. 하지만 그가 그렇게 얘기라도 해주니 명현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로서는 진심이라 해도 장난스러운 말에 위로를 받고 말았다. 그녀도 차츰 쉽게 생각이 되어지고 있었다.


“내가 고마워해야 되는 건가요?”


“상식적으로는 그렇지.”


그르이 부드러운 웃음이 어깨 너머로 넘어왔다.


“그래준다니 고마워요.”


그가 부대끼며 살아온 가족들이 궁금했다. 그가 자신감과 여유를 품을 수 있도록 그늘을 만들어주신 분들이 보고싶었다. 그에게 따뜻한 사랑을 심어준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할까봐 걱정스러웠다.


자신으로 인해서 그가 가족들과 위태해지면 어떡하나 하는 우려도 생겨났다. 만에 하나 그를 놓아야 될 경우가 생긴다면…. 그를 놓아야 할까봐, 그렇게 될까봐 무서웠다.


그의 등은 젖어 있었다. 팔월의 끝 주라 해도 땀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흘러내렸다.


주차장 표시가 나타나자 명현은 둘렀던 팔을 풀면서 꼼지락대었다.


“내려줘요.”


주차장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자 그의 차가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명현이 업혀있던 곳과 그 옆쪽까지 그의 셔츠 뒤쪽은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차라리 내가 남는 게 낫겠어. 매일 널 두고가야 되는 내 마음이 어떻지 네가 알기나 할까.”


다음날이면 어떻게든 볼 수 있을 텐데도 인우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녀를 병원에 남겨두고 혼자서 정문을 통과할 때의 무거움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매일 조금씩 그 중량을 늘려 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다. 굳이 명현을 찾아가 배웅을 해달라 전에 없던 일을 한 것도 그렇고, 그녀를 업고 주차장까지 온 것도 어쩌면 명현과 함께 있을 시간을 연장하고 하는 바람에서 였을 것이다.


“알아요.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넌 몰라. 그만 가야겠군. 조금만 더 있다간 저번처럼 널 도망시킬 것 같아.”


정말 유혹을 느끼듯 인우는 명현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명현은 살포시 웃음을 짓는 것으로 그의 안타까움에 위로를 표했다.


“그러면 안돼요. 우리 치프 선생님 무서워요.”


“병훈이도 무서워. 다들 안 무서워해서 그렇지.”


그가 차에 오르자마자 시동이 걸렸고 창문이 스르르 내려졌다. 차 내부 계기판의 불빛과 오디오의 깜박임이 그녀를 손짓하고 있었다. 어서 타라고,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명현은 그렇게 될까봐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려 주차장을 훑어보았다.


“윤명현, 업어준 사례는 해야지.”


열려진 창 사이로 내밀어진 그의 입술위로 명현의 입술이 살짝 내려앉았다. 겉 입술만을 살짝 적셔주고는 이내 얼굴을 떼어놓았다. 그리고 석류 같은 입술을 늘이며 웃어주었다.


“다녀오세요. 배웅하는 거예요.”


명현은 계단을 내려오기 전 그의 요구대로 배웅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인우는 짐짓 위험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경고했다.


“그렇게 웃지 말라고 했을 텐데.”


“트집잡지 말고 가요.”


어서 가라는 듯 명현은 차에서 두어 걸음 물러나면서 손을 살짝 들어주었다.


“내일 보자.”


떠나는 그의 차는 항상 미련 없는 곳을 벗어나듯 단번에 빠져나가 버린다. 지금도 붉은등 한번 보여주지 않고서 명현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


벨이 울렸다. 응급실에서 온 인턴의 전화였다.


명현의 눈이 자동적으로 시계로 향했다. 작은 바늘이 숫자 3근처에 있어 보였다. 자신이 졸고 있었는지 깨어있었는지 조차도 희미하다.


잠시 졸았다해도 현실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의식을 놓지 않았을 테니.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명현은 1층과 외부 별관으로 연결되는 곳에 있는 응급실까지 뛰어갔다.


명현이 도착하자 인턴이 설명을 하며 환자 앞으로 데려가 주었다.


병상 위가 온통 피범벅이었다. 친구 둘이서 술을 먹고 싸운 경우였다. 경찰관이 대동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 신고가 안된 상태인 것 같았다. 더 심한 환자부터 봉합을 하기 위해 명현은 상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간신히 수술만을 면할 정도였지 상처가 꽤 깊었다. 오른쪽 팔에 두군데의 자상은 출혈이 웬만큼 진정된 것 같았으나 같은 쪽 옆구리에서는 아직도 많은 양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명현은 옆구리의 상처부터 봉합을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응급실이 시끄러워졌다. 싸운 상대 남자가 자기가 더 위험한 상태이니 자신부터 치료를 하라고 난동을 피우고 있었다.


“저 새끼보다 내가 더 많이 다쳤단 말이야. 빨리 나부터 해, 얼른.”


붙잡고 있는 인턴을 밀치면서 다친 다리를 끌며 그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진정하세요. 이분 출혈이 더 심각합니다. 금방 끝나니까 기다려 주세요.”


환자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명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기다릴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막무가내로 명현에게 달려들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술에 취한 채 남자의 온몸이 허우적대고 있었다.


“이 쌍년! 너 죽고싶어? 빨리 나부터 치료 안해? 뭐야 너. 계집년 주제에 의사라고 사람 깔보는 거야? 응?”


취객의 비틀거리는 몸은 곧 명현을 덮칠 듯이 위험스러워 보였다.


“바로 치료해 드릴 겁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인턴들이 그를 잡고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말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아? 뭐야, 쌍!”


인턴 둘이 붙잡고 만류를 해도 술 취한 사람의 초인적인 힘은 감당하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동과는 상관없이 명현은 치료하고 있는 환자에게 집중을 했다.


생각보다도 옆구리의 상처는 꽤 깊었다. 조금씩 상처 부위가 봉합으로 좁혀져 가자 출혈도 따라서 줄어들고 있었다. 잠시후면 마무리가 될 것 같았다. 팔에 난 상처는 그다지 깊지 않아 빨리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난동자의 다리를 치료해주면 저 소란스러움은 곧 멎을 것이다. 명현은 다음 순서를 생각하면서 팔에 난 상처 봉합을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명현의 주위에서 크게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외치는 고함소리에 명현은 귓속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악! 악! 선생님!”


“악! 안돼요. 경찰 좀 불러주세요. 빨리요. 어서 빨리요!”


“어떡해, 빨리빨리, 저 사람 좀 잡아요. 자꾸 찌르잖아요. 빨리 어떡해!”


명현은 시끄러운 소리에 여전히 귓속만이 뜨거웠다. 뜨거움을 떨쳐버리고 싶어서 명현은 고개를 흔들려고 했지만 그 작은 움직임조차 쉽지가 않았다.


다시 한번 더 흔들어 보려고 명현은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아무 것도 의지대로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녀의 눈앞에 술에 취한 남자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스치듯 지나갔다.


“아, 씨발. 그러기에 나부터 치료 하랬잖아. 아프냐? 너도 아파 봐야 내가 얼마나 아픈지 알거 아냐.”


명현은 그 뜨거움의 느낌이 귓속이 아니었다는 것을, 남자의 말을 들은 후에 알게 되었다. 그녀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가 따뜻하게 데워준 피가 그녀의 복부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가 슬퍼할 텐데.’


명현은 웃음이 나왔다.


‘정말 의사는 힘들구나. 그가 도망가자고 할 때 그러겠다고 흔쾌히 대답해 줄걸.’


자신을 업어주느라 땀으로 젖어버린 그의 회색 셔츠가 명현의 눈을 조금씩 덮어주고 있었다.


# 17장


벨이 울렸다. 잠에 취해있던 인우는 본능적으로 재빨리 번호를 확인하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서인웁니다.”


인우의 목소리를 확인하자 휴대폰 저쪽에서 다급한 말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 3년차 송재영입니다. 응급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인우는 잠을 깨기 위해 얼굴을 문지르면서 전화보고를 계속 들었다. 다급한 음성에 어느새 잠은 달아났고, 보고를 하던 재영의 목소리가 잠시 멈추어지자 빠르게 재촉을 했다.


“계속해.”


인우는 낮은 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응급실에서 1년차가 취객이 휘두른 칼에 찔렸는데 지금 위험한 상태입니다. 제가 개복을 하긴 했는데 장기 손상이 너무 심합니다.]


일순간 인우의 감겼던 눈이 번쩍 떠졌다. 전화를 쥔 손에 차가운 땀이 스며들면서 확인하는 인우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을 있는 힘 다하여 누르고 있었다.


그는 왜 자신이 이렇게 불안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직을 서고있는 1년차는 여럿일텐데. 그러나 응급실에서 취객을 상대해야 될 확률이 제일 높은 경우는 단연코 외과다.


인우의 마음은 부정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결론을 향하여 제멋대로 달리고 있었다.


인우는 두려움을 속이며 담담하게 물었다.


“1년차… 누구?”


[윤명현입니다.]


지나치게 빠른 통고였다. 혹시나 생각했던 일과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일은 그 차이가 얼마나 되는 것일까? 인우는 잠시동안 생각이라는 걸 하지 못했다.


-윤명현입니다. 윤명현입니다. 윤명현…


‘어째서!’


그러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튀어 올랐다.


[위험한 상태입니다.]


-위험한 상태입니다. 위험…위험….


그의 사고를 되돌려 놓는 말이 그의 주위를 시끄럽게 맴돌고 있었다.


‘얼마나 위험하다는 거지?’


인우는 바지를 입으면서 현관를 뛰쳐나갔다.


계단을 뛰어 내리면서 벗은 상체에 셔츠를 꿰어 넣었다. 단추는 닫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아무 느낌도 없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주황색의 가로등 불빛이 달리는 속도 때문에 한 줄로 연결되어 보였다. 그는 더 밟아지지 않을 때까지 가속 페달을 더 힘껏 밟았다.


‘제발, 윤명현! 내가 갈때까지 만이라도 기다려. 제발.’


인우는 명현이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을까 두려웠다.


‘다녀오세요.’라고 분명히 그녀 입으로 약속을 했다. 그건 기다린다는 의미와도 같은 것이니 그녀는 자신을 기다려 줄 것이라고 인우는 믿고 싶었다.


여느 때처럼 전화로 퇴근을 알려주며 인사할 것을 괜히 수술실까지 올라가 명현을 업준 것을 인우는 후회했다. 해보지 못한 일을 남겨 두어야지만 그녀가 아까워 애착을 더 가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차가 본관 앞에서 굉음을 내지르며 급정거했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로비를 가로지르면서도 인우는 ‘제발’이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고 있었고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그는 한 자리에 머무를 수 없을 만큼 초조해했다.


‘땡!’하는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 사이로 빠져나간 인우는 수술실로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소독을 마치고 수술대로 다가서던 그의 눈에 소독포 사이로 뾰족이 나와있는 명현의 얇은 어깨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솜뭉치로 입속을 틀어막는 듯한 답답함에 인우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감겨져있는 눈이 서먹하게 그를 맞았다. 달게 자던 때의 그 잔잔함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점차 아래로 내려가지면서 확인해야 될 것에 머물렀다.


개복되어 있는 환부를 보던 인우는 자신의 심장과 폐와 간이 여러 조각으로 산채로 찢어 발겨지는 통증과 함께 살인에 대한 충동까지 느낄 수 있었다.


지독한 아픔이었을 것이다. 인우는 그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아 자신의 입술을 힘주어 짓씹어 터뜨려 버렸다.


“출혈이 잡히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지적이 이어지고, 그가 자리를 잡도록 위치를 다시 정비하고 있었다. 감정이 울컥하고 올라오자, 인우는 질끈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붉은 피가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눈에 띠는 출혈 부위는 이미 봉합이 되어 있었으나 출혈의 양은 줄어들지가 않았다. 아직까지 잡지 못한 출혈부위를 찾기 위해 인우의 손놀림이 다급해졌다.


흥건하게 고이는 피를 닦아낸 거즈가 높이 쌓여져 갈수록 다행히 출혈부위는 하나씩 잡혀 나가고 있었다.


“선생님, 마무리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


인우의 굳어진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뱉어지지 않았다.


복강 내 상처에서 흐르는 출혈이 없음을 확인한 인우는 명현의 벌어진 복부를 세심하게 마무리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명현은 생명이 위독할 정도의 피를 쏟아내었고 출혈을 잡기는 했지만 워낙 내상이 심한 상태라 회복의 예후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명현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인우는 알지 못했다. 그녀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심장이 뛰고 있음을 알려주는 기계만이 아직까지 명현의 생명이 그의 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작은 떨림도 없이 고요했고 인우의 따뜻함이 닿아 있는데도 열릴 줄을 몰랐다.


길게 이어진 악몽이길 바랐다. 힘들게 돌아선 순간부터 그녀를 데리고 나오고 싶어했던 자신의 간절함이 꿈속에서 뒤틀어지게 연출되어버린 기분 나쁜 꿈이었으면 했다.


그녀가 자신을 원망하여 이렇게 아픈 꿈을 꾸게 하는 것 같았다. 의사가 힘들다고 처음으로 투정을 부렸는데도 못 받아 주었다. 그렇게 지친 날은 그가 함께 있어 주어야 했는데도 떼어놓고 돌아서 버렸다.


붉은 입술로 말갛게 그를 향해 웃어줄 때 느낀 욕망대로 그는 그녀를 데리고 병원을 떠났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꿈도 꾸지 않을텐데.


이럴 순 없었다. 두 눈을 꼭 감고 그를 원망하듯 맥없이 누워있는 모습을 이대로 보아 넘길 자신이 없었다.


‘윤명현, 눈떠. 날 위해서 눈떠. 제발.’


명현의 날숨이 호흡장비의 쌕쌕거리는 소리와 함께 밖으로 내뱉어지고 있었다. 한번씩 찡긋거리며 그를 흘기던 그녀의 미간에 인우는 손끝을 살며시 얹어놓았다.


차갑지만은 않았다. 푸른기가 도는 가지런한 눈썹선을 그의 손끝이 살살 어루만졌다. 눈 주위만 맴돌던 그의 손이 조용히 그녀의 얼굴에서 멀어졌다.


‘윤명현, 너무 오래 자지는 마라.’


병훈이 다가왔다. 아침회진 때문일 것이다. 명현을 바라보는 병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격한 감정이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지만 병훈은 감히 표현하지 못했다.


지독한 분노를 다 품지 못한 인우의 옆모습은 힘이 들어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선생님, 회진 시간입니다.”


병훈은 차마 말 꺼내기가 곤욕스러웠다. 명현에게 쏟아지고 있는 인우의 눈빛은 모든 감정들이 가득 차서 넘쳐버린 침묵이었다. 다시 한번 더 명현의 얼굴을 새기려는 듯 인우의 시선이 그녀에게 잠시동안 머물렀다.


‘쉬고있어, 회진 다녀올게.’


그녀도 알아야 했다. 자신이 옆에 없는 이유를 알아야 기다릴 것 같았다.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그의 심정과 의식 없이 누워있기는 했지만 명현도 같은 거라 인우는 그렇게 여기고 싶었다.


중환자실 밖에는 명현의 부친인 성균과 석현 모가 인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늘 봐 왔던 대로 중환자실에 환자를 둔, 특히 그 경우가 자식일 경우는 바깥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받아들이고 있는 부모의 얼굴빛은 측은함으로도 부족했다.


성균도 그랬다. 메말라 있었다. 입술과 눈동자가 벌써부터 생기를 잃어버린 듯 파삭거렸다.


그를 발견하고서 반가움에, 그리고 딸의 상태에 대한 궁금증에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인우는 지친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보면 안될까? 잠시만이라도.”


성균은 떨고 있었다. 누구라도 붙잡고 애원하고 싶었다. 제발 그 아이를 살려 달라고. 그리고 그 눈빛은 간절하게 인우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러셔야죠.”


인우는 성균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느끼는 감정의 길을 다르다 하더라도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간절함의 냄새는 자신의 것과 같음을 알았다.


인우는 병훈에게 성균을 부탁하고는 힘겹게 등을 돌려버렸다.


성균이 각종 장치에 의지한 채로 간신히 숨을 내쉬고 있는 딸을 보자 충격으로 몸을 앞뒤로 크게 휘청거렸다.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가 자신의 딸이 맞는지를 재차 확인하는 듯 보였다.


까만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던 어린 딸은 커 가는 모습도 쉽게 보여주지 않더니, 지금은 자신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성균은 그런 딸의 얼굴을 눈에 넣어 버렸다. 이렇게 조용히 자신의 시선을 받고있을 딸이 아니었다.


벌써 돌아서 그림자도 비춰주지 않아야 되는데 딸은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흘리고 있는 눈물도 싫어할 것 같아 성균은 차마 눈물을 흘릴 수도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딸의 손을 쥐어보았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뿌리쳐주기를 성균은 빌었다. 고운 마디마디를 쓸고 있어도 딸은 아무런 거부도 보이지 않았다.


“명현아.”


‘미안하다. 네 이름을 불러서. 싫다면 얼른 깨어나서 부르지 말라고 네 이름 부르는 거 듣기 싫다고 말해다오. 제발.’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애끓는 부정을 말해주듯 초췌해진 그의 모습이 한시도 딸의 모습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성균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맺혀있던 눈물을 떨어내 버렸다.


인우는 자신의 방문을 닫아걸었다.


그는 녹아 허물어지듯이 문을 타고 흘러내렸다. 저대로 명현이 깨어나지 못하고 자신과 눈도 한번 부딪쳐주지 않는다면 자신은 과연 두발로 땅을 딛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인우는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명현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출혈만 멈췄다 뿐이지 모든 장기들이 심하게 손상을 입은 터라 제 기능을 해줄지 의문스러웠다.


그녀의 눈동자를 볼 수 없게 된다.


인우의 생각은 거기에서 멈춰 버렸다. 자신이 잠시 미쳤는지도 모른다. 애시당초 틈을 줘서는 안 되는 생각들이었는데 그 선을 넘고 말았다.


인우는 주저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옷걸이에서 가운을 벗겨낸 다음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


“어때요, 선생님. 아직 의식 회복 못했나요?”


회진을 위해 인우를 기다리며 소영은 초조하게 입술을 뜯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초조했다. 아팠다. 이렇게 명현을 보내버릴 것만 같은 불안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애꿎은 입술만을 피가 나도록 물고 또 물어뜯는 수밖에 없었다.


“후우, 아직.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야.”


한숨을 내쉬며 답답해하는 병훈의 대답에 승수가 머리를 흩트리며 흥분한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어냈다. 너무도 순식간에 불어닥친 불행에 모두가 망연자실했지만, 분노 역시 들끓고 있었다.


“미친 새끼. 어디서 그런 또라이 같은 놈이 술 처먹고 와서 사람을 찌르고 지랄이야. 그 옆에 있던 인턴 새끼들은 뭐 하고 있었대요. 그 새끼들부터 죽도록 패놔야겠어요.”


응급실에 있던 명현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승수의 입에서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동질감, 명현의 소식은 병원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가 막힌 소실일뿐더러,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순식간에 그랬다더라. 말릴 새도 없이.”


억울함을 담은 병훈의 목소리가 비통하게 흘러나왔다. 이미 그 역시 분노를 넘은 절망을 느끼는 듯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명현의 상태를 호전적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기에 표정 역시 음울했다.


“서인우 선생님이 수술하셨다면서요? 그래서 더 심란한 표정이셨구나. 무서워서 물어보지도 못 하겠더라고요. 얼마나 굳어있는지.”


승수의 입에서 인우의 이름이 거론되자, 병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수술대 위에서 발견했을 때의 그 모습과 함께 침착함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모습까지 기억에 스치자 그 참담함을 더욱 깊어만 졌다.


“원래 그렇게 자상하신 분이었어요, 서인우 선생님? ICU(중환자실)에서 밤까지 새셨다는데. 아무리 같은 병원 의사고, 또 직접 수술을 하셨다고 해도 그러긴 쉽지 않잖아요.”


알지 못하고 있었던 대단한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승수가 흥분한 채로 물었다.


“서인우 선생님 결혼 상대자가 윤명현이야. 이러면 이유가 되냐?”


병훈은 착잡한 심정으로 털어놓듯이 놀라운 사실은 전해주었다. 듣고있던 동료들의 눈과 입은 한동안 닫히지 않더니 소영이 먼저 머리를 흔들면서 놀라움을 한번 더 확인했다.


“명현이랑 서인우 선생님이 결혼할 사이라구요? 어떻게 그런 일이…. 아니! 언제부터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영은 재차 물었지만 병훈도 아는바가 없어 뚜렷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그건 나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돌아가면서 명현이 옆 잘 지켜.”


간호사실 저쯤에서 인우의 모습이 나타나자 모두들 하던 얘기들을 속으로 집어넣어야 했다.


***


한차례의 수술을 마치고 인우는 중환자실로 뛰어 내려갔다.


수술실과 한층 차이라 인우의 빠른 걸음으로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다. 그러나 인우는 걸을 수가 없어 달렸다. 몇 개의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 넘었다.


빨리 가서 명현의 얼굴을 봐야할 것 같았다. 자신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시나 그가 안보여 스스로의 끈을 놓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더욱 안달하게 만들었다.


인우의 걸음이 중환자실 문 가까이 다가섰을 때 안쪽에서 그의 부친인 서 원장이 나오는 게 보였다.


인우는 서 원장의 표정을 살폈다.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선배 의사로서 그를 존경했다. 의사로서의 신념과 지켜야할 원칙이 철저하신 분이었다.


그리고 외과의로서 충분히 그 실력을 인정받아온 분이었다. 그런 부친의 얼굴 표정은 인우의 기대를 무참히 무너뜨렸다. 서 원장의 낯빛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했다. 인우는 그래도 묻고 싶었다. 기대를 가지고 싶었다.


“보셨어요?”


“그래.”


인우의 물음에 사무적으로 대답을 하는 서 원장을 그는 간절하게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제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셔야죠.”


애원이었다. 그의 대답에 의지라도 해서 명현의 절망적인 상태를 부인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인우에게는 지금 하나의 끈이라도 절실했다. 그녀를 붙들 수 있다는 거짓이라도 작은 확신만 있다면 견디기가 한결 수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잘 해내겠지.”


희망적인 대답을 할 수 없을 때에 그가 하던 의례적인 답변을 서 원장이 똑같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건 아니었다. 뭔가가 더 있어야 한다는 바람이었다.


“그게 전부입니까?”


의사로서 허튼 희망을 심어주는 일을 하지 않는 서 원장의 말에 그는 절망하고 말았다.


거짓이라도 좋았다. 그저 금방 회복한다는 말 한마디면 당장이라도 기운이 솟아날 텐데, 잘 해내겠지 라는 말은 그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너도 잘 해내겠지.”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는 인우의 어깨를 감싸주며 서 원장은 껄끄러운 음성으로 다독여 주었다.


인우는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했다. 서 원장이 돌아가고도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윤명현이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녀는 삶을 붙잡을 만한 애착의 끈이 있을까. 서인우가 그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자신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고 이겨낼 수 있을까?


도대체 정확한 게 하나도 없었다. 인우는 차가운 벽에 이마를 갖다 대었다. 결과를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되어버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확실하지 않은 나중 시간을 걱정하는 동안 그녀는 힘을 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자 인우는 겨우 중환자실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윤명현, 잘 싸우고 있겠지? 나도 잘 싸우고 있어. 너처럼.’


명현을 발견하자마자 인우는 속엣 말을 그렇게 마음속으로 하고 있었다. 명현의 곁을 지키고 있던 재환이 옆으로 다가온 인우를 발견하고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선생님, 한시간 뒤에 수술 있습니다.”


평소라면 엄두도 못 꺼낼 말을 재환은 감히 꺼내었다. 혹여 잊어버리고 있지나 않을까 하며 수술스케줄을 확인해 주었다. 하지만 하루사이에 핼쑥해진 그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 재환이 고개를 먼저 돌렸다.


“알고있어.”


붉었던 입술이 하루도 못되어 제 색을 잃어버렸다. 소리 없이 엷게 웃어주던 사랑스러운 입술이었는데 벅찬 숨을 내쉬느라 말라 있었다.


차트에 기록되어 있는 그녀의 상태를 나타내어주는 수치들은 오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해주면서 인우는 그날 아침의 기억을 되살렸다. 뻗친 머리칼을 이리저리 쓸어 넘기며 뽀로통한 표정으로 기분 좋은 눈흘김을 하던 명현이 떠올라 인우는 그녀의 볼에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귓가에 속삭였다.


“네 모든게 그리워. 길어질수록 안 좋다는 건 네가 더 잘 알 거야. 빨리 돌아와….”


***


저녁 면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자 중환 자실 앞은 보호자들의 움직임으로 어수선했다. 거기에는 성군의 만류를 뿌리치는 윤 옹의 옥색 한복 자락도 있었다.


“왜 못 보게 하는 것이냐? 대체 어느 정도 다쳤기에 아직도 중환자실에 있는 것이며, 대체 왜 너는 보지도 못하게 내 앞을 막아서는 것이냐?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으니 막을 생각 말아라!”


“아버님!”


“글세, 내 눈으로 확인을 한다잖느냐!”


평소에는 되도록 목청을 높이지 않는 윤 옹이었지만, 손녀의 사고 소식에서는 이미 이성을 잃은 듯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차일피일 그녀의 면회를 허락하지 않는 아들의 변명에 그도 이제는 지쳐가고 있는 중이었다.


눈으로 봐야 했다. 상처를 입어 입원해 있다는 손녀의 면회를 허락하지 않는 아들의 비통한 표정이 괜찮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게 하지 못했다.


“회복이 늦어져서 그런 것뿐입니다.”


앞을 가로막고 그의 움직임을 제지하듯 다시 되풀이되는 성균의 말에 윤 옹은 거칠게 손을 내저었다.


“필요 없다. 물러서거라!”


성균은 윤 옹을 붙잡지 못했다. 강건하다고 하나 여든을 훌쩍 넘겨버린 노구라 한치 앞을 장담할 수 없었다. 비록 일찌감치 어긋나버린 조부와 손녀 사이였지만 명현의 꺾이지 않는 고집스러움과 강단을 윤 옹이 내심 기특해하고 있다는 것을 성균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핏줄이 해를 입는다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는 분이신 데 의식 없이 호흡기에 의지한 채 병상에 누워있는 손녀딸을 보게된다면 아마도 큰 충격을 받을게 분명했다. 그래서 막아섰는데 이미 고집을 피워대는 윤 옹의 발걸음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소독 가운을 입은 윤 옹의 뒤를 성균은 불안한 마음으로 따랐다.


수많은 병상들을 살피면서 자신의 핏줄을 찾기 시작한 윤 옹은 쉽게 명현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어디 있는 게야?”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윤 옹의 눈길이 차마 명현에게 닿지 않기를 기원하는 성균의 바람은 생각처럼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있지 않아 당당했던 발걸음이 한발자국씩 느려지면서 목적지가 입력된 로봇처럼 윤 옹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명현이 누워있는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경련을 일으킬 것 같은 떨림이 윤 옹의 전신에 퍼져있었다.


“이, 이게…!”


살아있다고 볼 수 없었다. 자신이 극심한 화기의 눈길을 쏟아내어도 당당하고 도도하게 다 받아내던 강한 아이였다. 스스로의 의지로 숨도 못 쉬어 저깟 기계에 의지해서 쌕쌕거리고 있을 아이가 아니었다.


윤 옹은 다그치고 싶었다. 혼을 내서라도 깨우고 싶었다. 그러다 얼굴 한 부분이 씰룩 거려지면서 탁한 노인의 음성으로 간신히 말을 꺼내었다.


“네 이놈, 여기서 뭘 하는 게냐? 당장 일어나거라! 명현아, 명현아, 눈을 떠보래도! 네 기어코, 이럴 참이더냐! 네 이놈, 이…놈….”


-죽으면 되겠네요. 그걸 버리려면.


“아버님!”


성균의 다급한 외침이 중환자실을 울렸다. 휘청거리며 균형을 잡기 위해 손을 내젓던 윤 옹의 몸이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손녀가 떨어뜨린 마지막 말은 조부의 심장을 움켜쥐고 짜부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쓰러뜨려 버렸다.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지는 윤 옹의 곁으로 주위에 있던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뛰어왔다.


간호사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오픈 방송이 요란해진다. 의사들의 심폐소생술이 시행되었고,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잠시 후 전기 자극이 이루어졌다.


윤 옹의 몸이 펄쩍 튀어 오르면서 심장박동은 돌아왔으나 그의 정신은 되돌아오지 못했다. 윤 옹은 그렇게 인공호흡기를 매단 채 명현의 옆에 나란히 누워있게 되었다.


***


다른과를 돌고있던 은정은 명현의 사고소식을 접했어도 면회를 할 수 있는 입장이 못되었다.


잠시의 짬도 내기 힘든 인턴 생활이 새삼 원망스러워 눈시울을 적시며 일을 하면서도 내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삼일이나 지난 지금도 주어진 일을 내팽개쳐두고 겨우 중환자실 앞까지 올 수 있었다.


명현의 응급실 사고는 세진병원 내뿐만 아니라 다른 병원의 의사들까지도 긴장하게 만들었고, 그녀가 회복되고 있는 과정을 매우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수술 스케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명현의 병상을 지키고있는 인우의 정성도 병원내의 화젯거리로 매일 떠들썩하게 했다.


은정도 명현과 인우와의 관계를 들리는 소문으로 접하고는 물구나무선 자세로 옥상에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성과의 사귐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던 그녀가 사랑을 하게 되었다는 것도 단순하게는 이해되지 않았는데, 그 상대가 서인우였다는 사실은 은정이 기함을 토하게끔 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만일 명현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면 아주 편안하고 따뜻한 사람일 거라 기대했다. 자신보다 더 차가울 듯한 사람을 택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밝혀진 사실이라 현재로서는 그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인우에게 직접적으로 어떻게 윤명현의 마음을 얻었으며 그리고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어보는 간 큰 짓밖에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은정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작은 미소를 지으며 자근자근 말을 하던 명현의 입술을 통해 그 좋은 소식을 듣고 싶었다.


오후 면회 시간이 아직 남아서인지 의자들의 대부분은 비어 있었다. 들러보지 못했을 때는 동동거리며 안달을 했는데 막상 볼 수 있는 거리에 와 있음에도 은정은 쉬운 동작으로 명현을 만나기 위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차라리 누구를 통해 전해듣는게 나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고 나면 더 답답해질 것만 같았다. 망설임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빈 의자들을 훑어보았다.


자신과 같이 망설임으로 고민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앞줄에 앉아있는 남자의 행동도 예사롭지는 않았다. 연신 얼굴을 쓸어 내리면서 머리를 흩트리고 있었다.


얼굴을 문지르던 손이 치워지자 남자의 옆모습이 은정의 눈에 잡혔다. 분명 낯이 익었다.


‘누구였지? 김은정, 빨리 머리를 굴려봐. 저런 미남자를 몇 번이나 봤다고 기억을 못하는 거야. 어디서 봤지? 저기, 여기요! 얼굴 살짝만 더 돌려주실래요? 이런 경우 기억을 못하면 미쳐버리는 고약한 성격이걸랑요? 조금만 돌려봐요. 에이 참, 더럽게 말 안 듣네. 내가 일어서고 말지.’


은정은 꼭 알아야겠다는 오기로 의자에서 일어나 옆으로 비켜 돌아가는 척을 하며 남자의 정면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반짝하고 그의 안경이 눈에 띄었다. 은정은 그것만으로도 남자의 신원파악을 완벽하게 기억해내었다.


“안녕하세요.”


“…….”


“왜 저번에 명현언니 찾아오셨을 때 봤었죠.”


알은 체를 하는 은정의 말에 그제야 머리를 드는 남자의 모습은 한눈에도 초췌해 보였다. 명현의 이름을 대고서야 볼 수 있는 남자의 모습, 그리고 작은 움직임에 은정의 모든 감각이 곤두서고 있었다.


“아, 네.”


대답을 하긴 했지만, 이내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남자의 모습에서 명현의 심각함이 이내 피부로 느껴졌다.


“명현언니 봤어요?”


“아뇨, 아직.”


명현의 위독함을 듣고 빠른 비행기편을 알아보고 있는 도중 윤 옹의 쓰러짐 소식도 전해졌다. 석현은 명현이 당한 엄청난 일에 대해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앞으로 행복만 해야될 자신의 누나가 그런 믿기지 않는 일로 아픔을 겪고 있다는 게 석현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넌 내게 동생이다. 하지만 널 동생으로 사랑해주지는 못할 것 같아. 미안하다.


한 지붕 아래 살면서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한 명현이 의대 진학을 앞두고 집을 나가기전 그에게 처음으로 던진 말이었다.


석현은 그로서도 충분하다고, 만족하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들려주지 못했다.


그 이후로 명현을 볼 수 있는 날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돌아가신 분의 기일에도 찾아오지 않았다. 바로 다음 해 그도 미국으로 진학을 하게되어 누나인 명현에게 그의 마음을 전할 수 없게 되었다.


머뭇거림을 하며 차일피일 말을 미뤄왔던 석현은 미리 알려주지 못한 자신이 못내 싫어졌다. 차라리 그 말이라도 전했더라면 이렇게 후회되지는 않았을 텐데.


“저기요, 면회시간 되려면 두시간이나 더 남았어요. 식사하셨어요? 아직 전이면 저랑 밥 먹을래요?”


먼길에서 곧장 온게 틀림없어 보였다. 까칠하고 피곤한 얼굴도 그랬고, 옆에 놓아진 배낭을 봐도 공항에서 바로 달려오느라 끼니를 못 챙겼을 것 같았다. 걱정과 초조함으로 가득한 불안한 모습이 은정은 안쓰러웠다.


밥 한끼로 그를 불안감에서 구해주진 못하겠지만 인지상정으로 먹이고 싶었다.


“아뇨, 감사하지만 전 괜찮습니다.”


아주 똑같았다. 두 남매가 거절과 자르는 건 타고난 것 같았다. 권하는 사람이 무안할 정도의 담담함으로 두말도 필요 없도록 거절을 하자 은정은 당황스러웠다.


뭐라고 한마디 붙여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기가 막힌 사정을 당한 입장을 고려해서 은정은 그의 굳은 태도를 이해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아서 기다림의 시간을 동무해 주었다.


***


“서 선생!”


수술실에서 방금 빠져나온 인우를 친구인 진성이 불렀다. 너무 당당해서 때로는 위협적이던 친구의 넓은 어깨가 속이 비어 덩그레 보였다. 힘들어도 그만둘 수 없다던 그의 사랑이 친구의 속을 비워버리게 만든 것 같아 진성은 마뜩찮았다.


옆으로 다가온 진성을 향해 인우는 건조한 목소리를 간신히 꺼내었다.


“수술 있었나?”


진성도 금방 수술을 끝냈는지 수술 마스크가 목에 매달린 채였다.


“응, 어때?”


“잘 됐어.”


마치 로봇처럼 익숙한 대답을 토해내는 인우의 모습에 결국 진성은 감정을 들어내고 말았다.


“너란 놈은 대체…. 내가 지금 네놈이 끝낸 수술이 궁금하댔냐?”


답답한 마음에 진성은 애꿎게 화를 내고 말았다.


“잘 싸우고 있지. 용감하게.”


깎아진 옆모습이 며칠사이 초췌해져 더 날카로워져 팽팽해져있는 그의 긴장감을 드러내 주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드는 희망에 인우의 눈빛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괜찮을 거라는 말을 하기에도 미안할 정도로 인우는 명현의 상태를 누구보다 가까이 곁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위로도 힘들었다.


모든 의료진들이 명현의 예후를 과히 좋게 보고있지 않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는 듯했다. 진성은 어렵게 찾아온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그가 얼마나 마음 졸여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포기해도 그는 그러지 않을거란 걸 알기 때문에 더 속이 상하였다.


“인우야, 힘내라. 좋은 결과가 나온 적도 많이 있잖냐.”


차마 기적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진성은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의 말을 대신했다.


“그래.”


그에게로만 나 있는 길처럼 인우는 한 걸음도 틀리지 않게 정확한 보폭으로 명현에게 향했다. 그렇게 좋아라하는 잠을 자는데도 그녀는 달콤한 표정을 짓고있지 않았다.


자신의 등뒤에서 앉은 채로 잠들어 있을 때는 사탕을 손에 쥐고 자는 아이처럼 달콤해 했었는데 지금처럼 다리를 뻗고 자지도 않았었고, 허락된 시간들이 아니었는데도 그토록 편안해 하더니 지금의 그녀는 아파 보였다.


인우에게는 명현이 너무 아파 싸울 힘조차 없어 보였다. 아픈 명현은 보기 싫었다. 아니, 그렇게 놔두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을 했던 그였다. 그런데 그는 지금 아픔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겨내라며 그녀에게 수없이 반복적으로 되뇌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그의 마음에 틈이 벌어졌다.


그녀는 이미 놓아 버렸는데 자신이 놓아주지 않아 저렇게 아파 보이는 얼굴로 싸우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집착이 그녀의 평안함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우는 입술을 뭉개고 있었다. 이렇게 놔주기 싫은데 넌 아프니 어쩌면 좋으냐고 묻고 싶었다. 제발 내 곁을 떠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과 그녀가 아픔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중적인 마음이 그를 힘들게 했다.


그는 미칠 것만 같았다. 이렇게 놔버려야 하는 건가? 그의 마음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흐느끼듯 흘러나왔다.


‘힘드니? 내 욕심 때문에 많이 아프니? 날 위해서 조금만 더 참아달라면 너무 잔인한가…. 내가 놓아주면 넌 안 아플까? 난 자신이 없다. 널 보낸 다음이 내게 존재할까 두렵다. 하지만 네가 아픈 건 더 못 견디니까. 제발, 제발 편안해라, 윤명현.’


***


‘안 된다.’


윤 옹은 말리고 싶었다. 죽은 며느리가 예쁜 꽃밭을 일구었다고 명현에게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데리고 가야겠단다. 며느리는 단아했던 그 모습 그대로 자신에게 큰절을 올리더니 방긋이 웃었다. 명현이 태어나기 전까지 웃음을 달고 다녔던 고운 며느리였기에 그 웃음 역시 익숙했다.


윤 옹은 자신의 욕심으로 며느리의 삶을 빼앗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며느리가 이해를 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자신의 집에서 며느리는 보란 듯이 목숨을 버려 음울한 기운이 흐르게 만들어 버렸다.


그런 며느리가 윤 옹은 야속했다.


좀 더 강해주지 못했던 며느리가 안타까우면서도 섭섭했다. 어린 자식을 두고 홀로 가버리더니 이젠 데려가야겠다며 찾아왔다.


윤 옹은 소리치고 싶었다. 데려가지 말라고. 그러나 며느리는 명현의 이름만을 계속 불러댔다. 그는 명현을 찾을 수 없도록 감추고 싶었다. 하지만 며느리의 얼굴을 발견하고 명현이 멀리서 반기며 달려오고 있었다.


점점 명현과 며느리의 간격이 좁혀지는 모습에 윤 옹은 애가 닳아 미칠 것만 같았다.


‘안 된다! 가지 마라. 명현아, 가지 마라!’


큰 소리를 내어 명현에게 외침을 반복했지만, 명현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직 제 눈에 보이는 것은 어미뿐인 양 그렇게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었다.


윤 옹은 며느리에게 애원했다.


‘미안하다, 아가. 명현이는 데리고 가지 마라. 그 아이는 여기서 좀 더 살도록 두어라. 제발.’


‘안돼요, 아버님. 우리 명현이 너무 외로워서 안돼요. 불쌍해서 더 이상 혼자 두지 않을 거예요.’


늘 순종적이던 며느리의 얼굴에 고집이 내려앉았다. 더 이상 그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을 하는 그 모습에서는 윤 옹의 마음이 조바심만 가득했다.


‘저 아이 짝이 잘 보살펴 줄 거다. 그러니 여기 두어라. 대신 내가 가 주마. 그래도 괜찮다면 내가 가마. 제발 부탁이다.’


결국 인정하고 말았다. 윤 옹은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그에게 나직하게 대답을 하며 믿음직스러웠던 인우를 떠올리며 며느리에게 말을 했다.


그런 사람이 있으니 명현이는 놔달라고, 사랑을 하고있는 손녀에게 행복을 빌어달라고. 그렇게 절규하듯 간절하게 며느리의 얼굴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순간 영주의 얼굴이 안타깝게 일그러졌다.


‘명현이에게 짝이 있다구요? 안돼요. 그 애가 같은 상처를 가지게 둘 순 없어요. 제가 데려가야겠어요. 그건 너무 아파요. 내 딸을 그렇게 아프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포한이었으리라. 명현을 낳고 더 이상 여자로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선언에 보란 듯이 등을 돌리던 아들의 배신이, 아직도 며느리의 가슴에는 한으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윤 옹은 고새를 숙이고 말았다.


이렇게 보내야 한단 말인가.


절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눈에 보이는 사랑이었다. 자신에게 일일이 설명하듯 말을 많이 하던 사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깊은 눈빛이 명현에게만 고정되어 있었고, 작은 손짓 하나에서도 그 아이를 아끼는 마음이 느껴질 정도의 사내를 손녀에게 쥐어주고 싶었다.


마지막 욕심이라도 좋았다. 행복한 손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는 그것으로 족했다. 지금까지 부린 욕심의 종착점이라 그리 맹세를 하면서 다시 윤 옹은 입을 열었다.


‘그 아이가 원한 일이다. 내가 시킨 일이 아니라, 명현이가 찾은 사람이다. 그래도 데려가야겠느냐?’


순간 며느리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고집스럽게 다물어져 있던 입매가 조금씩 풀리며 진심인지 가늠하는 눈빛이 절박하게 윤 옹에게 다가왔다.


‘믿어도 되나요. 정말 그 아이가 찾았나요?’


‘그래.’


‘전 우리 명현이가 외롭지만 않다면 좋아요…. 안녕히 계세요, 아버님.’


외로이 살짝 등을 돌리는 며느리의 모습에 윤 옹의 가슴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렇게 처량하게 또 혼자 먼길을 보내기에는 마음이 안타까웠다.


더 이상 이 세상에 미련은 없었다. 자식을 데리러 온 며느리의 마음이 그 애정이 현생에서 못해준 죄업과 맞물려 윤 옹을 잡고 말았다.


윤 옹은 한쪽에 서 있는 명현을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얼른 가거라, 너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하지만 명현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며느리에게 꽂혀 움직이질 않았다. 아마도 혼자 먼길을 떠나야 할 모친에게 대한 안쓰러움과 사랑일 것이다.


‘그래, 혼자 보내지 않으마. 너는 내가 표현하지 못한 사랑을 받고 행복하게 살다 오너라. 내가 네 어미와 함께 할 테니.’


소리 없는 윤 옹의 말을 알아들은 듯 명현이 등을 돌리자 그제야 그의 시선이 여태 등을 보이고있는 며느리에게 향했다.


‘아가, 같이 가자. 또 너 혼자 보내려니 안되겠다. 같이 가자.’


‘아버님!’


돌아선 며느리는 잠시 망설이듯 그를 바라보다 활짝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따스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해준 며느리의 수줍은 손짓에 윤 옹은 부드럽게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멀리 이어진 꽃길에 시선을 주었다.


‘이렇게 외로운 길을 너 혼자 보내 미안하구나.’


윤 옹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웃음이 감돌았다.


***


규칙적으로 들리던 기계음이 멈춰졌다. 그리고 심장이 멈췄다는 안내를 하는 소음이 중환자실을 울리고 있었다.


“심폐정지.”


“선생님!”


호흡이 빨라지면서 명현의 심전도가 일직선을 그었다.


그래프를 바라보는 인우의 눈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눈빛으로 호흡기를 바라보던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혈관이 도드라지게 그리고 하얀 관절이 불거진 그 주먹에는 힘이 가득 들어갔다.


배신이었다. 이렇게 빨리 놓을 줄은 몰랐다. 인우는 미치도록 화가 났다. 보내준다고 보란 듯이 뿌리치는 그녀가 미웠다. 내심 좀더 미련을 두길 바랐다. 윤명현답게 매몰차게 돌아서는걸 그는 용서할 수 없었다.


붙잡아둘 것이다. 좀 더 아프게 싸우도록 붙잡을 것이다.


‘안 보내, 못 보내!’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절박함이 그에게 차가운 이성을 돌려놓았다.


인우의 손바닥이 명현의 심장 위를 힘차게 두들겼다. 혈관으로 강심제를 주입하는 동안에도 인우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길에 따라 명현의 가슴이 들썩거렸지만 아직 심전도에는 별다른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다. 손가락을 교차해서 치고 누르기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그의 움직임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


부셔서라도 뛰게 만들 것이다. 자신에게 준 배신감만큼 멍들게 때려줄 것이다. 그래도 안된다면 가슴을 열어 심장을 주물러서라도 돌아오게 할 것이다.


“윤명현, 제발!”


인우는 소리치며 그녀의 가슴에 올려놓은 손위로 온몸의 힘을 실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손등을 더 강한 힘으로 내리쳤다.


“숨을 쉬어, 윤명현, 숨 쉬라고!”


아직도 일직선을 긋고있는 기계음에 귀를 막고 싶을 따름이었다.


‘안 보내! 절대 안돼!’


계속해서 주입되듯 머리에 떠오르는 그 단어만 생각하며 인우는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녀의 헤쳐진 가슴위로 물방울들이 떨어졌다. 인우의 이마에서도 또 눈에서도 쉼없이 떨어져 내렸다.


“선생님! 돌아왔습니다.”


불규칙적이지만 명현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놓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놓아지지가 않았다. 명현의 가슴 위에 올라있던 인우는 그녀의 헤쳐진 가슴위로 쓰러지면서 숨막히는 울음을 토해내었다.


“…고마워, 내게 다시 돌아와줘서.”


그러나 함께 멈춰버린 윤 옹의 심장에는 따뜻한 피가 돌아오지 않았다. 윤 옹의 죽음에 오열하면서도 성균은 명현의 손을 놓지 못했다.


# 18장


지난밤과 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의 심장은 꼬박꼬박 제때에 부지런히 뛰어주고 있었다. 결국은 붙잡아버려 놓고선 자신 없는 허세를 부리고 말았다.


규칙적인 저 소리를 아프게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뛰지 않는 심장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을 때는 제발 저 소리만이라도 가지게 해달라고 매달렸었다.


그녀에게 따뜻함이 돌아오기만을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인우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버린 그녀의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환자복 사이로 손을 넣어 멍든 가슴을 쓰다듬어 주며 말라버린 입가를 그의 입술로 눌러주며 감사해했다.


‘미안하다. 아프게 때려서. 그리고 날 떠나지 않아서 고마워.’


그때였다. 인우의 입술이 떨어지면서 그의 얼굴이 위로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너….”


명현의 검은 눈을 또렷하게 밝혀주는 파란 하늘이 반 이상 열려져 있었다. 그녀의 눈이 돌아와 주었다.


두시간 전 그녀의 심장이 돌아왔듯이.


한 번, 두 번 처음 배우는 동작처럼 느리고 서투르게 명현의 눈은 깜박거렸다. 세 번을 채우진 못했지만 속눈썹의 떨림으로 그녀의 의식이 의지대로 움직이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반가운 그녀의 움직임을 환영하듯 조심스럽게 그가 다가와 섰다.


인우의 서툰 손끝이 그녀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맴돌았다.


“윤명현?”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인우의 음성에 그녀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다시 올려지지는 않았지만 명현이 깨어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윤명현? 윤명현!”


인우의 다급한 외침에 한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명현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힘든 숨을 내쉬고 있었고 불편한지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려놓기도 했다.


그녀가 보여주는 대단한 반응에 긴장으로 굳어있던 인우의 어깨가 한결 풀어지면서 막혀있던 숨을 조금씩 끊어내놓았다. 이제 됐다는 성급한 생각이 물밀 듯 터져나왔다.


“아프니?”


인우는 명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의식상태를 확인했다. 그녀의 눈썹 사이가 좁아지면서 미약하지만 고개를 아래로 끄덕여주어 진통의 느낌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는 좋은 징후를 나타내어준 좁혀진 명현의 미간을 쓸어주면서 자신의 안도하는 마음을 귓속말로 들려주었다.


“잘 찾아와 줘서 고마워.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더 힘내.”


인우가 그녀에 대한 오더를 다시 내리는 사이 병훈이 그를 번갈아 바라보며 별 변화가 없는 모습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인우는 명현의 사고 이후 매일 밤을 중환자실 의자에서 앉은 채로 지새우고 있었다. 수술과 외래를 보는 시간외에는 오로지 그녀만 담고있는 그였다. 아무리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라 해도 이틀 이상 잠을 자지 못한다면 체력이 바닥으로 떨어져 정상적인 일상 생활을 하기가 어렵다.


하물며 낮 시간의 대부분을 수술실에서 보내어야 하는 그로서는 밤의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도, 인우는 명현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 사이 인우의 얼굴은 눈에 띄도록 수척해졌고, 피로감도 엿볼 수 있었지만 늘 그래왔듯이 자신의 일에 관해서는 적은 정도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일지도 모르는 중환자실 생활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도 쉬어야했다.


“선생님, 제가 잠시 있을 테니 쉬고 오십시오.”


인우는 간호사에게 차트를 건네주고 거칠어진 턱 주변을 여러 번 문지르면서 지나는 소리처럼 억양 없이 말을 꺼내었다.


“윤명현, 깨어났다.”


“네? 언제요?”


반가움의 목소리가 조용하던 중환자실을 울리고 말았다.


“지금.”


저녁 면회시간 이후 명현의 심장이 일시적으로 멎었었다는 얘기를 듣고 병훈은 암담함을 느꼈었다.


함께 지내온 동료이기 전에 자신을 잘 따라준 누이같은 후배로서 명현이 안타까웠고 사랑으로 그녀를 지키고 있는 한 남자의 애타는 마음이 무너져 버렸을 것 같아 가슴 아팠다.


그러나 다행인지 기적인지 명현의 심장은 짧은 시간 내에 다시 돌아와 절망의 끝을 희망의 시작으로 바꿔 놓았고 병훈도 그렇게 믿고싶은 마음에 중환자실로 걸음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병훈은 믿어지지 않는 반가운 소식에 환호성을 내뱉었다.


“의식 정도는요?”


“기대했던 것보다 좋아.”


누워있는 명현의 손을 살며시 잡는 인우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병훈의 입가가 슬며시 풀려버렸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명현이 용감하거든요. 빨리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선생님도 좀 쉬도록 하십시오.”


한숨을 놓은 듯 이제는 인우까지 걱정하고 나서는 병훈의 모습에 잡았던 명현의 손을 놓으며 그는 까칠해진 얼굴을 힘있게 문질렀다.


“오늘까지는 내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걱정 말고 가서 너도 쉬어라. 내일 집도도 있을 텐데.”


병훈은 인우의 눈빛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지에서 돌아온 명현이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담는 얼굴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일 수 있도록 그는 지켜봐주고 싶은 거였다. 그리고 자신을 담는 그 순간을 기다리기 위해 곁은 떠나지 않으려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병훈은 그들의 빠른 재회를 빌어주며 중환자실을 둘만 남긴 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


뭔가가 와 닿는 느낌이었다. 부드럽게 감싸고 지나가는 바람 같기도 했고 공기 방울들이 피부에 닿아 터질 때처럼 잘 느껴지지 않은 감촉이었다.


인우는 꿈결 속의 그 느낌이 너무 좋아 낮은 신음소리도 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꿈속인데도 따뜻함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고 멀어지는 아련함이 아니라 자꾸만 가까워지는 친밀한 접촉이었다. 그리고 꿈이라면 이렇게 잡혀지면 안 되는 거였다.


인우는 손으로 그 부드러움을 낚아채었다.


순간 그의 눈도 함께 밀어 올려졌다. 손으로 느끼고있는 감촉을 또렷이 의식해버린 것이다.


명현의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깨끗한 눈망울이 그에게로 향해 있었다. 인우의 손에 잡힌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쓸어주면서 그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깜박임도 없이 오랫동안 눈을 부딪쳐주며 인우의 기다림대로 그의 얼굴을 담고 있었다.


“잘 잔 모양이네, 좋아 보여.”


인우는 침상에 엎드려있던 상체를 일으키면서 그녀에게 익숙한 인사말을 해 주었다. 조금은 쉰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반가움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 명현의 눈동자가 일렁이면서 무언의 말을 전하는 듯 하자 인우의 손이 곧장 그녀의 입에서 호흡기를 떼 내어 주었다.


자주 적셔주었다 해도 명현의 입술을 바싹 타들어가 말라있었다. 인우는 그 입술이 안쓰러웠다. 평소에도 불만이 있을 때마다 곤욕을 당했던 입술이었는데 지금은 더 처참한 상태였다.


그녀는 벌어진 입술을 힘겹게 닫으며 한참동안 스스로 숨을 고르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입모양을 만들어 내었다.


“누구…세…요.”


끊어질 듯 이어지는 짧은 명현의 말에 며칠동안 딱딱해져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던 그의 심장이 이제는 끝없이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가 기다렸던 말은 저렇게 우스운 게 아니었다. 차라리 눈을 깜박여 주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러나 감정이 느끼는 서운함과는 달리 그녀의 눈빛을 인식해 내고있는 그의 머리는 다른 답을 찾아내었다.


그녀의 눈빛은 낯설음을 묻고있지 않았다. 누구인지를 알고있는 확인의 눈빛이었다. 알고서도 묻는 그녀의 물음에 그는 확인해 주어야 하는 대답을 해야만 했다.


“장난치지마. 전혀 재미없어.”


“얼굴이…왜…그래…요. 못 알아볼 뻔…했어…요.”


명현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인우를 쳐다보았다.


“누구 잡으러 다니느라 바빠서 그래.”


길지도 않은 대화로 그는 모든 걸 보상받은 듯한 만족감을 얻었고 웃어줄 수 있는 여유까지 찾을 수 있었다. 그녀가 옆에서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잡았…어요?”


“내가 놓칠 리 없지.”


자신만만한 그의 대답에 명현은 아픈 와중에도 우스운지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


“다행…이네요.”


그녀의 눈 위를 두드리는 새벽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차갑지만은 않은 시원함과 진하지 않은 엷은 빛이 열에 들뜬 자신의 이마위로 스며들고 있었다.


뻑뻑함도 없이 어렵지 않게 눈을 뜰 수 있었다. 반갑지 않은 곳이었지만 눈에 익은 곳이었다. 그리고 눈 감기 전 떠올렸던 따뜻함도 손끝 가까이에 존재해 있었다.


시키지도 않은 손길은 자연스레 제 갈 길로 가고 있었다.


이마위로 쏟아진 머리칼을 쓸어주었고 뻗어 내린 콧날을 지나 또렷한 입술선까지 그녀의 손끝은 멈추지 않았다.


이내 뺨과 턱 쪽으로 움직이던 손이 떨려오면서 그의 턱에서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단정하고 매끈한 턱이었는데 채 다듬지 못한 수염자국으로 거칠어져 자신의 손끝을 아프게 찌르고 있었다. 분명한 선만을 나타내었던 얼굴 옆선을 며칠새 살이 여위어 날카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보내었을 힘든 시간이 명현의 손끝을 통해 전해져왔다.


‘엉망이네요. 당신 얼굴 보며 속상해 할 내 마음을 조금은 생각해주지 그랬어요.’


***


다음날은 명현이 사고를 당한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명현은 중환자실을 나와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그날은 윤 옹의 발인이 있는 날이었다. 식구들이 보이지 않는 상황임에도 명현은 온몸을 찌르는 듯한 고통으로 그것을 의식할 정상적인 사고가 힘들었다.


입술을 짓이겨야 할 정도의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간병인의 호출로 간호사가 놓아주는 진통 주사를 맞은 후에야 몸서리쳐지는 고통에서 살며시 벗어날 수 있었다.


헉헉거리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명현은 수술 들어가기 전이라며 잠시 들른 인우가 해줬던 말을 떠올리며 어쩔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결국은 그가 예고했던 대로 되어버린 셈이다. 참으려 애쓰다 자신의 애꿎은 입술만 터뜨려 놓고 말았다.


‘한동안은 네 입술에서 핏물이 마르지 않겠군. 너무 참으려고만 하지마.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수술 끝나고 나와서 확인할거야. 지나치게 많이 깨물어져 있을 때는 혼날 줄 알아. 알았어?’


똑똑하는 소리 다음으로 이유 모를 표정을 지은 소영이 문을 열고 명현의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소영은 간병인에게 자신이 남아있음을 알려주며 점심식사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어주었다. 간병인이 나가는 기척을 듣고서야 소영은 들고있던 드레싱 통을 내려놓았다.


“환자분 상처 드레싱 하셔야 되거든요.”


기운차고 털털했던 소영의 정감 어린 말투가 아니었다. 적당히 거리감을 두고 개인적인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려는 딱딱한 어조였다. 명현은 갈라지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친구를 불렀다.


“소영아.”


약하고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윤명현 다운 또렷한 의사표현이었다. 아무런 대꾸도 없이 소영은 명현의 상처를 소독하기 위해서 환자복의 매듭을 풀어 열었다.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떼어낸 다음 붕대를 천천히 풀어 마지막 거즈만을 남겨두었다.


두 군데의 작은 거즈들을 먼저 걷어내고 가로방향으로 비스듬히 누운 나머지 거즈를 제거했다. 표정 없던 소영의 얼굴이 상처를 확인하자마자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명현의 상처자국은 소영을 참을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참혹할지 몰랐던 당황스러움이었다.


“아프겠다. 흑흑…. 나쁜 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나쁜 놈. 죽일 놈.”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소영은 명현의 상처를 소독하면서 나쁜 놈만을 잇따라 찾아댔다. 그녀의 눈물에 명현은 먹먹한 가슴을 애써 부여잡을 따름이었다.


“울지마. 더한 상처도 봤으면서 이 정도 가지고 왜 그래. 너답지 않아.”


명현은 상처를 보며 가슴 아파하는 소영에게 자신은 괜찮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자신의 상처로 친구가 아프게 우는 건 싫었다.


“뭐? 이게 이 정도야? 네 몸에 난 상처라고. 그런 소리가 뱉어져? 나다운 게 뭔데? 친구의 상처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하게 쳐다봐야 되는 게 나다운 거야?”


소영의 눈이 원망스러운 듯 명현에게 꽂혔다. 


잠자코 있던 명현의 손이 소영의 손을 잡아주었다. 괜찮다는 신호처럼 명현은 잡은 손에 힘을 주었고, 이윽고 흥분을 했던 소영의 얼굴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도 한마디 말도 해주지 않는 친구를 향해 여전히 헤헤거리며 농담을 지껄이는 게 나다운 거야? 그게 무슨 숨길 일이냐구. 네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걸 내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겠니? 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


“…….”


명현의 눈동자가 잔잔하게 일렁거리면서 그녀는 쉽게 대답을 들려주지 못했다.


8년을 늘 함께 했던 친구였다. 작은 일에서 큰일까지, 또 사소하거나 혹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걸 자신에게 들려준 정이 많은 친구였다. 명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미안함만이 가득했다.


“미안하다. 아픈 애 붙잡고 내가 미쳤나보다. 그냥 화가 나네. 안 그러려고 했는데, 네 상처 보니까 함께 섞여서 터졌나 보다. 미안하다. 이럴까봐 선생님이 다른 사람에게는 네 상처를 보여주지 않았나 보다.”


하얀 살결 위에 붉게 어지럽혀져 있는 봉합 부분을 바라보며 소영은 그렇게 인우를 두둔하고 나섰다.


“수술만 아니었다면 아마 나도 볼 수 없었겠지. 중환자실에서도 네 상처 드레싱은 선생님이 했다는데. 다들 널 그렇게 바라보는 게 싫으셨던 모양이다. 나도 본 걸 후회해. 차릴 보지 말걸…. 시간이 좀 늦어져도 선생님이 하게끔 두는 건데.”


명현은 친구의 화를 풀어주고 싶었다. 한없이 너그러운 친구인데 많이 서운했던지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까지 쏟아냈다.


드레싱을 끝내고 붕대를 둘러주고 있는 소영의 손을 명현은 잠시동안 멈추게끔 자신의 손으로 막아버렸다.


“가만히 있어, 거의 다 끝났어.”


“미안해, 소영아. 네 마음 이해해. 내가 나빴다. 일부러 숨기려고 그랬던 건 아니야. 음, 그냥 내겐 그 시간들이 평화였거든. 단지 난 그 평화로움을 좀더 오래 가지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이해해주면 안될까?”


막고있던 명현의 손을 밀쳐내고 남아있는 붕대를 끝까지 둘러 꼼꼼하게 테이프를 붙여준 소영은 아직 기대어 앉지도 못하는 명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퉁명스럽지만 살가운 눈치를 주었다.


“하여튼, 갖다 붙이기는. 나중에 낫거들랑 두고보자.”


“그래, 두고보지 말고 꼭 복수하도록 해. 기다릴게.”


소영은 부서질 것 같은 모습으로도 웃어주는 명현의 뺨을 정답게 쓸어주고는 병실을 나왔다.


***


가을임을 물어오는 비가 제법 또닥거리며 창문에도 부딪쳐 기다란 물줄기를 여러 갈래 만들고 있었다. 일어날 수만 있다면 손을 내밀어 만져볼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없다면 창문이라도 열어 땅에 떨어지는 물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그리고 빗물이 흙바닥을 패이게 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지게 만드는 비릿한 비 냄새도 맡고 싶었다.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간절함이 명현의 답답한 마음을 건드렸다.


“비와 사귀나? 뭘 그렇게 애절하게 쳐다봐.”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을 수 없을 만큼 명현은 무언가에 집중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옭아맨 것은 아무래도 하루종일 뿌려대듯 내리고 있는 비인 것 같았다. 인우의 시선도 명현을 따라 밖으로 향했다.


명현이 유독 비를 좋아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지금의 표정으로 봐서는 그 대답을 본인에게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간절하게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만지고 싶어서요. 좀 만져보면 안될까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앉을 수만 있어도 문제될 건 없는데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전혀 못되었다.


잘못하다가 상처가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고통이 배가 될 것 같아 인우는 그녀의 부탁을 단숨에 자르기로 했다.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면 도와는 주지.”


인우는 창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명현의 눈을 손으로 가려버렸다.


“그럼 창문이라도 열어줘요. 답답해요.”


자신의 눈을 가리고있는 인우의 손을 살며시 문지르며 명현은 부드럽게 졸랐다. 본인이 의사이면서도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조르고 있었다. 인우는 그녀의 눈을 가리고있던 손을 내리면서 무섭게 말했다.


“더 설명을 해줘야 되나? 왜 안 되는가를. 폐렴이라도 오면 꼼짝없이 중환자실 들어가야 되는 거 몰라?”


“30초만, 숨만 한번 들이쉴게요.”


명현은 그에 대한 미안함과 서운함이 섞여버린 얼굴로 간절히 부탁했지만 돌아온 그의 대답은 완강했다.


“안돼. 어디 가셨어?”


환자 옆을 지켜야 될 간병인이 보이지 않자 인우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녀를 혼자 두기 싫은 그의 마음이기도 했다.


“필요한 것 때문에 아래에 잠시 내려 가셨어요.”


명현이 입술을 축이며 이유를 설명하자 순간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인우는 누워있는 명현의 얼굴을 정면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자세로 그녀의 머리 옆을 손으로 내려 짚었다. 혼을 내기라도 하려는지 그의 눈이 엄한 빛을 띠었다.


경고를 했음에도 고집을 부린 흔적이 그의 눈에 선명한 색깔로 들어오자 그의 낮게 울리는 음성이 엄중히 흘러나왔다.


“입술을 아주 짓이겨놨군. 오더(order)대로만 해서 고통이 줄어든다면 의사와 간호사가 왜 필요한 거야. 고통이 정해진 규칙에 따라 오는 건가? 그러지 말라고 분명 다짐받고 갔을 텐데. 안 그래? 윤명현.”


단단히 화가 나 있는 어투에도 걱정이 들어있음을 느낀 명현은 손을 들어 그의 야윈 뺨을 어루만져 주며 걱정의 깊이를 덜어내 주려했다.


“몰랐어요, 그 정도일 줄은….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이제부턴 안 그럴 게요. 약속해요.”


출혈된 만큼의 수혈이 이루어졌어도 명현의 낯빛은 도무지 혈색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했고,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손에도 몸속에 피가 돌아다님을 부정하는 빛깔과 서늘함만이 가득했다.


인우는 자신의 손으로 명현의 손을 감싸쥐며 입술위로 가져와 손바닥 곳곳을 눌러 주고는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이렇게 라도 그녀의 체온을 느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행여 무게가 실릴까 그는 가슴도 닿지 않도록 가볍게 명현의 어깨만을 살짝 들어 안아주더니 얼마 있지 않아 조심스럽게 감았던 팔을 풀어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뭔가 중요하게 할말이 있는 듯 보이는 그의 표정에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했다.


“할말 있어 보여요. 뭐예요. 혹 장기 하나를 없애버렸나요? 그게 뭘까 궁금하네.”


명현은 불안했다. 자신을 염려하는 듯한 그의 눈빛으로 봐서는 사소하게 넘길 일은 아닐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도 직감적으로 뭔가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가족이라는 굴레로 엮어진 사람들의 일이 분명할 것이다. 그녀는 의식이 돌아온 후 가족들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의식이 별로 없었던 순간, 그리고 고통이 엄습하던 그 순간 동안 그녀의 곁을 지켜야 했을 가족 대신 간병인이 있던 것도 이상했다. 하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불안함의 실체를 직접 확인하는 시간을 애써 뒤로 밀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해가 되는 건 절대 보지 못할 분인 윤 옹의 모습부터 딸의 일이라면 눈빛이 달라지는 부친인 성균의 모습. 모두 보이지 않고 있었다.


명현은 차분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음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보여주었다.


“엄청난 일인가 보네요. 그런 표정은 처음 봐요. 누가 돌아가셨군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재차 확인하는 그녀의 건조한 목소리에 인우의 손이 그녀의 핏기 없는 얼굴을 쓸어주었다. 아프지 말라고 미리 조치를 해주는 것처럼 부드러운 손짓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오늘 발인이었어.”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건강하던 분이 하루아침에 돌아가셨고, 그녀의 의식이 없던 차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유가 뭐죠.”


그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명현은 본능적으로 짐작을 하고 있었다. 분명 자신과 관계된 일이라는 것을.


“심장마비.”


더 이상의 말도 않고 그녀를 바라보는 인우의 눈 속에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충격을 받지 말았으면 하는 안타까움 역시 그녀가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주는 힘이 되어 주었다.


“나 때문이군요.”


인우의 눈에 그녀는 건조하지만 뜨거워 보였다. 뚜렷하게 드러내지도, 그렇다고 속으로 밀어 넣지도 않는 무상(無想)의 감정 상태로 창밖만을 향하고 있었다.


# 19장


“집을 나가겠습니다. 할아버지께 허락을 구하고자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제 결정을 알려드리는 것뿐입니다.”


회색의 모직 스커트를 흐트러짐 없이 무릎 아래로 밀어 넣고 그 위로 하얀 손을 얌전하게 포개어 놓은 명현의 얼굴에는 확고한 결심만이 남아있었다.


한 갈래로 묶인 머리가 뒤 목선을 따라 적당한 길이로 흘러 있었고, 좁은 어깨가 범접할 수 없는 고집으로 꼿꼿하게 펴진 채로 명현은 윤 옹의 노기를 빠짐없이 받고 앉아있었다.


“뭘, 집을 나간다? 네 집이 여기 말고 또 있었더냐!”


고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의지에 걸맞는 고집이 있었다. 아비인 성균과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무관심을 떠나 무심의 기색을 띠었지만, 윤 옹은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명현의 숨겨지지 않는 당당함이 대견스러웠다.


남자든 여자든 모쪼록 사람에게는 기지(氣志)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자신의 손녀에게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맑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반감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윤 옹은 그 기운이 날카로움으로 변해 항상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운하다거나 괘씸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엇나감 없이 제 몫 하나는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그릇으로 커 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염려를 접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제때 좋은 자리를 찾아 성혼까지 시킨다면 어른으로서의 할 일은 다 한 것이라고 윤 옹은 믿고있었다. 그런 기대를 하고 있었던 윤 옹에게 명현의 일방적인 통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거스름이었다.


“여긴 제 집이 아닙니다. 보호를 받아야 할 나이라 어쩔 수 없이 머물게 된 곳일 뿐입니다.”


“여기가 왜 네 집이 아니란 말이냐! 양연당은 윤씨 종가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그런데 윤씨 종가의 장녀인 네가 양연당이 네 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느냐!”


호통을 치는 윤 옹의 말에도 꿈쩍 않고 명현은 나직하게 대답을 내놓고 있었다.


“저는 일찌감치 윤씨임을 부정하고 지내왔습니다. 제 사람을 버려가면서까지 지켜야만 되는 윤씨라는 성을 저는 거부합니다. 제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은 할아버지가 더 잘 알고 계시니 더 이상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윤 옹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명현은 원래 성격상 차분하고 진지하다고만 생각했었지 저런 구덩이를 파고 혼자 들어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게다가 윤씨임을 거부하겠다니…!


윤 옹은 모든걸 용납한다고 쳐도 핏줄임을 거부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당치도 않는 말은 입밖으로 내뱉는 게 아니다. 안 들은 걸로 할 테니 너도 그리 알고 물러 가거라!”


명현은 웃음이 났다. 허락의 의미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는데도 자신의 조부는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이곳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또 당당하게 벗어날 수 있는 이 시기를 어떤 절박한 마음으로 기다려왔는지를 밝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럼 당치도 않는 말의 이유를 제 입으로 말씀드리면 이해를 하실런지요. 저는 할아버지의 핏줄임이 수치스럽습니다. 그리고 윤성균의 딸임이 증오스럽습니다. 더 보태지도 않은 제 마음입니다. 절 붙잡을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제게는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으니까요. 여러번 죽고 싶을 만큼.”


씁쓸한 웃음이 명현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당신의 고집으로 인해 여러 사람의 삶이 의미 없이 망가졌는데도 인정하지 않는군요.’


명현은 윤 옹의 찌를 듯한 노기를 조용히 밟으면서 양연당을 나왔다.


***


저 어둠처럼 모든걸 덮을 수 있는 짙음이 부러웠다. 선명하게 남아있는 강한 기억들을 이제는 덮고 싶었다. 원망이나 미움이라는 사치스러운 단어도 쓰기 싫었다. 그리고 이제는 대상도 사라져버린 후였다.


자신을 존재하게끔 한 그들을 부인하고 선택할 수 없었던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뜻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끝까지 부정하려고 애써도 마지막 고리는 항상 풀어지지 않았다.


‘당신과 연결된 고리를 제 힘으로 끊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발버둥을 치는 절 배려하지 않으시고 당신은 끝내 마지막까지 묶어두고 가셨군요. 잔인하게도.’


닫힌 창문을 뚫고 낮보다 굵어진 빗방울 소리가 명현의 심장을 조급하게 보채고 있었다.


‘흙이 씻겨 내려갈 텐데….’


오늘이 발인이라 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다른 무엇을 끌어 모으려 해도 늘어나지가 않았다. 억지를 쓰고있는 머리를 자신의 마음은 따라주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모질게도 슬프지 않으니까.


싫은 분이었고, 미워하던 분이었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빗물을 따라 가셨으니 싫어도 기억은 하게 될 것이다. 끝내 거부할 수 없는 핏줄의 끈은 어쩔 수 없이 이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명현은 한쪽 팔로 눈을 가려버렸다.


똑똑.


문을 열고 두드리는걸 보면 처음 것은 자신이 못 들은 게 분명했다. 스며들지 못한 물방울들이 검정색 양복에 매달려 투명한 빛으로 잠시동안 머물러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석현에게서 그토록 맡고 싶었던 비 냄새가 물씬 나는 것 같았다.


처음 볼 때부터 자신보다 훨씬 컸던 동생이었다. 키도 그랬고 의젓함도 그랬다. 한 지붕 아래 함께 살게 되었을 때도 예리한 유리조각 같았던 자신과는 달리, 동생은 부드러운 심성으로 스스로를 키워가고 있었다.


5년 남짓의 시간동안 몇 마디의 말을 나눈 게 전부였지만 석현과의 사이는 불편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붙잡고 있는 곳에서 벗어날 때까지 서로에게 무언(無言)의 힘으로 지지를 보내는 동지로서의 역할을 해주었다.


“가까이 와.”


성큼 다가오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석현의 눈은 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혼자의 힘으로 숨도 제대로 못 쉬던 누이가 변함없는 목소리로 자신을 불러주고 있었다. 그것이 믿기지 않았는지 바라보는 눈망울에 진한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의식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긴 했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온전하게 돌아왔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고마움이 우선이었다.


석현은 삶을 다시 선택해준 누이의 의지가 고마웠다. 그리고 안타까웠다. 명현은 아픔으로 기운을 잃어버린 듯 침상 안으로 꺼져 버릴 것 같았다. 석현은 어떻게 해줄 수 없음에 다가설 수조차 없었다.


“아파 보여.”


달싹이는 입술을 바라보며 명현은 비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윤 옹이 묻혀있을 그 산기슭의 흐릿한 흙냄새도. 그리고 앞으로도 흐려질 수 없는 이 날의 잔상을 예감했다.


“그래, 하지만 어제보다는 아니야. 그러니 내일은 더 좋아질거야. 좀, 앉아줄래? 올려다보는 거 힘들어.”


내색하진 않았지만 자신 때문이라는 자책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모질고 독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새삼 핏줄의 위력을 내세워 거짓의 슬픔을 만들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어? 미안. 왜 혼자 있어?”


석현의 시선이 누이를 제외하고 빈 공간을 훑고 지나갔다.


병원에서 본 누나의 그 사람은 한마디로 거대한 산 같았다. 결혼할 사람이라며 어른들께 인사를 다녀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석현은 관심을 넘어서 호기심이 생겨났다.


누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결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과도 같았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철저하게 거부하듯 가족들에게도 일정 거리를 유지하던 그녀였다.


가능하지 않은 일을 현실화시킨 사람이 석현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했고 또 만나고 싶었었다.


좋은 계기는 아니었지만 중환자실에서 본 남자의 첫 느낌은 웅장한 산 같았다.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깊은 눈으로 누이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그랬다. 마음만 졸이며 어설프게 서 있는 자신과는 달리 자신감과 완벽한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완전한 어른이었다.


“누구? 아, 저녁 회진 시간이야.”


명현은 석현의 눈이 누구를 찾는지를 알아채고는 대답을 해주었다.


“내가 마음이 놓인다는 말을 해도 돼?”


조심스러운 물음. 형제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거리를 좀처럼 허용하지 않았던 그녀에게 묻는 동생의 물음이었다. 자격이 되냐고, 동생의 이름으로 서도 되겠냐는 물음 같아 명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랬니? 전해줄게. 잘… 보내드렸니?”


명현이 먼저 말을 꺼내었다. 석현의 양복에 묻은 빗물이 눈에 들어 왔을 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마지막이라도 편한 모습이었냐는 작은 물음은 입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응. 괜찮지?”


“그럼, 비가 많이 와서 고생했겠구나. 힘든 일을 네게만 남겨두어 미안하다. 석현아, 다 올려놓고 있지마. 내려놓고 싶은 건 네가 알아서 내려놔. 우리 더 이상은 고통받지 말자. 나는, 그러고 싶어. 끊어지지 않는다면 내려놓기라도 할거야.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당부였다. 그리고 그녀가 내보일 수 있는 애정이었다. 사랑을 하고 누군가를 마음에 들여놓다 보니 생긴 관영이기도 했다. 자신 역시 그렇게 하려는 다짐이 섞인 말을 명현은 그렇게 털어 내고 있었다.


“그럴게. 지탱할 수 있을 만큼만 가지고 있을게. 내가 누나보다는 힘이 세니까.”


원래부터 강해 보이던 석현이었다. 애써 강해지려고 노력한 그녀와는 달랐다.


“맞아. 네가 나보다 강하지. 그래도 힘은 들어. 매이지 말고 자유로워져서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


“사랑…해?”


석현은 누이의 마음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누이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게 무엇인지. 자신의 마음을 안심시킬 수 있는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 사람으로 인해 평화를 얻고 가슴 아플 만큼 좋은 감정이 생겨나는걸 그렇게 부른다면, 사랑해.”


명현은 스스럼없이 인우에 대한 사랑을 석현에게 털어놓았다. 동생이니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기에 누구에게보다 먼저 알려주고 싶었다.


“축하해야 될 일이야. 누나가 사랑을 받아들인걸 축하해. 앞으로 축하할 일들만 생기게 행복해져. 뭐든 잘 하니까 그럴 수 있지?”


“그래, 노력을 해서 더 좋아진다면 노력도 해볼게. 그러면 네 걱정도 줄겠지? 안심해. 다 잘될 거야.”


지나치게 차가워 오히려 위태하게 보였던 누이의 눈동자에는 따뜻함이 넘쳐 있었다.


사랑이 맞았다. 희미하고 어슴푸레한 감정으로서가 아니라 이미 정확하게 자리까지 잡아 무한의 에너지를 보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애잔했던 시간들을 희석시킬 수 있는 강한 기쁨의 순간들이 자주 생길 것이고, 혼자서 아파했던 것들이 이제는 위로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석현은 목안이 따끔해지면서 숨이 차올라 가슴을 크게 들썩여야 했다.


‘이젠 마음껏 행복해져, 누나.’


***


벌써 며칠이 지났는지 모른다. 명현은 자신의 옆 또 다른 침대 위에 누워있는 기다란 그림자를 보았다. 늘 그 자리를 지키는 나무처럼 그 그림자는 변함없이 우뚝 서 있었다.


이제는 웬만큼 혼자서 걸을 수도 있게 되었는데도 인우는 돌아가지 않았다. 보호자용으로 마련된 침대라 해도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는 조건은 못 되는데도 그는 쉽게 적응을 하는 것 같았다.


명현은 시트 밖으로 빠져있는 그의 팔이 신경 쓰였다. 가을로 접어든 새벽녘은 몸을 움츠리게 할 정도의 신선함이 돌아 자연스럽게 덮을 것을 찾게 만들었다.


그녀는 링거줄을 조심스럽게 당겨가며 인우에게로 다가갔다. 허리쯤에 내려진 시트를 어깨 위까지 살며시 올려주었다. 한기를 가려주는 온기를 반기듯 그의 몸이 웅크려지며 이불을 말아 쥐고 있었다.


한동안은 깊은 잠을 못 이루더니 그녀가 힘들게나마 혼자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자 비로소 휴식을 취하는 잠을 이루는 것 같았다.


명현은 가슴속이 무거워져 비워낼 수가 없었다. 텅 비워버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하여 그는 더 깊고 넓은 사랑을 해야했고 슬픔이 배여버린 자신의 가슴을 품어주느라 그는 심장의 따가움을 버텨야 했다.


그런 그에게 명현은 무던한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다. 웃어주며 손을 내밀어 만져주기도 하고 먼저 안아주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채 주지도 못하고 큰 아픔만 하나 더 얹어줘 버렸다.


그는 자신의 피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심장이 녹을 만큼의 간절함이 생겨났었고 자신의 심장이 멈췄을 때에는 사랑에 대한 분노와 배신으로 괴로웠다고 했다.


날카로워진 얼굴만큼이나 그의 가슴도 걱정으로 야위었을 것 같아 명현은 저릿한 심장부위를 어루만져야 했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당신은 항상 슬프고 아프기만 하네요. 그러게… 잡지 말지 그랬어요. 당신은 더 예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런데 어쩌죠, 이젠 내가 못 놓을 것 같은데. 이렇게 당신 얼굴 바라보는 게 너무도 좋아져 버렸어요. 미안해요.’


미안함의 눈물이 명현의 야윈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을 들어 그의 까칠한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단잠을 깨울까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닿을 듯한 거리에서 멈춰져있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눈물로 내쉬어지기만 했던 숨이 그녀의 입속으로 다시 모아지면서 생긴 작은 바람이 인우의 이마 위에 흩어져 있던 머리칼을 살짝 흔들어 놓았다.


호흡만으로 숨이 갈무리되지 않은 명현은 자신의 손으로 입술을 누르면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그러나 소리 없던 눈물은 이내 떨리는 흐느낌으로 변해버려 그녀는 급히 등을 돌려야만 했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그녀의 손으로 훔쳐내기에는 벅찰 정도였다.


잠결 속에서도 어렴풋이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참는 듯한 숨소리가 들리더니 간혹 한숨처럼 깊은숨을 내쉬기도 했다. 인우는 여기가 어딘지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병원이었고 명현의 병실이었다. 그 결론과 함께 감겼던 눈이 단번에 떠짐과 동시에 빠른 동작으로 몸이 일으켜졌다. 문 근처의 실내등이 조용한 떨림이 있는 좁다란 등을 비춰주었다.


“왜 그래?”


왜 저러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건지 인우는 불안했다.


그래서 재빨리 팔을 뻗어 명현을 돌려세웠다.


흐르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한 채 손으로 입을 힘껏 누르며 그녀는 떨고 있었다.


인우는 그녀의 입에서 손을 떼어내면서 자신 쪽으로 천천히 끌어당겼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의 안색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아파서 우는 거 같지는 않은데. 왜 그러고 서 있었어?”


그는 명현의 눈물을 따뜻하게 훔쳐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그의 손끝을 타고 작은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이젠 집에 가서 쉬어도 괜찮다고 했잖아요. 왜 여기서 그렇게 불편한 잠을 자고 있어요.”


명현의 속상함을 애써 누르며 달갑지 않은 목소리로 그의 불편함을 일깨워 주었다.


“불편하지 않아. 그리고 너 혼자 두고는 이제 안가.”


“흑흑….”


명현의 소리 죽였던 울음이 그때를 시작으로 조금씩 밖으로 터져 나오자, 인우는 싱긋 웃으며 그녀를 품으로 당겨 지그시 안아주었다.


“내가 이러고 있는 게 속상한가 보군. 네가 사라질 뻔했던 시간들에 비하면 내게는 천국 같은 시간이니까 속상해 하지마.”


“그래도 속상해요. 이렇게 흐트러진 머리도, 까칠한 턱도, 홀쭉해진 뺨도… 전부 다 속상해요. 내일부터는 들어가서 자요. 그렇게 해요. 네?”


인우는 울먹이면서 부탁하는 명현을 자신의 품에서 잠시 밀어내고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윤명현, 그날 말이다…. 내게는 가장 후회스러웠던 날이었고, 네게는 가장 아픈 날이었지. 넌 내가 병원에 도착해서 널 보기 전까지의 마음을 알지 못해. 그리고 수술실에 누워있는 널 볼 수밖에 없었던 내 마음도 알지 못할 거다. 한 조각의 숨도 제대로 뱉을 수가 없었다. 아, 이렇게 미쳐가는구나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지.”


마치 그때의 상황을 눈으로 보기라도 하듯 인우의 숨결이 거칠게 흘러나왔다. 그녀로서는 알지 못하는 그 상황의 급박함과 그가 느꼈을 아픔이 고스란히 경직되어 있는 몸의 상태로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었다.


“네가 흘리는 피를 보지 못했다면 아마 난 미쳐 있었을 거야. 아마도 네 피를 멈추게 해야된다는 사실이 날 붙잡았는지도 모르지. 그랬던 내게 넌 왜 행복을 뺏으려는지 모르겠군. sp 옆에서 잘 수 있는 게 내가 잠시라도 쉴 수 있는 시간이야. 그걸 막지마.”


그날의 절박했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자 명현의 심장은 누가 비틀어 놓은 것처럼 아릿해져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을 유발했다.


그녀의 몸이 움찍하면서 앞으로 숙여지자 인우의 팔이 명현을 힘주어 받쳐 안으며 화가 난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얼마나 그러고 서 있었던 거야! 네 마음 속상한 게 내 피 마르는 것보다 중요해? 더 말라야 할 피가 남아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죄여오는 고통으로 가빠진 숨을 고르고 있는 명현을 인우는 조심스레 들어 안아 침상위로 눕혀주자 그녀는 허리를 말은채 다시 옆으로 돌아누워야 했다.


피곤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그녀에게는 속상함과 안타까움으로 맺혀져 마음을 무겁게 했다는 것이 인우는 끝내 못마땅했다.


“누가 너더러 그런 걱정하라고 했지? 조금 피곤하다고 내가 죽어? 좀 마른다고 내가 죽느냐구! 넌 아니잖아. 넌 죽을 수도 있었어. 그거 알아? 내 눈엔 네가 꼭 죽을 것만 같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아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어.”


“화내지 말아요.”


그를 향한 명현의 음성이 애잔하게 젖어 있었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듯 꼭 잡은 허리에 힘을 주는 인우의 마음이 잡힐 듯 아스라이 명현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의식이 없는 자신을 붙잡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직 그의 노력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명현은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난 여전히 불안해. 일어나 앉을 수 있고,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됐더라도 내겐 아니야. 그러니 제발 내가 걱정스럽다면 그런 마음은 나중으로 미뤄둬. 그때가 되면 조금씩 철저하게 보상받을 테니까.”


항상 그의 마음보다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녀에게는 의식이 없었던 시간들과 상처의 아픔으로 인한 고통의 시간들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 순간을 견디기 위해 끙끙대느라 지켜보는 사람들을 염두에 둘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든걸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불안해하며 가슴을 쳤을 것이다.


“이젠 미안하다고도 않을게요. 같이 있어요. 나도 그러고 싶어요.”


명현의 손이 먼저 내밀어졌다. 허리에 올려져있는 그의 손을 끌어당기며 그녀의 옆자리를 탁탁 건드렸다. 그리고는 한쪽에 있던 베개를 그의 쪽으로 밀었다.


“자요. 좁지만 여기서 자요. 내가 깨웠으니까 재워줄게요. 믿어요. 아무 짓도 안할테니까.”


어느새 눈과 입을 살며시 움직이며 소리 없이 가볍게 웃어주는 명현의 코를 인우는 제법 세게 쥐었다가 놓으면서 다시금 조용해진 목소리로 그녀를 놀렸다.


“믿을 필요도 없겠군. 네가 아는 아무 짓은 전혀 무섭지 않아.”


***


인턴에게는 일요일도 없었다. 자투리 시간이란 거의 생명수와도 같다. 그 짧은 시간은 간절했던 무엇을 이뤄지게 해 행복의 순간을 맛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은정에게도 잠시동안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뭘 해야지 가장 뿌듯한 기쁨을 가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명현의 병문안이 남은 몇 가지를 제치고 선택되는 행운의 일이 되었다.


점심때가 지났으니 환자에게 이른 시간도 아니고 드레싱도 끝났을 시간이라 은정은 망설임 없이 노크를 했다.


“명현언…, 헉!”


채 열지도 못한 문을 조심스럽게 닫아주면서 은정은 갑자기 붉어지는 자신의 볼을 손바닥을 눌렀다. 막연히 잘 어울릴 거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저렇게 다정한 모습으로 아름다울 줄은 몰랐다.


명현의 등을 감싸 안은 채로 좁은 침상을 메우고있는 인우의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부드러움이었고, 둘의 잠은 천상의 잠처럼 지극히 고요해 보였다.


은정은 아직도 가슴이 설레어 쉽게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명현의 행복 한 단편을 살짝 훔쳐본 것처럼 심장이 크게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뭐해요?”


“네?”


지나가던 간호사가 멍하니 서서 얼굴에 손을 대고있는 은정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은정은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무심한 눈빛을 가장하고 서 있던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몇 걸음을 걸었을까. 단아한 감색의 투피스를 입은 중년의 부인이 살짝 그녀의 곁을 지나치고 있었다.


왜 그녀가 은정의 시선을 잡았는지 이유는 몰랐다.


‘어, 거기는 더 이상 다른 병실이 없는데?’


은정은 생각이 거기에 미치는 순간 몸을 재빨리 돌렸다. 그러나 이미 중년의 부인은 병실문을 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휴일의 안식을 취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 그 천상의 모습을 발견한 사람이 또 있다는 것이 야릇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어머!”


역시 그녀와 같은 반응이었다. 슬쩍 입꼬리를 타고 은정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혹시나 문이 소리가 날 새라 조심스럽게 닫는 모습에서 은정은 한시름을 놓을 수가 있었다. 아직은 그들을 깨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던 모양이었다.


일요일, 그들도 일상에서 벗어나 서로의 체온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그리고 그 존재가 명현이어서 더 간절했을지도.


‘언니, 행복해 보여.’


***


결혼식 날 며느리와 첫 대면을 한다는 것이 도무지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김 여사는 아들의 당부를 잠시 접어두고 병원 로비로 들어섰다.


함께 인사 오겠다는 날짜를 정해놓고 사고가 나 버렸다. 남편인 민준으로부터 위독한 상황이라는 얘기를 전해듣고는 사랑스러운 젊음이 아까워 먹먹한 가슴으로 한참을 있어야 했다.


그 뒤로는 아픈 눈으로 모든걸 지켜보고 있을 아들이 떠오르자 한시도 제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안부전화 때 넌지시 떠보았던 아들의 마음은 이미 제 것이 아닌 듯했는데, 곧 그 사랑을 잃어버려야 된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움과 초조함에 가슴을 동동거려야 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회복이라는 기적의 소식이 들려왔고 위급한 순간이 있었음이 무색할 정도로 좋아져 가고 있다는 말에 한시름을 놓은 터였다.


반가운 마음과 보고싶은 마음에 조용히 만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퇴원과 동시에 결혼을 할 테니 준비를 서둘러 달라는 아들의 전화가 왔었다. 서두름을 나무라면서 제대로 된 준비의 시간을 요구했지만 아들의 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아들이 살고있는 빌라를 다시 단장시켜 가구와 침대를 새로 들여놓고 소소한 살림살이 등도 꼼꼼하게 갖추어 놓았다.


그 사이 아들의 주재로 사돈들과의 만남도 있었는데 마치 보쌈이라도 해 오는 듯한 민망함에, 갖추어진 인사도 하지 못했었다.


그리하여 놓친 건 없는지 꼼꼼히 챙기는 사이 3주라는 시간은 가득 차 버렸고 결혼식을 이틀밖에 남겨놓지 않은 지금, 얼굴이라도 잠시 볼 요량으로 병원을 찾은 것이다.


설레며 처음으로 병실 문을 열었을 때의 당혹함이란. 아들의 품에서 잠을 자고있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 모습을 자신의 손으로 깨고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김 여사는 얼른 문을 닫고 휴게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조금 있으면 그녀가 아니라도 그들을 깨울 방해자가 나타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내어 입에 문 김 여사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무뚝뚝한 녀석에게 그런 모습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남편의 말대로 아들은 그런 다정한 감정을 모르고 살아갈 가능성이 컸었다. 부모의 생각으로는 딱히 그럴만한 다른 이유들이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아들은 감미로운 사람의 마음을 별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 인연이라는 건 정말 있는 것인지 변한 아들의 모습을 보면 귀중한 배필의 인연이 따로 있기는 한가보다.


“이제 가 봐도 되겠지.”


시계를 바라보던 김 여사는 빨리 만나고 싶은 조바심이 드는 마음과는 달리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병실을 향했다.


그리고 지금쯤은 잠에서 깬 그들을 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


단번에 아들의 마음을 알 수 있을 정도의 맑은 아이였다.


남편이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광장에서도 아들의 짝으로 찾을 수 있는 아이라고. 그래서 입이 마르게 칭찬을 하던 남편의 너스레에 핀잔을 주기도 했었다.


어이없는 비유라 생각했었고 단지 느낌이 좀 더 좋을 거라는 예상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의 말은 맞는 듯했다. 아름다움이 묻힐 정도의 기품이 있었다.


기척이 나는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손에 든 책을 내려놓는 모습에서도 정리되어 배어있는 단정함을 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그의 어머니였다. 그를 소중하게 낳아 따뜻한 사랑으로 기르셔서 세상의 모든 감정을 알게 해 주셨던 분이고, 자신에게는 그를 통해 스며들게 된 온기의 모체로서, 지속적으로 거기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전해드려야 할 분이었다.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았을까? 우리 집 남자 둘이 자기들만 숨겨놓고 보여주지 않아 그 질투로 내가 이리 뛰쳐나왔어요. 잘했다고 나 스스로에게 칭찬을 하고싶은데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네?”


김 여사 자신에게 하는 변명의 말 같았다. 아마도 아픈 그녀를 당황하게 만든 것 같은 죄책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환자복을 입은 그녀를 향해 안쓰러움이 가득한 눈빛이 향하자 그녀는 오히려 방문해주어 반갑다는 듯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저도 기쁩니다. 뵙고 싶었어요.”


명현은 침대 머리에 등을 바싹 당겨 앉으며 김 여사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많이 아팠을 텐데 대견하게도 잘 견뎌내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아들 하나 잃어버리는 줄 알았는데 찾아줘서 그것도 고맙고. 이렇게 예쁜 얼굴 내게 보여줘서 것도 고맙네. 그리고 무안하지 않게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해준 것도.”


그녀의 말에 묻어나는 인우의 마음졸임이 어김없이 또 명현을 강타하고 있었다. 아들을 잃어버릴 줄 알았을 정도로 그녀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풀기만한 인우. 그 남자의 어머니였다.


명현은 원망 대신에 고맙다는 말을 할 줄 아는 그의 어머니에게 절로 감사함이 먼저 들었다.


“죄송스럽고 송구한 마음이 더 하지만, 염치없게도 오늘은 어머님이 주시는 너그러움을 받는 게 제 도리인 것 같아 그렇게만 하겠습니다. 아니면 더 속상해 하실 테니까요.”


상대의 입장을 배려한 명현의 영민한 대답에 김 여사는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던 불안함을 떨쳐낼 수 있었다. 혹여 저 고아한 모습 뒤로 차가움이 흐를까 걱정했었는데, 말하는 투나 눈빛이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것 같아 걱정스러움을 드러내 버렸다.


“드레스는 잘 되었다고 연락 받았는데 마음에 들었니?”


인우의 손에 들려왔던 하얀 드레스를 바라보면서 명현은 그 옷을 손으로 쓸어보며 이렇게 예쁜 옷을 골라준 것에 감사함을 표현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기에 명현은 또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네. 예뻤어요. 그날은 더 예쁘게 입을게요. 감사합니다.”


“그래. 잘 지내보도록 하자. 인우를 떠나서, 나도 네가 좋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나.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만 욕심을 부리지 않으마. 우리 서로 천천히 서로에게 익숙해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좋아지겠지. 안 그러니?”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워낙 큰 상처를 입었던 터라 길게 붙잡고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김 여사는 잠시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에 크게 만족을 하면서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김 여사가 손에 들고있던 핸드백을 팔에 걸면서 침대 앞에서 움직이려 하자 명현이 침대 시트를 걷어내며 바닥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김 여사의 손이 명현의 손을 붙잡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침대 위에 꼭 눌렀다.


“나오지 않아도 된다. 다행히 이 병원은 길을 잃지 않을 정도로 친숙한 곳이니 그냥 있었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김 여사는 명현의 손등을 토닥거려 주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명현은 단정한 감색의 투피스가 사라진 문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서 있었다.


부족한 자신을 그저 곱게만 보아주셨다. 그리고 아들의 사랑을 떠나서 자신을 좋아할 것 같다는 뭉클한 정을 선뜻 내어주셨다.


명현은 벅차 오르는 감동을 누르기 위해 병실 내를 서성거렸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좀 더 멋진 곳에서 이 감정을 마음껏 품고 싶었다.


“윤 선생님, 어디 가세요? 서인우 선생님이 아시면 야단나는 거 모르세요?”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서는 여지없이 간호사실 앞을 지나야 했다. 살짝 숨어서 움직이는 게 더 우스워 대수롭지 않은 듯이 당당하게 그 앞을 지나쳤다.


“금방 돌아올 거예요. 아직 수술시간 많이 남았으니 괜찮아요.”


걱정 말라는 듯 휘어진 눈매의 웃음에도 간호사들은 아예 질색을 하듯 카운터 뒤에서 일부로 나오기까지 했다.


“그래도 안돼요. 저번에도 선생님 혼자 산책 나가셨다 저희 혼나는 거 못 보셨어요? 정말이지 다시는 서 선생님 화내시는 거 보고싶지 않아요. 그 눈빛에 찔려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러니까 제발 들어가세요.”


서인우의 서릿발같은 눈매에 다들 절절매는 것은 여전했다. 하지만 결코 명현은 질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순순히 병실로 들어갈 것 같았으면 힘들게 나오는 수고도 하지 않았겠지만.


“약속할게요. 삼십분이면 돼요. 아니면 숨어 있다가 계단으로 걸어 내려갈 수도 있어요. 그게 더 위험하니까 다녀오게 해줘요. 네?”


약하게 나갔다가는 정말로 병실로 쫓겨 들어갈 것 같은 분위기에 명현은 아예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두손 두발을 든 간호사의 애원의 목소리를 들은 후 명현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딱 삼십분이에요. 더는 안돼요. 선생님은 안 그러신 지 몰라도 우리는 서인우 선생님 화내시는 거 무서워요. 아시겠죠? 빨리 들어오세요.”


***


계절은 허락을 구함이 없었다. 제멋대로 하늘도 높아져 버렸고 바람들도 끝을 가볍게 해서 이리저리 나부대고 있었다. 병실에서는 잊고 지냈던 계절이, 얼마 떨어지지 않는 대지에는 벌써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명현은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바람결을 느끼려 눈을 살며시 감아 보았다. 나무들은 서로의 가지를 비벼대며 사그락거리는 마찰음을 내느라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지는 햇살을 완전히 막아주지 못했고, 열어두었던 나뭇잎 사이로 바람을 보내주어 배여있던 촉촉함을 시원함으로 날려주었다. 다시 마주하게 된 숲길은 그렇게 명현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녀는 가보고 싶었던 곳을 향하여 부지런히 움직였다. 나무가 있는 그 벤치를 향해.


간호사들의 원성을 듣지 않으려면 시간을 지켜줘야 했다. 하지만 남아있는 거리보다 걸어온 길이 더 많을 때쯤, 명현은 나무를 등지고 기대어 앉아야만 했다. 은근하게 올라오는 저릿한 통증으로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다리에 힘이 빠져버렸다.


“어떡하지!”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두고 온 휴대폰이 간절해지면서 약속했던 시간이 지나 가슴 졸이고 있을 간호사들의 원망 섞인 눈초리가 떠올랐다.


이내 가라앉곤 했던 통증은 쉽사리 누그러들지 않아 명현은 머리를 뒤로 기댄 채 마음속으로 사라진 기운이 돌아오기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아,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벌써 시간이 한참 지나있을 텐데… 더 늦어진다면 난리가 날텐데. 휴, 미안해요 성희씨. 괜한 고집 부렸나봐.’


***


성희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병실 복도를 뛰다시피 성큼거리며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빛을 피해버렸다. 도저히 그 눈빛을 다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자신을 이런 곤경에 처하게 만든 누가 밉고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드디어 서 선생님의 눈빛에 내가 산산조각이 나는구나. 아, 하느님…!’


역시 그 말을 믿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 저 눈빛에 기가 죽는 그녀의 처지를 원망하며 그녀는 병명을 생각해냈지만, 정직을 요구하는 그의 눈빛을 피할 수는 없었다.


“8호실 환자 어디 갔어요.”


“산책… 나가셨어요.”


차갑게 잘라서 묻는 말에 성희는 긴장감에 눌린 듯한 목소리를 가까스로 내뱉었다.


“물론 혼자겠죠.”


“네.”


“내가 허락했던가? 산책해도 좋다고.”


“아뇨. 하지만 잠시면 된다고 하셔서.”


“그 잠시가 얼마나 됐습니까.”


성희는 얼른 손목에 차여있는 시계를 내려보았다. 그리고 질끈 두눈을 감았다 뜨며 얼른 입을 열었다.


“헉, 삼십분. 아니, 사십분 지났어요.”


인상이 급격히 변한 인우는 쏟아내고 싶은 말을 참는 듯 턱을 굳히고는 몸을 돌려버렸다.


며칠 전에도 혼자 바람을 쐬러 나갔다던 명현이 한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인우는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병원을 찾아다녀야 했었다.


다행히 멀리 가지는 않았는지 명현은 공원입구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그러나 멀지만 않았다 뿐이지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변해있었고 지쳤는지 머리를 힘없이 떨어뜨리고 있었다.


오늘은 멀리 간 것이 틀림이 없었다. 벌써 비춰주어야 될 그녀의 그림자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고 있었고, 인우의 불안은 그와 비례하고 있었다.


‘어디 쓰러져 있지는 않아야 할텐데. 쓰러졌다면 사람들의 발길이 많은 곳이어야 할텐데….’


인우는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걱정스러운 발걸음은 멈춰지지가 않았다.


‘윤명현, 찾기만 해. 이번엔 그냥 지나가지 않아. 아니, 제발 좀 나타나. 화내지 않을 테니 빨리 보여줘.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나무들 사이를 샅샅이 살피던 인우의 눈이 한곳을 응시하더니 그를 뛰게 만들었다.


명현은 아예 주저앉아 있었다. 이 정도의 거리를 겁 없이 혼자 걸어 왔으니 어지러움이 일었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에 화가 나 성급한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명현에게 다가가자 낮달 같이 투명한 그녀의 얼굴이 인우에게로 돌려졌다. 반가움인지 미안함인지 명현은 꽃봉우리가 터질 때처럼 바스스 웃어주었다.


“늦었네요.”


인우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떨어지고 있는 햇빛을 가리운 채 말없이 서 있었다. 뛰어오느라 상기된 얼굴에는 땀방울들이 맺혀있었고 힘껏 움켜진 휴대폰 탓에 그의 팔에는 힘줄들이 솟아나 있었다.


아마도 불같은 화를 누르고 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건 그의 당부를 무시한 걸로 보였을 테니까.


그의 반응을 미리 알고있던 명현은 미안해하는 웃음을 지었다.


“일어나.”


인우는 화가 났다. 저렇게 웃어버리면 도대체 화를 어떻게 내라는 것인지.


하지만 이번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손도 내밀어 주지 않고 싸늘한 음성으로 그녀의 다음 행동을 일러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고 목을 빼고 그를 올려보았다.


“어지러워요. 나 업어주면 안돼요?”


좀처럼 하지 않던 어리광을 부리는 명현의 모습을 기가 찬 듯 바라보는 인 우였다.


“뭐?”


갈수록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어지럽다 하더라도 입술을 깨물며 힘들게라도 혼자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꼿꼿하게 몇 걸음 옮겨야 되는 것이다.


인우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자신을 조르는 명현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의 거절로 그녀를 긴장시켰다. 적응이 안 되는 반응에 명현은 움직임이 없었다.


“아니, 다시는 업어주는 일 따윈 없어. 그러니 빨리 일어나.”


업어달라는 말 한마디로 눈에 띄게 변하는 표정은 명현에게 뭔가를 짐작하게 만들었다.


“이유가 뭐예요?”


“그런 거 없어. 그러니까 업어달라는 말은 꺼내지마.”


“겁쟁이.”


명현은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날이 떠올라서 싫을 것이다. 그날과 관계되는 모든 일들이 끔찍하게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사고였을 뿐이라고 해도 그의 자책감은 줄어들지 않아 명현은 안타까웠고 또 지독히도 쓰라렸다.


“뭐라고 하든지 상관없으니까 빨리 그 차가운데서 일어나기나 해!”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마치 괜한 곳에 화풀이하듯 고함을 질러댔다.


“싫어요. 업어줘요.”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는 그녀의 고집이 나타났다. 완력으로 일으켜 세워도 마음은 거기에 고스란히 남겨둘 엄청난 고집이었다.


“제기랄.”


낮지만 거친 소리가 인우의 입가에서 흘러나오자 그에게서는 처음 듣는 낯선 소리에 명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럽다. 욕도 잘 하네요. 난 백번 넘게 연습했는데도 안 나오던데. 부러워요.”


“훗! 과외를 붙여줘도 못하는 욕이면 포기해.”


농담인지 아니면 자신의 거친 소리를 빗대는 말인지 인우는 알 수가 없었다. 정확한 건 웃음이 나왔다는 것뿐이었다. 자신을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능력이 그녀에게는 무한한 것 같았다.


“업혀, 하지만 후회할 수도 있으니까 잘 판단해서 업혀.”


“후회할 일이 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업힐래요.”


경고 같긴 했지만 명현은 감당하리라 마음먹었다. 낯익은 수술복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한참을 앉아있었던 탓인지 일어나기 위한 과정이 몹시도 길었다.


나무를 짚으며 어렵게 다리를 세우고 그의 등에 살며시 매달렸다. 그의 불안을 가져오기라도 하듯 명현은 인우의 목을 힘주어 껴안았다.


“죽일 셈이야? 말로해. 그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치료 중이에요. 서인우의 불안감 퇴치.”


“훗, 병주고 약주는군. 제발 좀 낫게 해줘. 어떻게 하면 윤명현을 봐도 불안하지 않을지.”


명현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쌉쌀한 소독약 냄새가 그의 향기인 양 명현은 한껏 들이마셨다. 마음속의 미안함을 깨끗하게 씻어줄 것만 같았다.


더 이상 표현하지 않으려 해도 그에게는 미안했다. 아직은 그를 편안하게 해주기란 어려울 것 같았다.


“투정 부리지 말고 조금만 더 참아요. 곧 건강해질 거예요.”


“투정? 내가? 그런 건 삼십년 전에 이미 끊었지만, 네가 그렇다면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지.”


그의 손이 장난처럼 명현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투정이라는 말에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거짓말 못한다 했잖아요. 어떻게 네댓살 먹은 애기가 투정이 없을 수가 있어요. 거짓말이야.”


“훗, 1년차 내년에 다시 해도 되지?”


인우는 준비했던 말을 꺼내 놓았다.


사실 지금의 상태로는 두달뒤라 하더라도 무리였다. 일상생활을 하는데는 큰 지장이 없을지 몰라도 1년차 생활은 가능하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내년으로 미뤄야 했다.


“서인우의 병을 낫게 해주려면 ‘그렇게 할게요.’ 라고 대답하면 되죠? 그래요, 내년에 다시 하면 되죠. 더 잘할 수 있을 테니까 걱정 안해요.”


한번쯤은 머뭇거릴 줄 알았는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욕심이 날 텐데도 우선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세심하게 살펴준 것이 고마웠다. 인우는 뿌듯함에 등으로 느껴지는 명현을 다시금 추슬러 업으면서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무거워. 놀더니 확실히 무거워졌어. 다음부터는 업어주는거 사절이야.”


그녀의 웃음이 목덜미에 느껴졌다. 친밀한 숨결이 닿을 때마다 그의 심장은 팽창되어져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잔잔하게 피식거리며 바람을 내느라 그녀는 가슴이 들썩이는 반동을 그에게 전해주며 나직하게 속삭여 주었다.


“어머니 다녀가셨어요”


그가 없는 시간에 단 둘의 만남, 하지만 밝은 명현의 목소리는 안심을 하는 듯 들렸다.


“그게 탈출의 이윤가?”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에 명현은 가만히 그의 등에 얼굴을 기대었다.


“날 좋아한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만큼 기뻤어요. 그래서 마음껏 웃으려고 나왔던 건데…. 이유가 멋지죠?”


“아니. 그래도 병실에서 날 얌전히 기다려야 되는 게 먼저야. 혼자는 안 된다고 계속 말했는데도 듣지 않았어. 혼나야 돼.”


목을 감고있던 팔이 풀어지면서 맞닿아있던 부드러움이 떨어져 서늘함과 허전함이 밀려왔다. 이해를 해주지 않는 자신의 대답을 듣고 명현이 서운함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급하게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가 인우의 추측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해주었다.


“다 왔으니까 빨리 내려줘요.”


병원 로비로 통하는 문이 보이기 시작하자 명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내려주기를 재촉했다.


“안돼, 이러고 병실까지 가야돼. 잘 판단해서 업히라고 미리 말도 해줬을 텐데?”


“말도 안돼. 이러고 병원 안을 들어간단 말이에요? 장난하지 말고 얼른 내려줘요.”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았고 내려줄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명현을 업은 채로 인우는 로비의 뒷문을 스스럼없이 들어섰고 흘깃거리는 사람들을 지나치면서 엘리베이터까지 당당하게 걸어갔다.


그의 팔을 내려치면서 애원하는 명현은 안중에도 없는 듯 인우의 태도는 무덤덤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노골적인 시선이 여과 없이 빗발치자 명현은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제발요, 내려줘요. 잘못했어요. 내려줘요. 서인우! 내려달라니까.”


크기를 줄인 목소리로 간절한 부탁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인우가 얄미워 명현은 극단의 조치를 취해버렸다.


‘화를 내요, 그리고 집어 던져줘요. 부디….’


하지만 인우는 아예 귀를 막은 듯했다. 예상을 벗어난 그의 태도에 명현의 고개는 다시금 푹하고 떨어져 버렸다. 할 수 없이 아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병실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기만을 빌어야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드나드는 사람들 모두가 둘을 뚫어지게 쳐다보여 작은 소리로 가만가만히 소곤거렸다.


다음 층을 알리는 소리와 새로운 사람들의 시선과 반응을 예민해져 있는 그녀의 신경이 가까스로 감당해내고 있을 때쯤 병실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음을 포기해야 되는 이의 음성이 들여왔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심장이 절로 떨어지는 기분에 명현은 그의 몸에 두르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아직도 많이 아픈가 보구나.”


끈끈하면서도 느릿한 말투로 봐서는 신경외과 과장님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민망함으로 인사를 드릴수도, 그렇다고 모른척하며 손으로 얼굴을 계속 가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둘 중 한가지를 해야된다면 인사가 당연 우선 이었다.


명현은 스스로를 달래며 천천히 손을 떼 내었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잘 익은 사과색으로 물든 뺨을 보여주며 명현은 수줍게 말을 붙였다. 잠시 시선이 마주친 신경외과의 과장이 찬찬히 얼굴빛을 관찰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 그래. 나빠 보이지는 않는데? 왜 그러고 있는 거냐, 서인우.”


“그럴만한 사정이 생겼습니다. 그냥 못본척 해 주십시오. 과장님.”


민망할 만한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매끄럽게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야 못본척 할 수 있어도, 그러고 병동을 지나치려면 원성이 이만저만이 아닐텐데?”


웃음기가 묻어나는 과장의 목소리에 명현의 고개는 더욱 인우의 등에 파묻히고 있었다.


“돌리지 못한 청첩장 대신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면 뭐라고들 못하겠죠.”


“뭐? 하하하! 그래, 그래, 그거 말 된다.”


신경외과 과장의 호쾌한 웃음소리와 수군거리는 다른 동승자들의 말소리에 명현은 그의 등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러다 엘리베이터가 외과 병동에 도착했다.


6층이다. 마지막으로 넘겨야 될 최대 최고의 관건이었다. 명현은 아주 가는 한숨을 내쉬며 간호사실과 반대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버렸다.


힘들어서라도 그만 내려놓을 법한데도 인우는 그러지 않았다. 더 느긋해지고 태연해질 뿐이었다.


“어머, 선생님. 윤 선생님 쓰러지셨어요?”


염려했던 첫 반응치고는 약했다. 저 정도면 꾹 참고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쓰러짐을 인정하는 인우의 간단한 대답 한마디면 얼마 남지 않은 병실 도착은 쉬워질 것 같았다.


마지막 고비를 남긴 명현의 기대를 설마 그가 무너뜨리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뱉어진 그의 대답을 듣기 전에는 그랬던 것 같았다.


“아뇨, 업어 달라고 조르기에 어쩔 수 없이 업어주는 겁니다.”


그는 복병이었다. 내부에 항상 존재하는 복병.


여기까지 오는 것으로는 부족했었는지 인우는 사실을 빙자한 고의적인 놀림으로 그녀를 혼내주고 있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다는 말은 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머, 정말요? 윤 선생님 대단하시다. 의외의 모습이시네요.”


명현은 빨리 이 시간이 흘렀으면 했다.


수간호사의 참는 듯한 웃음소리도 그녀의 시선이 머무르고 있는 병실 쪽에서 놀란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걸어오는 두명의 간호사들도 재빨리 지나쳤으면 했다.


명현은 자꾸만 솟아오르는 야속함에 이마로 그의 등을 쿵쿵 찧어댔다. 멈춰선 그에게 움직임을 재촉하는 몸짓이기도 했다. 몸에 밴 그녀의 버릇이 표출되자 지금까지의 상황을 즐겁게 지켜보던 인우는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젠 제발 가줘요. 아주 시원하게도 웃네요.”


명현이 그의 어깨너머로 얼굴을 바싹 붙이며 애원했다.


그때서야 만족스러웠는지 병실로 향하는 인우의 몸동작이 재빨라졌다.


그들의 근처로 다가오는 간호사들을 소리나게 피하기는 했지만 그녀들의 호들갑스러운 야단은 놓쳐지지 않았다.


“설마, 서인우 선생님 매일 저러시는 건 아니겠죠? 아니 여태 어찌 참으셨을까?”


“윤 선생님이 업어달라고 졸랐다더라.”


“예에? 윤 선생님이 졸랐다고요? 음, 그건 더 상상이 안 되는 일인데. 둘이 있을 땐 틀려지는 성격인가?”


“그것도 아닌가봐. 억지로 업어준 사람의 표정이 지나치게 환했어. 서인우 선생님답지 않게 장난치는 것 같았어.”


“언니, 난 장난이라도 부러워. 누가 장난 삼아 저렇게 병원 내를 업고 다닐 수가 있겠어? 누구는 사랑도 멋지게 하네.”


세 여자의 눈망울이 잔영이 남아있는 듯 둘이 사라진 병실 쪽을 확인하며 속닥거림을 이어갔다.


***


지나친 잠의 연속이었다. 중간쯤 깨어나는 시간도 무시하고 끝없이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방해꾼의 음성이 그녀를 귀찮게 하기 전까지.


“윤명현, 일어나.”


살살 몸까지 흔들어댔지만 명현은 잠의 유혹을 쉽사리 떨치지는 못하고 있었다.


“…….”


하지만 명현은 뒤척임도 낮은 신음소리도 없이 깨끗하게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거부했다.


그녀의 뺨에 붙어있는 머리칼을 부드럽게 넘겨주며 인우는 그녀의 기척을 도와주고 있었다. 여전히 도움을 주지 못했는지 명현의 눈꺼풀은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할 수 없이 그의 입술이 쓸어주던 이마를 지나서 그녀의 도톰한 귓불에 이른 다음 그곳을 자근자근 거렸다. 고정되었던 그녀의 몸이 조금씩 뒤척이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요.”


“일어나. 아마도 결혼식을 올리는 날일텐데.”


반쯤 들은 정신을 완전히 제정신 차리게 하는 소리였다.


어제 퇴원을 했고, 그와 앞으로 살게될 빌라로 간단한 그녀의 짐이 옮겨진 다음 늦은 시간에 잠이 들었다.


단단히 기억을 하고 잠을 청했는데도 병원에서의 잠기운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강력한 수마에 모든 긴장을 다 내어준 것 같았다.


명현은 깊은 깜박임으로 서서히 떠 있는 공간들을 의식시켰다. 희미하기만 한 천장과 제 위치에 잘 붙어있는 전구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칼로 자신을 가까이서 내려다보며 심장을 무거워지게 만드는 웃음을 보여주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명현은 눈꺼풀 속으로 밀어 넣었다.


“잘 잤어요?”


“누구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런 대로.”


느슨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인우의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한결 더 가볍게 해주었고, 웃음 띤 그의 입술이 또 다른 입술 위를 천천히 배회하며 숨결을 요구하자 소중한 감정들이 명현의 주위를 감싸고 맴도는 것 같았다.


“사…랑해요.”


명현의 웅얼거리는 속삭임이 그의 입술 속으로 배어들어 더 깊은 사랑으로 되돌려져 나왔다. 혹시라도 다칠 새라 그녀에게로 떨어지는 힘을 늦추어가며 입술을 몰아붙였고, 가냘픈 그녀의 손가락은 인우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움켜쥐며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서로의 입김과 손길이 점차 뜨거워지고 호흡이 불규칙해지자 인우의 머리가 갑자기 들어졌다.


입술이 떨어지는 젖은 소리에 명현의 얼굴이 붉어지자 그는 열기를 누르느라 굳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만해야겠다. 위험해.”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넘기면서 인우는 걱정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겁쟁이, 난 부서지지 않아요.”


명현은 내려진 그의 손을 잡으며 환한 웃음으로 그를 안심시켜 주었다.


“알아. 하지만 아직은 안돼. 일어나. 더 있다간 윤명현의 아무 짓에 넘어갈 것 같아.”


인우는 잡혀진 손을 빼내어 그녀의 코를 살짝 쥐어주고는 단호하게 침대를 벗어나 버렸다.


조금이라도 더 지체했다가는 그녀를 안아버릴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웃어주거나 손길이 와 닿는다면 지켜줄 자신이 없었다. 그에게로 손을 내밀기 위해서는 명현은 더 나아야했다.


# 20장


새파란 하늘을 시샘이라도 하는지 하얀 구름들은 군데군데 얼룩을 만들어두고 있었고, 깨끗한 가을 햇살은 주위의 모든 것들을 골고루 비춰주어 반짝거리게 만들었다.


결혼식 하객들의 옷차림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하얀 가운, 병원 유니폼, 간호사 복, 그리고 심지어 수술복까지. 하지만 결혼식 장소가 병원이고 평일이다 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하얀 테이블보 위로 풍성하게 세팅된 음식들과 제법 많은 개수의 의자들이 야외 공연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신랑 신부가 입장을 하게 될 아치형의 문에는 붉은 장미꽃이 화려하게 장식되어져 있고 그 아래로는 하얀 공단 천이 초록의 잔디 위로 깨끗한 길을 만들어 놓았다.


고운 한복들로 맵시를 낸 양가 어른들과 사회를 맡게 된 진성은 이미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결혼식 피아노 반주를 맡게 된 젊은 여자는 이미 감미로운 곡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연주해주고 있었다.


결혼식장의 의자를 차지하지 못한 병원 동료들은 저마다 무리를 이루어 얘기를 나누며 흔치않은 병원 내에서의 결혼식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인우와 명현이 탄 검은색 승용차가 병원 정문을 지나 결혼식장이 있는 공원 내로 천천히 진입하고 있었다.


승용차 뒷좌석에 인우와 나란히 앉아있는 명현은 화사한 신부의 모습에 우아함까지 깃들어 있었다.


쉬폰 블라우스처럼 둥근 칼라 깃에서 가슴 아래 부분까지 뽀얀 진주알이 단추선을 따라 일정하게 박혀있었고, 하늘거리는 흰 소매의 매듭에서도 몇 개의 진주알은 더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단아함을 돋보이게 해주는 심플하고 하얀 드레스는 아래로 흐를수록 그 폭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넉넉했다. 기다랗게 얹어진 면사포도 그녀의 가녀린 어깨와 등을 지나 넘실거렸다.


“그렇게 웃지 말라고 했을 텐데.”


뭐가 못마땅한지 인우의 표정이 잔뜩 굳어져 있었다. 그의 그런 모습조차 명현은 눈이 부셨다.


“좋아서 그러는 건데도 안돼요?”


유달리 자신의 웃음에 민감한 그였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명현은 참지 못했다.


“안돼. 그냥 데리고 사는 게 나을 뻔했어.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평소에도 투명하게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남자들의 은근한 시선이 닿는 게 못마땅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도우미들이 작정을 하고 꾸몄는지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 자신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명현은 억지를 쓰는 그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미소를 머금으면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관둬요. 여러 사람들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입은 게 아니니까. 아직 그 사람에게서 예쁘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보여줬으니까 상관없어요. 벗을까요?”


정말 그럴 사람처럼 명현의 손이 베일로 향하자, 인우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됐어. 예쁘니까 조금만 더 입고있어.”


결혼식장이 눈앞으로 선명하게 다가오자 인우는 급하게나마 명현이 듣고싶어하는 말을 들려주었다. 기사와 도우미가 먼저 차에서 내려 그들을 기다리는 사이 그녀의 뺨에 인우의 입술이 살짝 눌러졌다.


“잘 찾아서 와.”


신랑 신부의 도착이 알려지면서 예식은 곧장 시작되었다.


남자이지만 그는 아름다웠다. 짙은 재색의 예복이 날렵한 그의 몸을 단단하게 표현해주었고 한곳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깊은 눈빛은 남자의 절제된 뜨거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펼쳐진 새하얀 길을 밟고 서 있는 명현을 그의 시선은 한치도 놓치지 않고 좇고 있었다. 뜨거운 눈길이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가자 명현의 마음까지 조금해졌다.


“손… 주세요.”


딸의 결혼식에 태연하게 손도 내밀지 못하는 아버지, 성균에게 마음 닿지 않는 목소리로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요구에 성균은 떨리는 손으로 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주었다.


성균은 미안한 마음으로, 또 감사한 마음으로 딸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이렇게 손이라도 잡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족했다. 성균은 눈시울이 시큰한지 장갑을 끼고있던 손길로 눈가를 꾹 눌렀다.


“제게는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에요.”


명현의 말투는 여전히 같았지만 지난 세월보다 한결 누그러워진 기운이 엿보였다.


“그래.”


의미가 없다해도 성균은 감사하고 싶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생의 선물과도 같았다.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시간동안은 딸이 준 선물을 계속해서 꺼내볼 것이다.


성균은 딸의 손을 떨림으로 부여잡고 감사하며 그리고 행복을 빌어주며 한걸음씩 천천히 내딛었다.


짧았던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며 성균은 손을 넘겨주었다. 부탁의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바랄 수밖에 없었다. 눈으로 하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인우의 고개가 살짝 숙여졌다.


‘행복해라, 명현아. 그리고 미안하다. 널 지켜주지 못해서….’


자신에게만 향해진 인우의 손을 가볍게 쥐면서 명현은 해사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웃음 때문인지 그의 눈썹이 잠깐 움직이긴 했지만 명현은 그치지 않았다.


그칠수가 없었다. 빛을 발하며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아름다운 사랑 때문이었다.


“잘 왔죠?”


명현이 그를 응시하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웃지마.”


그의 툴툴거림에 명현의 미소는 더욱 크게 얼굴 전체에 번지고 있었다.


***


‘사람 구실도 못하는 이놈의 인턴 생활. 얼마나 예쁘고 멋진지를 이 두운으로 확인해야 되는데.’


원정은 돈 떼먹고 달아나는 사람을 잡는 심정으로 있는 힘껏 뛰기 시작했다.


이럴 땐 엉덩이를 덮고있는 의사 가운이 성가셨다. 짧으면 훨씬 더 잘 뛸 수 있을 텐데. 은정은 목을 앞으로 쭉 빼고 행여 결혼식이 끝났을까를 살피며 뛰어갔다.


‘끝나면 안 되는데. 명현언니, 조금만 더 기다려줘.’


턱까지 차 오르는 숨을 헐떡거리며 서있는 사람들 숲을 염치 불구하고 마구 헤쳤다. 힘들게 도착한 식장에는 사람들이 단상을 바라보고 있었고, 은정은 숨을 돌리며 그 시선들을 좇았다. 다행히 아직 끝난 것 같지는 않았다.


동그란 은정의 얼굴에 제법 많은 땀방울들이 맺혔다. 그녀는 손으로 대충 땀을 정리하면서 피해야 될 레지던트들이 있는지를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준비된 음식들을 맛보느라 인턴의 출현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걸 감사해하며 은정은 숨을만한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저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간 다음 명현을 독대한 생각으로 마땅한 장소가 없는지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눈에 익은 한 사람을 발견해 내고는 얼른 발걸음을 돌렸다.


‘어라? 신부 동생인데. 왜 저런 곳에서 혼자 있는 거야?’


그는 결혼식장과는 조금 떨어진 나무들 사이에서 그저 물끄러미 지켜보고만 있었다.


짙은 감색의 정장에 같은 계열의 조금 밝은 색의 펄이 섞인 넥타이를 한 그의 모습은 은정이 지금까지 봐 온 남자들의 모습 중에서 가장 근사한 겉모습이었다. 그녀가 보기에는 결혼식장에서 멋지게 서 있는 신랑보다도 자신이 훑어보고 있는 남자의 외모가 더 훌륭했다.


은정은 두어 번의 안면을 핑계로 그의 옆으로 슬쩍 다가가 곁에 섰다.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인기척을 냈는데도 석현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였다.


“흠, 흠.”


다시 한번 더 자기가 왔음을 알리기 위해 은정은 헛기침을 내며 석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은정은 석현의 눈에서 물기가 뺨을 통해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 숨을 멈추었다.


눈에서 흐르는 거니까 눈물이 맞을 것이다.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따르니 그 눈이 붙잡고 있는 곳에 명현의 웃음이 있었다. 은정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해는 다음으로 미루고 당장은 눈물부터 닦아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주먹 불끈 쥐고 달려온 그녀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혹시나 하고 가운 주머니도 뒤져보았지만 나오는 것은 먼지뿐이었다. 그냥 말로만 이해할 수 없는 위로를 해 줘야 될 것 같았다.


“손수건 있어 보이는데 눈물 좀 닦지 그래요? 누나 시집가는 게 울 일인가? 보통은 아버지들이 우는데.”


“…….”


대꾸가 없으니 재미없었다. 그래도 눈물은 닦았으면 좋겠는데.


무심코 은정은 손을 위로 올려 석현의 눈가를 쓰윽 문질러 주었다.


처음으로 그가 반응을 보였다.


“뭐하는 겁니까.”


당황하는 빛이 귀여워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은정은 머쓱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눈물 닦으라고 했잖아요.”


한곳에 오랫동안 머물던 석현의 시선이 마침내 다른 곳으로 돌려졌다. 자신보다도 한참이나 작은 여자에게로.


병원에 들를 때마다 만나게 되는 여자였다. 아니, 인턴이었다. 하얗기만 한 얼굴이 뚫어져라 석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그에게 덥석덥석 말도 잘 붙이더니 오늘은 얼굴에 손을 대기까지 했다.


이 여자에게는 어렵고 주저되는 일이 아마도 없을 것이다. 과장되게 표현한다면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가져다준다 해도 힘들이지 않고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씩씩해 보였다. 더 솔직하게는 사람다웠다. 아니, 인간다웠다. 그녀는 따뜻함이 물씬 풍기는 생명력 있는 사람이었다.


“안 울었어요.”


석현은 얼굴을 돌리면서 표정 없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래도 민망한지 헛기침도 잊지 않았다.


“허 참, 갑자기 이상한 사람이 돼버렸네. 그래요. 정히 그러고 싶다면 안 운 걸로 하죠. 혹시 창피해서 그래요?”


은정은 본격적으로 얘기를 할 셈이지 나란히 서 있던 몸의 방향을 아예 석현쪽으로 돌려버렸다.


석현은 스쳐 지나듯 얼굴만 두어 번 본 사람에게 따지듯이 묻고있는 은정을 한순간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잘 들어 라는 투로 분명하게 대꾸해 주었다.


“우는 게 창피한 일은 아니죠.”


더 이상 부인을 하는 것이 귀찮은 것인지, 아니면 그 말을 끝으로 그녀와의 대화를 거절할 요량인지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에 괜히 은정은 골이 났다.


“맞아요, 우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 근데 왜 아니라고 그래요?”


은정이 샐쭉하게 되받아 쳐도 석현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운게 아니니까요.”


남자가 이랬다저랬다한다고 생각한 은정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내가 닦아준 눈물은 뭔데? 이렇게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거짓말. 우기기 대장이네.”


편하고 심플한 티셔츠에 면바지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데 결혼식을 위해 감색의 양복을 입은 모습은 보기만 해도 흐뭇할 정도로 멋있었다.


이 남자는 볼 때마다 썩 괜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2년차 승수의 올려진 팔을 붙잡으며 신사도를 발휘했을 때, 중환자실 앞에서 삶과 죽음의 고뇌로 힘들어 할 때, 그리고 아름다운 누이의 결혼식 날 눈물을 흘릴 때에도 그는 진지하고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거짓말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그러면 그것조차도 거짓이라고 할 것 같아 그만해야 될 것 같군요.”


은정의 말이 거슬렸는지 석현은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면서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은테 안경속의 그의 또렷하고 짙은 눈도 진실이라고 말해주었다.


“정말이에요? 거짓말 한번도 안 했다는 거?”


은정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석현의 말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피로연 장소 쪽에서 누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이번 달 은정이 돌게된 과의 1년차 레지던트였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무조건 뛰어야했다. 나중에 깨지는 한이 있어도 여기서 잡힐 순 없었다. 얼른 가서 명현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고 난 다음 깨져도 깨질 것이다.


“어휴, 눈도 밝으셔, 미치겠네. 나, 갈게요. 그쪽도 잘 가요.”


여자가 저렇게 숲길을 잘 뛰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나로 질끈 묶어버린 머리카락을 달랑거리며 그녀는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더니만 저만치쯤 안전한 곳까지 달아났다 싶었는지 갑자기 휙 돌아서더니 석현을 향해 손을 높이 흔들어 주었다. 멀리서도 웃는 얼굴임을 알 수 있도록 크게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사라져 버렸다.


석현은 자신의 눈물을 따뜻하게 닦아주던 은정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자 갑자기 씁쓸해졌다. 그건 아마도 그녀의 수다로 느낄 수 있었던 마음의 생기가 그녀가 사라짐으로서 함께 사라져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일종의 허전함 같은 것.


***


회복기에 접어든 명현을 염려해서 양가 어른들은 모든 절차를 생략해주었고 공원에서의 결혼식과 동료들의 피로연을 끝으로 인우와 명현의 결혼식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오후 들어 지친 모습이 역력하더니, 집에 도착하는 즉시 명현은 쓰러지듯 잠이 들고 말았다. 붉은 입술색과 뽀얀 분을 지우지도 못한 채 그녀는 그대로 귀잠(貴眠)에 빠져 버렸었다.


옅은 먹물빛의 가지런한 눈썹은 편안한 잠을 이루고 잇는지 반듯하게 결대로 누워있었고 누가 시샘이라도 부릴 듯 오뚝 솟은 콧날에는 투명한 빛이 스며들어 그녀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게 만들어 주었다.


단 한번의 뒤척임도 없이 곤해있던 명현이 반대편으로 돌아누우면서 몸을 웅크리자 간신히 매달려있던 슬립의 얇은 끈이 어깨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흘러내렸다.


목덜미에서부터 드러난 살갗에는 상아의 은은함이 녹아 내린 듯 눈부시게 하얗다. 인우는 그녀의 서늘한 어깨가 안쓰러워 시트를 올려주기 위해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의도와 달리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이 뜨거운 불길을 일으켰다.


윤기 나는 쇄골뼈 아래로 봉긋이 솟아오른 그녀의 살가운 젖가슴이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지고 싶었다.


약한 숨이 새어나오는 그녀의 입술 위로 인우의 입술이 소리 없이 내려졌다. 달콤한 분 냄새와 함께 도톰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맞닿았다.


서두르지 않고 살짝 열려진 그녀의 아래 입술을 핥아주며 입안 깊숙이 그의 혀를 밀어 넣으면서 부드럽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잠이라도 깨우려는 듯 인우의 손은 자연 모습 그대로 드러난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면서 솟아오른 유두를 살며시 문지르다가 비틀 듯 힘을 주었다.


“음.”


명현은 몸을 조금씩 움직이면서 흐릿한 눈동자를 열었다.


고요한 눈빛이 말할 수 없이 짙어진 채로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명현의 손이 그의 얼굴과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자 인우는 그녀에게 입술을 묻은 채 뜨거운 숨결을 전해주었다.


“안고 싶어.”


인우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녀의 몸이 그리웠다.


“안아요. 마음껏.”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들렸다. 막 잠에서 깨어나 가라앉아 있는 쉰 듯한 음성에 갈망에 대한 애틋함이 더해져 있었다.


그녀의 유혹이었다.


가슴 밑으로 내려진 슬립을 인우는 발끝까지 밀쳐버리고는 명현의 보드라운 가슴을 탐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박설같은 젖가슴을 힘껏 빨아들였다.


말랑한 살들을 베어 물 듯이 흠뻑 들이마신 뒤 도드라진 돌기를 이를 세워 부드럽게 씹어대었다. 날카로운 이로 긁어댄 유두가 점차 짙은색으로 변하자 인우는 입술로 다시 지분거리며 달래주었다.


그가 가져다준 저릿한 젖가슴의 통증은 알 수 없는 감정들을 꼼지락거리게 부추겼고 더 깊은 것을 요구하게끔 충동질하였다. 아픔은 아닌데도 미간이 찌푸려지면서 자꾸만 애원하는 듯한 숨소리가 커질 것 같았고 자신을 더 활짝 열어주고 싶어 그를 더 세게 끌어당기고 싶었다.


“하아….”


명현은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칼 속을 헤집으며 격렬한 감정으로 인한 가쁜 숨을 떨림으로 내놓았다. 그녀의 입에서 마른 신음소리가 배어 나오자 인우는 그녀의 가슴 위에서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아픈 건가?’


“…….”


신음소리에 놀란 인우는 한순간 정지 상태로 있더니 곧 그녀의 안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다행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행히도 걱정했던 아픔은 아닌 모양이었다.


명현은 손을 올려 놀람으로 굳어있는 인우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고 그의 얼굴은 천천히 다시 숙여졌다. 그리고 그녀의 부풀어 오른 입술을 살짝 감싸듯 머금으면서 조용한 호흡을 들려주었다.


“사랑한다고 말해봐.”


“사랑해요.”


명현은 두 팔을 내밀어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함께 호흡을 나누고 있는 인우의 입속으로 속삭임을 밀어 넣었다. 온몸의 신경이 그의 손끝에서 흥분되고 있는 유두로 몰아지면서 명현은 그에게 더 가까이 닿고싶은 열기에 휩싸였다.


그의 목을 휘감고 있던 팔을 풀면서 그녀의 손길은 제 것을 찾듯이 스스럼없이 인우의 셔츠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만지고 싶었다.


탄탄한 배와 옆구리 주위를 쓸어주듯이 어루만지면서 그의 심장이 뛰는 곳까지 올라갔다.


손바닥을 때릴 듯한 강한 울림을 느낀 명현은 성급하게 입맞추며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가기 시작했다. 가슴을 맞대어 그 힘찬 소리를 안고 싶어졌다.


셔츠 사이로 그의 보기 좋은 상체가 드러나자 둘의 입술이 떨어졌다. 인우는 몸을 일으켜서 셔츠를 벗어 던졌고 나머지 옷들도 셔츠 위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감출 것 없는 하얀 나신이 그를 열망 섞인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또렷했던 눈망울도 조금은 잔잔하게 좁혀져 손을 내밀 듯이 일렁거렸고 붉어진 그녀의 입술은 살짝 벌어져 그를 재촉했다.


“두려워말고 안아요, 안아줘요. 제발.”


그녀의 가슴 아래쪽에 잠시 머물던 인우의 시선을 명현은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도록 한 다음 간절하게 애원했다.


“그만두지 못할 수도 있어. 아마 널 아프게 할거다.”


인우는 자신의 가슴 언저리를 조용히 쓰다듬는 명현의 손을 가만히 움켜지면서 괴로움 목소리를 내었다.


“만일 아프다해도 참을 수 있어요. 내가 당신을 안고싶어 하는 거니까.”


인우를 끌어안기 위해서 명현은 어깨를 살며시 들어올렸다. 팔 안쪽의 보드라운 살결이 그의 얼굴을 감싸안으며 천천히 그를 아래로 이끌어 내렸다.


인우는 비로소 그녀의 살냄새를 향긋하게 맡을 수 있었다. 두려움을 몰아내 버리고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그녀를 안을 것이다. 그의 당당한 육체는 명현의 가냘픈 몸 위로 힘을 실으며 감미로운 접촉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이 가는 곳마다 입술도 함께 따라 움직여 명현은 바르르 떨리는 쾌감을 끊임없이 느껴야 했다. 거칠지는 않았지만 그는 폭발할 것 같은 열정을 그녀에게로 온통 쏟아 붓고 있었다. 떨림으로 명현의 몸이 나른하게 이완되는 듯하자 인우는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 하아…!”


그녀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격정적인 신음을 울리면서 자신의 몸을 더욱 활짝 열어주었다. 그의 건장한 허리에 명현의 곧은 다리가 감겨지면서 둘의 육체는 사랑을 위해 격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인우의 단단한 골반이 그녀의 아랫배에 한치의 틈도 없이 맞닿은 채, 둘은 거의 하나의 움직임으로 서로를 탐하고 있었다. 조금씩 멀어짐과 다가옴을 반복하는 그의 모든 것에 명현은 근육의 수축으로 인한 경련과 아득해지는 의식 너머로 환희의 감동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나온 신음들이 인우의 입안으로 사라지면서 명현은 아름다운 의식의 끝을 맞이했고 그는 완벽한 결합의 마지막을 그녀에게 모두 쏟아 부은 다음 남은 여운을 음미하려는 듯 명현의 아랫입술을 조용히 빨아드렸다.


“내 아내가 된 널 사랑해.”


사랑을 나눈 후 애정 어린 눈길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남자의 마음을 애태우고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빠짐없이 새겨서 남겨두고 싶었다. 인우는 지나치게 붉어져 쓰라려보이는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어루만져 주면서 그의 입술을 움직였다.


“아름다워. 다시 가지고 싶을 만큼.”


“훗, 고마운데요. 지금은 안될 거 같아요. 아파요. 그리고… 다신, 너무 무거워요.”


인우는 몸을 급하게 일으켰다.


‘제길. 멈출 수 있었을 때 그만둬야 했었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까지 몰아가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인우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곁에 머물 수 있게 됨을 감사하며 더 아꼈어야 한다는 걸 그 사이 잊었던 모양이었다.


“많이 안 좋아?”


그의 목소리는 화가 난 듯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시트로 가려진 그녀의 복부를 살피기 위해 인우는 드러난 상체를 숙였다. 노출되어 있어서인지 그의 어깨는 위엄 있어 보일 정도로 넓어 보였다.


그의 손이 시트 자락을 들어올리려 하자 명현이 그를 만류했다. 그러면서 조용히 고운 입술을 열었다.


“훗, 왜 그렇게 사색이 되었어요. 그렇게 아픈 거 아닌데. 다시 안을까봐 무서워서 그랬어요. 그리고 당신이 무거운 건 사실이에요.”


명현의 말에도 안심을 하지 못했는지 이리저리 그녀의 몸을 살피는 인우의 눈길에 조바심이 묻어 났다.


“다친 곳 아니야?”


“조금은, 맞아요. 너무 놀라는 거 같아서요. 걱정할 정도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인우는 이마에 손을 갖다 대면서 몸을 뒤로 털썩하고 넘어뜨려 버렸다. 한쪽 팔로 눈을 가린 채로 한참 동안을 그 자세로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누워만 있었다.


“자요?”


“…….”


명현은 살그머니 일어나 눈을 가리고 있는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여전히 눈을 감고있는 인우의 가슴을 톡톡 치며 명현은 한번더 되물었다.


“자요?”


“만지지마. 네 손이 닿지만 않으면 참을 수 있으니까. 제발 만지지마.”


다시 눈을 가리면서 그는 나직하게 부탁했다.


이렇게 라도 누르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끓어오르는 열망과 또 싸워야 할 것이다. 이길 자신도 없는 싸움이었다.


“목욕해요, 우리.”


“뭐!”


인우는 순식간에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제발 이라고 부탁까지 했는데 목욕이라니?


조금은 장난스러운 그녀의 고집이 저런 엄청난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을 것이다. 명현은 겨우 가슴까지 정도만 시트로 가리고 있어 옆쪽으로는 아슬아슬하게 감춰지고 있었다.


인우는 난감해했다. 어쩌면 장난에 걸려들 수밖에 없을지도 몰랐다.


“화장도 못 지웠어요. 내 얼굴이 아닌 것 같아. 빨리 씻어요. 저번엔 당신이 씻겨줬으니까, 오늘은 내가 씻겨줄게요.”


명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르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죽이고 싶은가 보군. 윤명현이라면 틀림없이 날 죽일 수 있을 거야.”


“그럴리가요. 결혼 첫날에 남편이 죽기를 바라는 여자는 없어요.”


또 웃는다.


요즈음 들어 너무 자주 웃었다. 이래저래 죽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환한 웃음에 심장이 멎으면서 죽거나 아름다운 그녀를 안지 못해서 미쳐서 죽거나 결론은 하나였다.


“싫어, 혼자 씻고 와. 농담하는 거 아니야.”


그는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며 명현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위험해 보이면 내가 살려줄게요. 당신보다는 못하겠지만, 여기에다 심폐소생술 해 줄게요.”


“장난치지 마.”


그녀의 하얀 손이 인우의 심장 위로 살며시 얹어졌다.


일정한 속도의 쿵쾅거림이 그녀의 손바닥 아래서 서서히 빨라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아우성을 치고있는 그의 열정은 명현의 몸을 그에게로 수줍게 이끌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향해 무릎을 세우면서 그녀는 눈으로 물었다.


‘당신에게 키스하고 싶은데도 참을까요?’


명현은 따뜻한 그의 입술위로 스며들 듯이 빠져 들어갔다. 살짝살짝 느리게 헤엄쳐 다니며 그의 입술을 어루만져 주었다. 촉촉해진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며 숨 가쁜 호흡으로 그를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인우의 머리를 끌어당기면서 더 깊숙이 파고 들어가자 둘 사이에 존재하던 얇은 장애물이 그녀의 가슴을 스치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말캉한 젖가슴이 애태울 만큼의 거리에 닿아 있었다. 도드라진 돌기만이 그의 어깨에 살랑거리며 간질이자 인우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둘 사이를 빈틈없이 메워 버렸다. 보들보들한 살들이 바싹 부딪혀오자 인우는 미친 듯이 명현의 입술을 삼켜버렸다.


싸움은 질 것 같았다. 도저히 그녀는 이길수가 없었다.


그의 혀가 명현의 입속을 남김없이 더듬으며 원하는 만큼 탐하기 시작했다. 달싹거리며 자신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입술과 영혼처럼 부대껴져 있는 그녀의 체온이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는 경고음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마주 닿은 두 입술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미칠 것 같은데 그만둬야 하나?”


자신의 의지로는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그녀가 그칠 수 있도록 붙잡아줬으면 했다.


“그럴 수 있겠어요? 난 안될 거 같은데….”


명현도 예민해진 감정의 욕구를 채우고 싶었다. 그리고 그도 사랑해 주고 싶었다. 강한 어깨를 짚으면서 명현은 그의 위에 나긋하게 걸터앉으며 인우의 입술을 깨물었다.


인우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살이 맞닿으면서 그녀의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연한 허벅지가 허리를 부드럽게 마찰시키면서 그를 조여주었다.


인우는 점치 거세지는 본능에 따라 그녀의 등을 안아 힘껏 누르면서 자신을 더 가까이 밀어붙였다. 세워진 허리 탓에 그녀의 가슴에는 안개 같은 살들이 탐스럽게 차올라있어 인우는 입안 가득 그녀의 향기를 맛볼 수 있었다.


그의 입술이 감촉 좋은 유두를 잘근거리며 애무하자 명현은 배여나오는 신음을 억눌러 간신히 숨을 내쉬며 애원했다. 그의 온몸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제발….”


달아나려는 의식 속에서도 자신의 가슴을 물어뜯듯이 빨아대는 그의 입술만은 느낄 수가 있었다. 다른 부탁의 말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제발 어떻게 해 주기만을 재촉하게 될 뿐이었다.


결국 참으려고 했던 신음이 흐느낌으로 변하면서 명현의 목덜미가 뒤로 젖혀졌다.


“어서…제발….”


명현의 도발적인 요구였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으로 팽팽해진 신경들이 튕겨져 나갈 것 같았다. 인우의 손이 탄력 있는 그녀의 엉덩이를 감싸안아 살짝 들어 올렸다.


“아….”


단단하게 일어선 그가 들어서자 가냘픈 외마디의 신음이 터져 나오면서 명현의 몸이 조금씩 흔들렸다.


그녀의 허벅지 안쪽 살들은 인우를 더 압박하여 살갗을 마찰시켰고 커다란 손에 의해 엉덩이가 잡힌 채 완벽하게 그에게로 끌어 당겨졌다.


그윽했던 그녀의 눈빛이 순간 찌푸려졌다. 아랫입술은 이미 깨물어져 있었고 어깨를 그러쥐고 있던 손가락에도 힘이 잔뜩 들어가 누르듯이 움켜쥐었다. 터뜨려주고 싶었다.


입술이 깨물어져 틈이 닫혀버린 그녀의 숨을 트여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가엾게도 내지르지 못하고 숨죽이고 있는 게 인우는 보기가 싫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얼굴을 낚아채어 고정시키고는 다급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여유를 주지도 않고 강력하게 그녀의 숨을 들이마셨다.


마지막 숨까지 모두 차 올랐는지 명현은 움직이지도 않는 고개를 약하게 저으며 그만둬주기를 사정했다. 한 모금도 남김없이 흡입하고 나서야 인우는 입술을 열어주었다.


“하아… 하….”


파르르 떨면서 지탱하고 있던 그녀의 팔이 풀어져 내리면서 막혔던 숨이 가쁘게 토해졌다.


인우는 미끄러지는 그녀의 상체를 지그시 받쳐주며 배회하듯이 느긋한 동작으로 등허리를 쓰다듬어 주며 더 싶은 곳에 닿기 위해 거침없이 밀고 들어갔다.


찌를 듯한 뻐근함이 명현의 아랫배를 아릿한 통증으로 무겁게 만들더니 이내 참을 수 없는 야릇하고 다른 느낌으로 바꿔놓기 시작했다.


말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들이 연한 점막을 마찰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통증으로 인해 경직되었던 몸이 한결 부드러워지면서 그가 주는 감미로운 사랑의 행위를 통해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숨김없이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 명현은 물위에 떠 있는 꽃잎처럼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일렁거리며 넘실대듯 그를 두드렸다.


“윤명현, 네 목소리 듣고싶어….”


인우는 도망칠 수 없는 절정의 동작을 잦아지게 움직이면서 탁한 음성으로 으르렁거렸다.


“아…, 사랑해요.”


명현은 그의 몸을 안간힘을 다해 끌어안은 채로 온몸을 내 맡겨 전율의 선물을 들려주고는 인우의 가슴팍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나신은 흘러내릴 듯이 나른한 모습으로 그에게 매달려 있었다. 꺾인 목을 간신히 그의 어깨 위에 걸치듯 얹어 놓고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한 번도 불안했던 사랑의 행위를 연이어 받아들이느라 그녀는 남아있는 기운을 모두 쏟아버렸다.


툭하고 그녀의 팔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몸이 뒤로 휘청거렸다.


인우는 잽싸게 그녀의 뒷목을 받아들어 자신에게 붙인 다음 천천히 몸을 숙여 침대 위로 누웠다.


아직까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몸 위에서 아이처럼 엎드려있는 명현을 인우는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촉촉했던 그녀의 등이 차츰 서늘해지자 인우는 마음이 갑자기 급해졌다.


“윤명현, 너 무거워.”


“음, 알아요. 나도 참았으니까 당신도 참아요.”


졸리운지 명현의 웅얼거림이 희미하게 들렸다.


“훗, 나 씻겨준다고 하지 않았나?”


“취소예요. 다음에 해 줄게요. 지금은 자고 싶어요.”


납덩이라도 매달은 듯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걸었다.


“지금 씻어야 돼. 땀 식으면 감기 걸려.”


“괜찮아요, 이러고 있으니까 하나도 안 추워요.”


인우는 손을 옆으로 뻗어 더듬더듬 시트를 잡아당겨 명현의 등을 덮어주며 그녀의 몸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명현은 소중한 온기를 빼앗겨서인지 몸을 더욱더 웅크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무거워요? 이렇게 내팽개칠 만큼?”


목안으로 빨려 들어간 듯한 힘이 빠진 목소리로 억지를 부리는 명현을 인우는 피식 웃으면서 쳐다보았다.


“농담을 하는 거 보니 다시 살아났나 보군. 물 받아놓고 올게.”


몸을 일으킨 그가 돌아서자 드러난 나신에 눈길이 저절로 갔다.


움푹 팬 등줄기를 중심으로 자잘한 근육들이 세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강해 보이는 어깨에서 날렵한 허리까지 그의 벗은 등은 우뚝 솟아 보였고 탄탄한 허벅지와 날씬한 종아리는 그의 기다란 다리를 보기 좋은 모양으로 만들어 주었다.


욕실 안으로 그가 사라지자 명현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거렸다.


‘휴, 안 아픈 곳이 없네. 일어서지도 못하겠어. 그냥 이대로 잘 수 있었으면….’


욕에 물 받히는 소리가 한참동안 들렸다. 그 소리에 방안의 모든 소리들이 묻혀버렸다. 시계침이 째깍거리는 소리, 공기 청정기의 낮은 울리, 그리고 또….


몸이 둥실 공중으로 떠올랐다. 자유의지 없이 이끌려 다니는 걸 보면 아마도 꿈속인 모양이었다. 스르르 소리도 없이 얌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따뜻한 구름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인우는 속눈썹으로 깊은 그늘을 만든 명현을 가슴에 안은 채 욕조 속으로 들어가 몸을 담갔다. 하루만의 피곤뿐만 아니라 누적되었던 걱정과 안타까움 들이 모조리 다 들고 일어서는 것 같았다.


“괜찮아?”


잠에 취한 그녀에게 괜한 물음을 던진 인우는 물 속에 잠긴 그녀의 몸을 다정하게 쓸었다. 그녀의 가슴 앞으로 가로질러 있는 손으로 드러난 어깨에 물을 흘려주며 인우는 짧으면서도 치열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떼어내고 싶었던 순간들도 걸러지지 않고 고스란히 덩어리져 있었다. 그는 명현의 상처를 손끝으로 되짚으며 고새를 뒤로 젖혀버렸다. 새살의 흔적들.


인우가 생각에 잠기면서 욕조 뒤로 고래를 젖혀버리자 그의 가슴에 기대어져 있던 명현의 머리가 조금씩 움직였다.


자세가 불편해서인지 명현이 눈을 얄팍하게 뜨면서 그에게 기대어져 있던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등뒤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명현은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는 손길로 그가 깨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 이러고 가만히 있어요? 빨리 씻고 나가서 자요.”


“화장 지우는 법을 몰라서 네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복부를 스치는 그의 손을 붙잡고 명현은 돌아앉았다. 그의 몸은 나른하게 이완되어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그를 쉬게 해주고 싶었다.


“모르는 것도 있었어요? 근데 너무 쉬운걸 모르니까, 좀 시시하다. 일어나 봐요, 모르는 건 배워야죠.”


명현은 욕조 모서리에 세워둔 튜브를 가져와 인우의 손가락에 살며시 눌러 짜낸 하얀 크림을 묻혀 주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얼굴에 닿게 했다. 감겨져 있던 눈이 서서히 떠지더니 이내 허리를 세워 앉았다.


“뭐하는 거야?”


그가 뭐하냐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가르쳐 주잖아요. 모른다면서요.”


그의 길쭉한 손가락을 잡고 클렌징 로션을 이마와 뺨에 얹어놓은 그녀의 모습은 케이크 크림으로 장난을 치는 아이와 같았다.


끝없이 인우를 그녀에게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 한계도 알 수 없었고 다음을 예측도 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원을 그리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볼록했던 크림들을 납작하게 퍼뜨리면서 그는 조그마한 얼굴을 어루만졌다.


“잘 하네요. 이젠 수건에 물을 적셔서 닦아주면 되요. 빨리요.”


명현은 눈을 감고 그가 닦아주는 대로 가만히 있더니 해말간 얼굴을 드러내 주었다. 인우의 집게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쓰윽 훑어 내리자 검은 구슬이 자신에게 반짝거리며 웃어주었다.


“잘 닦였어요?”


인우는 명현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들여다보았다.


“그래.”


“쉽죠?”


“생각보다는.”


또다시 울렁거리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그녀는 잔잔하고 맑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맞춰볼래요?”


“만일 정답을 말한다면 뭘 해줄 거지?”


“자신 있나 보네요. 좋아요. 원하는 거 하나만 들어줄게요. 됐죠?”


“윤명현, 너 행복해 보여.”


여유 있는 눈동자가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명현은 급한 숨을 내쉬며 억울해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문제가 너무 쉬웠어. 게다가 답도 여기에 큼지막하게 써 있어.”


물기 묻은 기다랗고 강한 손가락이 명현의 이마를 쓸 듯이 눌렀다.


그러면서 그녀의 눈가와 입술도 소중하게 쓸어주었다.


“그렇게나?”


“음.”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에게 자신의 마음이 고이 비춰졌다는 게 기뻤고, 행복을 표현할 수 있는 스스로도 대견스러웠다.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럴 가능성도 거의 희박했었던 일을 그가 만들어 주었다.


명현은 두팔을 들어 그의 목을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내 것과도 같은 그의 온기가 느끼고 싶어졌다.


“그럼 그 이유도 알겠네요.”


명현이 그의 귀에 입맞춤하면서 낮게 속삭였다.


“그건 들어봐야 알 것 같은데.”


대답을 요구하는 인우의 말에 명현은 안았던 몸을 살짝 떼어내며 눈을 흘겨가며 그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잖아요.”


“아니, 몰라.”


알고도 모른 체 한다는 걸 알았는지 자신의 목을 휘감고있는 그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힘껏 조여주는 부드러움이 너무도 좋았다.


아무 거리낌없이 자신을 덥석 껴안는 그녀의 친밀함도 뿌듯한 만족을 가져다주었다.


“당신 때문이에요.”


듣고 싶었던 말이 흘러나왔다. 그의 입술이 명현의 귓불과 뺨을 지나 입술위로 옮겨지더니 그녀의 입술 모양을 따라 그리듯 움직이면서 웃음기를 머금었다.


“다시 말해봐.”


포개어진 입술을 살며시 열어주며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당신….”


더 듣지 않아도 충분했다.


열 번이라도 대답할 수 있는 그녀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타나는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알면서도 시치미떼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린 자신에게 들려준 그 한번의 감동으로도 인우는 넘칠 것 같았다.


***


정수리 위에서 그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왔다. 등에 맞닿은 그의 가슴도 일정한 속도로 뛰고 있었고 팔베개를 해준 팔뚝에도 맥박은 규칙적이었다.


잠이 들었다. 그는 잠이 든 게 분명했다.


명현은 팔베개를 해준 그의 팔을 살며시 밀어 올렸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늘만 이러고 자.”


머리 위에서 들려온 조용한 목소리였다.


“난 팔베개해서는 못 자요.”


자신의 팔을 쓸어주며 부탁의 말을 하는 명현의 허리를 인우는 더욱 자신에게 바싹 당겨 끌어안으며 그럴 의향이 없음을 알렸다.


“베고 자본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알아.”


“베개도 못 베고 자는데 팔을 어떻게 베고 자요.”


대체로들 좋아하고 원한다고 알고 있었다. 이렇게 몰래 밀어낼 정도로 싫어한다는 게 인우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팔을 누르고 있는 적당한 무게감이 잠을 자는 사이에도 그녀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원하는 거 해준다고 하지 않았나? 약속이니까 지켜.”


“…….”


명현은 약속이라는 말에 다른 말은 보태지 않았다. 그녀가 인우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했을 때 그가 팔베개를 해 주겠다고 했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잠버릇 중의 하나였다. 베개를 베지 않고 웅크리고 잘 때가 가장 편안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함께 잠들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별 달갑지 않은 버릇이었다.


처음이니까 힘든 거라고 오기를 부리고 싶었다.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인우는 그녀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매끄럽게 드러나 그녀의 등에 입술을 부비며 자신의 가슴에 맞닿은 살갗들의 부드러운 감촉을 마음껏 느꼈다. 그런데 자신의 입술이 그녀의 어깨와 귓불을 장난스럽게 애무를 해도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녀가 깨어있다는 기척이 없었다. 벌써 잠이 들지는 않았을 텐데?


인우는 명현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살짝 들어올려 떨어뜨려 보았다. 툭하고 힘없이 떨어졌다.


싱거웠다. 제법 오래 뿌루퉁해 있을 줄 알았는데 쉽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마도 평소였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결혼 서약을 했었고 둘의 사랑을 더 깊이 확인한 날이기도 했던 게 그녀가 불편한 팔베개를 하고도 쉽게 잠이 든 이유였다.


‘서인우의 아내, 윤명현.’


가득 고여있는 눈물들을 밀어내지도 못하고 담아두기만 했던 투명한 눈동자가 그의 심장에 박혀 버렸었다.


빼 버려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저 찌르는 통증을 느끼고만 있었다.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힘들고 아픈 시간이기도 했고 행복하기도 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자신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보아도 정확한 이유는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 사이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빼버리지 않은걸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만일 그녀를 빼버렸다면, 그랬다면 자신에게도 따뜻한 사랑이란 영원히 존재하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너 때문이다. 윤명현.’


답답하게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거운 돌덩이가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명현은 몸을 뒤척거려 보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는 가늘게 눈을 뜨면서 어슴푸레한 빛을 눈으로 흡수했다. 그의 맨 가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팔베개는 밀쳐버리고 그의 겨드랑이 아래의 좁은 공간에 그녀는 웅크리고 있었다. 명현은 자신을 덮고있는 그의 나머지 팔에서 어깨를 살짝 빼내었다.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돌아누울 수가 없었다. 돌덩이로는 부족한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그녀의 다리를 휘감고 있었다.


명현은 그의 단단한 허벅지를 살살 쓰다듬어 주면서 조심스럽게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음, 인우의 짧은 신음소리가 들리자 명현은 흠칫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마 아래서부터 각 지게 뻗어 내린 콧날을 제외한 그의 얼굴은 부드럽게 이완되어 있었다. 그로서는 정말 오랜만의 단잠일 것이다. 명현은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자연스러운 뒤척임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아늑함이 하늘에서 내리고 있었다. 벌어진 커튼 사이로 일직선의 물줄기가 계속 이어져 내렸다.


그의 고른 숨소리와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명현을 동시에 유혹했다. 따뜻함 속에서 잠을 더 청하고도 싶었지만 비의 감상이 더 간절하게 다가왔다. 날씬한 종아리가 침대 아래로 단정하게 내려졌다. 의자에 걸쳐놓았던 가운을 여미며 명현은 창가로 다가갔다.


빌라의 정원은 한껏 멋스럽게 꾸며져있었다.


적당히 큰 나무들이 울타리처럼 빙 둘러 서 있었고 예쁘게 모양을 낸 길들이 사이사이로 순서를 일러주듯이 연결되어 있었다.


넝쿨들을 얽히게 얹어놓은 작은 터널과 따로 꽃들만 심어놓은 공간에는 정원에서의 식사를 위한 테이블과 의자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가지 색에서 점점 여러 가지 색으로 변화하고 있는 나무들은 물기를 머금어 더 선명하게 짙어져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마루에 나와 앉아 떨어지는 빗물을 손으로 받아내었다.


손바닥을 때리며 튕겨져 나간 물방울들이 눈가에 맺힐 때는 하늘이 자신을 대신해서 울어주는 눈물이라고 생각했었다. 때로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가슴속을 시원하게 정화시켜 주었고 또 어떤 때에는 애절한 마음만 더 보채고 가기도 하면서 익숙하고 좋아졌다.


하지만 오늘은 대신 울어주기를 바라지도 애태우지 말고 더 내려주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기쁘게만 느낄 것이다. 늘 반기던 친구였으니까.


***


잠결에도 인우는 허전함이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억지를 써가며 안고 잤는데도 그녀는 품을 벗어난 것 같았다. 그 고집스러움이 지금은 너무도 맘에 들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인우의 손이 어디쯤인가를 더듬었다. 그런데 손에 닿지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빈자리가 메워지지 않자 그는 불만스러운 단어를 내뱉으며 거대한 나신을 일으켰다.


“후!”


침대 옆 서랍장 위에 옷들이 차곡차곡 개어져 있었다. 인우는 그것들을 대충 걸치는 걸로 끝을 내고는 침실의 욕실문부터 열어 보았다.


없었다.


그는 침실문을 열고 나와 먼저 눈에 보이는 주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도 그녀는 없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서재와 그 반대편에 잇는 피아노 방까지 살폈다. 없었다.


집안에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성적으로는 아무 일도 아닐 수 있었다. 바깥에 잠시 나갔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나가야 될 일이 전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인우의 사고회로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는 침실로 들어가 방이 울리도록 거칠게 문을 닫고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익숙한 버튼을 누르고 호흡이 제대로 흘러나오기를 기다렸다. 이내 그의 입에서 한숨 같은 긴 숨이 흘러나왔다.


“어디야.”


대답대신 반갑지 않은 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그의 청각으로 흘러 들어왔다. 핸드폰을 귀에 바짝 대고 방안을 서성거리던 인우가 갑자기 창가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커튼을 세차게 걷어버렸다.


“거기서 뭐해?”


인우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초록의 정원에는 빗소리와 함께 그녀가 하얀 미소를 머금고 손을 흔들며 서있었다.


명현은 검정의 우산을 받쳐들고 그를 올려다보며 티없이 웃어주었다. 지금까지 걱정에 안절부절하지 못하던 그의 생각은 하나도 모른 것처럼 화사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핸드폰의 폴더를 닫으며 인우는 이마를 가리며 흘러 내려온 머리를 쓸어 올렸다. 도대체 무엇을 걱정하고 불안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터무니없는 생각을 떠올리진 않았지만 어떻게 보면 아주 없지만도 않았을 것이다.


윤명현이 사라졌다.


그녀를 잃어버릴 뻔한 순간이 아직까지는 눌러 없어지지 않고 자꾸만 뇌리에 떠올랐다. 손가락 사이로 순식간에 빠져버리는 모래 알갱이들처럼 그날의 허무함은 인우에게 오랫동안 각인 되어 있었다.


“윤명현…. 못 말리는 윤명현.”


그녀의 이름을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인우는 급하게 가디건을 찾아들고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현관의 붙박이에서 우산을 꺼낸 다음 현관문을 힘차게 열었다. 순간 차갑게 느껴지는 싸늘한 공기에 인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감기가 그리운가 보군.’


인우는 정원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빨리 가서 그녀를 데리고 들어와야 할 날씨였다. 저만치쯤 나무 아래서 비 구경을 하고있는 명현이 보였다.


“윤명현.”


그의 부름에도 잔잔한 모습이었다. 처음부터 거기에 속해있던 그림처럼 명현은 편안하게 묻혀 있었다.


“깨우지 그랬어.”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고있는 명현은 입술이 이미 파래져 있었다. 인우는 가지고 나온 가디건을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며 우산을 받쳐 주었다.


“깨우면 안될 것 같았어요. 곤하게 자는데 누가 깨우면 화나잖아요. 별일도 아닌 거 가지고.”


명현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의 음성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눈떴을 때 안 보이는 거보단 나아.”


일어나 그녀의 체온을 찾아 움직이던 손길의 허무함과, 집안 곳곳을 뒤지며 찾았지만 보이지 않아 불안하게 뛰던 심장의 박동을 그녀는 절대 모를 것이다.


“혹시 걱정했어요?”


명현이 그의 얼굴을 미안한 듯 살피자 굳었던 인우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아직까지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랬다. 혹시라도 눈에 안 보이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아직도 그의 내재에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뻗친 머리를 하고 나왔구나. 면도도 안하고. 놀랐잖아요, 저렇게 부스스한 아저씨가 누군가하고.”


명현은 인우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소리 없이 입술을 길게 늘였다.


정리되지 않은 모습으로 그가 빗속을 찰박거리며 뛰어왔다. 이마를 지나 옆으로 헝클어진 머리는 손으로 대충 빗어 넘긴 듯했고 다듬어야 할 때를 놓친 턱에는 수염 자국이 거무스름하게 번져있었다.


명현은 그런 그의 모습이 더 좋았다. 그의 이마에 쏟아져 내린 머리카락도 넘겨주고 싶었고, 밤새 푸른 수염이 돋아난 거친 턱도 만져보고 싶을 만큼 멋지게 보였다.


“아저씨? 내가?”


기가 막힌 듯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는 모습에 명현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려 주었다.


“아저씨, 싫어요? 난 편안해 보여서 좋은데. 그리고 결혼했으면 아저씨 맞아요.”


명현은 새침한 표정으로 인우를 놀리며 그의 팔에 팔을 쑥하고 집어넣어 팔짱을 꼈다.


“그럼, 윤명현은 이제부터 아줌마라고 부르면 되나?”


“마음대로 해요.”


인우는 아줌마가 된 명현을 상상해보며 싱긋 웃었다.


“상관없다는 뜻이야?”


“…….”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팔에 매달려 걸음을 맞추는 게 즐거워 보였다. 찰박찰박 걸음을 따라오는 그 경쾌한 소리에 명현은 신이 난 모양이었다.


“비가 그렇게 좋아? 너그러워질 만큼?”


유독이도 비를 좋아하는 명현의 모습에 이제는 반 포기가 될 정도였다.


“그런가봐요. 비 싫어요?”


그의 얼굴을 비켜서 슬쩍 올려보며 명현은 애교스럽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얼굴은 새파랗게 얼어있었다.


“별 감정 없었는데 네가 너무 좋아하니까 갑자기 싫어졌다. 들어가자.”


질투였다. 속 좁은 남자라 욕을 할지라도 명현에 대한 소유욕은 이제 막을 수 없는 성처럼 견고해지고 있었다.


“난 그래도 계속 좋아할 거예요.”


“그러시든지.”


인우는 한 팔로도 푹 파묻힐 만큼의 가녀린 어깨를 단단히 움켜쥐면서 바람을 타고 사선으로 내리는 빗물을 커다란 우산으로 맞받았다.


정원을 벗어날 때쯤 굵어지고 있는 빗방울들이 우산을 스치고 들어와 두 사람의 얼굴을 때리면서 흘러내리자 그가 시큰둥하게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감기 걸려 앓아 누우면 앞으로 좋아하는 비는 절대 못 만날 줄 알아.”


인우는 자신의 행복에 감사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해 줄 수 있는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했다.


# 21장


“애들 도착할 때 되지 않았나?”


새 사람을 기다리는 흥분된 마음으로 서 원장은 거실과 주방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아내에게 넌지시 물었다. 서성거리는 발걸음이 반가운 기다림을 즐기는 듯 했다.


“거의 그러네요.”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쁘게 손을 놀리던 김 여사는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해 주고는 접시에 반찬들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지원아, 너 나가있어. 할 일도 없는데 뭣하러 둘씩이나 붙어있어? 나가서 아버지랑 바둑둬.”


나가 있으라는 말에도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식탁머리에서 왔다갔다하던 지원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김 여사에게 돌렸다. 뭔가 하고싶은 말이 있는 듯 싶었다.


“왜?”


김 여사가 옅은 갈색의 원피스를 세련되게 입은 지원을 향해 입모양을 둥글게 했다. 그러면서 지원의 얘기를 들어주기 위해 김 여사가 반찬을 담으려던 빈 접시를 식탁 위에 그냥 내려놓았다.


“어머니, 진짜 예쁘죠? 결혼식날 다들 신부 예쁘다고 한마디씩 하셨잖아요. 정우 오빠 친구들도 난리 아니었어요.”


크게 쌍꺼풀 진 눈과 동그란 얼굴이 전체적으로 귀여운 인상의 지원은 마시고 있던 물 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면서 김 여사와 편안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오랜 시간 함께 지낸 데에서 오는 익숙함이기도 했다.


“그래, 예쁘더라…. 너도 그럴 텐데 뭘 그러니.”


“에이, 어머니. 그건 아니에요. 전 그런 분위기 안 나오잖아요.”


인자하게 웃어주는 김 여사를 향해 지원은 손사래를 치며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 눈에는 너도 그렇게 예뻐. 그나저나, 정우 많이 늦는대니?”


주방을 가로질러 거실 한 중앙에 있는 괘종시계를 바라보던 김 여사가 미간을 접으며 물었다.


“전시회 준비 막바지잖아요. 시간 맞춰 온다고 그랬으니까, 곧 도착할 거예요.”


지원의 말에 김 여사의 손길이 더욱 분주해지고 있었다.


이제 곧 들이닥칠 새 식구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주방에 가득했다. 정성과 반가움이 묻어나는 음식을 바라보던 지원이 한쪽에 있는 수저통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했다.


얼마 있지 않으면 자신도 곧 결혼을 하게 될 텐데도 부러운 마음이 드는 건, 아마도 그날 너무 아름다운 신부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질투의 마음이었다.


어릴 때부터 줄곧 자신만을 예뻐하시던 어른들도 이제는 그 사랑을 나눠서 줄거라 생각하니 자신의 마음이 얄궂게도 가족을 향하여 질투라는 감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자신도 인우가 사랑하는 사람을 맞게되어 너무도 기쁘고 축하하는데도 다른 이면의 마음은 그런 서운함도 가지고 있었다.


지원은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 본 뒤 김 여사를 향해 명랑한 목소리로 당당하게 요구했다.


“어머니, 저희들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 해 주셔야 해요.”


“아이고, 얼른 결혼이나 하세요.”


김 여사는 딸같이 어리광을 부리는 지원에게 정겹게 눈을 살짝 흘겼다.


“그런데요, 어머니.”


반달처럼 휘어진 김 여사의 눈길이 또 뭔가를 종알종알 물으려는 지원의 입술에 집중되어졌다.


“왜?”


“정말 예쁘죠? 그분?”


부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지원의 물음에 김 여사는 고운 미소로 돌려주었다.


“너도 예쁘다니까.”


“정말요?”


“그래.”


“감사합니다.”


지원은 씩씩하게 대답을 하며 식탁에 반찬 접시들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


초록 저고리에 다홍치마. 저고리의 소매 끝동과 치맛단에 물린 금박들이 색채의 화려함을 더해주면서 명현의 단아한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해 주었다.


길어진 머리는 적당한 웨이브로 볼륨 있게 마무리되어 드레스를 입었을 때와는 또 다른 기품이 보였다. 명현은 유리상자속의 인형처럼 그렇게 앉아있었다.


“걱정되는 거 있어?”


차에 오르고 명현은 줄곧 말이 없었다. 불편한 옷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허리가 유난히 꼿꼿하게 곧아있어, 자꾸 인우가 그녀에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긴장감처럼 딱딱하지는 않았지만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그 모습 때문에 간간이 운전을 하는 도중에 명현을 돌아보고 있었다.


“아뇨. 왜 걱정 있는 것처럼 보여요?”


평상시와 같은 어조의 음성이었지만 인우는 뭔가가 틀리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인우가 잠시 망설이며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명현이 그를 부드럽게 쳐다보았다.


“그럼, 조금 맞아요. 말 그대로 시집가는 거잖아요.”


시집이라는 말에 긴장을 하는 것 같아 인우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고 힘을 주었다.


“훗, 그게 그 ‘시집’인가 보군. 낯설어서 그럴 거야. 그렇게 힘든 분위기 아니니까 걱정 안해도 돼.”


시집이라는 단어.


예전과 달리 의미가 없진 말이기도 했다. 산 넘고 물 설은 곳을 남편의 뒷모습만 보며 쫓아가서, 얼마의 시간 동안은 자라고 정들었던 곳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의 차가움을 손으로 훔쳐내어야 하는 인내의 의미.


가고 싶어도 쉽게 가지 못했던 곳을 부모의 부음을 받으면서 가장 당당한 걸음으로 갈 수 있었고, 출가외인이라 하여 타인의 의미까지 부여해 준 시집.


어머니의 결혼이 그러했고, 그녀의 할머니 역시 그랬을 것이다.


지금에서야 받아들일 수도 있고 어쩌면 황당한 느낌까지 드는 억울한 단어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어려움과 조심스러움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끔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도 그랬다. 단지 어렵고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뿐이라고. 자꾸만 뱃속을 간질거리게 하는 이 불편함은 어려움 때문이라 애써 자위하며 명현은 말간 웃음을 지었다.


괜찮다. 괜찮다.


***


“아버님, 어머님. 절 받으세요.”


명현은 가지런히 겹친 두손을 어깨 높이로 살짝 들어올린 다음 허리를 천천히 숙여 이마를 손들에 살포시 대었다.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연결된 선으로 능숙하게 큰절을 올리는 그녀를 서 원장 부부는 연신 따뜻함이 묻어있는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주 곱게도 인사하는구나. 잠은 잘 잤니?”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고운 맵시였는지 김 여사는 감탄스러워 하며 칭찬을 했다.


“네. 잘 잤어요, 어머니.”


명현은 치마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려두며 미소 진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그럼 너도 잘 잤겠구나.”


서 원장은 부모 앞에서도 좋은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 아들이 괘씸해 드러내어 놀려주었다.


“네.”


부친의 의도를 눈치챈 인우는 내내 바닥으로 내리고 있던 시선을 서 원장에게로 향하게 한 다음 싱긋 웃었다. 그 모습에 서 원장 내외는 놀란 표정을 지었고 명현의 뺨은 홍조를 머금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보지 못했던 아들의 환한 웃음에 김 여사는 마음이 뿌듯해졌다. 좋은 짝을 만나 저렇게 행복한 얼굴을 보여주니 부모로서는 더 바랄게 없었다. 그러다 문득 병원 일로 신혼여행을 가지 못하는 아들이 얼마나 더 쉴 수 있는지 궁금했다.


“여보, 인우 언제 출근해요?”


“그걸 왜 내게 물어봐. 저기 입 벌리고 앉아있는 당신 아들한테 직접 물어보면 되지.”


“인우 입 안 벌어졌어요. 왜 괜히 질투하고 그래요.”


여자에게는 남편보다는 자식이 먼저인가 보다. 김 여사의 눈이 통박을 하는 남편을 원망하듯 하지만 인우에게는 더없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내일까지 쉬기로 했어요. 조정이 안된 수술들이 있어서 모레 출근해야 되요.”


결국 인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결혼식 올린 날 포함해서 삼일밖에 안 된다는 거니?”


김 여사는 짧다는 어감으로 남편인 서 원장을 흘깃대며 아쉬워했다.


“스케줄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의사가 환자를 우선시 하는 건 당연한 거다. 삼일이며 우리 때보다 하루 더 쉬는 셈인데 뭘 그리 안타까워해?”


“당신이 대신 해줘요. 인우 수술.”


아들을 살짝 바라보다 부탁을 지나 강요의 눈빛을 김 여사가 보내자, 서 원장은 큰 눈만 껌뻑거렸다.


“뭐?”


“쟤들 며칠 더 쉴 수 있게 당신이 인우 대신 그 수술 해주면 되잖아요. 설마 서민준 씨 오피(operation, 수술) 실력이 서인우만 못 하려고요. 그죠?”


나긋한 목소리로 교묘하게 서 원장을 자극하는 김 여사의 말투는 조심스럽게 앉아있는 명현의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만들었다.


“그만하세요, 어머니. 그렇게 매번 정확하게 찌르시면 아버지는 항상 당하실 수밖에 없어요. 아버지도 한번쯤은 이겨 보시죠.”


큰소리로 다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더욱더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 모친의 유함을 대단히 권위적인 성격의 부친은 단 한번도 이기지 못했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들이 모친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게 적용되었고 더불어 이해와 지원까지 뒤따랐다.


자라면서 아들들은 그 너그러움이 모친에 대한 부친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렇게 부모는 소리 없는 사랑을 아들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넌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내가 볼 땐 너도 가망 없어. 똑같은 말을 너희 할아버지께 드렸었다. 물론 지금의 내 대답과 같으셨다. 가망 없는 이유를 더 설명해주랴?”


서 원장은 웃음을 입가에만 머금고 있는 명현과 느긋하게 부모의 대화를 듣고만 있는 인우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대뜸 큰소리로 장담했다.


“저 왔어요. 형, 왔어? 어, 예쁜 형수님이 오늘은 더 예쁘시네.”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면서 상기된 정우의 얼굴이 내비쳐졌다.


형제간의 외모는 거의 흡사했지만 말하는 투로 나타나는 성격은 극과 극이었다.


정감 어린 말로 어색한 사이를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정우는 모친의 성격을 닮은 듯했다. 서로지지 않는 말을 주고받은 인우와 서 원장의 성격과는 틀림없이 달랐다.


“많이 먹으렴, 지원이도.”


반찬 접시를 가까이 놓아주며 김 여사는 다정한 말을 잊지 않았다. 아마도 명현이 오기 전부터 여자가 봐도 예쁘다는 말을 입이 마르게 하던 그녀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을 것이다.


“네. 어머니.”


기쁜 듯한 지원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국을 떠먹던 정우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명현을 바라보더니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형수님! 팬클럽 생겼는데 모르시죠?”


“네?”


“네! 팬클럽이요!”


시장했는지 다시 쉴새없이 젓가락을 움직이며 자랑스러운 사실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정우는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팬클럽? 누가 팬이라는 거야?”


인우의 시선이 밥을 먹으며 말을 하느라 분주한 정우에게 머물렀다.


“왜, 신경 쓰여? 하긴, 형에게는 안티가 되니까 신경이 쓰이겠구나.”


안티라는 말에 인우를 비롯한 식구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감돌았다.


“훗, 안티? 현우, 건우, 선우 그리고 네놈 친구 김형석 또 더 있어?”


“어, 규태도 있는데.”


명단을 꿰고있는 인우의 말에 골똘하게 생각을 하던 정우가 단박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들먹였다.


“서른을 넘긴 놈들이 아직도 그런 장난이야?”


아직 미혼인 사촌 동생들과 동생의 친구들이 명현을 위해 그런 우스운 장난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는 있지만 인우 역시 명현을 좋아한다는 동생의 친구들 소식이 싫지는 않은지 입가가 부드럽게 휘고 있었다.


“장난 아닌데…. 회비도 걷기로 했고 이제 곧 활동도 할 생각인데?”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놓았다는 동생의 말에 인우는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며 우습지도 않은 작당에 대해 물었다.


“활동? 말해봐. 얼토당토 안한 일이며 허락 못해.”


그 말에 피식 정우가 입가를 비틀었다.


“형 허락은 필요 없어. 우리는 형수님 허락만 떨어지면 활동 시작할 거야. 형수님! 무조건 허락하시면 돼요. 절대 좋은 일만 있을 거니까요.”


형제끼리 우스운 일로 대립하듯이 옥신각신하며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그 조차도 보기 좋은 모습이어서 명현은 흔쾌히 즐거운 대답을 했다.


“제 입장에서는 당연히 과분한 일인데 허락이라뇨.”


“오빠, 근데 구체적인 활동이 뭐야? 여느 팬클럽처럼 생일 파티도 하고 깜짝 이벤트도 하고 그래?”


재미거리를 발견한 십대처럼 지원도 흥미로워하며 세 사람이 함께 쿡쿡거리자 혼자가 된 인우는 어이없어 했다.


“그 외에도 형이 형수님을 괴롭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럴 땐 우리가 가서 형을 무자비하게 응징하는 것도 있어. 정의의 이름으로.”


“에이, 오빠 그건 아니다. 그 중 누구하나 인우 오빠한테 눈 부릅뜨고 대들 사람 있어? 내가 볼 땐 한 사람도 없으면서 그런 용기는 대체 어디서들 나오는 거야?”


지원이 정확하게 사실을 꼬집자 뜨끔한지 정우의 얼굴이 붉어지며 언성이 조금은 높아졌다.


“한 사람씩은 서인우에게 약해도, 뭉치면 우리가 더 강해질 수도 있어.”


역시 정우도 순순히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원은 그런 약혼자가 대견한지 웃음으로 후원해 주었다.


“음, 갑자기 든든해지는데? 나도 결혼하면 그 오빠들이 팬클럽 해줄까?”


지원이 다정하게 약혼자인 정우의 팔을 붙들면서 애교스럽게 조르듯이 물어오자 정우는 짐짓 심각하고 곤란하다는 얼굴로 장난스럽게 대꾸해 주었다.


“어쩌지? 우리 사랑스러운 지원이는 미모는 되는데 연세가 과도히 많으셔서 아마 어려울 거 같은데.”


나이 타령에 지원의 고운 이마에 가느다란 줄이 일자를 그리며 생겨났다. 밥을 먹는 어른들의 눈치를 보다 웃고있는 모습에 투정도 절로 흘러나왔다.


“뭐? 그런 게 어디었어. 거기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몰라! 책임져. 다 오빠 탓이야.”


작은 투정 섞인 어리광에 손끝으로 정우가 그녀의 이마를 꾸욱 눌러 밀어냈다.


“걱정마, 어차피 넌 내가 책임질 거니까. 근데 지원아, 팬클럽은 그래도 안돼.”


유쾌했다. 그들의 격없는 대화가 그랬고 쉽게 다가오고 다가가는 자유스러운 표정도 그랬다. 머뭇거림 없이 시원했고 그로 인해 그들은 즐거워 보였다.


명현은 자신의 걱정과 조심스러움을 저만치 달아나게 만들어 준 그들이 고맙고 감사했다. 그리고 사랑할 것 같았다. 옆자리에서 여유 있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서인우를 이토록 간절하게 사랑하듯이.


***


어디선가 끙끙거리며 앓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품속에 안고있는 가냘픈 몸이 이리저리 뒤채고 있었다. 잠결에 등을 쓰다듬어 주며 뒤척임을 달래 주었다.


뜨거웠다. 가슴에 열기가 부딪쳐 왔다. 등을 쓸어주던 손이 멈춤과 동시에 인우는 잠에서 깨어났다. 쌕쌕대는 거친 숨소리가 또렷이 느껴지자 그는 재빨리 팔을 뻗어 침대 곁의 스탠드를 밝혔다.


“윤명현? 윤명현!”


그는 이마를 찌푸린 채 더운 열을 내뿜고 있는 명현의 어깨를 가만히 흔들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인우는 명현의 뺨을 제법 소리나게 찰싹거리며 그녀를 깨우기 시작했다. 열기 속에서도 뺨에 닿는 아픔은 전해졌는지 그녀의 감은 눈이 움찍하며 서서히 떠 올려졌다.


“왜요?”


떨리는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명현은 열에 들뜬 흐릿한 눈동자로 자신을 깨운 이유를 되물었다.


“미치겠군, 안 아파?”


“열이… 좀 나는 것 같긴 해요.”


기가 막혔다. 조금이라니. 온몸의 수분을 모두 다 증발시킬 것 같은 고열인데도 별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답을 하는 그녀를 인우는 화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조금? 엉터리 같으니라고.”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내뱉고는 급히 침대와 문을 차례대로 빠져나갔다.


늦은 시간까지 분당에서 즐겁게 어울리느라 초저녁부터 체온이 오르고 있는 것을 그냥 명현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 버렸다.


빌라에 도착했을 때는 열이 조금 나는 정도로 인식만 했을 뿐이었다. 간단히 약이라도 먹고 잤어야 했는데 혹시나 그가 걱정스러워 할까봐 말을 하지 않았다.


결국엔 더 나빠지기만 했지만.


얼마 있지 않아 그가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미안했다. 그러나 그 말은 안 하기로 약속을 했으니 하면 안될 것 같았다.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


“약 있었어요?”


열에 들뜬 명현의 숨결이 거칠게 흘러나왔다. 주사기를 들며 약병에 찔러 넣는 인우의 표정이 이마위로 흘러 내려온 머리카락 때문에 보이지가 않았다.


미안해요.


“윽, 주사 진짜 아프게 놓는다.”


가까스로 목에 힘을 주어 명현은 그렇게 자신의 미안함을 표현했다. 일부러 들려주기 위한 말을 하고 있는데도 그의 얼굴 표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왜 열이 났다고 생각해?”


부드럽지도 않았지만 차갑게 들리지도 않았다. 단지 열이 난 이유에 관해서만 정확하게 지적하기 위한 그의 날카로움이었다. 명현은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어야 했다.


“아마도 당신이 생각하는 이유와 같을 거예요.”


너무 반가웠다. 병원에 들어가고 부타는 한번도 그런 여유를 부려보지 못했었다. 우산 위로 떨지는 빗방울 소리를 음미하며 느릿한 걸음을 걸을 수 있어서 기뻤었는데. 산책 시간이 좀 길었던 것 같았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 지도 잘 알겠네.”


인우는 침대 옆 바닥에 앉아 그녀의 눈을 붙잡고 계속 확인했다.


“자제할게요.”


“자제만으로는 안돼.”


인우가 단번에 잘라 말했다. 이럴 때는 꼭 의사선생님이라고 광고를 하듯 말하는 것조차 딱딱했다.


“알았어요. 창문으로만 볼게요. 됐죠? 당분간은.”


다정하게 이마를 쓸어주는 손길이 자상해서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당분간은 창문도 열지마.”


단단히 못을 박으려는지 그는 물러남이 없었다.


항상 자신이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한 발짝 뒤로 물러 나주곤 했는데 오늘은 더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너무해요.”


열이 들 떠 숨을 헐떡이면서도 명현이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내가? 너무한 건 이른 새벽에 비 맞으러 나간 윤명현이지.”


“우산 썼잖아요.”


“그래서 그 우산이 감기를 막아 줬나 보지?”


“…….”


할 말이 없었다. 그의 걱정대로 감기가 덜컥 와 버렸으니.


어쩌면 올해 안으로는 우산을 쓰고 비를 감상하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애꿎게도 아무 잘못 없는 비만 그의 눈총을 가득 받게 생겼다. 불쌍하게도.


명현은 몇 번이고 이마를 쓸어주는 시원한 그의 손길에 눈을 감았다.


***


창을 꼼꼼하게 가려놓은 커튼 사이로 아침은 용하게도 비집고 들어와 있었다.


어제 하루종일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은 인우의 성화 탓에 감기기운이 웬만해졌는지 명현은 쉽게 눈을 뜰 수 있었다.


6시 10분.


그의 출근이 있는 아침이었다. 명현은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와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결혼식이 있기전 제기동 박씨 아주머니는 빌라와 명현의 아파트를 오가며 반찬들과 명현의 짐 정리들을 깨끗하게 해 두었다. 그리고 시댁에서 준비해준 음식들도 냉장고를 빈틈없이 채울 정도로 많아 한동안은 시장을 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명현은 익숙하지 않은 살림들을 몇 번의 헛손질을 한 다음에야 식탁을 차릴 수 있었다. 데우기 위한 국은 렌지위에 올려두었고 반찬들은 조금씩만 들어서 작은 접시에 담아 놓았다. 이젠 그를 깨우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싱크대에서 비누로 손을 씻은 후 수건으로 닦으면서 몸을 뒤로 돌렸다.


“어, 깼어요?”


맨 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그가 서 있었다. 여느 때처럼 자신을 은은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근거렸다. 갈수록 불안하게 더 거세 지고 있었다. 명현은 눈을 감고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그의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활짝 웃어주었다. 오직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


“뭐하는거야?”


“출근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아침 준비했어요. 말 그대로 준비만.”


눈을 떴을 때 비워진 옆자리가 불만스러웠다. 자신의 눈동자를 가득 매워야 될 얼굴이 보이지 않자 인우는 언짢은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찾아 나서야 했다. 침실문을 열고 나서자 싱크대 여기저기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혼자 고민 중에 빠져있는 명현이 보였다.


엷은 분홍색 원피스 위에 검정색 가디건을 편안하게 입고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불만스러웠던 마음을 저만치 훌쩍 던져 버릴 수 있는 예쁜 모습으로 따뜻함을 만들고 있었다.


“아침준비? 무슨 연구 중인가 했지. 뒷모습이 비장해 보였거든.”


화를 내야 했지만 차마 자신을 위해 애쓰는 모습에 그럴 수가 없었다.


“훗, 처음이라 어려워서 그래요. 차츰 좋아지겠죠.”


결국 미소에 넘어가 흐지부지 이마를 맞대고 사이좋게 속삭이고야 만다.


“내가 씻을 동안 그 연구 끝낼 수 있어?”


“그럴 거 같아요. 아마도 아침이란 걸 먹을 수 있을 거예요.”


그는 간단한 아침이면 뭐든 상관없다고 했다. 오전 수술을 경우는 대체로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서 끝나는 게 대부분이어서 아침을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인우가 이것저것 반찬과 함께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에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명현이 곱게 웃었다.


“뭐든 잘 먹네요.”


“그건 내가 많이 했던 말 같은데?”


그러고 보니 그의 일상생활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았다. 뭘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명현은 식탁에 턱을 괴고 그의 밥 먹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만 봐도 마음이 기뻤다. 그의 벌어지는 입속으로 사라지는 수저질에 마음이 즐거워져 그녀는 보고 또 볼뿐이었다.


“내가 밥을 재미있게 먹나보지? 재미있는 얼굴이군.”


“훗, 맞아요. 신기할 정도로 재미있어요.”


내가 당신을 위해 차린 밥, 내가 차린 상, 내가 해준 음식을 먹는 당신이 좋아서.


차마 부끄러워 입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 가슴속에 잔잔하게 퍼져갔다.


“듣기에 따라 기분 나쁜 말일수도 있지만, 윤명현이라 용서하지.”


“나 밥먹을때도 보면서 웃었잖아요. 난 기분 안 나쁘던데.”


인우는 아직 감기기운이 남아 깔깔한 목안으로 힘겹게 반찬들을 밀어 넣었다. 명현은 식탁위 그녀의 겹쳐진 손등에 얼굴을 올려놓고 자신을 쳐다보며 소리 없이 웃고있었다.


부끄러워하는 표정이. 그 눈을 마주하자 이대로 상을 물려버리고 이대로 상 위에서 안아버리고 싶었다.


안고 싶었다. 제발이라는 단어만이 입안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인우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면서 물 컵으로 손을 뻗어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차가운 물을 흘려 넣어도 뜨거움은 좀체 사그라지지 않았다.


“앞으로 나 밥 먹을 때 웃지마.”


“아, 미안해요. 그런 거 아니었는데. 기분 나빴어요?”


명현은 놀란 표정으로 고이고있던 얼굴을 냉큼 들어 당황스러워 했다. 어쩔 줄 몰라하며 단박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리와봐.”


인우가 손을 내밀었다.


명현이 미안함을 가득 묻힌 얼굴로 그에게로 다가가자 인우는 그녀의 손을 잡아 힘껏 끌어당겼다. 명현이 그의 무릎에 앉혀지는 순간, 인우는 그녀의 안경을 벗겨내어 식탁위로 던져버리고 입술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원하는 만큼 실컷 빨아들였다.


갈증이 나는 듯 답답했던 속이 풀려갔다. 목안을 채우고있던 뻑뻑함이 뚫리고 있었다. 막혀서 자유롭지 못하던 숨이 그녀의 입술을 통해서 원활해졌다. 그때서야 명현의 입술 위에서 입술을 마주한 채 인우가 말했다.


“널 마음껏 안을 수 있을 때까지는 제발 그렇게 웃지마.”


그의 입술이 거칠게 명현의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면서 다시 한번 더 애타게 사정했다.


“미칠 것 같으니까.”


명현은 팔을 들어 그의 목을 꼬옥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나직이 속삭였다.


“그것도 미안해요.”


명현이 살며시 혀를 내밀어 그의 입술을 달래주자 인우의 숨결은 더 거칠어져 그녀의 입술을 몰아치듯 파고들었다. 둘의 입술이 깊숙이 얽히면서 명현의 보드라운 몸은 그에게로 더 밀착되었다.


인우는 그녀의 원피스 단추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손이 배를 스치듯 지나 그녀의 말캉한 가슴을 움켜쥐자 명현은 입술을 살짝 떼어내어 가는 숨을 흘러 내었다.


“하아….”


명현은 붉어져 있었다.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 곳곳을 쓰다듬었다. 맑은 눈을 그리고 솟아있는 콧날을 또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웃고있는 입술을.


“웃지마. 그리고 오늘은 전화 사절이야. 중간에 뛰어올 수도 있으니까.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겠지? 안 도와준다면 야 할 수 없지만.”


키스의 여운 때문인지 인우의 목소리가 약간 쉰 듯이 저음으로 갈라져 나왔고, 명현은 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매만졌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 위에 인우의 손이 살며시 겹쳐졌다.


“쉽지는 않겠지만 도와줄게요.”


그의 넓은 어깨에 얼굴을 부비며 명현은 약속해 주었다.


***


소영은 치프인 병훈과 회진을 돌면서 환자 가이드를 시작했다.


그녀가 차트를 열심히 넘어가며 설명하는데도 병훈은 듣고는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 말도 없이 연신 고개만 끄덕이는 병훈과의 치프 회진을 마치고 처음 시작했던 병동으로 돌아오면서 소영이 병훈에게 슬며시 물어왔다.


“선생님, 어제 술 많이 드셨어요?”


“응? 왜, 냄새 많이 나냐?”


병훈은 세수라도 하듯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여러 번 문지르면서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엄청 많이 나요. 오늘 서인우 선생님 출근하시는 날인데 어쩌려고 그러세요?”


소영의 말에 병훈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게 많이 나? 내가 그만 마신다고 그랬는데, 아, 그 나쁜 동기 놈들이 계속 주잖아. 야, 정말로 많이 나냐?”


다시 한번 더 확인해보라며 병훈은 입김을 불어댔다. 그러자 소영은 몸을 훌쩍 떼내며 손사레를 쳤다.


“어휴, 냄새맡는 사람이 다 취하겠어요. 커피나 초콜릿 같은 거 먹으면 좀 낫지 않을까요?”


그녀의 말을 들을 요량인지, 병훈은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잔돈을 꺼내 들었다.


“그럴까? 아, 미치겠네. 가뜩이나 정신도 없어 죽겠고만, 빨리 무슨 조치를 취해야지.”


방법을 찾으러 병훈이 급하게 어디론가 가려하자 소영이 큰 소리로 멀어져 가는 그의 등에 대고 당부했다.


“시간 다 되었어요, 선생님. 빨리 오셔야 돼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서 구했는지 병훈은 초콜릿 하나를 입에 물고 회진을 시작해야 되는 병실 앞으로 뛰어왔다. 아마도 간호사실에서 구했을 것이다.


탁월한 효과를 바라며 병훈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초콜릿을 녹이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는 인우가 확인해야 될 서류들과 차트들이 쌓여있었다.


아침 회진 전 필요한 것들만 추려서 재빨리 훑어 본 다음 회진을 돌기 위해서 그는 방을 나섰다.


긴 다리로 성큼 거리며 복도 중간쯤의 모서리를 돌아 병실로 향하는 인우를 병동의 간호사들이 발견하고는 저마다 축하 인사를 건네었다.


“어마, 선생님. 출근하셨어요? 다시 한번 결혼 축하드립니다. 그날 윤 선생님 너무 예뻤어요. 안부 전해주시겠어요?”


간호사실의 막내인 성희가 수줍어하며 정중하게 축하를 해주자 인우는 입가를 늘여 웃어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절로 입가에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꼭 전하겠습니다.”


성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인우에게 몰렸다. 아마도 새신랑이 된 그를 환영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리라. 인우는 입가에 드리운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로서는 감사의 표시이기도 했으니까.


“축하드립니다. 어째 더 멋있어진 거 같은데요? 엄청 좋으신가 봐요.”


오래된 친근함으로 수간호사 진숙은 은근히 장난스럽게 물었다.


“축하 감사합니다.”


인우는 친숙함에 대한 예의로 걸음을 멈춰서 시선을 마주한 채 싱긋이 웃어주고는 다시 병실로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뒤쪽에서 수군대던 간호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러더니 그의 결혼에 대해 지대한 관심들을 발하기 시작했다.


명현을 부러워하기도 했고 시기도 했으며 결혼과 상관없이 서인우의 인기를 재검토도 하면서 마지막으로는 그의 결혼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


복도 저쪽에서 인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당당한 모습이 가까이 올수록 병훈은 헛기침을 해대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혹시나 냄새가 날까 입안에 든 초콜릿을 더욱 빨리 우물거리며 단숨에 목안으로 삼켰다.


‘미쳤지, 오늘 아침을 생각해서 조금만 마시는 건데. 김병훈, 무사히 넘어갈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말자.'


회진이 시작되었다.


인턴과 1년차 소영이 한발 앞서 병실로 들어가 담당 환자 앞으로 다가가 서 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병훈은 인우에게 환자의 상태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했다.


한 환자의 병세를 듣던 인우는 직접 반창고를 열어 환부를 확인하기도 했다. 별다른 이상이 없자 그는 1년차에게 열려진 드레싱을 정리하라는 오더를 남겼다.


인턴은 먼저 다음 병실로 재빠르게 달려갔고 소영도 풀어진 드레싱을 정리하고 복대를 다시 조여 준 다음 병실로 뛰어가야 했다.


다음 병실로 들어 선 소영은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쳐야 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미 스태프와 회진을 도는 모든 의사들에게 둘러싸인 환자를 보며 소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휴, 저 환자 아닌데.’


어제 들어온 신환(새로 입원한 환자)에 대한 설명을 하고있는 모양이었다.


병훈은 차트에 적어놓은 대로 환자의 병력이나 과거력 모두를 정확하고 막힘 없이 늘어놓고 있었고 뒤에 서서 진지하게 경청하는 여러 명의 실습 나온 학생들은 그 내용을 메모까지 하고 있었다.


‘죽었다, 우리 환자 아닌데. 신환은 다음 병실에 입원해 있는데.’


병실이 바뀌게 되는 경우는 1년차에게 제일 먼저 연락이 오게끔 되어있어 소영은 오늘 아침 신환의 병실이 바뀐 사실을 전해 들었다.


아침 치프 가이드 시간때 지금 그들이 있는 병실로 소영이 들어가려 하자 병훈은 뻔한 환자인데, 하면 차트 내용만을 알고 들어가지 않았었다.


소영이 풀어진 드레싱을 정리하고 복대를 조여주는 동안 병훈은 어제 저녁 정보까지만 알고있는 인턴이 가이드 하는 대로 환자의 침대 위치만 확인하고 설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영은 마음속으로 셀 수 없을 만큼의 성호를 긋고 또 그어대고 있었다.


‘부디 치프 선생님이 살아날 수 있기를.’


환자는 자신의 앞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것으로 주눅이 들어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내일이 수술 예정이라는 병훈의 보고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벌써 수술 날짜가 잡혔어요? 오늘 검사 결과보고 결정한다고 하셨는데….”


순간 인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리고 환자에게 나지막이 물어 보았다.


“제 기억에는 외래 진료때 한번도 뵌 적이 없는 분 같은데, 무슨과 진료를 받으셨습니까?”


그 말에 멈칫거리며 불안한 듯 환자가 대답했다.


“저기, 콩팥에 돌이 들어있어서…. 오늘 방광 특수 촬영하기로 했는데요.”


환자의 대답이 끝나자 병훈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고 인우는 아무 말 없이 병실을 빠져나갔다.


복도는 무거운 분위기가 자욱했다. 학생들을 괜히 움찔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인턴과 레지던트들은 스태프와 치프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뒤따라 나온 병훈의 얼굴이 이미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음을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병훈이는 나 좀 보자.”


인우의 지시는 간단했다. 의외의 반응에 모두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안도해 했지만 병훈은 인우의 낮은 경구에 가슴이 졸아있었다.


“선생님….”


뒷머리를 긁적이며 조마조마하게 서있는 병훈을 소영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으응? 어, 괜찮아. 내 잘못이니까. 치프 회진때 그 병실을 들어가서 환자의 얼굴을 확인했어야 했는데…. 야단을 들어도 할말이 없지 뭐.”


병훈은 머리를 더 세게 긁어대고는 걱정스러워 하는 눈들을 뒤로하고 복도를 벗어났다.


조금했다. 빨리 폭탄 같은 야단이 떨어지는게 편안할 거 같았다. 담당 환자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한 치프가 어디 있단 말인가?


스태프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일일 것이다. 섹션일을 총괄해서 이끌어가야 되는 치프가 환자의 얼굴도 모른다는 건 누가 들어도 웃을 일이었다.


***


병훈은 인우의 방앞에서 몇 번이고 싶은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며 긴장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노력했다.


손이 문으로 향하다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문으로 향한 손길은 거침없이 노크를 시작했다.


안에서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병훈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바라보는 인우를 향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선생님.”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인우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김병훈, 치프 회진은 돌았나?”


느긋하게 물어오는 목소리와 인우의 눈빛은 느낌이 전혀 달랐다.


“네.”


“그럼, 이제부터 내가 비뇨기과 환자도 봐 줘야 하나보지?”


비뇨기과라는 말에 병훈은 속으로 자책을 했다. 준비를 못한 자신의 실수로 인해 딱딱하게 변해버린 인우의 표정이 더욱 미안했다.


“잘못했습니다.”


“김병훈, 치프는 보고 배우는 사람이 많다는 걸 의미하는 자리다. 그런 치프가 자기 환자의 얼굴도 모른다고 하면 누가 널 신뢰하지?”


정확한 지적이었다. 더욱이 함께 회진을 돌던 스태프까지 거론하자 그로서는 할말이 없었다. 잘못에 대한 깨끗한 인정을 하는 병훈이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됐어, 나가봐.”


“네.”


병훈에게는 짧은 몇 마디의 지적이 오랜 시간의 훈계보다 더 적절히 작용했다. 인우는 결론을 알려주는 야단보다는 앞으로의 지침을 일러주었다.


보고 배우는 사람이 많다.


병훈은 부끄러웠다. 쉽게 생각해서 넘길 일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걸 잠시 또 잊고 있었다.


병원 내에서는 작은 일조차도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되는 것인데. 하물며 환자를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해버린 자신이 창피스럽고 못마땅했다.


‘익숙해졌다고 해서 쉬운 건 아니다.’


***


똑똑. 병훈이 나간 후 곧바로 들려온 소리에 인우의 고개가 문 쪽으로 돌려졌다. 강력하게 두드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주인공은 NS의 진성이었다. 느물거리는 웃음을 입가 여기저기에 돌려가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캬~! 역시 새신랑이라 때깔이 틀리는구나. 부럽다, 부러워.”


진성은 너스레를 떨며 인우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는 듯 쳐다보았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 바쁠 텐데. 감히 날 놀리려고 일부러 온 거 같지는 않은데.”


인우는 하던 일을 멈추고 의자를 슬쩍 뒤로 밀더니 긴 다리를 여유 있게 들어 나머지 한쪽 무릎 위에 포개어 놓았다.


“왜 아니야? 너 보러 일부러 온 거 맞아. 서인우가 결혼이라는 걸 하고 나서 첫 출근한 날인데 내가 기념 정도는 해줘야지. 그리고 네놈 좋아라 하는 얼굴도 볼 겸해서 들렸지.”


진성은 인우를 계속 놀려볼 참이었다.


판독실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걸음이었는데 인우의 출근소식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궁금했다. 끔찍이도 위하는 여자를 집에 두고 출근을 했을 서인우의 얼굴 표정이.


“훗, 그럼 이제 본 소감을 말해봐.”


양쪽의 손가락들을 어긋나게 깍지 끼워 의자 팔걸이에 올려둔 채 인우는 느긋하게 의자를 조금씩 좌우로 회전시켰다.


“뭐야? 자신 있다 이거야? 소감은 무슨…. 그냥 궁금한 거 하나만 해결하면 돼. 해결해 줄 거지?”


“친구가 애원하는데 그래야 되겠지? 뭐야?”


어서 말해보라는 듯 인우의 고개가 까딱하며 위 아래로 움직였다.


“음, 내가 궁금한 건 네가 첫날밤에 신부를 잘 안았나 하는 거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한번 안아보긴 했냐? 서인우?”


인우는 웃음이 났다.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물을 묻고있는 진성의 솔직함이 그를 웃게 만들었다.


“첫날밤이라…. 어떤 대답을 해야 네놈에게서 미친놈 소리를 안 들을 수 있을까?”


“그야, 당연히 못 안은 서인우가 미친놈이지. 미친놈으로 알고 그냥 갈까?”


어떻게 해서라도 그에 대한 대답을 듣겠다는 뜻으로 진성은 피해갈 수 없는 물음을 넌지시 던져 놓았다. 그에 반해 인우는 의외로 담담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이번 한번은 네놈 잔꾀에 넘어가 주지. 날 그냥 미친놈이라 불러.”


그의 대답에 진성은 믿어지지 않는 듯 인우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표정을 진지하게 살피듯 눈초리가 더욱 가늘게 변했다.


무덤덤하게 그 시선을 받는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입을 어렸다.


“뭐? 이게 넘어와 주는 거냐? 응? 정말이야? 야, 너 거짓말이지. 사실대로 말해봐. 네놈 얼굴에 있는 답은 그게 아니라는데?”


아직도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진성의 말에 인우는 여전히 표정을 만들지 않았다.


“그렇게 믿지 않을 거면서 왜 묻는 거야?”


무표정, 늘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야, 네 입에서 뜨겁게 안았다는 고백을 듣고 싶어 서지. 나는 전부다 얘기해 줬건만, 아, 무정한 놈.”


무정이라는 미끼를 인우가 덥석 물기를 진성은 기다렸다. 그리고 눈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지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이겼다는 것을 느꼈다.


“훗, 잔꾀에는 넘어가 줄 수 있어도 협박에는 굴복할 수 없어. 뜨겁게 안았다. 됐냐?”


“뭐? 하여튼, 너라는 놈은 알 수가 없다. 하하하!”


둘은 재미있는 말놀이를 끝낸 것처럼 서로 마주보며 웃고 말았다. 아주 싱겁게.


# 22장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가 올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명현이 시계를 흘깃거리는 횟수는 잦아졌다. 명현은 보고있던 책을 덮어 무릎 위에 내려놓고 거실의 한쪽면을 차지하고 있는 투명한 유리 너머를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물끄러미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거울처럼 보이고 있었다. 명현은 몸을 일으켜 또 하나의 자신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손목에 힘을 주어 옆으로 살짝 밀어보았다.


청량한 가을의 밤공기가 열려진 틈으로 살며시 밀고 들어왔다. 쪽이 진 뒤꿈치를 슬리퍼에 쏙 담그면서 명현은 그곳을 거닐었다.


한 겹의 유리가 더 남긴 했지만 그녀는 충분히 상쾌했다.


명현은 가슴부분까지 올라오는 나무들 사이로 빌라로 진입하는 차들은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까만 사물의 윤곽들이 편안하게 눈 속으로 들어올 무렵, 명현은 남아있던 유리문을 급한 손놀림으로 열어 젖혔다.


그가 왔다. 환한 빛을 반사시키는 은회색의 차체가 부드러운 동작으로 주차장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왔다.”


차 꼬리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명현은 유리문을 닫을 새도 없이 현관으로 곧장 달려갔다. 그리고 미리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깔끔하게 매듭지어져 있는 그의 발자국 소리가 점차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긴 그림자가 눈썹을 슬쩍 들어올리며 그녀에게로 좁혀져 왔다.


“잘 다녀왔어요?”


그만의 알싸한 향기가 명현의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재색의 정장에는 바깥의 시원한 바람결도 묻어있었다.


“문단속 잘 하라는 말도 해줘야 되나?”


맨발이었다. 하얗게 드러난 종아리 아래로 가느다란 뼈들의 이어짐이 보이는 그녀의 작은 발이 보였다.


병원 주차장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조급함이 순식간에 가라앉는 것 같았다.


맨발로 그들의 집안 곳곳을 밟고 다녔을 생각을 하니 인우는 가슴이 뿌듯해져 옴을 느낄 수 있었다.


“차 들어오는 거 봤어요.”


“참지 말고 웃어. 이상해 보여.”


“훗, 참고있는게 보였어요?”


눈은 이미 생긋거리면서도 입가만 늘이지 않기 위해서 명현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곧이어 인우의 허락이 떨어지자 명현의 웃음은 화사하게 피어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인우는 눌러진 숨을 짧게 내쉬고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기에 더 있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내 뒤따라 들어온 명현은 태연해 보였다. 묻는 말 역시 아주 평온했다.


“저녁은요?”


양복 상의를 벗어 붙박이 장 안에 걸어두고 다음으로 넥타이를 풀어내면서 인우는 곧 시선으로 바로 눈앞의 명현을 바라보았다.


“혹시 안 먹었나?”


“아뇨, 심심해서 먼저 먹었어요.”


휙 소리를 내며 셔츠의 목 부분에서 넥타이가 길게 빠져나왔고, 셔츠의 단추도 하나씩 차례대로 끌러졌다. 명현의 시선은 열심히 그의 손을 쫓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손이 멈춰졌다.


“아직은 아무 것도 안돼.”


“알아요. 그냥 숨김없이 말하고 싶었어요.”


멈춰졌던 인우의 손이 명현의 얼굴을 감싸안았다. 온종일 끊임없이 아른거렸던 눈동자가 보란 듯이 내밀어져 있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밑을 은근히 자극하듯이 쓸어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심심한 건 보고싶어 미칠 것 같은 거에는 비할 바가 못돼.”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 스칠 만큼만 내려와 애태우듯이 소곤거렸다.


닿을 듯 말 듯 하면서 그녀의 입술 근처를 배회하자 명현은 그의 셔츠자락을 힘껏 붙잡고 발끝을 돋운 다음 자신의 입술을 더 가까이 열어주었다.


촉촉해진 그녀의 입술이 부드러운 감촉을 전해주자 인우는 망설임 없이 명현의 입안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뜨겁게 달구어진 그의 혀가 하루동안의 그리움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다급하게 그녀의 혀를 찾았다. 그리고 강하게 휘감아 세차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혀를 자신에게로 더 가까이 끌어들이기 위해서 인우는 점점 더 거칠어졌고 받아들이는 명현의 고개는 뒤로 젖혀져 버렸다.


“하아….”


발끝을 세운 채로 인우의 입술에 매달려 있던 명현의 허리가 휘어질 듯 넘어가려 하자 그는 손을 내려 그녀의 등을 힘차게 받쳐 안았다.


그의 가슴에 위태하게 닿아있던 그녀를 품속 가득히 안아들면서 인우는 명현의 무게감 없는 원피스를 단숨에 들어올렸다. 허리에서부터 미끈하게 뻗은 그녀의 하얀 다리가 드러나면서 그 위로 좁다란 등도 이내 모습을 보여주었다.


커다란 손은 그녀의 옷속을 마음껏 휘젓고 다녔다. 목덜미에서 허리까지 이어진 등줄기를 애무하듯이 쓰다듬던 그의 손이 앞으로 옮겨와 말캉한 가슴을 지그시 움켜쥐자 명현은 끊어질 듯한 신음을 내며 그에게서 입술을 떼었다.


붉어질 대로 붉어진 입술이 그를 향해 살짝 벌어졌다.


“하아…, 보고 싶었어요.”


열기에 휩싸인 그녀의 눈이 그의 손길을 빨라지게 만들었다. 인우는 들춰진 원피스를 그녀의 머리위로 벗겨내 버리고 그 위에 자신의 셔츠와 바지도 함께 떨어뜨렸다.


하얀 살결이 솟아오른 젖가슴이 살랑거리며 그의 가슴에 부딪히자 푸른빛이 도는 침대 위에 그녀를 살며시 눕혔다. 그리고 한숨처럼 그가 속삭였다.


“오늘만은 날 위해서 아파도 참아.”


“난, 괜찮….”


그의 입술이 명현의 나머지 말을 묻어버렸다.


아릴 듯이 부풀어 오른 입술을 연신 빨아대며 핥았다. 그녀에게로 더해지는 힘을 낮추기 위해 인우는 자신의 팔을 침대 위에 더 강하게 고정시키면서 선이 고운 목덜미로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빈자리를 남김없이 차지하듯 그의 입술은 집요했다.


푸른 시트를 한웅큼 거머쥐고 있던 섬세한 손가락이 그의 뺨을 감미롭게 어루만지면서 차츰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머리칼도 함께 쓸어 넘겨주었다.


피부가 따끔거렸다. 유두를 잘근대는 그의 입술은 불꽃을 담은 듯 뜨거웠다. 데일 것 같은 자극을 명현의 입술은 이겨내지 못했다. 막을 수도 없는 본능적인 감정의 표현이었다.


“하아, 하….”


보드라운 살점들을 베어 물고 빨면서도 그의 손길은 그녀의 따뜻한 배를 연신 쓸어주고 있었다. 명현은 자신의 배를 쓰다듬고 있는 그의 손을 잡으며 수줍게 애원했다.


“그냥, 안아요. …어서요.”


신열에 들뜬 얼굴이 자신의 욕망을 받아들이겠다고 조르고 있었다. 인우는 핏물이 배인 명현의 입술을 미안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빨아들였다.


쓰라리지 않게 혀로 살짝살짝 적셔주면서 그녀의 매끄러운 허벅지를 벌렸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의 촉촉하게 젖은 몸속으로 자신을 밀고 들어갔다.


자잘한 입술들의 흔적이 뿌려진 목덜미와 쇄골이 뒤로 젖혀지며 명현의 입술은 인우를 향해 벌어졌다.


“사랑해요.”


여린 살들은 그를 팽팽하게 조여주면서 터질 듯한 욕구를 멈출 수 없도록 만들었고 검정의 눈동자는 파르르 떨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명현은 그렇게 온몸으로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무한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이성과 인내와 절제를 모조리 앗아가 버려 그녀에게로만 계속 이끌고 있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한다.”


이미 거칠어져 있는 숨소리에 인우는 잔뜩 쉬어버린 음성을 더해주었다. 들려줄수록 늘 부족한 말이었다.


조금씩 그리고 서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그녀 안에서 인우가 움직였다. 그에게 묶여져 있는 명현의 눈동자도 함께 밀려 올라갔다. 잔잔하게 일렁거리기만 했던 그녀의 몸은 허리를 받쳐주며 본격적으로 강하게 파고드는 그의 격렬함에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딪혀진 시선이 서로에 대한 갈망으로 진해지면서 둘의 몸은 더 깊은 곳까지 닿기 위해 몸부림쳤고, 인우의 어깨를 지나 단단한 등으로 그녀의 팔이 둘러지자 그의 움직임은 끝을 향해 치닫기 위해서 세차게 반복되어 지고 있었다.


으스러질 듯이 단단하게 맞붙은 부위에서 불이 붙은 듯 열기가 일었고 그 뜨거움은 아찔한 격정을 뒤섞고 있었다.


그가 명현의 가는 허리를 더 높이 들어올리면서 격정적인 몸짓을 정점으로 끌어올리자 그녀의 눈이 질끈 감겨지면서 가둬두었던 신음들이 공기 중으로 부서졌다. 동시에 그의 욕망도 함께 가져가 버렸다.


***


오이, 토마토, 양파, 계란, 치즈, 햄….


명현은 식탁 위에 잔뜩 늘어놓은 재료들을 눈으로 쭉 훑어 확인하고는 일회용 비닐장갑을 조심스럽게 손에 끼웠다. 그리고 생각해두었던 순서대로 빵 사이를 도톰하게 채우고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 준비해둔 용기에 가지런히 옮겨 담았다.


갓 내려진 커피를 보온병에 붓고 어지러워진 식탁을 정리하는 모양이 제법 익숙해 보였다.


흐르는 물에 손을 내맡긴 채 접시를 헹구고 있던 명현이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거실로 빠르게 움직였다.


“네, 여보세요?”


[나야.]


인우의 굵은 음성이 저편에서 들려오자 전화기를 붙들고있는 그녀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어렸다.


“네….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한참 바쁠 시간인데?”


[집안에서 운동이라도 했어? 왜 그렇게 숨 가빠 해?]


설거지를 하던 도중 전화를 받기 위해 거실까지 종종걸음으로 뛰어 오느라 명현의 호흡은 빨라져 있었다.


“아뇨. 주방에 있었거든요.”


[설마 점심인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오늘 박씨 아줌마 다녀가시는 날이잖아요. 함께 맛있는 거 먹었어요. 그런데 지금 수술방에 있어야 할 시간 아니에요?”


매일 있을 수술 스케줄 정도는 그가 출근 전에 얘기를 해주는 편이라 전화 통화를 해야될 경우는 알아서 그 시간을 피하곤 했다.


[혈압 때문에 미뤄졌어.]


“그럼, 일찍 오겠네요?”


명현이 반가운 기색을 내자 저편에서 그의 희미한 웃음 들려왔다.


[누가 조른다면 그럴 의향이 있지.]


“그냥 스스로의 의지대로 판단해요. 이젠 안 조를 거예요.”


[훗, 서운하군. 나중에 보도록 하지.]


결혼을 하고 두달의 시간동안 그는 매일 한 통의 전화를 출근후 잊지 않고 해주었다. 오늘처럼 일주일에 두 번 박씨 아줌마가 다녀가는 거 외에는 거의 하루종일을 그녀 혼자 있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전화는 명현이 낮 동안 입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얘기 상대인 셈이었다. 그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있는 인우는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때보다 그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해주곤 했다.


그건 명현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난 기억이나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까지. 매일 조금씩 서로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그녀의 아픈 어린 시절까지도 모두.


***


체크 무늬의 치마가 허리부분이 끈으로 묶여져 있는 검정색의 하프코트 아래에서 차분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어깨까지는 미치지 못했지만 자연스럽게 웨이브 진 머릿결이 걸을 때마다 윤기를 내며 찰랑거렸다.


택시에서 내린 명현은 병원 로비의 문을 살며시 지나 두달 남짓의 시간동안 떠나 있었던 곳을 걸음을 떼지도 못하고 천천히 살펴보았다.


외래 진료를 받기 위해 드나드는 사람들로 로비의 자동문은 쉴새없이 열렸다 닫혔고 별관 쪽으로 향해있는 작은 도로에는 응급차가 바쁘게 진입하고 있었다.


여전했다. 질서가 존재하는 혼란의 덩어리. 결코 반갑거나 기쁘지 않은 곳.


그러나 명현에게는 반갑고 따뜻한 곳이었다. 허물어져 가는 생명들을 다시 힘차게 일으켜주기 위해서 많은 동료들이 모자라는 시간들을 쪼개어 정열을 쏟고있는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랑들이 만들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아픔을 쓰다듬어 주는 사랑. 명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이제는 남편이라 불리는 사람이 떠올랐다.


혼자 있게 되는 자신을 위해 마음을 두고 출근한다는 남자. 입술보다는 눈빛으로, 그보다는 넉넉한 가슴으로 힘껏 껴안아주며 사랑을 말하는 남자. 서인우.


“서인우.”


명현은 그의 이름은 나직이 불러보았다.


보고싶음이 멈추었던 걸음을 움직이게 했다.


명현을 바라보는 간호사실의 모든 사람들은 놀라움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창백했던 얼굴이 보기 좋을 만큼의 살이 올라 연분홍의 홍조가 가득한 뺨으로 빛나고 있었고, 차갑게 도도했던 아름다움은 사랑을 듬뿍 머금은 은은한 여인의 모습으로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우아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죠?”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명현은 쑥스러운 듯 웃고 말았다. 그 모습 역시 사랑스럽게 그지없어, 그녀 주위로 화사한 기운이 순식간에 퍼져갔다.


“어머머, 윤 선생님! 어쩐 일이세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휘둥그러진 눈으로 반가운 호들갑을 성희는 정겹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이내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좀 있으면 퇴근하실 텐데 약속 있으신가 봐요?”


성희의 눈이 자연스럽게 인우의 방이 있는 곳을 응시하며 다시 명현을 바라보았다.


“후훗, 아뇨. 박 선생 보러 왔어요. 병실 올라갔어요?”


“전화 안해 보셨어요? 호출해 볼까요?”


명현은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았다. 더 놀래켜 주고 싶었다. 간혹 걸려오는 전화로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는다며 소영은 원망했었다.


명현은 바닥에 내려놓은 종이 가방 하나를 성희에게 내밀며 자신감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방 안에는 조금전 그녀가 만든 샌드위치를 담고있는 예쁜 용기가 들어있었다.


“맛은 장담 못해요. 아무래도 이쪽으로는 영 재주가 없는 거 같아요.”


고맙다면서 가방을 건네 받는 성희의 손을 바라보다 이내 명현은 등을 돌렸다.


또각거리는 명현의 구두소리가 복도를 울리면서 여의사들이 의국으로 이어졌다. 문 앞에 도착한 명현은 작게나마 노크를 하고 문을 슬쩍 밀어보았다.


낯익은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쓰러지듯 몸을 누인 침대도 아직 자신의 옷이 걸려있을 것 같은 좁은 옷장도 명현의 눈에 다정하게 들어왔다.


그리움의 종류란 참으로 다양한 모양이었다. 의국안을 떠도는 공기와 먼지가 가슴을 편안하게 가득 메워 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책상 위에 흐트러져 있는 자료들을 차곡차곡 챙겨두면서 명현은 친구를 기다렸다.


***


인우는 머리를 의자등받이 뒤로 젖혔다.


일부러 자제하고 있었던 전화 통화를 해서일 것이다.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속삭이듯 아침을 열어주던 해사한 얼굴이 떠올랐다.


명현은 밤사이 자신의 품속에 안겨 모든 열정을 받아내던 사랑스러움보다 더 진한 향기로 잠을 깨워 주었다. 저절로 내뻗어진 손길이 그녀를 다시 안게 해준 다음에야 폭주하던 심장은 잠잠해 질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명현의 매력은 차츰 가늠이 어려워졌다.


꽃봉오리가 벌어져 꽃이 활짝 피어나는 걸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점점 아름다워지고만 있었다. 그가 도저히 만지지 않고는 견뎌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똑똑.


인우는 들려오는 낮은 소음에 뒤로 떨어뜨렸던 고개를 반듯하게 곧추세웠다. 그리고 건조하고 사무적인 대답을 하며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


문이 열리고 허리선까지 기다랗게 늘어뜨린 보랏빛 스카프에 치마 정장 차림의 여자가 자신감 있는 걸음걸이와 함께 그에게로 다가왔다. 의대 동기 최선영이었다.


“바쁘니?"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확인한 인우의 얼굴에는 그 흔한 반가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는 사람을 대면하는 단조로운 일상만이 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아니야. 어쩐 일이야?"


책상을 사이에 두고 하얀 가운의 인우가 위협적인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다음 주에 과장님 모시고 미국으로 단기 연수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 의논드리러. 너와 함께 있고 싶어서 GS(일반외과) 지원하려는 날 붙잡으신 분이잖아. PS(성형외과)에 나 같은 인재가 필요하다 하시며 부추기셨지. 훗, 그땐 정말 그 말을 믿었으니."


선영의 입에서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음이라는 것이 입에 걸리자, 조금은 경직되고 차가워 보였던 인상이 한결 부드럽게 변하기는 했다.


“지금도 네 실력을 자랑하고 다니시는 분에게 대한 예의는 아닌 것 같다."


‘아직 선영이만큼 현미경 수술 잘하는 놈 못 봤어.'


그녀를 대견하게 여기던 성형외과 과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인우는 싸늘한 충고를 잊지 않았다.


느긋한 표정이긴 했지만 위험 요소가 느껴지는 그의 말투에 선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아이라인이 깔끔하게 그려진 눈으로 옆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라는 말 안 하니?"


잠자코 그녀를 응시하고 있던 인우가 나직이 말했다.


“앉아."


스카프보다는 다소 짙어 보이는 정장 재킷을 입은 선영이 의자에 앉는 걸 지켜본 후 그도 책상에서 일어나 그녀가 앉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결혼 소식 들었어. 그 소식을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게."


그가 결혼이란 걸 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10년이 넘도록 그녀 혼자 애끓게 바라본 그는 결혼이라는 단어조차 모르는 남자 같았었다. 그런 그가 결혼이란 걸 했다니. 그 소식을 듣고 한동안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던 그때를 기억하며 그녀는 나직하게 말을 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별일 아니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는 담백한 인우의 눈빛에 그녀는 다시 한 번 자괴감에 빠져들고 말았다.


“내게는 그래. 넌 영원히 혼자일 것 같이 보였거든. 그런데 나도 못 잡은 너의 마음을 잡은 여자가 있다는 사실이 솔직히 샘이 나기도 해."


붉게 칠해진 그녀의 입술이 뾰족하게 말하자 인우는 다리를 겹쳐 놓으며 의자를 조금 뒤로 밀었다.


“왠지 제대로 된 축하 같지는 않군."


그가 핵심을 찌르듯 하지만 별 상관없다는 듯 말을 하자, 붉은 입술을 살짝 문 선영이 조금은 당황한 듯 보였다.


“맞아, 예쁘게 축하할 정도로 착하지 못하잖아."


선영이 얄미울 정도로 솔직하게 그녀의 기분을 털어놓자 인우도 그가 내리게 된 결론을 냉정하게 들려주었다.


“그럼, 네 축하는 내 쪽에서 먼저 사양하지.”


“그 사람이야?”


선영의 이마가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그녀는 무고 싶었다. 자신은 10년의 노력에도 그의 따뜻한 눈길 한번이 불가능했었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와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를 속속들이 알고싶었다.


“그 사람이라니?”


인우의 짙은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지난번 엘리베이터에 함께 탔었던….”


무슨? 인우의 눈빛이 그때의 일을 찾고있는 듯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군. 난 어떠한 얘기도 한 기억이 없는데.”


“처음 알았어. 너도 그렇게 다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그것도 여자에게.”


“그랬던가?”


이제야 선영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게된 인우는 생각을 잠시 되돌려 보았다. ‘몸은 좀 어때?’ 그저 담담하게 몸 상태를 물어봤을 뿐일텐데. 그 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다정하게 들렸다니 조금은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마지막이야, 서인우. 이젠 정말 내 마음 끝낼 거야. 그러니 대답해 줘. 널 움직이도록 만든 게 뭐니? 난 죽도록 노력을 해도 얻지 못했던 네 마음이 그렇게 움직여버린 이유.”


인우는 선영의 눈동자에서 파란 불꽃이 가라앉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그게 무엇인지 깊이 골몰했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대답을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인우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몰라.”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조건적인 마음이 먼저 달려나갔으니 그 자신도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명현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그 이유라고 생각되면 그녀의 붉은 웃음이 아깝고, 짙은 슬픔이 신경 쓰였다고 말하면 순수하고 깨끗한 그녀의 마음이 아쉬웠다.


도대체 어떤 것에 그의 마음을 뺏겼다고 말을 해야 되는지 인우는 알지 못했다.


***


파란 정맥이 도드라져 보이는 희뿌연 손목에 감겨진 갈색의 시계줄이 살짝 들어올려졌다. 병실 드레싱만 끝내고 온다던 소영은 예상 시간보다도 늦었다.


좀 있으면 또 저녁 회진 시간일텐데. 명현은 한번더 시간을 확인했다. 메모라도 써놓고 일어서야 되겠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의국문이 부서져라 벌컥 열렸다.


묶어둔 머리카락이 뺨위로 여러가닥 빠져나와 있는 모습이 여전했다. 통통한 얼굴도, 정감 있게 흘깃거리는 눈초리도 그리워했던 만큼 볼 수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치고 명현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된 거야. 기집애, 미리 연락을 주면 좋잖아.”


“너 놀래주려고 그랬지. 한창 바쁜 시간인데 좀 그렇다. 미안해.”


명현은 소영의 손을 잡은 채로 빙긋이 웃으며 마냥 기분 좋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좋아 보이는데? 더 예뻐지고 부드러워졌어. 남편 되시는 분이 잘해주는 보양이지?”


“좋아. 그리고 편안해.”


인우의 평소모습을 기억이라도 하는 듯 명현은 행복한 웃음을 지었지만, 그와 반대로 소영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럼 우리한테만 딱딱한가 보구나. 웃음을 볼 수가 없어. 무릇 신혼인데 그래도 되는 거야?”


“훗, 그렇게 딱딱해? 힘들었겠네.”


위로의 말치고는 성의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영의 귀밑머리를 가다듬어 뒤로 넘겨주며 명현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웃어? 남편 흉보는 건데도 웃음이나. 남편? 명현이의 남편? 거참, 어감 무지 이상하구만. 서인우 선생님을 그렇게 불러도 되나? 친구의 남편이라니. 명현아, 넌 어때? 남편 같아? 아직도 스태프 선생님 같지? 그치?”


명현을 만나자마자 그 동안 쌓아두었던 궁금증이 터진 모양이었다.


소영은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아직 경험하지 못한 궁금증을 풀 요량인지 계속해서 질문을 해댔다.


“솔직히 말자면 둘다 아니야. 스태프라는 의미는 그 사람이 내게 사랑인걸 알았을 때 이미 사라졌었고, 남편이라는 말은 너처럼 주위에서 자꾸 들려주니까 인식할 정도지 스스로 느끼지는 못해.”


드르륵, 소영은 의자를 명현의 무릎 가까이 바싹 당기고는 은밀한 얘기라도 전하려는 듯 상체를 기울이며 진지하게 눈빛을 반짝거렸다.


“명현아, 이건 절대 나 혼자만의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우리 파트의 원만한 근무 분위기를 걱정해서 물어보는 거니까 사실대로 얘기해 줘야된다. 알겠지? 스태프 선생님 얼굴이 먹장구름이면 아래에 있는 우리는 비를 맞아야 하잖니. 혹시 말이야…. 서인우 선생님이 밤에 너 자주 안아주긴 해?”


정확하게는 개인적인 호기심이 더 컸었다. 명현의 사고 이후 그가 보여준 사랑은 입술만으로는 노할 수 없을 정도의 지극한 것이었지만 결혼 후의 사랑도 꼭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차갑기로 소문난 스태프의 신혼생활도 여느 사람들처럼 불꽃이 터지는지 개인적으로 너무나 궁금했다.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인 대답을 원했는지 소영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마도 성에 차지 않는 대답이었나 보다.


“얘가 애매모호하게 대답하네. 명색이 의사라는 애가 대답하는 범위가 왜 그렇게 불분명해. 바른 대로 명확하게 말해 보라니까.”


“네가 말하는 자주의 기준이 얼마만큼이야? 하루? 일주일?”


명현의 되묻는 질문에 소영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뭐? 하루? 아니, 얘가 결혼을 하더니 세게 나오네? 거기에 하루라는 단위가 어떻게 들어가니? 아, 아니다. 친구나 선배들 얘기 들어보니 하루에도 여러 번 그럴 수 있다고는 하더라. 설마… 너랑 서인우 선생님도 그렇다는 거야?”


입을 떡 벌린 소영에게 부끄러워하며 간신히 대답을 할 줄 알았던 명현은 담담하게 풀어놓듯이 얘기를 꺼내었다.


“아니, 하지만 내가 건강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어. 그게 뭐 별거니? 사랑하는 건데. 서로의 사랑을 주고받는 표현의 한 방법일 뿐이야. 손을 맞잡는 거와 틀릴게 없어. 굳이 안아주지 않아도. 손만 잡고 함께 잠들어도 사랑임에는 똑같아. 때로는 껴안아 주기만 해도 눈앞에 별이 떠 있을 수도 있어. 더 구체적인 상황과 횟수도 얘기해 줘야되니?”


“뭐? 야, 윤명현! 너 누구 염장 질러? 횟수? 됐어, 그만하면. 선생님 방에 가봐야 되지 않아?”


“나 여기에 온 줄 몰라. 네가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너 보러 온거야.”


“정말? 순수하게 나만 보러 왔다구? 하아! 얘가 사랑이 어쩌구 하더니 친구 감동도 먹일 줄 아네. 근데 어쩌냐. 바쁜 1년차께서는 너와 놀아줄 시간이 더 이상은 없어. 어서 가서 곧 있으면 퇴근하게 될 네 남편에게나 놀아 달라고 해. 알았니?”


타박하면서도 우정이 어린 소영의 말투에 행복했고, 표정이 저절로 허물어졌다.


“오프때 가능하면 놀러올 수 있어? 아줌마에게 부탁해서 맛있는 거 많이 준비해 놓을게.”


“그래, 다음 오프때 바로 가도록 할게. 사진도 찍어서 병원 홈페이지에 올려둬야지. 아마 특종이 될 것이다. 서인우 선생님 사생활 공개는.”


못 말린다는 듯이 흘겨보는 명현과 그런 좋은 기회는 놓치면 예의가 아니라는 소영은 결국 함께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러다 갑자기 소영이 소리쳤다.


“헛, 죽었다. 리서치 미팅(Research Meeting)있는 날인데. 지금 몇 시냐? 여섯시? 명현아, 언니가 깜빡하고 있었던 스케줄이 급하게 떠올랐거든? 그래서 오늘은 이마 헤어져야겠다. 서운하지만 우리 다음을 기약하며 용감하게 여기에서 헤어지도록 하자. 안녕, 내 사랑~!”


명현의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까지 하고서 소영은 또다시 의국문을 부서져라 열어 젖히면서 비상구 계단으로 사라져 버렸다.


위층으로 멀어지는 소영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명현도 의국과 반대편으로 이어진 복도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길게만 보이는 복도는 중간쯤에서 양갈래로 나누어져 있었고 명현은 왼쪽으로 연결된 벽을 따라 나란히 붙어있는 몇 개의 문을 지나 마지막 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자그마한 뼈가 솟아있는 그녀의 손들이 또렷한 타격음을 내었다. 기대했던 목소리가 들려오자 명현은 손잡이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아차 싶었다. 미리 연락을 해 두었더라면 얘기 도중에 불쑥 찾아드는 불편한 일은 없었을 텐데.


“손님이 계신 줄 몰랐어요. 밖에서 기다릴게요.”


명현이 손잡이를 잡은 채로 두걸음 정도 내딛었던 몸을 그대로 돌리려 하자 인우의 낮은 음성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럴 필요 없어. 이리와.”


살짝 굳어져 주춤하고 있는 명현을 인우는 몸을 일으켜 성큼 다가와 그의 허리 옆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그러자 커다란 손에 파묻힌 명현의 손을 묘한 눈빛으로 주시하던 나머지 한사람도 의자를 뒤로 물리면서 큰 키를 드러내었다.


“소개 안시켜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무안할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명현은 선영이 자신도 한번은 보았던 얼굴임을 기억해내었다. 그와 나란히 멋진 그림을 연출했던 아름다운 여인.


“여기는 서인우의 아내 윤명현, 이쪽은 의대 동기인 최선영. 이 정도면 충분한가?”


맺음이 분명한 소개였다. 그의 냉담한 목소리 끝에는 선영의 기다란 손이 명현의 앞으로 내밀어졌다.


“반가워요. 의대 동기라고만 소개하기엔 서인우를 짝사랑한 10여년의 시간들이 좀 아깝군요. 늦은 감이 있지만 결혼 축하해요.”


짝사랑이라. 그것도 10여년이나.


투명한 안경 너머 검은 눈동자가 잠시 일렁거렸다. 명현은 자신 앞에 내밀어진 손을 조용하게 맞잡았다.


“얘기 중이셨는데 죄송합니다. 미리 연락을 했었어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했어요.”


“그렇지 않아요. 중요한 용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잠시 안부차 들렀어요. 결혼 축하도 할 겸해서. 궁금했었어요. 누가 저 단단한 바위를 뚫었는지.”


명현은 그녀의 살피는 듯한 눈이 거북했다.


“기회가 있으면 또 봐요. 명현씨 남편의 눈빛이 이제 그만 가라는군요. 갈게.”


“그래.”


책상 건너편의 두 사람에게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려 웃어주며 선영이 나가버린후 남아있는 공간에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의 손에 잠겨있던 명현의 작은 손이 움직였다.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손을 인우는 더 힘주어 움켜쥐며 나란히 서있는 명현을 마주보게끔 돌려세웠다.


“어떻게 된 거야?”


“소영이 만나러 왔다가 들렀어요.”


“전화했을 때 그런 말 없었잖아.”


“그땐 확실하지 않았으니까요. 빨리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소영이를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혹시 방해가 되었나요?”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명현의 물음이 거슬리게 들렸기 때문이다.


“무슨 뜻이야.”


“얘기 중이었잖아요. 나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하게 돼 버렸어요.”


맑은 눈동자 그대로였다. 흐릿함이 전혀 묻어나지 않은 명현의 눈빛은 그녀로 인해 중단된 이야기만을 미안해하는 것이 분명했다.


절대 돌려 표현하지 못하는 그녀를 잠시 의심했었다. 방해라는 말에 그의 신경이 뾰족해진 모양이었다. 우습게도.


“그래서 처음에는 정말로 안 들를 생각이었다는 거지?”


“조금만 기다리면 집에 올 거니까요.”


“넌 정말….”


뭐라 말을 잊지 못한 인우는 그녀를 힘차게 끌어안아 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 채로 으르렁거렸다.


“여기에서 기다려. 곧 올 테니까.”


# 23장


평일 퇴근 시간의 도심은 온통 붉었다. 도로 위의 차들은 빨간 꼬리를 매달은 채로 멈춰있었고, 12월의 한 주가 흐른 거리에는  오렌지 빛의 꼬마전구 외투를 화려하게 차려입은 나무들로 휘황했다.


거기에 서로의 얼굴에 하얀 입김을 불어대며 연신 웃어대는 연인들의 뺨도 발그스름했다.


“재미있어?”


깊은 생각에라도 빠진 듯 명현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꼼짝하지 않아 그런 명현에게 먼저 말을 걸어보는 인우였다.


“흠, 신기해요.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들끼리 만나서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이유를 몰라?”


“알아요.”


사랑이라는 거죠. 행복했다가 슬프기도 하고 또 긴 시간 돌아오지 않은 마음을 가슴앓이하며 기다리게 만드는 아름답고도 고통스러운 마법이죠.


명현은 오랜 시간동안 그를 외사랑 해왔다며 자조하던 선영의 얼굴을 고요하게 떠올렸다.


그리고 냉담했을 그의 모습도 그려보았다. 잘못 찾아든 사랑이었으리라. 하지만 10여 년이라는 시간은 명현의 가슴을 계속 아프게 했다.


“오랫동안 아팠겠네요.”


운전을 하느라 정면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던 인우는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을 얘기하고 있는 명현을 쓰윽 쳐다보고는 짧게 물었다.


“뭐가.”


“최선영 씨….”


신경이 쓰였나보다. 담백한 눈망울을 하고 있기에 별다른 느낌이 없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닐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인우는 그녀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때마침 신호가 바뀌어 그는 명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변함없이 투명했다.


의심이 들어있지 않은 단순한 물음에 그는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하고 말았다.


“신경 쓰여?”


“나빠요. 그렇게 긴 시간을 아프게 했다는 건.”


“훗, 내가? 억울하군. 뭐가 나쁘다는 건지.”


“받아줄 수 없었다면 돌아설 수 있게 도와줬어야 했어요.”


인우는 그녀의 심각함을 덜어주고 싶어졌다.


그의 입장에서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던 일이 지금의 그녀에게는 우울한 생각을 가져다 주었다는 게 내심 못마땅했지만 편안한 게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충분히 도와줬어. 넘칠 만큼. 됐지? 그러니, 그만해.”


“넘칠 만큼은 잔인해요.”


마치 자신이 그에게 겪은 일이라고 할만큼 명현의 반응은 평범함을 넘어서고 있었다. 오히려 다른 여자들이라면 반기는 흔한 반응이 아니었기에 인우의 입매가 굳어졌다.


“윤명현.”


“이해해줘요. 난 아픈 사랑에 민감한 사람이에요. 사랑의 아픔은 정말 싫어요.”


“네가 그럴 일은 없어.”


건드려진 것은 그녀의 상처였다. 아픈 사랑.


인우는 핸들 위에 올려진 오른손을 내려 그녀의 손을 감싸쥐었다.


없어지지 않는다면 빨리 옅어지기만이라도 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면서.


집으로 돌아온 명현은 코트만 벗어두고는 능숙하게 따뜻한 저녁 식탁을 차려놓기 시작했다. 인우도 간단히 손만 씻은 채 그녀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아주머니가 해주신 새로운 반찬이라며 인우의 밥위에 먹기 적당한 크기고 단정하게 젓가락으로 올려주며 명현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래? 괜히 나쁜 놈 만들어 놓고 보니 미안해?”


그리 물으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인우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명현은 다시 생긋거렸다.


“진짜 가슴이 아팠어요. 사랑을 알게 되었으니까 더더욱.”


"억지로도 안되는게 있어. 그땐 뭐든지 아니었으니까. 하나만 제외하고는.“


“피아노?”


인우는 피식 웃기만 하고 물을 마신 뒤 냅킨으로 입가 정리를 했다.


“윤명현이었다 해도 그때는 아마 아니었을 거야.”


“피, 완벽한 복수네요. 치사하게.”


귀엽게 입술을 삐죽이는 명현의 모습에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억지로는 펼칠 수도 또 접어지지도 않는 것이 사랑이란다. 그래서 아픈 사랑도 존재하는 거라고.


***


첫눈에 이어 두 번째 눈까지 내려 계절은 겨울의 한복판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달력의 숫자가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알려주는 날, 명현은 결혼 후 처음으로 친정으로 불리게 된 곳을 다니러 가게 되었다.


고택의 기와지붕에는 하얀 솜뭉치들이 무게를 자랑하듯 두껍게 쌓여 날렵하게 치솟은 처마 끝을 부드러운 선으로 뭉텅거려 놓았고, 간간이 부는 바람들 편으로 눈가루를 다시 날려주기도 했다.


여전히 대문 앞에서 선 채 차갑게 굳어있는 명현의 손을 인우는 가만히 잡아주었다.


“추워, 들어가자.”


“…….”


“내가 추워서 그래.”


쉽게 떼어지지 않는 걸음이었다. 내려놓았던 마음들은 간혹 땅위에 성이 난 돌부리처럼 툭툭 발끝에 채였고 잠시 녹아있던 가슴은 한기가 도는 탓인지 빳빳하게 경직되어 가는 듯했다.


지우지는 못하더라도 담담해지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아직은 안될 모양이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나중에. 그것도 힘이 든다면 더 나중에 그럴 것이다. 명현은 조용히 낮은 숨을 들이쉬더니 이윽고 결심을 한 듯 자심의 손을 감싸고 있는 인우의 손을 힘껏 맞잡아 주었다.


성균이 거주하는 안방은 겹문 구조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중간쯤 또 하나의 문이 더 존재하는.


그들이 온다는 소식에 미리 앞뜰까지 나와있던 성균은 그들과 함께 겹문을 열고 방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맨 나중에 뒤따라 들어간 석현 모가 문의 턱을 넘어 성균의 옆으로 다가가자 인우가 절을 하기 위해서 손을 이마 높이로 올렸다.


“하지 마시게.”


앉아있던 성균이 냉큼 일어나 강한 힘으로 인우의 손을 잡았다. 성균은 인자한 표정으로 괜찮다며 인우의 팔을 아래로 당겼다. 그리고 억지로 바닥에 앉게 만들었다.


“얼굴 보여준 걸로도 감사하니 너무 안절부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절을 해야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못하게 된 것도 신경 쓰이는 일이라 성균은 인우를 배려해 주었다.


“네, 그럼 마음으로 드린 걸로 대신 하겠습니다.”


인우는 앉은 채로 앞쪽을 향해 간단히 목례했다. 고마움으로 같이 고개를 숙이던 성균은 인우의 옆에 초연하게 앉아있는 명현을 보며 조심스레 먼저 말을 걸었다.


“몸은 괜찮니?”


딸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한눈에도 건강해져 있음을 알 수 있었으나 성균은 딸의 목소리를 한번이라도 더 들으려는 욕심을 부렸다.


“좋아졌어요.”


아버지이지만 자식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랑을 하신 분이었다.


혼약(婚約)을 저버린 대가로 아내와 자식을 잃어버리게 되는 벌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분.


명현은 자신을 아릿하게 바라보는 부정(父情)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에 이어 인우에게 시선을 돌리는 성균이었다.


“자네에게 늘 고마워하고 있네. 염치없는 부탁인지 모르겠지만 항상 어여쁘다 여겨주게.”


성균은 복받치는 안타까움을 가까스로 누르며 인우를 향해 진심 어린 바람을 말했다.


“그러겠습니다. 장인어른.”


인우가 강조하듯 내보낸 마지막 말에 찻잔을 들고있던 성균은 떨림을 감추지 못하고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까스로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두손을 몸쪽으로 살며시 가져와 힘주어 포개며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였다.


‘딸에게 아비도 못 되어준 내겐 붙잡을 수 없는 말이네. 하지만 두고두고 고마운 말일 걸세.’


명현은 이어진 무거운 침묵을 감내할 수가 없었다. 그만 일어나야 할 거 같았다. 명현은 가라앉은 공기를 가르며 아무런 느낌도 배어나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를 입술 밖으로 흘려보냈다.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명현은 사랑을 버리지 못해 그늘 속의 삶을 택한 여인과 묵묵히 시선을 주고받았다.


“…….”


할 말이 있는 듯하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석현 모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명현이 입을 열었다.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잘 살아라.”


흔하디흔한 말이었다.


어른으로서, 그리고 같은 여자로서 더 멋진 말을 해 주지도 못하는 관계에 명현은 씁쓸하면서도 쓸쓸했다. 대문을 벗어난 그녀는 발걸음으로 인우를 재촉했다.


그림자 자락이 길게 늘어진 고택의 은행나무를 뒤 배경으로 두고 차츰 멀어지고서야 비로소 명현은 편안한 숨을 쉴 수 있었다.


***


와인빛 건물의 이 층은 실내의 갖가지 조명들이 바깥으로 다 새어나갈 정도의 넓은 창들로 꾸며져 있었다. 야경을 염두에 두고 지어진 곳이라는 걸 처음 방문한 누구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모자이크된 불빛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었다.


깔끔한 정장차림의 홀 매니저가 예약을 확인하고는 두 사람을 정해진 자리로 안내하자 거기에는 벌써 정우와 지원이 다정하게 앉아있었다.


“형수님! 형! 제기동에서 바로 오는 길이야?”


그들을 발견한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반가운 표정으로 가벼운 목례를 했다.


“그래, 많이 기다렸니?”


“아니, 십분 정도.”


결혼 후 몇 번의 만남 동안 늘 느끼는 바였지만 정우의 살가움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는 명현에게 한가족이라는 친밀감을 확인시켜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정우와 나란히 앉아있던 지원도 반가운 얼굴들이 보이자 정우를 따라 날렵하게 일어나 생긋거렸다.


“오빠! 아, 그리고 쑥쓰럽지만 형님도 안녕하세요?”


지원의 막힘이 없는 활달한 인사였다. 나이로 따지자면 명현이 두 살이나 어린데도 항상 유쾌하게 맞아주며 껄끄러운 문제들을 현명하게 해결해 버리는 모나지 않은 성격이었다. 명현은 지원의 시원함이 닮고 싶을 만큼 부러웠다.


“뭐야, 벌써 형님이라고 불러야 돼?”


이제 막 의자에 앉으려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정우가 생뚱맞게 물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 다음달 결혼인데 누구 씨 하며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나이도 어긋나 언니 동생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처음부터 입에 붙이는 게 상책이야. 인우 오빠, 내 말이 맞지? 그치?”


인우는 깊이 있는 의자에 등을 기대앉은 채 낮게 동조하듯 웃어주었다.


“그래, 거기에 인우 오빠라는 말도 빼면.”


“휴, 그게 남았구나. 근데 그건 잘 안될 거 같아. 몇 년을 오빠로 불렀는데.”


거의 20년에 걸쳐 부르게 된 호칭을 갑자기 바꾸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고쳐야 될 거라면 어색하더라도 빨리 시작하는 게 옳았다.


지원은 흠흠 거리며 몇 번의 헛기침을 내뱉더니 살며시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인우의 호칭을 바꿔불렀다.


“그렇게 할게요, 아주버님.”


자기가 말을 하고서도 민망함과 멋쩍음으로 지원이 몸서리를 치며 팔뚝을 열심히 비벼대자 옆자리에 앉아있던 정우가 딱하다는 듯이 지원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살짝 튕겨 버렸다.


“뭘 미리 애쓰고 그래. 결혼하면 다 나아지게 돼 있어. 참, 형수님은 형을 어떻게 불러?”


그 순간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지켜보기만 하던 인우의 눈빛은 미묘하게 변했고 무릎 위에 놓인 자신의 손톱 끝을 만지작거리던 명현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정우를 쳐다보았다.


“너희 형수한테 물어봐. 뭐라고 부르는지.”


명현의 이맛살이 연하게 휘어졌다.


인우는 애매한 대답을 여유롭게 슬쩍 떠넘기며 그 또한 명현의 다음 말을 기다릴 듯 진지한 얼굴이었다.


“아직 못 불러 봤어요.”


명현은 솔직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정확한 호칭으로 그를 불러보지 못했었다. 대체로 처음 부르게 되었던 말이 습관처럼 스며들기 마련인데 그를 선생님이라고는 부를 수 없었다.


그리고 결혼한 부부들의 정식 호칭인 여보, 당신은 한 음절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어 포기해 버렸고, 남들이 흔히 쉽게 부르는 자기야, 오빠는 생각만으로도 낯이 간지러워 아예 배제시켜 버리자 결국 남은 것은 이름뿐이었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감히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아 그저 얼버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확인을 당하고 나니 난감할 뿐이었다.


명현은 어려운 숙제를 혼자 풀게끔 내버려 둔 인우를 얄밉게 바라보면서 식탁아래 길쭉하게 뻗어있는 그의 허벅지를 푹 찔렀다. 그리고는 인우와 눈이 마주치자 도와달라는 입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못 불러 봤어요?”


“마땅한 호칭을 찾지 못했어요.”


“마땅한 호칭이라…. 그럼 결혼 전에는 뭐라고 부르셨는데요?”


“선생님.”


정우와 지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라는 표정이었고, 인우는 도와줄 의향이 전혀 없다는 듯 입가에 미소만 지은 채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 관계였어요? 나쁜 선생이네, 젊음 제자를 꼬드기고.”


짐짓 장난스럽게 놀려대는 정우의 짓궂음에 인우는 넌지시 웃고 말았다. 그리고 정우의 그 말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꼬드겼다.


닫혀있던 그녀를 두드리면서 부추겼었다. 함께 사랑하자고.


***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그고 나니 피곤했던 가슴이 느슨하게 풀어지면서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엷은 화장을 지우고 얼굴에도 더운물을 손으로 훔쳐 올렸다.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말끔히 헹구어 낸 다음 거울을 쳐다보았다.


이젠 27살이 되어버린 윤명현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창백하게 위태했던 모습이 아닌 생기 있고 편안한 표정으로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명현은 손을 들어 거울속 자신의 뺨을 지그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말해주었다.


‘사랑한다, 윤명현.’


욕실을 나와보니 소파정도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명현은 자신이 나온 침실을 제외한 나머지 방들을 일일이 열어보며 확인해 보았다.


그래도 그는 없었다. 명현은 소파에 앉아 무릎을 세워 그 사이로 얼굴을 갖다 대었다.


자연스럽게 돌려진 시선으로 바깥 풍경이 들어왔다. 명현은 곧장 일어나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유리문을 활짝 열고 소리쳤다.


“와! 눈이다.”


감탄과 함께 명현은 두손을 하늘을 향해 뻗으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눈 처음봐?”


한 겹의 유리를 더 지나야 되는 테라스에 그가 서 있었다. 외출했던 옷차림 그대로 눈을 맞고 있었다.


“여기 있었어요? 찾았잖아요.”


그가 들어오려는 기미를 보이자 명현은 완전히 다물어지지 않은 문을 힘들이지 않고 쉽게 열었다. 인우는 머리와 어깨를 가볍게 털어낸 후 명현이 열어준 문을 지나면서 차가워진 손을 그녀의 뺨에 살짝 대었다.


“으, 차가워요. 그만.”


명현은 몸서리를 치며 자신의 얼굴에서 그의 손을 떼어내었다.


“들어가요. 갑자기 해야될 일이 생각났어요.”


찬 기운으로 찌푸려진 명현의 얼굴이 금방 환해지면서 그의 손을 다급하게 끌어당겨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뭐하는 거야?”


“옷 벗기잖아요.”


명현은 인우를 소파에 앉힌 후 스스럼없이 그의 정장 상의와 넥타이를 벗겨내었다. 그리고는 그의 상기된 얼굴을 천천히 살피더니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생각해요?”


“너와 같은 생각.”


인우는 간결한 손길로 셔츠의 맨 위 단추를 풀어주고 있는 명현을 깊어진 눈으로 좇고 있었다.


“훗, 내 생각이 뭔데요.”


답답해 보였던 첫 단추만을 살짝 끌러주며 명현은 홍조 띤 얼굴에 미소를 드리웠다. 아마 그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날 사랑해 주겠지.”


“맞아요.”


명현은 인우에게서 떨어져 욕실로 들어가더니 얼마 있지않아 다시 그의 옆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훗, 서로 생각이 달랐나보군.”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아니, 마음에 들어.”


명현은 따뜻한 물에 담겨진 그의 발을 양손으로 감싸쥐며 부드럽게 주물러 주었고 손끝에 힘을 주느라 앞으로 숙여진 고개 탓에 그녀의 깨끗한 목덜미는 그의 눈 아래에서 잔잔하게 흔들렸다.


“이제 이유를 말해줘야 되지 않나?”


잠긴 목소리로 그가 확인했다.


명현은 이전에 본가에 다녀온 후에는 반드시 아프다 했었다. 정우와 지원과의 저녁시간 동안은 내내 밝은 표정을 보이긴 했지만 완전히 가볍지는 않은 듯했다.


“내 발 두배는 되겠어요. 발가락도 길고.”


“윤명현, 오늘도 아프니?”


다른 쪽으로 이야기를 비켜나가는 명현에게 그는 직접적인 물음으로 물었다.


“…조금. 일기장에 ‘눈 오는 날 남편 발을 닦아주고 싶다.’라고 쓰여 있었어요. 엄마는 못 해봤을 테니 난 해보려구요. 그런데 좋은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거니까 해보고 싶었나 보죠. 앞으로도 눈 오는 날은 내가 발 씻겨 줄게요. 좋죠?”


약간 젖은 눈을 하고도 명현은 웃었다.


인우는 아직도 물 속에 있는 그녀의 손을 끄집어 올렸다. 뚝뚝 떨어지는 물기들이 그의 셔츠에 번지면서 스며들었다.


인우는 일으켜 세운 명현의 허리에 팔을 둘러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눈이 자주 와야 할텐데.”


명현도 그의 머리칼을 조용히 쓸어주며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왔으면 좋겠어요.”


***


인우는 그녀가 깨어있음을 알았다.


등을 보인 채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맨 어깨에 인우는 입술을 대었다. 그의 입술이 조금씩 뜨거워지면서 그녀의 어깨 여기저기를 비벼대자 명현은 몸을 더 동그랗게 감아 붙이며 낮게 소리내었다.


“따가워요.”


그녀의 불평에 인우는 쿡 하는 웃음과 함께 더 장난스럽게 까칠해진 수염자국을 문질러댔다.


“왜 이렇게 어두워요. 새벽은 아닌 거 같은데.”


“흐린 거겠지.”


인우는 그녀의 등줄기로 입술을 미끄러뜨리며 말캉한 가슴을 지그시 감쌌다. 그의 손이 보드라운 살결들을 주무르듯 움켜쥐면서 손끝으로 선명해진 유두를 만지작거리자 명현의 입에서 ‘아’하는 짧은 탄성이 뱉어졌다.


“윤명현, 날 불러봐.”


등 곳곳에 입술을 누른 그의 입술은 어느새 명현의 귓불을 핥으며 귓속으로 더운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서인우.”


떨림으로 더욱 가늘어진 명현의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말하자 인우는 그녀의 몸을 단번에 돌려 눕혀버렸다.


살짝 찌푸려진 이마 아래로 그의 투명한 구슬은 촉촉하게 일렁거렸고 밤사이 더 붉어진 그녀의 입술은 그의 이름을 말하고 채 닫아지지 못한 상태였다.


“그 이름은 둘만 있을 때 불러.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 부를 수 있는걸 말해봐.”


인우는 명현의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면서 어려운 물음에 답을 하라고 강요했다. 명현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더니 전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입술만을 깨물었다.


“어려워요. 알고 있다면 알려줘요.”


“훗, 나도 어려워.”


“그냥 이름 부를 거예요. 후보로 남은 게 그것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서인우 씨, 하며 정중하게 불러줄게요.”


그녀가 나긋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흉내내듯 부르자 인우가 빙그레 웃었다.


“나는 윤명현 씨라고 못해.”


“마음대로 해요. 난 억울하지 않으니까.”


이미 분홍빛으로 진해져 있는 얼굴이 함빡 웃음을 머금으며 그를 다가오게 만들었다. 인우는 그녀의 얼굴을 강하게 당겨 입술을 맞대었다.


그는 입술이 묻힌 명현의 입술을 거세게 빨아들였다.


그의 흡입으로 부풀어 오른 그녀의 입술이 가쁜 숨을 몰아 쉬려 하자 그의 혀가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숨결 못지 않게 명현의 숨결도 거칠어지면서 그에게 더 가까이 밀착되어져 결 고운 살들을 그의 몸에 빈틈없이 부딪쳤다. 단단한 몸에 밀려들어 온 보들보들한 감촉들은 인우의 입술이 그곳을 향하게끔 이끌었다.


인우는 여지없이 탐스러운 명현의 젖가슴을 마음껏 베어 물었다. 도톰한 살점들과 함께 그의 입속으로 들어온 유두를 인우는 끊임없이 핥은 다음 자근 깨물어 버렸다.


“아!”


그의 머리카락 속을 헤집는 명현의 손길에 힘이 가해지면서 아픔으로 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인우는 그녀의 신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거칠게 빨아대었다.


거세게 빨려가며 가여울 정도로 시달리고 나서야 명현의 부푼 가슴은 그의 입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따뜻한 곳에서 촉촉하게 머물던 유두는 공기 중에 노출되면서 쓰라림의 감각을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그러나 아릿한 가슴의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늘어져 있던 명현은 흠칫 놀라 몸을 뒤척여야 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조심스럽게 일깨워주고 있었다.


그는 혀끝에서 맴도는 작은 돌기를 소중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핥았고 그럴수록 명현은 치솟는 쾌감에 안타까움으로 타 들어갔다.


“하아…, 제발.”


그들의 뜨거운 숨결들이 방안에 흩어졌다.


명현은 허리를 달싹거리며 애끓어하는 목소리로 그에게 매달렸다. 명현은 그의 머리를 들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빨리 자신을 안아주기를 재촉하고 싶었다.


그의 머리칼을 좀더 세게 거머쥐며 명현은 간절하게 애원했다.


“제발, 어서… 안아줘요.”


그녀의 은밀한 곳에 더 깊이 얼굴을 묻고 자극적인 애무를 그치지 않던 인우는 명현의 열망에 들뜬 얼굴을 한번더 확인하고는 그녀의 휘어진 허리를 붙잡고 세차게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녀는 강하게 파고드는 그를 머금은 채 아찔하도록 이는 흥분으로 허리를 파르르 떨었다.


기다렸던 그의 몸짓이 시작되자 명현은 가느다란 다리로 그의 엉덩이를 감싸안고 힘껏 끌어당겨 조이며 서로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슨하고 부드럽던 그의 동작들이 빨라지고 격렬해지면서 격정을 이기지 못한 명현은 점차 흐느끼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희열의 탄성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아야 했다.


“사랑해.”


“사랑해요.”


동시에 내뱉어진 속삭임에 그들의 사랑은 더욱 거칠어만 갔다.


***


그녀는 예뻤다.


한 묶음으로 중간쯤 올려 묶은 머리칼 아래로 고운선의 목덜미는 거의 예술적이었고, 창백할 만큼 하얀 피부는 오히려 차가워보여 거부감이 들 정도였지만 도도하게 솟은 콧대와 적당한 크기의 입술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처음에는 느낄 수 없도록 하는 강렬한 것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눈이었다. 파란 잉크가 엷게 풀어진 물 속에 검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박혀있었다.


감동스러울 만큼 특별했다.


“김주명 씨, 특별히 더 불편한 곳 있으세요?”


명현은 펼쳐두었던 소독포를 접어놓으며 드레싱을 마무리했다.


“있는 거 같은데요.”


위천공으로 응급수술을 받고 오늘이 사일째 되는 날이었다. 의사의 예후와 달리 환자의 자각 증상은 때론 차이가 생겨나기 때문에 명현은 그의 말에 관심을 보여야 했다.


“어디가 어떻게 불편하게요?”


“여기가 답답하면서도 뻐근한 거 같기도 하고, 어떨 땐 터질 것 같이 두근거려서 불안해요.”


주명은 자신의 심장이 있는 곳에 손을 얹어놓으며 능청스럽게 하소연했다.


죽을 것 같은 복통을 일으켜 구급차에 실려온 후 응급수술을 받았고 마취가 깨어나는 순간, 저 눈을 보게 되었다.


그땐 아, 내가 죽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천국의 천사이거나 혹은 하늘나라 선녀인 그녀가 자신을 환영하고 있다는 착각을 느꼈었다.


그러나 며칠동안 보아온 그녀는 그다지 천사 혹은 선녀 같지 않았다. 물어보는 말에만 정확한 대답을 해줄 뿐, 살짝 웃어주는 부드러움도 없었고 자상하고 따뜻한 눈빛을 보여주는 일도 없었다. 지극히 사무적이고 딱딱하기만 했다.


“아마도 심장 쪽인 거 같은데 말씀하시는 증상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검사를 받아봐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잠깐만요, 윤명현 선생님. 모르는 겁니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겁니까? 그게 검사가 필요한 증상 같으면 이렇게 웃으면서 말하겠어요?”


주명은 허탈하다는 듯 피식거리며 명현의 대답을 단숨에 끊어버렸다.


“더러 웃으시면서 증상을 말하시는 분들도 계시죠. 그럼 뭐가 문제신가요.”


극히 미미한 감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명현은 건조하게 대꾸했다.


“관심 문제죠. 선생님한테 관심 있어요.”


명현은 가운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완만한 자세로 침대에 기대어 누워있는 주명을 내려보았다.


드레싱 때나 회진 시를 포함해서 하루에도 수차례는 보게되는 얼굴이었다. 그의 눈이 자신을 담고 있다는 것은 명현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환자의 개인적인 눈초리를 가지고 뭐라고 할 상황은 아닌 거 같아 시종일관 무시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어 표현한다면 그저 무시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담당의사로서 환자에 대한 관심은 저도 있습니다.”


“여자로서 관심 있어요, 나는.”


그는 명현의 말이 불만인 듯 또렷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명했다.


여자로서의 관심이라….


“별로 바람직한 관심은 아니군요. 저는 이미 결혼을 한 사람입니다.”


명현은 결혼이라는 단어를 유달리 힘주어 말을 했다.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서 자연스럽게 포기가 이뤄지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오호, 그러세요?”


그러시냐는 듯 주명은 더 빙긋이 웃고만 있었고 명현은 이런 일까지 신경을 써야 된다는 게 피곤했지만 그가 자신의 담당환자라는 걸 우선 생각하기로 했다.


“나중에 뵙죠.”


명현은 조용히 병실문을 닫아주고는 길지 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병원으로 돌아온 지 세달하고도 절반이 지났다. 소영이 2년차로 있는 대장항문 파트를 시작으로 이미 한번의 섹션 체인지가 있었고, 지금은 인우를 만난 처음처럼 다시 위장질환 파트를 돌게 되었다.


# 24장


오전 7시가 되려면 긴바늘이 한칸정도 남아있는 시간이었다.


명현은 걷고있는 복도 바닥이 다리를 밑으로 무겁게 끌어당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병실 퍼스트 콜이 있는 당직을 선 다음날은 자신이 얼마동안 졸았는지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힘이 들었다.


의국으로 가기 위해서 간호사실을 지나던 명현은 자신을 부르고 있는 성희의 목소리를 듣고는 지친 걸음을 멈추었다.


“윤 선생님, 이거 가져가세요.”


명현은 몸을 천천히 돌려 간호사실로 다가가 성희가 내민 종이가방을 받아들었다. 고소한 냄새가 내용물을 바로 확인시켜 주었다.


“벌써 출근했어요?”


인우가 있는 방쪽을 습관적으로 돌아본 명현은 성희의 대답을 기다렸다.


“선생님 당직 다음날은 꼭 아침 배달 하시잖아요. 따뜻할 때 얼른 드세요. 좋으시겠어요. 부러워요.”


명현은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맞아요, 좋아요.”


그는 순간순간의 행동들이 한결같은 사람이다.


늘 놓치기 쉬운 끼니를 그러지 않게끔 철저하게 챙겨 주었고 당직인 날은 간혹 야식을 사들고 깜짝 위문도 와주곤했다.


그 외에도 새벽의 모닝콜은 빠짐없이 정확했고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공원산책도 함께 해주는 등, 1년차 생활을 무사히 그리고 건강하게 보낼 수 있도록 많은 외조를 해주고 있어 병원의 사람들은 간혹 부러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나예요.”


한창 바쁜 시간이라 의국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손에 들려있는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명현은 익숙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전화기를 들었다.


[응.]


아침이라 그런지 그의 목소리가 더욱 가라앉아 낮게 들렸다. 아마도 새벽부터 분주했을 것이다.


“아침 배달 때문에 일찍 움직였네요. 고마워요.”


[고마운 인사는 얼굴 정도는 보여주면서 하지 그래.]


“안돼요. 내일 있을 컨퍼런스 자료도 준비해야 되고 할 일이 잔뜩이에요. 그보다는 당신 얼굴 보면 자고 싶어져서 안돼요.”


명현은 피곤한 눈두덩을 한 손으로 꾹꾹 누르며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위험한 발언이야.]


“전혀 아니에요. 그냥 서인우 옆에서 실컷 잤으면 좋겠어요.”


정말이었다. 그의 체취를 느끼며, 그녀를 아끼는 온기 속에서 단 몇 시간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은 것이 요즘 명현의 유일하고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빨리 오프 달라고 해.]


“아직 백일 되려면 며칠 남았어요.”


[말려 죽이겠군, 잔인하게. 끊어.]


***


며칠 후, 밤 10시 10분.


삐비비비.


또 호출이었다. 명현은 1층 별관에 있는 응급실에서 엘리베이터를 급하게 타고 8층의 간호사실까지 재빠르게 움직였다.


“또예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주일째 계속 이러고 있었다. 결국 명현의 이마에도 작은 빗금이 그어져 버렸다.


“네, 오늘만 몇 번째예요?”


“지금이 네 번째니까 오늘은 더 이상은 없겠네요. 매일 네 번씩이니까.”


명현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혼을 했다고 해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수술후 일주일이 지났으니 남아있는 일주일 정도의 입원기간동안 심각하게만 하지 않는다면 참으려고 했었다.


그리고 호출을 한다는 것뿐이지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 따위도 없고 얼굴을 보는 순간 그저 싱긋 웃는 게 전부일 뿐이었다.


명현은 간호사실 데스크 위를 손가락으로 약하게 두드리면서 망설이고 있었다.


“정말 직업이 변호사 맞긴 맞아요? 저렇게 막무가내면서 변론은 어떻게 하나 모르겠네요. 그냥 서인우 선생님에게 말씀드리세요. 그래야 할 것 같은데요.”


당직 간호사가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건 기어이 서인우라는 이름이었다. 조금은 특별한 이유가 개입된 귀찮고 피곤한 일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담당 의사로서 현명하게 대처하고 싶었다.


병원은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인 만큼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고 앞으로 더 어렵고 힘든 일들도 많을 텐데, 그럴 때마다 그에게 하소연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뭐라고 말할까요? 특실 환자인 김주명 씨가 하루 네 번은 꼭 호출을 하는데 그래서 뛰어가 보면 날 보고 웃기만 한다. 이렇게 말해요? 말도 안돼요.”


명현은 숨을 한번 고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병실로 향했다.


***


그리고 다음날 아침. 회진을 마치고 병실을 나서는 인우에게 주명은 큰소리로 불만을 이르듯이 털어놓았다.


“저기요, 선생님! 혹시 병원에서 의사는 환자와 사귀거나 그와 비슷한 상황으로는 발전해선 안 된다고 정해놓은 규정이나 원칙이 있습니까?"


숨은 의미가 있는 말 같았지만 그 뜻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인우는 주명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담담하게 물었다.


“그렇게 우스운 규칙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왜 그러시죠?"


“아, 제가 관심을 표현한 의사 선생님이 계신데 도무지 반응이 없어서 별 이상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더 적극적으로 나가도 병원 내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될 이유는 없는거군요."


“그런 관심은 세상 어떠한 것으로도 막을 수가 없죠. 누가 그런 이상한 추측을 하게끔 만들었습니까?"


단정하게 다물어져 있는 입술에 힘이 실리면서 더더욱 싸늘해 보이는 명현을 주명은 눈으로 가리키며 또 다시 싱긋 웃었다.


“여기 가까이 있네요. 윤명현 선생님."


반듯한 선으로 곧게 뻗어 내린 인우의 옆얼굴이 스치듯 굳어 보이면서 정적이라는 게 흘렀다. 그러나 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그 시간 동안 병실 안에 있던 인턴 레지던트 그리고 서브 인턴들까지 대략 10명에 가까운 사람들은 긴장감이라는 것을 느껴야 했다.


“윤명현 선생은 이미 결혼이라는 걸 했을 텐데요."


속마음을 파악하기 힘든 눈빛으로 인우는 서늘하게 말했다.


“정말입니까? 그게 사실이었어요?"


주명은 어이없는 경우를 당한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명현을 쳐다보았다.


“그럼, 알고 있으면서도 관심을 보였다는 겁니까?"


인우의 눈가가 미세하게 흔들리면서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피하려는 핑계인 줄 알았어요. 간호사들도 함께 둘러댄다고 생각했었죠. 거 참…, 확실히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잘못 보셨군요. 핑계 같은 건 절대 못 대는 성격인데. 그럼."


표정을 담고 있지 않은 얼굴이 뒤돌아서 성큼 병실을 나가버리자 남아 있는 사람들도 그 뒤를 순서대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3년차가 된 승수가 걸음을 멈추더니 딱하다는 듯 주명을 향하여 한 마디 거들었다.


“진짜 상황 우습게 끌고 가셨네요. 우리 윤 선생은 거짓말 같은 거 못 해요. 그리고 방금 그 이상한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신 선생님이 바로 윤 선생 남편 되시고요. 아시겠습니까."


얘깃거리만 잔뜩 제공한 황당한 해프닝이었다.


하루 이틀 정도는 병원 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많은 웃음을 주겠지만 이내 긴박하게 돌아가는 병원 생활이 잊어지게 해줄 것이다.


바로 지금도 마찬가지의 경우였다.


30분 후에 있을 수술을 위해 모두 바빠 있었다. 인우는 병실을 나오는 명현을 정면으로 바라보기만 할뿐, 별말 없이 등을 돌려 계단 쪽으로 향했고, 명현도 수술준비를 위해 계단과 반대 방향인 복도 끝쪽의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


오후 1시 수술실.


인우의 집도로 위암 환자의 수술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4시간에 가까운 수술시간 동안 수술대 아래에는 피묻은 수건들이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고 봉합전 단계인 흉부세척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집도의로서 할 일을 끝내고 수술대를 벗어나려던 인우는 봉합을 준비하는 재환에게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1년차 백일 지났는데 오프 줘도 되지 않나?”


“네? 아….”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재환은 머뭇거리다 간신히 대답했다.


“그럼, 오늘 내가 데려가도 되겠지?”


수술방의 모든 시선이 인우에게로 집중되었다.


아직은 신혼이고, 아내가 백일동안 오프가 없었던 1년차라지만 그의 요구는 노골적이었다.


멈칫하며 안경 너머로 곤란한 눈빛을 띠는 명현과는 달리 인우는 수술마스크를 밑으로 끌어내려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수술방을 빠져나갔다.


뒤에 남은 시선들을 모조리 명현에게만 돌려놓고서.


***


병원 정문을 나서기도 전에 명현의 머리는 창문에 기대어졌다.


차의 속도를 늦추며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려는 인우의 노력에도 명현의 머리는 연신 유리를 콩콩 찧고 있었다.


인우는 팔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창가에서 반대편으로 옮겨주며 안경도 벗겨내 주었다.


제법 살이 올라 보기 좋았던 뺨은 그의 염려와 수고에도 불구하고 다시 핼쑥해져 버렸고 눈 밑도 파르스름하게 그늘져 있어 그녀의 고단함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그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극히 적었다. 기껏해야 그녀의 식사와 간식 정도를 챙겨주며 어깨를 감싸주는 일 따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독립적이고 강했다.


사고가 일어났던 응급실도 큰 반감 없이 드나들었고, 그녀의 사고와 비슷한 경우의 환자 수술에도 별다른 문제를 보이지 않았다.


“윤명현, 윤명현.”


10여분동안 어깨를 흔들고 뺨을 토닥거린 후에야 그녀는 깨어나는 기척을 보였다.


“다 왔어. 일어나.”


“아프게도 깨우네요.”


명현은 잠을 깨운 원망이 섞였는지 자신의 뺨에 손을 갖다 대고는 인우를 살짝 노려보았다.


“십오분이나 지났어. 여기서 자고 싶어? 미안하지만 난 차안에서는 별로야.”


“…….”


아직도 의자 등받이에서 머리를 떼지 못하고 있던 명현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뭐라고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멍한 얼굴로 그의 짓궂은 표정만을 살피고 있었다.


“내려, 윤명현 잠 깨우는 데는 최고의 방법이군.”


인우는 속눈썹을 깊이 깜박거리고만 있는 명현의 눈에 안경을 씌워주고는 차에서 먼저 내려 그녀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뒤이어서 바로 명현이 내리자 인우는 곧장 그녀의 손을 당겨 쥐며 기다란 손가락으로 자그마한 손들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조금 앞장선 듯 걷기 시작했다.


일정한 속도를 내는 두 사람의 명쾌한 구두 소리는 지하 주차장을 울리면서 지상으로 이어진 계단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와, 집이다. 흠, 냄새도 우리 집이 맞네.”


그녀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반가워하고 좋아했다. 떠나고만 싶었지 돌아가고 싶은 집이 없었다고 했었다.


그래서 명현은 집이 주는 정겨움을 모른다고 했었다.


“집만 반가운 모양이군.”


인우는 거실 안으로 달려들어가는 명현의 뒷모습을 보면서 지나가는 투로 무심한 그녀를 탓했다.


그러나 그의 낮은 혼잣말을 들었는지 앞으로 쭉 멀어졌던 명현이 갑자기 돌아서더니 그에게로 재빨리 다가가서 목을 힘껏 감싸안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 사는 사람이 조금 더 좋아요.”


명현의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무방비 상태로 있던 인우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조금?”


그가 마치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녀의 몸을 떼어놓으려 하자 명현은 더 힘껏 매달리면서 웃었다.


“조금보다는 좀 더 많이.”


웃느라 내뱉어진 그녀의 숨결이 달짝지근했다.


인우는 자신의 얼굴에 볼을 부비며 살가움을 표현하는 명현을 거센 힘으로 끌어당기자 한 팔로도 너끈히 둘러지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가 휘청거리며 안겨 들어왔다.


“그 정도로는 이미 빠진 기운이 돌아오지 않아.”


부족함을 항의하는 인우의 음성은 그의 목에 둘러진 명현의 팔을 스르르 풀어지게 만들면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도록 만들었다.


“사랑해요.”


명현은 그의 아랫입술을 가만히 빨아들이며 자신의 심장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발돋움을 한 채로 부드럽게 자극하고 있는 그녀의 입술은 인우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단숨에 명현의 몸을 들어올려 그녀의 입술을 삼켜버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입 속을 거칠게 파헤치면서 침실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등뒤로 딸깍하며 그들만의 침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인우는 명현을 침대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눕혔다.


묶여져 있는 곳에서 올올이 빠져 나온 머리카락과 허리선에서 밀려 올라온 블라우스 자락이 그녀의 모습을 흩어진 꽃잎처럼 침대 위에 펼쳐 놓았다.


인우는 자신을 담고 있는 그녀의 아득한 눈빛에 스며들면서 셔츠와 나머지 옷들을 벗어 던져버렸다. 곧 그녀의 눈 속을 가득 메운 탄탄한 몸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명현의 동그랗고 투명하도록 하얀 젖가슴과 애처로울 만큼 가느다란 허리를 공기 중으로 노출시켰다.


“팔을 뻗어 안아주더니 그새 잊어 버렸나?"


뺨을 쓸어 내리던 그의 서늘한 손가락이 입술을 살짝 벌리며 비집고 들어와 혀를 두드렸다. 명현은 뜨거운 입속으로 시원한 감촉이 느껴지자 비로소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랬나 봐요."


그녀의 팔이 그를 향해 내밀어짐과 동시에 둘은 이성적인 사고를 잃어버렸다.


인우는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며 항상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하얀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입술 아래에서 팔딱거리는 그녀의 맥박이 그를 만족스러움의 한숨을 내쉬게 해주었다.


늘 곁에 있으면서도 한동안은 가지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허리를 껴안아주는 아쉬운 포옹만을 해 주고는 재빨리 품을 빠져 나가버렸다.


거둬지지 않던 손길을 중간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은 가혹한 일이었다.


인우는 움켜쥔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며 입술을 내렸다. 쇄골과 가슴 골짜기도 지나 더 아래로 움직이던 입술은 그녀의 뽀얀 복부 샅샅이 핥아주고 있었다.


아직도 가슴 한가운데를 저릿하게 만드는 상흔을 그는 입술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젠 안 아파요."


명현은 마치 의식이라도 치루는 것처럼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해주었다.


“알아. 빨리 옅어지라고 주문 거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에 작은 떨림이 섞여 들려오자 인우는 고개를 들었다. 명현의 짙게 드리워져 감겨진 속눈썹이 젖어 있었다.


“윤명현, 눈 떠."


“……."


속눈썹을 내려 가까스로 막아두었던 눈물방울들이 이마 옆을 스쳤다. 명현은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러길 원하니까.


“나도 이제 안 아파. 그러니까 울지 마."


그는 명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 그녀의 입술을 마음껏 탐하면서 허벅지 안쪽의 부드러운 살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무릎사이로 몸을 실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인우의 넓은 어깨에 가려진 명현도 등허리를 살짝 휘며 열린 두 다리로 그의 엉덩이를 힘껏 감싸 안았다. 갈망의 손길에서 전율의 끝까지 사랑의 하나 됨을 위하여 그들은 그렇게 아낌없이 주고받았다.


***


오늘 수술한 환자의 수술기록이며 입퇴원 환자의 기록정리, 그리고 환자의 수술후 상태를 기록하는 프로그레션 노트. 또 오늘 나간 특수 결과의 확인, 내일 수술할 환자의 준비 등이 병실과 수술실, 중환자실, 응급실을 드나드는 시간외에 명현이 해야될 일들이다. 그리고 컨퍼런스가 있을 때에는 자료 조사까지 해야했다.


새벽 3시.


응급 수술을 마치고 의국으로 돌아온 명현은 바닥과 침대가 구분이 안될 지경으로 지쳐있었다. 온콜(on call, 응급) 수술이 연 나흘간 이어지고 있었다.


모든 콜을 일차적으로 받아야되는 1년차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어떤 강한 힘이라도 그녀의 눈꺼풀은 들어올리지 못할 것 같았다. 명현은 손으로 간신히 침대를 더듬어 몸을 뉘었다.


그러나 그녀의 혼수(昏睡)같은 잠은 길지가 않았다.


삐비비비.


콜벨 소리가 울렸다.


순식간에 눈을 뜨지도 못한 그녀의 몸이 벌떡 일어나 앉아졌다. 명현은 손에 들고있는 안경을 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비척거리며 나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응급실의 어수선함이 바로 눈앞에 다가오고 나서야 명현은 안경을 가까스로 콧잔등 위에 걸쳐놓았다.


교통사고 환자였다.


온몸이 피투성이로 의식을 상실한 상태였다. 쇼크(shock)를 막기 위해서 혈관 확장제에 피를 섞어 몇 파인트(pint)씩 계속 주사기로 넣었다. 복강내 출혈(abdominal hemorrhage)로 환자의 배가 터질 듯 불러있었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환자의 남편은 아내의 암담한 모습에 한마디 말조차도 내뱉지 못하고 수술 승낙서에 사인을 해주었다. 곧바로 환자의 침대는 수술실로 향하기 위해 다급하게 옮겨졌고, 명현은 생명을 구하기 위한 싸움터에 또다시 들어가야 했다.


5시간이 넘는 수술이었다.


중환자실을 나오는 명현은 의지를 가질 수 있는 생각이라고는 도무지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푸른색의 수술복이 그녀의 하얗게 표백된 낯빛으로 인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명현은 속이 뒤집힐 것 같은 메스꺼움에 중환자실 복도 벽을 팔로 짚으며 허리를 숙였다. 수면 부족으로 간혹 일어나는 일이긴 했지만 이번은 정도가 심한 것 같았다.


피로한 날들이 더 길어져서 일거라 생각하며 구역질이 멈춰지길 기다리며 명현은 내뻗은 팔에 얼굴을 묻었다.


아침 면회 시간을 기다리는 환자의 보호자들이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뭐라고 말들을 하고 있었다. 거기까지만 그녀의 의식에 남아있었다.


그 이후에는 분명 눈을 뜨고 있을 텐데도 보여지는 건 아무 것도 없었고 뿌연 필터가 끼여진 렌즈처럼 답답함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차가움이 느껴졌다.


명현의 1년차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다. 간 질환 파트로 섹션 체인지 한지도 두달이 넘었으니 한달 남짓 남은 셈이었다. 출퇴근은 같이 할 수 없어도 주중 오프날이 두 번이나 된다며 그녀는 2년차가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그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힘든 시간을 많이 보냈다는 의미와 같다.


며칠새 명현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아침까지 이어진 응급 수술들이 그녀의 체력을 바닥으로 떨어뜨려 놓은 것 같았다.


***


인우는 어젯밤 퇴근하기 전 보았던 명현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태엽이 풀어진 인형처럼 모든 운동 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지쳐 있었는데도 자신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미소를 예쁘게 그려 보여 주었다.


그것은 더 이상의 걱정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그녀만의 표시였다. 내키지 않는 방법이지만 그럴 땐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잠깐동안 깊숙이 안아주기만 하고는 등을 돌려주어야 했다.


출근전 명현과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아 병동 스테이션에 알아보니 수술방에 있다고 했다.


오늘이 나흘째일 텐데 어떻게 견디고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아침 회진이 끝난 시간인데도 연락이 없는걸 보면 수술이 늦어지는 모양이었다.


“안 들어가고 뭐하냐?”


과장인 원규였다. 인우는 프리젠테이션이 있는 판독실을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그 앞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힘들어하는 얼굴이나마 보아야 안심이 되곤 했는데 오늘 아침은 그러지 못하니 불안했다.


인우는 막아섰던 문에서 살짝 비켜나며 원규가 먼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들어가시죠.”


“표정이 왜 그래? 걱정되는 거 있냐?”


평소와 다름없는 묵묵한 얼굴이었지만 인우는 어두워 보였다.


“아뇨, 그런 거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들어가자.”


판독실 문이 인우에 의해서 열리자 미리 와서 프리젠테이션을 준비중이던 레지던트들이 원규와 인우를 향해 인사를 했다. 그 웅성거림과 동시에 인우의 가운 주머니에서는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번호가 병원 내 번호였다. 기다리는 전화라도 되는 듯 인우는 지체없이 전화를 받았다.


“네, 서인웁니다.”


그게 통화의 전부였다. 인우의 입에서는 뒤따라 나온 다른 어떤 말도 없었다.


[선생님, 윤명현 선생님이 쓰러지셨어요. 9층 8호실입니다.]


이럴 순 없었다. 불안하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더니. 쓰러지기나 하고.


이유를 물어보지 못했었다. 차라리 그 이유가 과로 때문이기를 인우는 바라고 또 바랐다. 그 외의 이유는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와 그녀를 위해서.


인우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5층에서 9층까지 단 몇 번의 호흡으로 날아오르듯 솟구쳤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비상구로 통하는 문이 필요이상 거칠게 열어 젖혀졌다. 명현이 있다는 8호실의 문 또한 그렇게 열렸다.


수술복 차림으로 링거를 꽂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일단 겉으로 보이는 외상의 흔적은 없는 것 같았다. 인우의 눈빛이 날카롭게 명현의 전부를 훑은 다음 옆으로 돌려 찾지 못한 이유를 물었다.


“결과 나왔어?”


“끄러지면서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나 봅니다. 사진은 깨끗했습니다.”


그의 말에 경직된 목소리로 대답을 하는 사람은 NS(신경외과) 기능질환 파트의 4년차였다.


“뇌진탕이라는 건가? 상태는?”


“그건 깨어나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언제쯤 깨어날까.”


“확실치는 않지만 한두 시간은 지나야 될 거 같습니다.”


얄팍한 손등 위에 꽂혀진 바늘은 반창고에 의해 교묘히 감춰져 있었다. 인우는 숨겨진 바늘을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거의 50일 가까이 그녀의 손등에 붙어있으면서 보기 싫은 얼룩을 만들어 놓았었는데 또 다시 날렵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인우는 명현의 손가락을 살며시 만져보았다.


차가웠다면 아마도 화가 났을 것이다. 손끝을 타고 미지근한 그녀만의 온기가 그의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떨어져나간 심장의 조각들이 제자리로 돌아올 때쯤 서 원장이 병실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 깨어났어?”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서 원장은 명현은 응시한 채 대답을 기다렸다.


“네.”


“힘들었던 모양이구나.”


명현은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공손하고 정갈한 태도로 서 원장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는 아이였다. 거기에 의사로서 자질도 병원 내에서 보고들은 바로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사고 이후의 건강이 계속 염려되긴 했지만 체력적으로 차이가 나는 남자들도 힘들다는 외과 1년차를 무난하게 해내는 걸 보며 내심 대견해하며 안도했었다.


과로로 쓰러지는 건 다반사로 있는 일이지만 운 나쁘게도 머리를 부딪쳤다는 것은 걱정스러웠다.


“두 시간만 계셔주세요. 외래 진료 시간이에요.”


간호사들에게만 부탁하기에는 미덥지 못했었는데 부친인 서 원장이 지켜 봐준다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우는 자신이 할 말만을 하고는 돌아서 버렸다. 조금 더 머뭇거렸다가는 약속된 환자들을 모두 돌려보내야 할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아 주저 없이 몸을 돌려버렸다.


***


만일 그녀가 깨어났다면 간호사실이나 부친에게서 벌써 연락이 왔을 텐데 여태 조용한 걸 보면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벼운 뇌진탕이라 생각했던 것이 의외로 심각한 건 아닌지 인우는 움직이는 내내 초조해했다. 미칠 노릇이었다. 불안 초조가 지나치면 화가 나게끔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윤명현, 화내기 전에 빨리 깨어나라.’


인우는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급한 마음에 속을 태웠다.


이상한 분위기였다. 병실 문을 여는 순간 목청껏 크게 웃고있는 진성이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주억이며 소리 없이 웃고있는 부친의 모습도 뭔가 이상했다.


인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더 명현의 상태를 확인했다.


“깨어났습니까?”


“아니, 아직이구나. 네가 왔으니 난 이제 가 봐야겠다. 깨어나면 연락 다오.”


들어올 때와는 사뭇 달라진 표정으로 부친이 나가자 인우는 그 궁금함을 진성에게 돌려 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원장님이 웃을 수 있는 이유를 말해봐.”


“그럼, 뇌진탕으로 쓰러진 사람이 잠꼬대를 하는데 웃지, 울까?”


진성은 채 다 웃지 못한 얼굴이었다.


“잠꼬대?”


그렇다면 의식을 잃었던 게 아니라 잠을 자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건가? 인우는 자신이 기막혀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없었다.


“십분만 내버려두세요. 그러던데? 얼마나 못 잤기에 잠꼬대 내용이 그러냐?”


“나흘.”


“나흘이라…. 그런데 이제부터는 그러면 안돼. 잘먹고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돼.”


“그럴 거야.”


당연하다는 말투로 즉각적인 대답을 하는 인우의 옆구리를 진성이 푹 찌르며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뭘 알고나 대답하는 건지…. 임신이야.”


“누가… 뭐?”


서있는 채로 명현의 가냘픈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인우의 시선이 갑자기 진성에게로 향해졌다. 무슨 소리냐는 듯 다그치는 눈빛이었다.


“서인우가 아빠가 된다고. 일곱달 뒤에.”


“내가?”


인우는 묘하게 찌푸려진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병실 안을 서성거렸다.


윤명현이 아기를 가졌다? 얼마후면 그녀와 똑같이 생긴 작은 눈망울이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는 뜻인가?


인우는 명현을 닮았을 아이를 상상하니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아, 어지러워! 정신없게 왜 그래?”


가뜩이나 큰 키를 앉아서 올려다보려니 목이 아파 힘들 지경이었는데 눈앞에서 휙휙 거리며 정신없이 돌며 서성이기까지 하니 고문이 따로 없었다. 그 모습을 참던 진성은 급기야 인우의 팔을 붙잡으며 그만 멈춰주기를 사정했다.


“못 보겠으면 네가 나가. 난 더 이래야 할 거 같으니까.”


인우는 진성의 타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병실을 오가며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돌아다니던지 창문으로 뛰어 내리던지. 어쨌거나 축하한다. 기대하고 있으마.”


진성은 안절부절못하는 인우를 싱긋이 바라보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


명현은 지독히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저렇게 반듯한 자세로는 오래 자지 못하는 편인데도 그녀는 뒤척임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창밖이 어느새 잿빛으로 변했는데도 굳게 닫혀져 그녀의 눈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인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명현의 뺨을 건드렸다.


“윤명현, 윤명현, 윤명현….”


혹시 자고있는게 아닐까 뇌진탕의 후유증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인우를 엄습할 때쯤 명현의 눈이 천천히 뜨여졌다. 그녀는 외부와의 접촉을 시도하는 듯 눈꺼풀을 깜박거리며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잘 잤어?”


그런 명현의 귓가에 울린 것은 인우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목소리였다. 낮고 울림이 있는 그의 음성은 명현의 눈동자에 초점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잤어요?”


뭐가 잘못되었는지 명현은 잔뜩 찌푸려진 이마에 손을 올리며 깔깔해진 목으로 숨을 들이쉬었다.


“아홉 시간이 지났지, 아마.”


“미쳤어!”


튕겨 올랐다는 게 정확할 만큼 급히 몸을 일으킨 명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손들에 연결된 링거 바늘을 빼낸 다음 병실 바닥으로 발을 내렸다.


그 순간 잠자코 보고만 있던 인우의 손이 움직이더니 그녀의 발을 다시 침대위로 얌전히 가져다 놓았다.


“내가 안 미치도록 도와줄 테니까 지금은 그냥 있어.”


인우는 여전히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웃기만 했다.


걱정이 될 것이다. 어찌됐건 하루종일 잠만 잔 1년차가 되었으니.


“이건 도와준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어떻게 아홉 시간을 자도록 내버려둬요?”


명현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있는 인우의 손을 붙잡으며 어리광처럼 불평했다.


필요한 수면을 충분히 취했는지 그의 눈앞에 앉아있는 그녀는 뽀송뽀송해 보였다. 결 사이로 공기를 함빡 머금고 있는 새 솜처럼 말끔하고 보드라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품고있는 자신의 아이도 이처럼 예쁠 거라 생각하니 인우는 감당할 수 없는 기쁨으로 숨쉬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녀를 안는 것으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숨 막혀요.”


품속에서 그녀가 바르작거렸다.


“불평하지마. 나도 숨쉬기 힘드니까.”


“그러게 왜 이렇고 있어요.”


“이러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 거 같아서 그래.”


명현은 알 수 없는 이유를 대는 인우의 가슴에서 벗어나기 위해 꼼지락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팔이 가하는 압력은 느슨해지지 않았다.


“휴, 나 숨막혀 죽기 전에 빨리 심장 좀 달래봐요.”


인우는 명현의 귀여운 투정에 그녀를 감았던 팔을 풀면서 소리내어 웃었다.


고개를 젖혀가며 시원하게 터뜨려 버렸다.


그리고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의사 선생님이니까 임신을 나타내는 징후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겠지?”


“…….”


그의 말대로 명현은 임신의 징후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그날이 언제였는지….


그러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놀라고 당황스러웠는지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손끝으로 이마를 지그시 문지르고만 있었다.


“겨우 그 정도야?”


놀리는 투였지만 인우는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알았다.


“다행이 심장이 터질 거 같지는 않아요.”


그를 닮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했었다. 괜찮을 거라는 진단을 받긴 했지만 불안하고 초조했었다.


“그래도 날 숨막히도록 안아줄 수는 있지 않나?”


“자신 없어요.”


“시도는 해봐.”


그가 두팔을 벌렸다. 사랑을 처음 부를 때처럼.


명현은 천천히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마을을 느낄 수 있도록 있는 힘껏 껴안아 주었다.


“윤명현, 숨막혀.”


서인우, 사랑해요.


# 에필로그


아침 회진 가이드를 해야될 인턴과 1년차가 나란히 나타나지 않았다. 한바탕 소란이 일었지만 좀체 그들은 돌아올 생각이 없는 듯 싶었다.


밤사이의 환자 변화와 신환이 들어왔는지를 알 수 있는 이들이 보이지 않자 명현은 인턴 숙소와 병실 간호사들에게 1년차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5시쯤 응급실에서 일을 마치고 올라간 것을 끝으로 그 이후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이대로 우왕좌왕 할 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또 그렇게 분주한 병원의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있었다.


명현은 한숨을 내쉬며 스태프 가이드를 하기 위해 병실로 향했다.


8시 30분.


정확하게 성큼 거리며 다가오는 인우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군의관 복무를 마치고 주니어 스태프로 돌아온 병훈이 그 뒤를 따랐다.


“문제 있어?”


출근 때와는 달리 굳어져 있는 그녀의 표정에 인우는 넌지시 그 이유를 물었다.


“인턴과 1년차가 사라졌어요.”


명현은 옆으로 몸을 살짝 기울여 어이없다는 듯 속삭여 주었다.


“훗, 도망갔나 보군. 잘 봐줘. 힘들 때잖아?”


“나타나야 용서를 하든지 한 대 때리든지 하죠.”


제법 근엄한 표정을 짓고 대답을 하는 명현을 바라보며 그는 놀란 듯 물었다.


“때리기도 하나?”


“간혹요.”


순간 인우의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가자 명현은 장난스럽게 코를 찡긋하며 웃어 보였다.


회진이 끝난 지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사라진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화보다는 걱정이 더 크게 작용할 때쯤 저쪽에서 흐트러진 모습으로 뛰어오고 있는 그들이 보였다.


충혈된 눈과 구겨진 가운이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했음을 분명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명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도망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고마워, 1년차 선생. 가서 일봐, 먼저 세수부터 하고.”


차분한 명현의 모습에서 그녀의 현재 기분을 알 수 있는 군더더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겁을 먹은 1년차였다.


“저기, 치프 선생님. 그냥 야단치시면 안 될까요? 저는 한달 동안 텍스트 리뷰보다는 차라리 지금 몇 대 맞는 게 훨씬 좋습니다. 제발요.”


아예 사정을 하는 1년차의 모습에 그녀는 크게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좋아, 그럼. 너 지금 몇 시야. 1년차가 아침 드레싱도 나 몰라라 하고 어디 찾아지지도 않는 곳에서 자다가 정확하게 회진 끝난 다음에 나타나? 며칠 밤을 꼬박 새워도 그러면 안되는거 아냐? 됐니? 욕먹으니까 마음이 편안해?”


“네. 홀가분하고 편안합니다.”


이미 벌을 받은 듯 표정이 편해진 1년차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명현이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네 마음이고. 난 별로 효과가 없는 방법 같아. 그냥 우리 텍스트 리뷰로 하자. 끝.”


고개를 숙인채 명현의 야단을 듣고있던 1년차의 얼굴이 무서운 속도로 들어 올려졌다. 어쩐지 쉽게 풀린다고 마음을 놓았던 것이 실수라면 실수일 것이다.


이윽고 1년차의 고개가 푹 꺾어지며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빠르게 들렸다 사라지고 있었다.


예쁘고 자상하고 부드럽고 다 좋은데, 저거는 꼭 피하라고 동기들이 충고를 해줬었는데.


다음은 인턴 차례였다.


“오늘 수술할 환자 CBC(complete blood count)와 LFT(live function test)가 얼마지? 어제 수술했던 환자는 밤사이 피 두 파인트(pint)맞고 아침에 결과가 어때?”


인턴은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기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답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인턴을 보니 명현은 화가 났다.


“어떻게 인턴이 그렇게 정신을 빼 놓고 다니니. 오늘이 몇 번째야. 아무래도 우리 과에서 점수 잘 받을 생각은 않는 게 좋겠다.”


명현은 하기 싫은 일을 한 사람처럼 언짢아 보였다.


힘들고 고된 시간들일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부딪히게 될 더 어려운 시간들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혹독한 담금질로 수련을 해야한다. 그래야지만 환자들의 생명을 당겨주는 질긴 밧줄 역할을 충실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열심히 배우고 잘 견뎌내는 수밖에 없다. 진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후닥닥, 1년차의 구겨진 가운 자락이 명현의 옆을 재빨리 스치고 지나갔다. 곧 있을 수술 준비를 하러 가는 것이리라.


“연진 어미야.”


1년차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명현은 자신을 부르는 귀에 익은 음성에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시어머니인 김 여사가 나풀거리는 분홍의 원피스를 입고 여기저기를 조심스럽게 기웃거리는 두 돌이 채 안된 딸을 데리고 간호사실 앞에 서 있었다.


“어머, 어머님!”


놀란 표정으로 명현은 다급히 그 앞으로 갔다.


“저 녀석이 엄마아빠 보러 가자고 어찌나 울어대는지. 그래서 달래기를 포기하고 데려왔다.”


명현의 병원 생활로 인해 연진은 백일 이후부터 그녀의 시어머니가 돌봐주고 있었다. 주말은 물론이고 주중에도 들러서 자주 얼굴을 보여주는 편이지만 아이는 제 부모가 늘 보고픈 모양이었다.


명현은 코끝이 시려와 허리를 숙이고 앉아 딸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러나 막상 엄마의 얼굴을 확인한 아이는 보기만 한 것으로도 충분한지 활짝 웃어주고는 제 볼일을 보느라 병원 복도를 요리조리 살피느라 뒤뚱거렸다.


명현은 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시어머니가 들려주는 딸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간밤에 미열이 있었으나 더 이상 오르지 않았고, 산책을 하는 도중에는 송아지 만한 개를 겁도 없이 덥석 끌어안아 많이 놀랐다는 듯, 시어머니는 작은 것 하나까지도 알려주기 위해서 세심하게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때 명현은 딸이 갑자기 제 걸음에는 버거울 정도의 빠른 속도로 걷고있는 것을 보았다. 저러다가는 제 발에 꼬여서 넘어질게 확실했다.


무엇을 향해 저렇게 열심히 걷나 싶어 명현은 딸의 목표를 찾아보았다.


딸이 어설픈 걸음으로 달려가 목표를 확인한 명현의 얼굴에는 뿌듯한 미소가 어렷다.


“서연진.”


과장인 원규의 방에서 나오던 인우가 복도 저 쪽에서 자신을 향해 두 팔을 내밀며 넘어질 듯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딸을 발견했다.


아빠인 자신을 먼저 알아보고 저렇게 열심히 위태한 걸음으로 달려오는 딸이 인우는 너무나 대견하고 사람들이 놀라서 쳐다볼 정도로 그는 딸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뛰어가 안았다.


팔을 위로 쭉 뻗어 높이 올려주어도 놀라거나 울지도 않았다. 인우는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두 개의 예쁜 구슬을 향해 사랑을 얘기해 주었다.


“사랑하는 우리 연진. 서인우의 예쁜 딸 서연진.”


그의 얼굴에 온통 딸의 사랑이 흘러 넘쳤다. 팔짱을 끼고서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명현의 얼굴에도 어쩔 수 없는 행복의 기운이 묻어나고 있었다.


명현은 딸 연진을 가슴에 안고있는 인우의 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딸과 눈을 마주치느라 그녀가 다가오는 줄 몰랐던 인우가 명현을 발견하고는 싱긋 웃었다.


“연진이 언제 왔어?”


“조금 전에요. 연진아, 엄마한테 와.”


명현은 딸을 안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연진은 인우의 목을 끌어안고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안 간다는데? 우리 딸은 엄마보다 아빠가 더 좋은가 보다. 근데 이를 어쩌지? 서연진. 아빤 엄마가 더 좋은데.”


인우는 보들보들한 딸의 뺨에 연신 입을 맞추면서 명현을 위한 너스레를 떨었다.


명현은 그렇게 말해주는 인우를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수줍게 고백했다.


“나, 다음에 태어나도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조용히 물어오는 명현을 향해 인우는 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다음에는 윤명현 안 만나. 데리고 살기까지 너무 힘들어서 다음은 사양하고 싶어.”


그러면서 딸에게서 한 손을 내려 명현의 어깨를 꼭 껴안아주었다. 그리고는 나직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혹시 윤명현이 서인우를 잡으러 다닌다면 잡혀줄 의향은 있지.”


잠시 서운함으로 떨렸던 명현의 눈동자에 그의 사랑으로 말간 눈물이 고이자 인우가 손끝으로 눌러 닦아주었다. 슬프지 않는데도 눈물이라는 것은 고여서 흘러 내렸다.


명현은 인우를 향해 웃었다.


“그래요. 다음에는 내가 잡으러 다닐 테니 잘 도망 다녀요. 서인우.”


# 외전


“염병할.”


새우잠도 모자랄 형편인데 또 맞선이라니. 병훈은 잘해보라는 동료들의 응원을 받으며 꼬리에 불붙은 쥐 마냥 뛰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했다. 남들은 일년에 서너번 선보기도 힘들다고 하던데 그에게 선을 매달 해야하는 월례행사였다.


“김병훈, 너 또 선 보냐!”


막 열린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려는 그에게 내과에 근무하는 재형이 저 멀리 복도 끝에서 제법 큰 소리로 비아냥거렸다. 곧이어 휘파람 소리와 잘해보세요, 라는 간호사들의 응원도 들려왔다. 병훈은 엘리베이터에서 고개만 내밀고 자신의 목을 조이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이번에는 꼭 성공해라. 파이팅!”


누가 들어도 조소다. 그를 놀리기 위해 소리친 게 분명한 재형은 한때 그의 대타였다. 즉 그 대신 재형이 선 자리에 나가 올해 결혼한 놈이다.


“신경 꺼라.”


재형에게 험악한 인상을 지어 보인 병훈은 내심 오늘로써 선보는 것은 마지막이라고 맹세를 했다. 하지만 이 맹세 또한 매달 월례행사처럼 하는 것이다.


“선 볼 때가 아닌데.”


약속은 지켜야하므로 나가고는 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안 그래도 명현이 중환자실에 누워있어 병원의 기류가 심상치 않은 때다. 아니, 그보다는 그가 아끼던 후배가 갑작스런 사고로 인해 아직 의식조차 찾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 정신없이 보낸 날이다.


어느덧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 멈춰있었다. 병훈은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와 이틀 전에 주차해 두었던 차가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이쯤인데…?”


병훈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확한 주차공간을 기억하지 못해 한참을 살피고서야 자신의 차를 찾아낸 순간 그는 그만 입이 떡 벌어졌다.


“젠장, 안 그래도 늦어 죽겠는데.”


누군가 그가 주차해 놓은 차 바로 앞에 차를 버젓이 세워놓고 있었다.


“이런 인간들 때문에 우리 나라 교통질서가 엉망이지.”


차 앞 유리에 차주의 핸드폰 번호를 적은 쪽지도 없었다. 병훈은 시계를 흘끗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늦었는데 무한정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는 양복상의를 벗어 자신의 차 위에 던져놓고는 앞쪽에 주차되어있는 차를 밀었다.


“끙!”


당연한 일이지만 차는 도통 힘을 주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젠장, 쥔장은 어디 있는 거야!”


괜히 울화가 치밀었다. 핸드폰 번호를 남기지 않았다면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어놓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병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번 더 힘써보기로 했다. 그는 크게 기합을 지르고는 있는 힘껏 차를 밀었다. 그럼에도 차는 꼼짝하지 않았다.


병훈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3시 40분. 약속시간까지는 정확히 20분 남았다. 지금 출발한다 치더라도 늦기는 매한가지였다. 어떻게 손을 쓰지도 못할 차를 아쉽게 바라보던 그는 던져두었던 양복 상의를 다시 걸쳤다. 빨리 뛰어가서 택시라도 탈 요량으로 병훈은 달렸다.


“헉, 헉!”


바쁜 일상 때문에 운동을 게을리 한 탓인지 겨우 한층 올라왔을 뿐인데 숨이 턱까지 찼다. 그는 습관적으로 넥타이를 고쳐 매고 길게 숨을 골랐다.


“선생님!”


자연스럽게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의사라면 하루에 백 번 넘게 선생님이라는 말을 듣기에 아주 습관적으로 그 소리에 고개가 돌아간다.


“어디 가세요?”


말쑥한 양복을 차려입은 레지던트 2년차인 승수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응?! 응. 너는?”


“저 오프예요. 일년 열 두달 병원에 있었더니 나도 모르게 병원 쪽으로 운전하고 있지 뭐예요. 그래서 과자 좀 사들고 간호사들에게 전해주고 가는 길이에요. 그런데 듣자하니 선생님 오늘 선 보러 가셨다던데?”


승수의 표정은 여태껏 안 떠나고 뭐하세요, 라고 묻는 듯했다.


“지금 가는 중이야.”


둘은 어느덧 로비를 빠져나와 쏟아지는 여름 햇살을 이기지 못하고 동시에 손으로 이마에 그늘을 만들었다.


“무지 덥네.”


항상 에어컨 바람에 길들여 있었던지라 벌써부터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병훈은 이마에 맺히기 시작한 땀을 훔쳐내며 투덜거렸다.


“그러게요. 근데 선생님 차는요? 지하에 주차해 놓으셨잖아요?”


치프가 되면 개인 주차장이 생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승수가 이상하다는 듯이 한쪽 눈을 치켜 떴다.


“누가 주차를 개떡같이 해놔서 뺄 수가 없었어.”


“누가요?”


“그걸 알면 내가 땀 흘리며 너와 함께 있겠냐. 핸드폰 번호도 그렇다고 사이드 브레이크도 풀어놓지 않았더라.”


아, 라고 짧게 외친 승수는 눈을 살짝 감았다. 그리고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병훈을 보고 씨익 웃었다. 병훈은 그 미소에 괜히 기분이 오싹해졌다.


“너 그렇게 웃으면 징그러워.”


“왜 이러십니까. 이 미소에 여자들이 여름날 아이스크림처럼 살살 녹아난다고요.”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집에 가서 잠이나 쳐 자라.”


“알겠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잠이나 자러 가겠습니다. 그 전에, 제가 선보는 장소로 모셔다 드릴게요.”


“됐다. 택시 타면 된다.”


일부러 선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얄미운 승수에게 병훈은 시큰둥하게 거절했다.


“그래요? 모처럼 베푼 호의인데.”


아, 얄미운 놈. 병훈은 택시 정거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구시렁거렸다. 승수의 차는 외제차다. 폼나는 스포츠카.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운전해보고 싶은 차다. 운전은 못하더라도 타보고는 싶다. 자식, 한번 더 물어볼 것이지. 푹푹 찌는 여름날 10m 걷는 것도 짜증이 났다.


그는 목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택시를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리는 택시대신 자가용만 연신 드나들었다.


“대한민국 택시는 다들 어디 간 거야?”


이러다 큰길까지 걸어 나가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앞섰다. 뒷머리에 따라붙은 탱글탱글한 태양을 머리 위에 지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차피 늦은 김에 나가지 말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의 뒤에서 차의 엔진음이 경쾌하게 들려왔다.


“선생님, 타세요.”


“됐다니까.”


차창을 내리고 머리를 반쯤 내놓은 승수는 멈춤 없이 앞을 향해 걸어가는 병훈을 바라보다 클락션을 눌러댔다.


빵! 빵빵!


저 자식이? 하여간 그를 무서워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 스스로도 치프라는 자리를 고스톱 쳐서 땄다고 말을 하고 다니지만, 저 까마득한 2년차가 기어오르다니.


빵.


하여간 못 말린다. 그는 승수의 고집에 졌다는 핑계를 대고 못이기는 첫, 뒤를 돌아보았다.


“야!”


“선생님 고집부리지 마시고 타세요. 제가 기사까지 되어 드린다는데 괜히 택시 잡느라 고생하지 마시고, 타세요.”


병훈의 어깨가 잠시 위로 올라갔다 다시 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에어컨의 시원한 공기가 감도는 승수의 차에 올라 시트에 지긋이 몸을 기댔다.


“그럼 서울 호텔로 가자.”


“호텔이요?”


“귀 먹었냐?”


“오호! 뭔일이래?”


“이 자식이!”


병훈의 말에 승수는 휘파람을 길게 불다 가속 패달을 밟아 속도를 올렸다.


그놈의 잔소리.


승수는 오는 내내 남자치고는 꽤 많은 수다를 늘어놓으며 그의 두통을 가중시켰다. 마치 누군가가 관자놀이를 내리치는 것처럼 머리가 아파 왔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의 오늘 악운이 끝나는 것은 아닌가보다.


승수가 끝까지 따라올 것처럼 집요함을 보이자, 병훈은 호텔 입구를 한 100여 미터 앞에 두고 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차라리 시간이 좀 늦는다 하더라고 택시를 타고 오는 편이 그의 정신건강에는 더 좋았을 것이라는 결론을 늘어놓으면서.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왜 비가 오냔 말이다. 화창하게 맑은 날씨는 아니었다. 낮게 내려앉은 구름 때문인지, 아니면 여름의 습기 때문인지 해는 나지 않는 날이었지만 훅훅 숨까지 찰 정도로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그런데 바로 호텔 입구를 몇 미터 앞두고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허둥지둥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이미 옷은 젖어 물에 젖은 생쥐가 따로 없었다. 이렇게까지 운이 나쁘기도 힘이 들것이라는 생각에 벌써 입가에는 욕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선은 무슨 선. 그냥 병원에서 시간이 안 난다고 둘러댈 걸.”


하지만 그는 호텔을 나서지는 않았다.


***


“잘 하고 와.”


“네.”


거실 소파에 인형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앉은 소빈의 대답에 소빈 모(母) 희진은 영 마땅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흰 원피스를 차려입은 모습이 단박에 사람을 사로잡을 듯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차분하고 이지적인 분위기가 꽤 매력적인 편이었다.


긴 머리는 윤기 나게 다듬어져 어깨 아래까지 흘러 내렸고 영민함이 깃든 얼굴에는 적당하게 화장이 되어 있었다. 원피스가 좀 더 화려했으면 했지만 그건 그럭저럭 봐 줄만 했다. 귀걸이도 그만하면 됐고, 팔찌는….


아무 것도 걸쳐지지 않은 소빈의 빈 손목을 발견한 희진은 순간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시계라도 차거라.”


“그럴 게요.”


반박은 없었다. 하지만 살가운 말투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감정이 보이지 않는 소빈의 말투에서는 선을 보러 나가는 여자의 기대나 설렘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실수하지 말고. 그 사람, 성격도 좋고 금나하면 외모도 괜찮다니까. 사람 됨됨이만 괜찮으면 바로 날 잡을 줄 알고. 내가 지금이라도 같이 갈까?”


“아뇨. 잘 하고 올게요.”


앙증맞은 비즈 핸드백을 든 소빈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집을 빠져나왔다.


대문을 열고 나오자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가기 싫었다. 음울하게 짙은 구름이 내려 낀 날씨도 그랬고, 마치 결혼을 못해 난리인 것처럼 잔뜩 치장을 하고 나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타시죠, 아가씨.”


“그냥 저 혼자서 제 차로 갈게요.”


하지만 대문 바로 앞에 차를 대어놓은 김 비서는 비킬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차문을 열고 그녀에게 타라며 강압하듯 굵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제 차로 갈게요.”


데이트하시는데 방해된다고 사모님이 지시하셨습니다.“


30후반의 건장한 체구를 가진 김 비서가 희진의 말을 전해주었다.


모든 것이 강한 희진의 뜻대로 움직여졌다.


노력을 해도 완전하게 매울 수 없는 부족함을 희진은 안달난 사람처럼 가지려고 애를 썼다.


그게 오히려 더 딸이 가지고 있는 치열한 삶의 의욕을 메마르게 만드는 것도 모르고 희진은 늘 동동거렸다.


소빈은 자신을 세상에 나오게 한 아비가 누구인지 모른다.


사랑 놀음. 아니 그것도 과분하다. 일차적인 육체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얽혀 들어선 안 된 사람들이 얽혔다. 그래서 자신이 태어났다. 자신은 한번쯤 키워보고 싶은 애완동물이 아니었다. 절대 나오지 말아야 할 세상이었다. 사생아….


어린아이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도 또 그게 왜 손가락질을 받아야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릴 때는 친구의 엄마가 자신을 싫어하고 피하는 걸 용서할 수 있었다. 그 이유를 몰랐으니까. 그러나 커가면서 피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자신의 육체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몸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자신은 차라리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사생아답게 살아보려 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에게 자꾸만 그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라고 요구한다. 자신은 결혼이나 가정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된 사람이 아닌데도 몰아 부친다.


소빈은 한참을 앞에 세워진 차를 바라보다 이내 입술을 꼭 물고는 차에 오르고 말았다. 어차피 몇 시간 말하지 말고 차만 마시고 오면 그 뿐이다.


집에서 오롯이 희진의 시선을 받는 것이나 낯선 타인의 시선을 받는 것이나 그녀에게는 별반 다를 것이 없을 따름이다.


“출발하겠습니다.”


소빈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생기 없는 표정으로 세상을 구경했다.


***


늦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병훈은 호텔 커피숍에 들어오자마자 혼자 앉아있는 여자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입구에서 두리번거렸다.


“손님 뭘 도와드릴까요?”


“고소빈 씨가 계신지 알고 싶은데요.”


단정하게 머리를 올리고 베이지 색의 유니폼을 입은 웨이트리스를 바라보며 병훈이 말을 했다. 그러자 그 여자의 다음 행동이 기가 막혔다. 마치 결혼식장에나 있을 법한 팻말에 고소빈이라는 글씨를 써넣더니 종까지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러더니 대뜸 앞장 서 걸어가고 있었다.


병훈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절대 저 뒤는 따르지 않으리라 결심을 하며 무심하게 발끝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뭐 하세요, 따라와 주세요.”


에이씨! 그냥 찾으시란 말입니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에 그는 절로 인상이 찡그려지고 말았다. 하지만 약속 시간에서 20분이나 늦은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그렇다고 저 뒤를 따르며 걸어가는 것은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일진이 사납다는 것은 이미 여기까지 오는 고행으로 예감하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오늘은 마가 낀 것 같았다.


젠장! 속으로 욕설이 마구마구 튀어나왔다.


딸랑, 딸랑.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으려는 찰나였다.


“제가 고소빈입니다.”


낭랑한 목소리는 아니어도 조용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내려져 있던 병훈의 고개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평범한 차림의 겸손한 외모. 그리고 별반 특이사항 없음.


그의 시선이 여자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한번 훑어 내린 후 바로 그녀가 있는 테이블을 향해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김병훈입니다.”


“고소빈입니다.”


고소빈. 그 여자는 병훈의 모습조차 제대로 보지 않고 먼저 자리에 앉았다. 뭐 선이라는 게 다 그렇지, 라고 아무리 생각을 해도 별로 유쾌한 모습은 아니었다.


‘빗물에 젖어 머리며 양복의 상태가 썩 좋은 모습은 아니더라도 무시하듯 고개를 돌리는 여자의 모습이란…. 거기다 고소빈? 고소미도 아니고 무슨 고소빈?’


먼저 자리에 앉은 여자는 새치름하게 시선을 깔고 바닥을 바라보는 대신, 비오는 창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 무례하다는 생각이었다.


“뭐 드실래요?”


우선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호감 역시 들지 않는다. 병훈은 빨리 이 자리를 끝내고 병원으로 들어갈 생각으로 주문을 서둘렀다.


“커피요.”


대답을 듣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병훈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아무리 싫다 해도 사람을 면전에다 두고 어쩌면 저럴 수가 있는가? 뭐 대단히 겸손한 얼굴에, 볼품없는 몸매, 그나마 볼만한 것은 머릿결 외에는 없는 여자에게 대놓고 무시를 당하자 그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아이스커피 주세요.”


원래 여자들이 선 자리에서 가장 피하는 음료가 커피다. 립스틱 자국 때문이라면 호들갑을 떨던 민지로 인해 사전 지식을 이미 얻은 터였다.


“저기….”


사람이 쳐다보는데 젠장,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대답을 하는 여자의 입모양이 참으로 비참함을 불러 일으켰다.


“네."


복화술을 하는 모양이었다. 젠장, 차라리 이러려면 나오지나 말지, 남의 금쪽같은 시간까지 죽이게 만든 여자에 대해 이제는 짜증마저 일었다.


“우리 차만 마시고 일어나죠?”


“벌써요?”


여전히 시선은 밖으로 향해 있었다. 별로 놀라는 기운은 없어 보였고, 그래서 더욱 불쾌지수만 높아졌다. 거기다 아까 맞은 비로 인해 몸은 꿉꿉했고, 젖은 앞머리는 이마를 자꾸 가리듯 내려오고 있었다.


“드시죠.”


웨이트리스가 쟁반을 들고 자리를 비켜주자, 그는 건성으로 말을 하고는 아이스커피의 얼음을 우두둑 씹었다. 그 소리 때문인지 여자의 시선이 창밖에서 찻잔으로 돌려졌다. 그리고 찻잔을 거머쥐었다.


순간 병훈의 시선이 여자의 손목으로 집중되었다.


옅은 주름처럼 보이는 그 흔적은 자해의 자국이 분명했다. 손목을 긋는 사람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볼 때가 있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일차적으로 손목을 긋는다. 그리고 피를 흘리며 병원에 실려 들어오는 사람들을 대할 때면 그는 한심함에 고개를 젓곤 했었다.


그런데 저 맘에도 들지 않는 여자의 손목에 그 흔적이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칼 잘 드는지 시험해 봤어요?”


빈정거림이 가득한 병훈의 입가가 슬며시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지금까지 그의 시선을 한번도 받아주지 않던 여자의 얼굴이 고스란히 병훈을 향해 올려졌다.


“어떻게 아셨어요?”


“몰랐어요? 제 직업이 의사라는 거?”


“아….”


병훈은 목에서 쓴 물이 넘어오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의 이름만 달랑 알고 나왔다는 말이다. 직업에 무슨 특권 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선을 보러 나오는 자리에 당연하게 들었을 사전 정보마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명확한 거부의 의사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그래, 어차피 비싼 돈 들여 커피까지 시켰는데 궁금하다는 소원 하나 풀어주지 못할까 싶었다.


“네,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남의 살 칼로 베어보셨죠?”


병훈은 막 마시려고 들었던 잔을 순간 소리나게 내려놓고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저 여자가 뭐라고 하는거야 라는 질문을 얼굴 전면에 가득 담고서.


“그게 무슨 말이죠? 당연히 수술방에 들어가면 칼로 베기는 하지만…. 꼭 그쪽 어투가 무슨 도축장에서 가축을 죽이는 사람처럼 기분 나쁘게 들리네요.”


하지만 그의 불쾌감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눈이 순간 호기심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별소리도 안 했는데 왜 저러나 싶은 것도 잠시, 병훈은 귓가에 들리는 질문은 정말로 기가 막혔다.


“자살하는 사람들, 많이 보셨어요?”


“아뇨. 자살하는 사람들은 많이 못 봤지만, 자살에 실패해서 실려오는 사람들은 많이 봤습니다.”


그러자 정말 그에게 관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소빈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병훈이 먼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죽고 싶었어요. 당신은 칼로 그어봤으니까 그 느낌 알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누구보다 간절하다 생각했는데 막상 내 손목을 그으려니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더라고요. 그 와중에도 내 자신을 사랑했나 봐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자살을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더 아등바등 살려고 노력하지, 자살이란 극단적인 방법으로 생을 놓을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살 자격을 박탈당해야 한다고 봅니다.”


너무 열변을 토해 놓았다 보다. 정말 입에 침이 튀도록 그는 평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토로했다. 하지만 핀잔에 가까운 그의 말에도 여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참 성격 이상한 여자네, 라는 생각이 들려는 찰라.


“근데 칼이 잘 안 들더라고요.”


정말 생각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이상한 여자였다. 병훈은 냉커피를 단숨에 비워냈다. 그리고는 꿈지럭거리며 일어나자는 의사를 표시했다.


“갑시다. 저도 바쁘고.”


“아직 질문이 끝나지 않았어요.”


“무슨 질문이요?”


자꾸만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갑작스럽게 선을 보라고 닦달을 하던 어머니의 전화에 잊고있던 자리였다. 안 그래도 명현으로 인해 시끄러운 속이 이상한 여자 때문에 더 볶이자 위장은 살려달라 발악을 쳐댔다. 신물이 넘어 왔지만 병훈은 일어설 수가 없었다. 이 여자가 할 질문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혹시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아시나요?”


사람 살리는 의사에게 죽는 방법에 대해 묻는 의도를 모르겠다. 이러다 정말 자살을 하는 것은 아니야? 병훈은 의사였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하는…. 이 여자가 장난처럼 얘기하는 죽음의 문턱을 지금 누군가는 힘겹게 넘지 않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명현의 처지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짓고 있는 소빈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자 그는 화가 나고 말았다.


“정말 죽고 싶어요?”


“네.”


“그럼 왜 안 죽었어요?”


“안 죽어지니까.”


한숨이 새어나왔다. 저 여자가 갈망하는 것이 정말 죽음이지, 아니면 일종의 객기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가볍게 들먹일 단어가 죽음이 아니라는 것은 그는 몸소 체험을 했고, 그렇기에 분노를 넘은 화가 가슴을 뜨겁게 덥히고 있는 것이다.


명현을 사랑하는 인우. 그리고 죽어 가는 여자를 애써 붙잡고 있는 그들의 사랑을 눈으로 매일 확인하는 그. 병훈은 앞에 앉은 소빈을 매몰차게 쏘아보았다. 평소에는 사람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뭐 모난 성격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리 만만하게 보일 성격도 아니었다. 어중간한 보통의 성격의 인간이 바로 그였다. 그런데 소빈은 자꾸만 그를 화나게 만든다. 그것도 그가 주관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어떻게 죽고 싶은데요?”


“영화 델마와 루이스 보셨죠? 거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옆자리에 근사한 사람을 태우고 함께 하늘을 자동차로 날고 싶어요.”


이제는 병훈에게 화낼 기력조차 없었다. 날고 싶단다. 그럼 날라야지. 그런데 죽으려면 곱게 혼자나 죽을 것이지, 왜 옆자리에 사람은 태우고 죽을 생각을 하냔 말이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일고의 가치가 없는 여자였다.


병훈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냉소적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죽으려면 그냥 죽으면 안 되죠. 먼저 장기기증 센터로 가서 장기기증 서약을 하고 그 다음 약은 복용하지 말고, 되도록 인체 내부 장기에 해가되는 짓은 하지 말고 죽으세요. 그럼 당신의 죽음으로 몇 사람은 새 생명을 얻을 테고, 당신은 그토록 염원하던 죽음에 이르면 되겠네요.”


그가 테이블에 놓여 진 계산서를 들고 나가려는 순간, 가늘게 들리는 소빈의 목소리가 또 한번 그의 발걸음을 잡아채고 말았다.


“흔적이 싫어요. 제가 살았었던 흔적, 그리고 누군가에게 기생하며 또 사랑가야 하는 그런 게 싫어요.”


의미 없었다. 장난처럼 죽음을 들먹이는 자에게 그 흔한 충고도 염려도 모두 별게 아니라는 생각에 병훈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그럼 살던가.”


뚜벅뚜벅 대리석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병훈의 뒷모습도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소빈의 시선이 병훈의 뒷모습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살을 입에 담자마자 얼굴 표정이 확 달라진 그이 모습은 처음의 인상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이상하게도 비에 홀딱 젖어 들어오는 그의 양복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난감하게 여기저기 둘러보는 그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당당하게 죽으라고 말한 남자. 그는 의미 있는 죽음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딸랑거리며 종을 울리는 메모판에 버젓이 적힌 이름. 김병훈. 그의 프로필을 읊으며 모처럼 흥분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그녀는 비웃음을 애써 감췄다.


보이는 조건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평범한 집안에 아직 전문의 시험도 보지 않은 레지던트, 게다가 요즈음은 모두들 기피한다는 외과의사.


‘어머니, 잘못 생각하셨어요. 이 남자, 어머니 생각만큼 호락호락할 것 같지 않아요.’


대학을 졸업하기 바로 전 가을. 소빈은 죽음이라는 걸 시도했었다. 그녀가 뭘 시도하든지 간에 참고해야 될 사항처럼 사생아라는 꼬리표는 빠짐없이 그녀는 붙잡고 늘어졌다. 그 꼬리표에 대한 증오심이 최고조에 이른 때가 그때였다.


어수룩하게 감정에만 치우쳐 그 죽음이라는 것을 마냥 쉽게 생각했었다. 성공하지 못한 일은 지탄을 받게 되어 있다. 그 이후 어머니는 그녀에게서 자유를 빼앗았다. 그리고 이렇게 가져서는 안 될 것에 욕심을 부리는 일에 그녀를 내몰았다. 수도 없이. 거기에서도 꼬리표의 영향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가장 예민하고 강렬했다.


아이러니 하게 죽고 싶은 사람에게 사람을 살리는 의사를 선보게 했다는 사실에 조소를 금치 못하고 있었는데 가슴은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특별히 잘생긴 얼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눈에 띄는 카리스마의 성격이나, 어디 한군데 도드라지는 면도 없었다.


수더분한 인상에 그저 편안해 보이는 표정, 하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지루한 듯 차를 시키고 훈계조로 몇 마디 하더니 거절의 의미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모습으로 등을 돌린 남자였다. 그런데도 소빈은 그가 한번쯤은 더 보고 싶었다.


발자국 자국조차 남지 않은 대리석의 바닥을 아련히 바라보는 그녀의 입술이 작게 열리고 말았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같이 있어도 좋을 텐데.”


하지만 그 말은 이미 늦은 후였다. 그는 벌써 사라지고 주위에 자신과 같이 맞선을 보던 사람들의 흘깃거림만 난무하다. 차였다고 안쓰러워 하는 표정이 역력한 그 모습에 그녀는 슬핏 조소의 웃음을 짓고 말았다.


‘차였다.’


맞는 말이었다. 여자인 그녀를 배려하지 않고 그는 자살을 생각하려면 장기 기증이나 하고 죽으라는 매몰찬 말을 남기고 사라지고 만 것이다.


관심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그에게 다가갈 정도의 용기도 없었다. 하지만 다시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가 있는 곳에 핑계와 변명 없이 가서 얼굴이라도 정확하게 보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도 생각나지 않았다. 소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호텔 커피숍을 빠져나갔다. 함께 저녁을 먹고 들어오라며 먼저 들어간 기사의 말만이 택시를 기다리는 그녀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


“또 차였죠? 맞죠?”


하여튼 저 촐싹이가 또 입을 나불거린다.


그가 어제 오후에 잠시 외출을 나갔다 온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에 자신의 입으로 떠벌리기는 싫었다.


별로 맘에 드는 상대도 아니었고, 일일이 선보러 다녀왔다는 말은 더더군다나 하기 싫었다. 그렇기에 병훈은 승수가 하는 말에 무시로 일관했다 대꾸를 하지 않는다면 저도 지치겠지. 뭐, 그의 권위로 눈을 한번 치켜올리면 그뿐이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 픽 웃고 말았다.


스스로도 인정을 했지만, 별다른 도드라짐이 없는 사람이 그였다. 아직 타이가 능숙하지 못해 서인우 선생님에게 지적도 받고, 전문의 시험을 앞두고 있지만 병원에 남던가 아니면 학교에 남는다는 욕심도 없었다.


그저 작은 병원 하나 차려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이 그의 소박한 욕심이면 욕심이었다. 그나저나 그 자살을 입에 담았던 여자는 잘 들어갔는지 괜히 마음에 걸렸다.


병원에 돌아와 정신없이 이리저리 바쁘게 왔다갔다하는 도중 집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고, 그는 자신이 여자에게 꽤 무례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맘에는 들던?]


“누가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그는 그렇게 어머니의 질문에 성의 없이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렇기에 벼락처럼 전화기를 울리는 화난 고함소리에 덜컥 정신이 들었고, 자신의 실수를 알아채고 말았다.


‘아차차! 선을 봤지?’


“별로였어요. 어머니.”


그것으로 전화는 종료될 것으로 믿고있었다. 평소대로 바쁘다며 말하면 곱게 끊을 줄 알았던 그의 어머니는 이상하게도 잔소리를 연신 해대고 있었다.


[네 나이가 얼마인데 지금도 늦었어. 이미 결혼한 후배들도 많다며? 그런데 넌 어떻게 천하태평으로 그리 마음을 놓고 살 수 있니? 그 아이, 참하고 예쁘기로 소문이 자자하던데, 한번 다시 만나보고 결정해, 알았니?]


예쁘다고? 꽤 겸손하게 생긴 것으로 기억한다. 뭐 그리 시력이 나쁜 편이 아니라 자부를 하니 잘못 봤을 리는 없다. 어머니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 적은 별로 없었다. 이 특이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분명히 이유가 존재할 것이고, 거절의 말을 하기에 더욱 힘들다는 예감이 절로 들었다.


“다음 에요. 요즘 바쁩니다.”


[바빠도 결혼할 시간도 안 준다니? 너희 병원에 결혼한 의사들은 다 어떻게 산다고 그런 말을 하니?]


금방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끊어야 했다. 그는 옆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키득거리는 승수의 등을 확 내리쳤다.


“왜요, 선생님.”


병훈은 손가락으로 귀에 대고있는 전화기를 가리켰다. 빨리 끊게 하라는 강요의 눈빛을 가득 담고.


“선생님 급해요. 얼른요.”


승수는 역시 잔머리의 대가였다. 전화기에 입을 가까이 대고는 소리를 지르는 듯 연극을 하는 그를 칭찬하듯 병훈은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쁩니다, 나중에 전화 드릴게요.”


[병훈아, 병훈아, 얘….]


점점 높아지는 목소리에도 상관하지 않고 병훈은 핸드폰의 폴더를 거칠게 닫았다. 이로서 잠시의 평화는 얻었지만 그래도 후환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라는 말을 애써 머릿속으로 기억하면서 그는 다시 병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


“응급에서 콜 왔습니다.”


“왜?”


“모르죠. 가 봐야 알겠죠.”


“정말이냐?”


“제가 아무리 간이 부었어도 치프님 가지고 장난치겠습니까?”


승수의 장난기 어린 눈빛이 어쩐지 수상했다. 하지만 어쩌랴? 응급에서 콜이 왔다면 그만큼 위급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뛰어, 자식아.”


“선생님, 저도 이제는 2년차인데 이 자식 저 자식 상당히 듣기 거북….”


병훈이 뒷머리를 가격하는 바람에 승수의 말이 중간에 잘려버리고 말았다. 꽤나 아픈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인상을 찌푸리는 폼이 재미있기는 했지만, 병훈은 걸음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외래가 바로 끝났기에 병원은 조금 전보다는 많이 한가했고, 굳이 계단을 이용해 이동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엘리베이터 앞도 한산했다.


“뛰어.”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달리듯 들어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뛰면 미친놈으로 알아요.”


병훈의 굵은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알았어요, 알았어. 선생님은 저만 미워해요.”


“그럼, 내가 널 사랑하리?”


“치프 선생님 우리 확 커밍아웃을 하죠? 어쩌겠어요,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 이제는 하늘에 순응하자고요. 뭐 우리도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요? 운명이니 받아들이는 수 밖에요.”


이 녀석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병훈의 뒤쪽에는 정말 한 눈에 봐도 아름다운 여자 둘이 서 있었다. 승수의 말을 듣자마자 엘리베이터 벽에 바짝 붙어 무슨 병자를 보듯 바라보는 그 여자들을 그제야 발견한 병훈의 눈이 순식간에 가자미눈이 되고야 말았다.


“너, 이 자식!”


“그러게 누가 사람을 그렇게 때리래요? 말하지 못하는 동물도 그렇게 갑작스레 맞으면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다고요.”


“저, 저놈의 입을 꿰매야 돼.”


“선생님도, 그래도 먹어야 살죠.”


휴! 졌다. 병훈은 승수의 거침없는 말대답에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래도 이 녀석이 있기에 그나마 웃게도 된다.


어색한 공간의 침묵이 익숙해질 즈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가 내리려 발을 채 떼기도 전에 뒤에서 있던 여자들이 후다닥 그들의 몸을 밀며 뛰어 나가고 있었다.


“참, 우리가 무슨 괴물도 아니고, 그쵸, 자기야!”


승수는 병훈의 뺨을 곱게 쓸어 내리며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는 시늉을 했다.


“이 자식아! 장난도 작작 쳐다. 그래도 명현이가 깨어났으니 다행이지, 서인우 선생님보고 뭐 느끼는 것도 없냐?”


“아! 실수.”


오늘에서야 무사히 깨어난 명현의 일에 반가워하는 사람들로 인해 그나마 힘든 일과가 수월하게 흘러간 것 같았다. 그런데 응급실의 콜이라니.


피곤에 전 서인우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이라도 지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한 여자를 향해 박혀 떨어지지 않는 그 시선에서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대신 지키고 있겠다고 했던 말을 도로 주어 담고 싶기만 했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차갑다고 가까이 가기도 겁내하던 병원의 무수한 추종자들을 일시에 후회의 빛이 돌도록 만든 그 사랑이라는 것에 동기 몇몇과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병훈과 승수는 별관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뛰듯이 빨리 걸어갔다. 응급실의 시끌시끌한 소리들이 가까이 들려왔다.


“선생님 여깁니다.”


교통사고 환자였다. 출혈이 너무 심해 바로 수술방으로 들어가야 할 환자의 상태에 조금 전까지 감정적으로 흘렀던 기분이 일시에 경직되고, 긴장이 감돌았다.


“수술방 있나?”


“있습니다.”


“그럼 뭐하고 있어? 얼른 옮겨.”


분주하게 이동침대를 굴리며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화급히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병훈도 침대에 손을 얹고 응급실을 막 빠져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어?


저 여자. 어제 선을 봤던 여자였다. 그런데 버젓이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어쩐지 이상했다. 혹시 정말로 자살을?


스르르 이동침대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고 급하게 움직이던 발걸음도 멈춰서고 말았다.


“선생님.”


갑자기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는 그를 보며 승수가 급하게 불러댔다.


“먼저 가서 준비하고 아직 퇴근하지 않은 선생님 계신가 확인하고 연락해. 곧 따라 올라갈게.”


“네.”


워낙 촌각을 다투는 환자라 그런지 승수 역시 별 말없이 응급실을 빠져나갔다. 병훈은 천천히 침대에 누워 한쪽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왜 그녀를 순식간에 알아봤나 누군가 물어본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냥 무심히 지나가던 눈길을 그녀가 잡고만 것이다.


하얗게 핏기가 없는 얼굴을 보자 저도 모르게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모진 말이었다. 죽으려면 장기기증이나 하라며 비아냥거렸고,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던 그녀의 말이 왜 기억나며 소름까지 돋는지 그도 알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그림자가 길게 그녀의 얼굴 위에 드러워졌는데도 여자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상하게 손목으로 그의 손길이 향했다.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제야 멈추었던 숨이 다시 쉬어져서 나왔다.


“이봐요.”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 들었는데 그럼에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무심했는데 잠시의 시선 머무름에도 그녀를 알아차린 것이 이상했다.


“정신 안 들어요?”


잠시 그녀를 흔들려고 했던 손길이 허공에서 멈칫했지만, 다시 몸에 살짝 닿았다. 흔들린다. 그리고 느껴지는 것은 따뜻한 사람의 체온이었다.


“이봐요.”


눈꺼풀이 살짝 떨려오며 여자가 눈을 떴다. 공중에서 딱 부딪친 그 눈길에 그는 순간이지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너무 검었다. 그리고 반짝였다. 물론 그 불빛이 응급실 조명의 요사일지라도 지금 그의 눈에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어?”


알아본 모양이었다. 어디가 아픈 모양인지 얼굴에는 혈색이 전혀 감돌지 않고 있었고, 다른 침상과 달리 그녀의 침상에는 그 흔한 보호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고, 이유 없이 몰려드는 화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괜찮아요? 여기는 왜….”


사실은 자살을 시도했나 묻고 싶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여자의 눈에서 또르르 한 방울의 눈물이 마치 물기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살던가, 라고 했던가요?”


기억이 난다. 분명 그런 말을 했었다. 그렇기에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그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나, 그래서 살았는데 잘 한 건가요?”


“무슨 말이에요?”


병훈의 목소리가 꽉 잠겨버렸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잘했냐고 묻는 말에 슬며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토닥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주먹에 힘을 주어 가운 주머니 안에 숨겨버렸다.


멀쩡해 보이니 그만 가야 했다. 그를 기다리는 환자가 있다.


“수술이 있어서요. 나중에 뵙죠.”


뭐라 대답을 하려고 달싹거리던 그녀의 입술에서 힘겹게 눈을 돌린 병훈이 마침내 등을 돌려 서고 말았다.


“나중에 언제요?”


그냥 나오는 대로 말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녀는 언제냐고 묻는다. 병훈은 뭐라 대답을 해야 할까 찰나의 시간이지만 수많은 고민이 스쳐지나갔다. 어머니의 전화에 겸손한 얼굴이라 생각했었다.


사실 얼굴은 별로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손목에 흐린 흔적이 자꾸만 생각이 나서 가슴이 아파 왔다. 그 동안 병원 생활을 하면서도 수없이 아니 그보다 더한 상처를 대한 그였는데 그녀의 그 작은 상처가 자꾸만 마음을 건들었다.


‘그냥 지나쳐.’


호기심은 엉뚱한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결혼을 전제로 선을 본 사이었기에 병훈은 마음과 달리 퉁명한 말을 하고 말았다.


“인연이 닿는다면…. 하지만 우리가 그럴 리는 없죠!”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이라 평을 듣는 그였다. 그런데 유독 이 여자 앞에서는 말 한마디 좋게 나오지 않는다. 이미 나온 말에 혀끝을 물어도 후회는 소용없었다. 병훈은 주머니에 넣은 손을 꺼내지 않고 응급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가 버렸다.


응급실에 누어있는 것쯤이야 뭐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무심한 눈길을 바라보며 소빈은 처음으로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무슨 사이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보통의 환자를 보는 그 이상의 관심 정도는 받고 싶었다.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앉아 침대맡에 무릎을 말고 가슴을 붙였다. 마치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아이의 모습 같아 보여 처량해 보일 정도였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얼마나 심장이 두근거렸던가.


하지만 모두 헛수고에 불과했다. 그녀가 확인한 것은 결국 남자의 무관심이었다. 처음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한 그 남자의 무심함에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응급실을 지키고 있던 하얀 가운의 사람들이 급하게 뛰어 나오며 급하게 차 문을 열고 있었다.


낭자한 선혈이 보이고 비릿한 피 냄새에도 누구 하나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이동 침대에 환자를 옮긴 사람들은 다시 우르르 응급실로 뛰어들어가고 있었다.


소빈은 그런 응급실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이미 외래는 끝난 지 30여 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만날지 못 만날 지에 대해서는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응급실을 찾은 것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갑자기 어디가 아프다고 해야 할지 집에서 생각한 그 수많은 변명들은 하얗게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냥 쓰러져 버릴까?


소빈은 잠시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사람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아무도 그녀를 주시하는 사람은 없었고, 좀 전에 실려 왔던 환자의 상태가 급한지 응급실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어수선했다.


쿵.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무작정 자신의 몸을 땅을 향해 쓰러뜨렸다.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 그리고 흔들어대는 손길에 속으로 안심을 하면서 그녀는 그 순간부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100만 분의 일의 확률이라 생각했지만, 그를 보고 싶은지 이유는 필요 없었다.


삶의 끈을 잡게 해 줄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가슴을 흔들어놨던 그 실체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외면을 당하고 말았다. 의사가 환자에게 보이는 일반의 관심 외에는 보여주지 않는 그를 보며 왜 눈물이 났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소빈은 서러웠다. 몸을 말고 있는 지금조차 혹시나 다시 응급실로 그가 오지 않을까 시선이 문에만 머물고 있었다.


수술실에서 나오자마자 병훈은 급하게 뛰고 있었다. 그녀의 창백한 모습이 떠올라, 그리고 언제 만날 거냐고 물어오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수술에 집중을 해야 함에도 그러지 못했다.


무작정 뛰면서 응급실의 문을 열자 그곳에 있던 간호사와 인턴들의 눈길이 그에게 향했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까 여기 있던 환자는?”


그는 소빈이 누워있던 빈 침대를 가리켰다. 그러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인턴과는 달리 간호사는 재빨리 컴퓨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가셨는데요.”


“언제?”


갔다는 말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온 몸의 힘이 다 빠지고 말았다.


“조금 전에 가셨는데 혹시 아시는 분이세요? 별 이상은 없었는데….”


그는 수술복을 입은 채로 응급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휴! 가슴 깊이 숨겨져 있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 퇴근을 해야 하지만 몸에 있던 힘이 모두 탈진된 듯 기운이 없었다.


천천히 몸을 움직이던 그이 눈에 뭔가가 잡혔다.


뭐지?


작은 움직임이었다. 응급실 문 한쪽에 누군가가 몸을 구부리고 앉아 훌쩍이고 있는 모습은 평소의 그라면 그저 모른 척 하고 자나갈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왜 여기 있을까? 갔다고 했는데 왜 이곳에서 울고 있을까. 자꾸 이상하게 그의 마음을 잡는 여자였다.


“왜, 아직 안 갔어요?”


숙인 고개가 들어 올려지지 않았다. 대신 길게 흘러내린 머리 사이로 뽀얀 목살이 하얗게 내비치고 있었다.


“혹시 나 기다렸어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지만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기다리다니…. 선 자리에서 사람을 그렇게 무안을 주었는데 그를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응급실도 시내의 다른 병원이 아닌 그가 있는 병원으로 온 것 역시 우연에 불과할 텐데 신경을 쓴 자신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나 좀 데려다 줄래요?”


병훈은 가로등에 비쳐 더욱 작아 보이는 여자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웅얼거림처럼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어떤 큰 소리보다 그의 귓가에 정확하게 들리는 그 소리에 반응을 했다.


“기다렸어요?”


낮았다. 그리고 작았다. 어떤 망설임이 묻어나는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실한 사실에 대한 확인 같은 음성이었다.


“네.”


“조금만 기다려요.”


병훈은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가을이 오나보다. 얇은 카디건 하나를 걸치고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의 실루엣이 어쩐지 서늘해 보였다. 뭐라도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싶지만 수술방에서 바로 나온 그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빨리 다시 나오는 일 뿐이었다.


“기다려요. 서둘러 나올게요.”


“네.”


비가 내린다. 차창을 타고 동그랗게 말린 물방울들이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병원은 명현의 회복으로 그 동안 술렁임을 잊은 듯 또다시 평소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긴장이 풀릴 새가 없는 곳이 바로 이 병원이라는 곳이었다. 작은 실수도 인정되지 않는 곳, 그리고 그 실수가 생명과 곧바로 연관되어 있는 곳이기에 병훈은 회진을 가이드하고 나서의 긴장을 풀고 있었다.


의국방. 그곳이 그에게는 안식처나 다름이 없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수술이 있었지만 유독 가을을 알리는 이 서늘한 빗방울에서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연애해요? 선생님 요즘 이상해요.”


승수였다. 요 며칠 그에게 치근대며 뭐냐며 묻는 그가 이제는 연애를 한다는 확신을 가진 이유는 몰랐지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연애가 뭐냐?”


“선생님도. 연애를 하는 분이 연애에 대해 물으시면 어쩝니까?”


“내가 지금 연애를 한다고 누가 그래?”


“선생님 얼굴에 써 있어요.”


“얼굴에?”


그는 희미하게 창에 비치는 자신의 실루엣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이 모습이 연애를 하는 사람이라고?


“어떻게 써 있는데?”


“누가 간절하게 보고 싶다는 것처럼 눈빛이 깊잖아요. 엥, 언제 보여주실 겁니까? 안 그래도 서인우 선생님과 명현이 때문에 뒤숭숭한데 선생님까지 꼭 그러셔야 합니까? 이거 여자 없는 저만 서럽습니다.”


여자가 있다. 그 말에 병훈은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집에서는 지금도 연신 선을 보라며 재촉 전화를 하고 있는 것을 승수도 알 텐데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연애, 그리고 여자.


고소빈이라고 했다. 그녀의 이름이 한동안 생각나지 않았지만 그는 다시 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결국 생각해 냈다. 고소빈, 고소미라는 단어를 기억했던 자신의 작은 중얼거림이 생각나자 묻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부터 그에게는 시간이라는 것이 너무도 빨랐다. 잠도 부족했고,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의 완료해 가는 이 시점까지 병원 외에 다른 것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딱히 사귄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뜸한 만남, 그리고 가끔의 전화. 그런데 승수는 그것을 연애라는 말로 단정을 지었다.


하지만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꾸 그녀를 보면 손목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그 작은 흔적에 왜, 라는 질문이 매번 흘러나왔지만 물어보지는 못했다.


“선생님.”


“왜?”


“전화 오잖아요.”


“으응?”


벨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전화가 걸려온 모양이었다. 그는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얼른 휴대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


“네. 김병훈입니다.”


[바쁘세요?]


안색이 변했나보다. 승수가 앉아 있던 소파에서 엉덩이를 들어 올려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곧 수술방에 들어가야 합니다.”


[아, 그럼 끊을게요.]


그가 먼저 전화를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녀에게서 가끔씩 전화가 오면 그는 바쁘다는 말밖에 별로 한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꾸만 연결이 되는 여자.


정말 인연인가? 감정이라는 놈을 흔들어대는 이 작은 여자가 정말 그에게 인연이라는 말인가?


선을 본 지 벌써 2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단 한번도 만나서 결혼이나 미래에 대한 설계나 약속 따위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만날 뿐이었다.


뭐가 뭔지 명확하지 않은 이 관계를 바라보며 그는 고민처럼 자주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만나요.”


[바쁘다면서요.]


“수술방에 들어간다고 했지, 바쁘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쁘더라도 만나고 싶어요.”


[언제요?]


“오늘. 수술방에서 나오는 대로 전화할게요.”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은 그는 얼쩡거리는 승수의 뒤통수를 한번 세게 내리친 후 발걸음을 옮겼다.


“선생님, 폭력은 안 된다고 했죠?”


“그럼 네가 치프를 하던가.”


“선생님!”


***


“왜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분위기 좋은 커피숍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맞선 상대자와 데이트를 즐길 만한 장소도 아니었다. 그저 회식때 자주 다니던 고깃집에서 소주를 잔에 따라주며 병훈은 되도록 가볍게 말을 하고 있었다.


“궁금해요?”


“네.”


“왜요?”


“궁금해하면 안 되나요?”


소주잔을 하얀 손에 든 소빈은 잠시 흔들리는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손목의 상처. 이제는 세월이 흘러 주름처럼, 남들은 예사 바라보는 그 상처를 저 남자가 유독이 주시하는 모습에 뭐라도 그 상처를 가리고 나올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저 왜 만나세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는지 소주를 마시던 그가 갑자기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궁금했다. 그날 응급실에서 말없이 집까지 데려다 준 후, 그는 거리를 좁히지도 그렇다고 매정하게 끊지도 않는 관계를 만들어오고 있었다.


집에서는 그와 약혼이라도 하라며 타박을 하고 있지만 소빈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저 남자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밀어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보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평범한 그의 외모와 평범한 말투, 그리고 무심한 눈빛을 자꾸만 상상하고 다시 대하고 싶은 갈망에 자신이 더 혼란스러웠다.


오늘 만나자는 그의 말에 소빈은 결심을 하고 나온 터였다.


이제는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만약 더 이상의 진전이 없다면 다음 맞선 상대라며 슬그머니 탁자 위에 사진을 밀어대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나자 슬며시 눈 꼬리가 찌푸려졌다.


언제 기침을 했냐는 듯 단정하게 다시 소주잔을 들어올리는 병훈의 모습에 소빈은 차분한 눈길을 주고 있었다.


“제가 싫어요?”


“싫고 좋은 감정을 느낄 정도로 많이 만나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고개가 끄덕여졌다. 맞다. 그럴 정도로 잦은 만남을 가진 것도 아니었기에 그녀는 인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왜 자살을 하려고 했습니까? 내가 물어보는 거 싫어요?”


“아뇨. 그저 사는 것이 귀찮았다고 말한다면 다시 화를 낼 건가요? 그냥 그랬어요. 눈을 EM고, 또 잠을 자고, 먹고, 사람을 만나는 그 단조로운 일상에 식상했었어요. 그래서 그랬나 봐요. 순간적으로 제 손목에 칼을 가져다 댔는데 저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칼을 잡은 손에 힘이 가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오기가 났어요. 깨어나 보니 병원이더군요.”


“이유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병훈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약한 가요? 저에게는 너무 간절한 이유였는데.”


“그래서 다시 죽고 싶어요?”


병훈의 눈동자는 그녀만 담고 있었다.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소빈은 고개를 저었다. 그를 만나고서는 정말이지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었다. 참 신기했다. 그는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려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그녀를 살려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뇨.”


“왜인지 물어봐도 되요?”


소빈은 강렬한 그의 눈빛을 받아내기가 힘이 들었다. 글쎄, 왜일까? 그가 이유였다. 죽으려면 장기기증을 하라며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것처럼 그녀를 꾸짖던 그의 모습이 그 이유라고 말한다면 그는 뭐라고 말을 할까?


“선을 보래요.”


“네?”


병훈이 놀란 표정이었다.


“선을 본다구요. 이틀 뒤에.”


술잔을 잡은 하얀 손이 유독 투박해 보였다. 햇빛을 보지 못한 것처럼 그의 손은 유독 하얀색이었다. 그런데도 투박했다. 매끈하게 잘 뻗은 손가락이 아니라, 굵은 마디가 도드라지는 그런 손.


“갈 겁니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대답을 해 줘야 합니까?”


소빈은 술잔을 목에 넘기는 그를 바라보다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 그가 대답을 해야 될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아무 것도 그녀에게 약속을 하거나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은 사이. 그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줬으면 좋겠다. 가지 말라고 그녀를 말려주고, 그녀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으로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네.”


마음과는 달리 담담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남들이 말하는 좋은 조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만 이 사람이 자꾸 생각이 났다. 예전에 정말 상처가 없던 그 시절에 꿈을 꾸듯 원했던 자상한 남자도 아니었지만 좋았다.


좋다, 싫다는 말이 굳이 필요 없는 몇 년간의 생활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살고 싶다는 욕망만큼이나 그가 바라봐 주길 원하는 욕심이 생겨버리고 만 후였다.


“만나지 말아요.”


덜컥.


심장이 고장난 모양이었다. 갑자기 멈췄다가 다시 요란하게 온몸의 혈관을 터트릴 것처럼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래도 말을 해야 함에도 그녀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만나지 말라고요.”


무뚝뚝한 병훈의 눈빛이 소빈에게 조용히 닿았다.


***


“선생님.”


인우가 병훈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담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 가운을 입은 익숙한 모습이 아니었다.


인우와 명현의 결혼식이 있는 날은 하늘의 축복이 있는 것처럼 화창하게 개어있었다. 병원에서의 결혼식은 며칠 내내 온 병원을 흥분으로 들끓게 만들었다. 아직 완전한 회복을 한 명현은 아니었지만, 대기실처럼 꾸며 놓은 곳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이지 너무나 아름다웠다.


“축하드립니다.”


“고맙다.”


병훈은 자신의 뒤에서 서 있는 소빈을 향해 의문을 던지는 인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허리를 알았다.


“선생님 보니까 저도 결혼을 해볼까 생각중입니다. 후보 1순위입니다.”


옆에서 놀란 숨을 들이마시는 것을 들으면서도 그는 태연하게 소빈을 인우에게 소개하고 있었다.


“훗, 축하한다. 자랑하고 싶었나보군.”


인우가 싱긋 웃으며 병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건 아니구요. 그냥 소개시켜 드리고 싶어서요.”


병훈이 쑥스러워하자 인우가 넌지시 한마디 던졌다.


“하더라도 전문의 시험 끝나고 해.”


“네, 선생님. 그러겠습니다.”


하객은 많았다. 그렇기에 병훈은 그와 인사를 하고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리를 물리고 소빈과 잔디에 놓여진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결혼해요?”


떨리는 음성, 그리고 조금은 상기된 듯 붉어진 뺨, 선선한 바람에 흩날리는 고운 머릿결. 한때는 그녀의 모습을 겸손한 외모라고 폄훼를 했었다.


이렇게 예쁜 모습을 한 그녀를 잔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병훈은 스커트 위로 단정하게 올려진 손을 잡았다.


“싫어요?”


“아뇨.”


용기가 있는 여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만날 때만은 다른 여자들이 내세우는 내숭이라는 무기를 들이민 적이 없었다. 솔직하게 대답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부라고 했지만, 그에게는 예외가 허용되나 보다. 갑작스레 벼락을 맞은 것처럼 그녀가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서서히 물기를 머금는 종이처럼 그에게 스며든 여자였다.


“서운하죠?”


“뭐가요?”


“선생님에게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내서.”


“…….”


대답이 없었다. 하긴, 여자들에게 프러포즈라는 것은 중요하다는 말을 종종 간호사들의 수군거림에서 들었다. 그래서 얼마나 고민을 했던가?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무수한 고민이 요 며칠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낯간지러움에 남들처럼 멋진 프러포즈는 준비하지 못하고 무작정 일을 저지르고 만 후였다. 그럼에도 소빈은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았고, 그 마음이 고마운 병훈이었다.


“치프 선생님!”


병훈의 눈이 감겼다. 불만인 듯 입술이 한일자로 닫히고 드디어 눈을 뜬 그가 고개를 치켜올렸다. 딱 걸렸다는 듯한 표정의 승수가 앉아있는 그를 내려보며 커다랗게 떠진 눈으로 옆에 앉아있는 소빈을 바라보았다.


“혹시?”


“뭐가 말이냐?”


“그 애인?”


쿡쿡 소리가 났다. 아마도 소빈이 요란스런 등장을 하며 사람들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질러대는 승수의 모습이 웃겼던 모양이었다.


“형수님이다.”


“엥?”


옆에 있던 의자를 하필이면 병훈과 소빈이 사이로 가져와 앉는 승수의 심술에 그는 픽 웃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결혼해요?”


“안 되냐? 아니면 허락이 필요한 거냐?”


“웅웅웅! 한꺼번에 배신의 칼을 꽂냐? 선생님도 병원에서 하려고요?”


이제는 예식장마저 결정해 줄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그에게 향해진 동료들 선배들 후배들의 시선이 마냥 의식되어 죽겠는데 승수는 소문을 내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만해라.”


“선생님.”


“왜.”


무뚝뚝하게 대답을 하는 그의 모습을 소빈의 눈길이 따르고 있었다. 갑자기 갈 곳이 있다면서 정장을 하고 나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결혼식에 올 줄은 몰랐다.


그런데 사람을 진료하는 병원에서 결혼식을 위해 준비해 놓은 세팅을 보고서 놀란 것도 잠시, 자신을 결혼할 사람이라 소개를 할 때는 눈앞이 다 캄캄했었다. 쉽게 말을 꺼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다.


“진짜 결혼할 거예요? 우리 선생님하고?”


웃음이 자꾸 얼굴에 생겨나고 있었다. 의사라는 직업이 주는 딱딱함, 그리고 근엄함을 일소에 해소시켜 주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눈앞에 잇는 승수라는 사람일 것이다.


병훈이 지나가는 말처럼 그에 대해 얘기할 때만 해도 설마 했었다. 하지만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얼굴까지 디밀고 있는 그를 보자 자꾸만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웃음만 튀어나오고 있었다.


“네.”


“아이구, 정말이요?”


승수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확인하자 소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요?”


“제가 백가지만 댈까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그를 향해 병훈이 대뜸 손으로 뒤통수를 내리쳤다. 놀랄 새도 없이 뒷머리를 긁적이던 승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놀라지 마세요. 워낙 많이 맞아서 이제는 굳은살이 생겼어요. 그렇다고 여자까지 패는 무식한 사람은 아닌 것 아시죠?”


“이 자식이! 너 딴 자리로 가.”


“안 그래도 가려고 했습니다.”


맞고도 웃음을 얼굴 만면에 지으며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는 그는 정말이지 소년의 풋풋함을 그대로 간직한 사람이었다.


“친구 많아?”


갑자기 병훈의 말이 짧아졌다. 그녀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떨결에 대답을 했다.


“네?”


“주변에 괜찮은 친구 있냐고?”


병훈이 승수를 향해 턱짓을 했다. 그리고 소빈은 그게 뭘 말하는지를 알았다.


사람을 대할 때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먼저 의식부터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이제 천천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불길 같은 사랑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흘러가는 물처럼 잔잔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을 아직 병훈이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소빈은 여유롭게 기다릴 것이다.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당당한 걸음으로 신랑이 입장을 하고 있었다. 조금 있자 꽃보다 더 아름다운 신부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에게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병훈의 손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다.


“그 프러포즈라는 거 나에게 다시 해 줄 거죠?”


“음?”


주례를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소빈은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는 병훈과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아, 난 그게 너무 어려….”


“해 줄 거죠?”


나란히 앞을 바라보고 있는 병훈의 얼굴을 살짝 들여다보며 소빈이 진지하게 요구했다.


“어휴!”


한숨을 쉬는 그를 응원하듯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The End-.